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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9 - 북적이자 오랑캐 거란족의 요나라가 발해를 정복하고 송을 굴복시키다!
어릴 때 고무줄놀이를 할 때 “무찌르자 오랑캐 중공군 몇백만이냐~” 라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부른건 이승만 대통령이 1955년 11월 강원도 화천호를 찾아
6.25때 중공군을 무찌른 전적지라 하여 “파로호(破虜湖)” 로 이름을 바꾼게 그 유래인데.....
6사단장이 중공호로제10군(中共胡虜第十軍) 이라 적었으니 훗날 제가 근무한 사단이기도 합니다.
오랑캐의 어원은 몽골계 종족으로 숲속에 사는 우량카이 Uriankhai(兀良哈 올량합) 족 에서 유래한
이민족에 대한 멸칭으로 야만인이란 뜻인데, 중국에서 북방민족을 뜻하다가 명나라때는 거란이나
여진족의 멸칭으로 불렀으며 훗날 징기스칸의 막내동생 옷치긴왕가를 말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중원으로 이주하지 않고 초원에서 유목생활 하는데서 야만인으로 본 것이며 그들은 몽골중앙군 20만이
금나라(그후 남송) 를 공격하면서 배후 안전을 위해, 1차는 3만 이후는 1~2만으로 아홉차례나 고려를
침공한 그 몽골군이며 그 후손인 토크타는 13세기에 망해버린 거란족 칭호인 요왕(遼王)을 자처합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고려에서 도망쳐 함경도로 가서 항복한 산지(散吉) 대왕(大王)은 옷치긴 왕가
의 2대왕 타가차르 아래 제후왕이었으니... 이안사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옷치긴 왕가로부터 천호장 겸
다루가치를 임명받아 세습하며 함주등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하다가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 쇠퇴
하고 고려 공민왕이 쌍성을 공격하자 이자춘과 아들 이성계는 원나라를 배신해 성문을 열어 항복합니다.
일찌기 역사에서는 "한번 배신한 자는 두번 배신한다" 고 했으니 이성계는 이후 2번째로 또 고려를 배신해
최영과 우왕을 죽이는 것이니, 훗날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견제하는 것인데.... 중국에서 조조와 사마의가
당대에 황제를 죽이는 배신을 하지 않은 것은 후대 역사에서 "역적"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 것으로 봅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거란족이나 여진족을 오랑캐로 불렀고 6.25 이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중공 오랑캐” 라 불렀으니 중국인 되놈들이 오랑캐인줄 알았는데, 커서보니 중국이 자신들을
제외한 이웃 민족들을 북적, 서융, 남만, 동이라 멸시해 불렀고 한국이 동이라면 우리가 오랑캐
인 것이라.... 놀라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오랑캐이자 북적(北狄) 인 거란족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중국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2070년 우(禹)를 시조로 하는 하(夏)나라로 하남성 황하유역에 있었는데
기원전 1600년 동쪽의 탕(湯)이 군대를 일으켜 하를 멸하니 상(商, 은)나라인데.... 기원전 1046년에
무왕이 멸망시키고 주(周) 나라를 세웠으니 기원전 771년까지 장안에 도읍했던 서주와 그후 견융을
피해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 기원전 256년 진(秦)나라에 망하기 까지를 동주(춘추 + 전국) 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화하족(華夏族) 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중심에 있으니 사방의 이민족을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 동이(東夷) 오랑캐라고 불렀는데..... 이때 동이(東夷)는 한반도나 왜국을
가르킨 말이 아니고 중국 동부지방인 하남성 동부와 산동성을 가리켰으니, 어떻게 보면 상나라도
하남성 동부이니 동이로 보기도 하는데... 그들이 중원을 차지하니 이제 동이(東夷) 는 더 동쪽인
산동성과 강소성을 말하며 중국 전체를 통일한 이후는 만주와 한반도 및 일본이 동이(東夷)가 됩니다.
북적(北狄)은 북쪽 오랑캐로 중국 북쪽에 있는 이민족을 칭한 호칭인데 동아시아 지리상 중국 동쪽과 북쪽
은 육로로 쭉 이어져 있어서 명확하게 나눌 기준이 없기 때문에, 중국의 동북쪽에 있는 이민족은 시대에
따라 동이로도, 북적으로도 분류되었으니 고구려는 수서 열전에 백제, 신라와 함께 동이로 분류되었지만,
발해는 신당서에서 북적으로 분류되었고 말갈도 수서에서는 동이로, 당서에서는 북적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원래 적(狄) 의 의미는 은(상(商)대에 나타났던 귀방(鬼方) 또는 튀르크계 민족으로 추정되지만
나중에는 의미가 확대되어서 중원 북쪽에 사는 비한족 민족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변해
갔으니, 시대에 따라 흉노족, 오환족, 선비족, 돌궐족, 위구르족, 거란족, 몽골족 등을 지칭하게
되었으며.... 또 나중에는 서쪽의 융족과 구분이 점점 흐릿해져서 융적으로 통칭하기도 했습니다.
적(狄)은 춘추시대는 산서성에 거주했는데 병주(幷州)나 태행산(太行山) 인근은 기원전 500년까지만 해도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당대의 패자 진(晉)나라가 융적을 몰아내 중원의 영역으로 편입
시킨 것이며 춘추시대 중기에 위(衛)가 북적에 멸망당해 제나라가 다른 나라들을 이끌고 이들을 공격한
적도 있으니 이들중 북쪽으로 쫒겨나거나 동화되지 못한 갈래가 나중에 중산국을 구성하는 무리가 됩니다.
전국시대 부터 중국 문명과 접촉한 흉노는 초기에는 북적과는 다른 집단으로 인식되어
호인(胡人)으로 지칭되었다가 한족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북적이 사라지게
되고 나서 부터는 북적과 호인이 서로 혼용되어 오랑캐라는 명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북적(北狄)에 속하는 민족 중에 하나인 거란(契丹)족은 중세에 요하와 시라무렌 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한 준 몽골어족으로 동호계 유목민 또는 반(半)유목민이니 거란족은 동호(東胡)- 선비(鮮卑)
에서 갈라져 나와 4세기에 등장했으며 내몽골 지역을 영유하다가 10세기에 요나라를 세워 요동과
중국 허베이성 일대, 막북(漠北) 지역을 모두 정복하여 동아시아 북방의 패권 강국으로 군림했습니다.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금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몽골 제국이 세계 정복전을 시작하자 몽골제국
내 군대, 사회 각지에서 활동했으며, 몽골제국 당시까지는 거란족은 몽골족과 어느 정도 구분
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어, 문화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몽골족에 동화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들이 농경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농반목 & 수렵채집, 어로 정주민인 여진- 만주족과
달리 이들은 더 유목민의 성격이 짙었으며.... 한국인에게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의
오랜 대전쟁을 치렀기에 공격적인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독자적인 거란 문자를 만들고
위대한 불교문명을 이룩했으며 거란의 장식구가 송나라에서 유행하는등 고도의 문명을 향유했습니다.
실제 요나라 시대의 불교 유물, 유적은 중국의 불교 문화재 가운데에서도 평이 매우 높으니 세 차례
여요전쟁을 치른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오히려 일변하여 요가 멸망할 때까지 평화- 친선 관계
를 유지했는데..... 물론 이는 요나라가 고려 침략전쟁에 군자금을 쏟아부으면서 그 기회를 틈 타
금나라가 요나라를 기습침공해서 더이상 고려침략을 재개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 역사에 몽골은 실위의 한 부족이었는데(몽올) 실위는 동호- 선비의 후손이고 거란도 동호- 선비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쓰여있으니 몽골 고원의 유연- 돌궐과 화북의 북위 및 수, 당에 지배를 받았으며 당군
과 함께 고구려를 침략해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전리품으로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영주로 잡아가 농노로
부리다 당나라에 대적하면서 당군이 공격하니 그 틈을 타서 30년 만에 농노들이 달아나 발해를 세웁니다.
거란족은 나라를 세우기 전에 8개 부족으로 갈라져서 서로 싸웠는데 391년에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
대외원정에 나섭니다. 秋七月、南伐百濟、拔十城。九月、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又招諭本國
陷沒民口一萬而歸。 가을 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무너뜨렸다. 9월에 북으로 거란
을 정벌하여 전쟁포로 500구를 사로잡고, 또 본국의 잡혀간 백성 10,000명을 불러서 타일러 돌아왔다.
“광개토대왕릉비” 의 “비려(거란 8개 부족 중에 하나)” 기록에는 광개토대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토벌했다(躬率往討)' 는 말이 나오는데 이때 되찾아 온 고구려인들은 14년 전인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이 고구려 북쪽 8개 부락을 약탈해간 것으로 보지만 포로의 수가 10,000
명에 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거란의 고구려 약탈은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391년 삼국사기 기록과 395년 광개토왕릉비 기록은 같은 사건으로 봅니다.
광개토왕릉비 395년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不歸*#人, 躬率往討, 過富山*負碑至鹽水*上,
破其三*部落六七百營*, 羊, 不可稱數 영락오년, 세재을미,
왕이비려*불귀*#인, 궁솔왕토, 과부산*부비지염수*상, 파기삼*부낙육칠백영*, 양, 불가칭수
영락 5년은 을미년으로 왕은 비려가 고구려 함몰인들을 귀환해 주지 않기 때문에 몸소 토벌에
나섰다. 부산을 넘어 산을 등에 지고 염수에 이르러 비려의 3부락 6~7백명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 (碑麗* 비려 : 거란의 한 지파. 태자하 상류지역.
고구려와 인접해 전쟁 상태) - 광개토왕릉비 5년의 기록인 위 내용은 삼국사기 원년의 일로 봄.
고구려가 거란 전체도 아니고 8개로 나뉜 한 부족인 비려에게 수차례 칭공, 약탈당해 만여명이
넘는 고구려인들이 잡혀가서 포로생활을 했다는게 잘 이해가 되지 않을수도 있겠는데....
242년 동천왕때 위나라 관구검의 공격으로 수도 환도성(국내성)이 함락되고 왕은 남옥저로
달아났으며, 342년 선비족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함락하자 고국원왕은
홀로 도주하니 왕모와 왕비에 수도 백성 전부라 할 수 있는 5만명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갑니다.
거란의 사촌인 선비족 모용황은 337년에 전연을 세우고 342년에 55,000명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침공 의도는 입위장군 모용한이“고구려와 우문선비를 먼저
멸망시켜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니 요나라, 금나라, 후금에 몽골이 중원
(중국)을 침공하기 전에 고구려(고려)를 쳐서 굴복시켜 배후를 안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북도는 평탄한 넓은길이고 남도는 험악하고 좁은 산길이라 고구려는 적이 북도로 오리라 예상해 북도
에 5만 남도에 1만을 배치했는데.... 전연은 고구려가 저리 배치할 것이라 여기고 역이용해 남쪽에
4만, 북쪽에 15,000명을 보내니 고구려의 생각이 평범했던데 비해 전연의 전략은 한수 위 였습니다.
환도성(국내성)을 함락한 전연이 혼자 달아난 고국원왕을 추격하지 못한게 북도에서 승리한
고무(高武)의 50,000명이 건재했기 때문이며 또 저 5만의 추격을 염려해서 미천왕릉을
도굴해 시신까지 파서 방패막으로 가져갔다고 말하는데.... 당시 땅은 넓은데 비해 인구가
적었으니 세금과 부역에 공물을 바치고 병역을 나가는 백성이 나라의 국력이던 시대입니다.
고구려 고무군 5만이 추격하지 못한 이유를 고국원왕이 효성이 지극해 미천왕 시신과 왕모에 왕비가 해침
당할까 염려했다고 변명하는데... 고구려 수도의 백성 전부인 5만이 끌려가는데 전연군은 노획한 재물과
포로들을 끌고가느라 걸음이 느리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따라잡을수 있고 저 5만 백성 중에 일부는
구할수 있었지만 5만군이 북도의 적군을 빨리 제압하지 못한 탓에 “추격시기를 놓친”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전연군이 고구려땅을 지배하지 못하고 빨리 철수한 것도 저 고무의 5만군이 건재했기 때문으로 말하는데,
전연의 큰 꿈은 만리장성을 넘어 재물이 풍부한 "중국을 점령" 하는 것이고 사방이 적국이었는데 비해
인구와 군사가 적었으니.... 고구려땅에 주둔하면 중국을 침공할수가 없고 적군이 전연을 습격할 염려도
있으니 원래부터 고구려를 점령할 생각 자체가 없었고 약탈한후 굴복시키는게 목적이라 철군한 것입니다.
미천왕의 시신과 어머니를 볼모로 내준 고국원왕은 343년 2월에 1,000여가지의 보물을 바치면서 스스로
“전연의 신하” 라 칭하는등 눈물겨운 노력으로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345년에 전연은 고구려
를 떠보려고 남소성을 빼앗아 갔지만 공순함을 보이기 위해 군대를 내지 않았으니, 이를 참작한 전연은
모후 주씨를 돌려보내주었으며 이후 고국원왕은 북쪽에서 잃은걸 남쪽에서 변상하려고 371년 백제를
공격하다가 전사했으니 이런 고구려인지라 거란의 일개 부족이 378년부터 침공해 약탈을 했는가 합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거란족은 위구르와 당에게 정복당했음에도 당과 위구르를 약탈하는 강심장을 가졌으며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는 군사적으로 대립했는데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 8개 부족을 통일하고
발해를 멸망시킨후 내몽골의 실위, 해를 통일하고 분열되어 있던 몽골 영역의 부족들을 모두 정복하여
초원의 패권제국으로 군림하지만 고려침략전쟁에 막대한 군자금을 쏟아붓으면서 성장 동력이 줄어듭니다.
그후 거란의 탄압에 저항하여 아쿠타 아래 일거에 일어난 여진족의 금과 송의 연합공격에 멸망하니 거란족
중 일부는 서역으로 퇴각해 서요를 건국하고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침략해 카트완 전투에서 승리하는등
서아시아의 패권제국으로 군림하면서 승승장구하지만, 피난가지 않고 남은 거란족들은 금의 지배를 받으
면서도 부흥 운동을 몇번 일으켰으나 패전하고 이후 전세계를 정복하게 될 몽골 제국군에게 정복당합니다.
거란이라는 이름은 고대의 진나라(China), 중세의 북위(탁발부)(Tabgach) 에 이어, 근세 중국
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으니 특이하게도 셋 모두 순수 한족과는 거리가 먼 최소 혼혈
이었으며 거란족들은 자신들을 거란어로 키탄(Khitan)이라고 불렀으니 키타이(Khitai)
혹은 키단(Kidan) 이라고도 하며 그 중에 키타이라는 발음의 경우는 서방 세계로 전해졌습니다.
그 영향으로 러시아와 유럽에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는 중국 혹은 한족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르니
위구르어의 히타이나 포르투갈어의 카타이(Catai), 몽골의 햐타드(Хятад), 카자흐어의 크타이
(Қытай) 등이며 영어도 흔적이 있으니 홍콩 국적항공사였던 캐세이퍼시픽 항공(國泰航空有限公司,
Cathay Pacific Airways Ltd.)의 캐세이(Cathay)는 영어의 고어로 중국을 뜻하는 또 다른 어휘입니다.
'거란'(契丹) 은 거란어 '키탄' 을 음차한 것이니 한국어 한자 독음은 '계단' 이 아닌 '글단' 으로,
'거란' 은 '글단' 이 한국어 내부의 변화로 인해 변화한 것이니..... 옛날에 나온
무협물이나 중국 사극을 보면 역자들이 생각없이 계단족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보입니다.
종종 '글안' 이라는 표기도 보이는데, 원래 한자에 대응시키기 위해 한자 독음을 재해석한
것이니 신채호가 남긴 글에도 '글안' 이 보이고, 네이버 한자사전 해당 항목에서도 독음
을 글안▽ 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끝의 역삼각형 기호(▽) 는 물론 "이 글자(丹;붉을 단)
는 원래 이렇게 읽는 글자가 아닌데 이 단어에서만 이렇게 읽는 것임" 이라는 뜻 입니다.
일본어에서도 '킷탄(きったん)' 이라고 변칙적으로 읽는데 용례가 하나밖에 없다보니 독음이
상용한자표에도 들어있지 않으며..... 마르코 폴로는 흔히 "동방견문록" 으로 번역
되는 자신의 책에서, 북중국을 카타이(Catai), 남중국을 만지(Mangi, 蠻子) 라고 불렀습니다.
거란족의 원형은 흉노와 동호(東胡)설로 갈리는데, 거란족사와 요사 연구자들은 대체로 거란이
동호 선비족 우문부의 분파로써 우문부, 고막해와 분리되었다고 인식하며 거란은 민족의
규모가 크지 않고 느슨한 형태의 부족 연합 세력이던 4세기경에는 선비족 전연의 영향력
아래 있다가 전연이 중심지를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고막해의 영향력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388년 고막해가 선비족 탁발씨 북위에게 토벌당하자, 이후 독립하게 되었으며 고막해가
선비족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생각해 족보를 따지면 거란은 선비족의 별종이라 할 수
있으니... “등국 중에 북위의 군대가 크게 깨뜨리자, 마침내 달아나 흩어져 고막해와 나뉘
었다. 수십년이 지나 점차 커져서 부락이 화룡의 북쪽 수백리에 있게 되었다.” - 위서 거란전
그후 거란은 고팔부(古八部) 시대에 세력을 키웠으나 고구려, 중원, 막북의 강호들 사이에
끼어 샌드위치 신세였으니, 7세기경 지배 세력 가운데 대하(大賀) 씨가 당에 귀부하여
이씨 성을 하사받게 되며... 고구려 멸망후 거란에 대한 당의 지배권이 공고해지는 듯
했으나, 696년에 이진충이 무상가한(無上可汗)을 칭하며 독립하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진충이 죽고 후계자 손만영이 집권한 시기인 698년에 돌궐의 도움을 받은 당나라 측천무후
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이 혼란을 틈타 30년 전에 거란이 당군과 협력(용병?)해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하고 그 전리품으로 잡혀온 고구려인과 말갈인 포로들이 도망쳐서 발해를 건국합니다.
이후 당과 돌궐의 동맹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란은 돌궐의 영향력에 강하게 종속되며 이후 발해,
당, 돌궐 사이에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고 안록산의 난이 터지면서 위구르(회흘) 역시 이런
열강 구도에 끼어드니 이런 상황은 요련(遙輦)씨를 거쳐 야율아보기 등장 이전까지 계속됩니다.
907년에 야율아보기가 거란 8개 부족을 대통합하고는 해족과 습족, 실위를 정복하고 서하, 하서
회골, 조복을 복속시킨 다음 916년에 요나라를 건국했으며 926년에는 동쪽 발해까지 멸망
시켰는데 요(遼) 건국 뒤에도 거란(키타이)이라는 이름은 요와 함께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됩니다.
야율아보기의 거란 제국은 영토가 몽골,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 만주에 이르게 되었는데 몽골 고원은
직접지배가 아닌 간접지배의 형태였고 만주 역시 요동, 연해주와 발해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여진족과
발해 유민의 반동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으니 실효적인 지배력이 미친 영토만 따지면 축소
되며 실효적인 지배장소들은 모두 사람들이 살수있는 적합한 곳이었고 거란의 중심지와도 가까웠습니다.
건국 이후에는 북송을 공격해 세폐를 받아먹었으며 고려와 서하를 치나 형식적이지만 굴복 관계
를 이루었으며 이후에는 여자와 매 등의 심한 착취로 인해 분개한 여진족이 완안아골타 아래
에 규합하여 요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결국 1125년 여진의
금나라와 북송의 협공을 받게 되어 천조제가 금나라 군대에 사로잡히면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요나라와 관련된 설명에서 의아한 것은 요하 유역과 하북성 일대에서 웅거하던 요나라가
1125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왕족인 야율대석이 거란족 유민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 서요(카라키타이) 를 건국하여 대국이 되어 요나라를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천조제 이후 공중 분해된 것 처럼 설명되는 것은 잘못 입니다.
서요가 쿠츨루크의 폭정과 뒤를 이은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무너진 뒤에도 일부 거란족
의 유민들은 이란 동부까지 이주해 다시 요나라를 이어갔는데 얼마 안가서 또 다시
원에 의해 멸망당하지만 이란, 즉 페르시아 남동부 케르만 주에 세웠던 거란족의
국가는 키르만 왕국 혹은 치얼만 왕조라고 부르며, 후서요(後西遼) 라고도 표기합니다.
서요(카라 키타이)는 몽골의 발흥과 함께 몽골족에 동화되어 사라졌으니 멸망해 사라졌다기
보다는 페르시아와 파르티아와의 관계와 비슷하게 둘 다 동호에서 갈라져나온 종족
들인지라..... 사촌이니 문화적인 차이도 적고, 금나라와 싸울 때부터 뜻을 함께한
몽골에 이들이 딱히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동화되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또한 요나라 시절 몽골에 대한 정책도, 몽골에게 가혹한 강경책으로 일관한 금나라와는
달리 요나라는 대부분 간접적인 통치를 행해서 몽골을 직접 탄압한 일도 상대적
으로 적었고..... 이 때문에 몽골의 거란- 요에 대한 적대심도 역시 적었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금나라가 요나라 원수이기 때문에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에 많은 거란인들이 협력하였으니
대표적 인물이 야율초재로 그 외에도 칭기즈 칸의 참모로 활약한 야율아해(耶律阿海) 와
장군으로 활약한 야율독화(耶律禿花) 형제가 있으며.... 야율유가(耶律留哥) 라는 거란인도
동요(東遼)라는 국가를 세웠으나 나중에 몽골에 들어가서 몽골의 신하로 활약했으며 요나라
가 멸망한 후에 일부 거란인들은 만주에 대요수국을 세우고 할거했다가 칭기즈칸에게 복속됩니다.
현재 몽골과 중국은 이 종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이며 한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거란은 그저 오랑캐였다 보니 역사 문제와 달리 이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사는 소수민족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유력하게 추정되며
2005년에 12만명에 달해 중국의 소수 민족 중에서 34번째로 많은데 샤머니즘과 티베트 불교를 믿습니다.
분포 범위도 거란족의 강역과 대강 일치하고 스스로 거란을 계승하는 의식이 있으므로, 이들이 거란족의
후예라고 보며 만주국 황제이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선통제의 부인인 고불로 완룽(郭布羅
婉容)이 다우르족 출신이고 베이징 등 화북 한족들 역시 거란족과 몽골족의 피가 진하게 섞여 있습니다.
또한 윈난성 바오산(保山) 시에는 거란족 황실 후예들이 산다고 하니 서요의 거란 황족 출신 중 야율아소루
(耶律阿蘇魯)라는 사람이 몽골 제국의 신하가 되어 윈난성까지 파병되었고, 아소루를 포함한 거란인들이
여기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대리국 사람들이 거란인을 학살하자 야율씨 일족은 성씨를 장씨,
뤼씨, 화씨, 양씨 등으로 바꾸어 살아남았으며 아소루의 무덤을 포함해 거란 왕족들을 기리는 사당과
족보도 있고 사당에는 야율(耶律) 이라고 쓰인 간판이 있으며 1473년까지 서역의 하미를 지배하였습니다.
한국사 속 국가들과는 여러모로 깊은 악연인데, 거란이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8년(서기 378년) 가을 9월의 기록으로.... 이 때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고 나오며 일부는 광개토대왕의 거란 토벌후 고구려에 복속되어 번병이 되었고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세력을 키워 발해와 함께 초반에는 같이 힘을 합쳐 당과 일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거란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전성시대을 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무너뜨리고 만주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그후 발해 부흥운동을 계속 진압하며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
을 강화해 나갔는데..... 발해 정복을 끝낸 후에는 한반도까지 노려서는 여요전쟁을
대대적으로 일으켰고 고려의 선전으로 결국 막아내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서희와 담판에서 거란은 고구려 계승권을 내세우는데 "우리가 고구려 요동 땅을 점령했으니 고구려 땅은
우리 땅이다, 고려는 신라에서 나왔잖냐" 라고 말하니 서희는 우리가 고구려를 계승해서 국호도 고려로
했고 평양을 고려 수도로 삼았다(서경) 너희들 논리대로라면 동경(요양)은 우리 땅 아니냐고 대꾸합니다.
2017년에는 거란어에는 다른 몽골계 언어와 상이하게 한국어와 어원이 같은 단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면서.... 거란어가 어떤 식으로든 실제 고구려어와 관련되었을 것을 가정하는 연구도 나오기도 했는데,
그 고구려어 항목에서 고구려어와 고대 한국어 관련해 소개된 바 있는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연구입니다.
거란인들이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아니라, 거란어에서 몽골어, 중국어, 기타 퉁구스어나 만주어 등
에서 유래하지 않은 기원이 불분명한 단어와 고대 한국어를 함께 분석해서 고구려어 단어를 많이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거란어 해석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니, 한국이 중국에서 한자 어휘
를 수용하는 것 처럼 인접국끼리 문화 교류를 통해 어휘를 주고받는 언어동조대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이라고 알고 있는 단어 중에 80%는 우리말이 아니고 중국말인데.... 산(山)의
우리말은 뫼이고 강(江)의 우리말은 가람이며 해(海)의 우리말은 바다이니, 중국말인 백두산
의 우리말은 흰머리뫼 이고, 한강은 큰가람 이며 동해는 샛바다 이고, 一二三四五... 를
중국은 이얼산쓰우... 일본은 이치니산시고... 한국은 일이삼사오... 라지만 3가지 말 모두
2천년전 중국 한(漢)나라시대 사람들의 말(漢字)이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말은 조선말 + 중국말 + 일본말 + 미국말이 섞였으니 종이, 진달래,
바람, 해, 아지랑이는 조선말이고 유교, 천문, 동지, 불교는 중국말이며 영어, 민주주의, 문화,
자유, 개인, 국민, 민족, 주식회사, 자동차, 전기, 전화, 기차, 축구, 야구는 일본인들이 영어
를 번역내지 조어(造語)한 말이고 테니스, 라디오, 컴퓨터, 캠핑, 개그맨, 힐링은 미국말 입니다.
고려시대 남경, 즉 현재의 서울은 여요전쟁 때 항복한 거란족 포로를 수용하던 곳이 있었으니 왕이
남경을 방문했을 때.... 왕을 맞이하는 거란인들이 거란 가무를 추고 거란 악기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도경에 따르면 거란 포로들 10명 중 1명은 기술자들이었는데, 고려 조정은
이들을 옷과 그릇을 만드는 일에 종사케 하여 고려의 제조기술이 더욱 정교해졌다고 적혀 있습니다.
요나라가 멸망할 때 압록강 이남의 보주(의주)가 고려의 영토가 되면서 그곳에 살던 요나라 주민들 다수
가 고려로 귀순했으며 그 외에도 일부 거란인들이 고려로 망명해오기도 했으니 당시 기록에 거란인들
뿐만 아니라 요나라에 살던 발해인, 해족, 한족(漢族), 일부 여진인들의 귀순이 이어졌다고 적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로 동화되었는데 무관으로 등용되기도 했으니 병든 아버지에게 자신의 살을 잘라 먹여
명종에게 상을 받은 거란인 무관 위초(尉貂)의 효행이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나오며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 기병 중에는 항복한 거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종 때 토벌된 뒤 고려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었고 거란 유민들 중 8만명이 몽골에 쫓겨 고려로 침공해오기
도 했는데... 고려로 내려와서 각지에서 고려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끝에 강동성에 웅거했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에 포위되고 항복했으니 어찌보면 고려와 몽골 제국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계기를 제공한 셈입니다.
강동성에서 포로로 잡힌 8만의 거란 유민들은 고려에서 도살업을 하거나 갖바치, 고리, 광대 등의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는데 불교에 대한 신앙이 강한 국가에서 안 그래도 이런 일들은 천대받은
일들이었고, 거란은 역사적으로도 고려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유민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리
만무했으니 조선시대가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아서 백정 집단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로 이어집니다.
정수리를 몽땅 밀어버리고 주변 머리만 남겨놓는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인 변발을 한 민족으로 잔인하고
난폭하기로 유명한 거란족이지만, 동북쪽 흑룡강에 사는 흑수말갈이라 추정되는 말겁자(韈劫子)라는
부족을 만나기만 하면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고 하며, 겨울에는 얼은 호수에서 얼음 낚시하거나 사냥
해 잡은 물고기와 짐승들을 여러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두어연(頭魚宴)" 이라는 축제를 열었다고 합니다.
장례 풍습의 경우는 귀족과 왕족 등 높은 신분층들은 시신을 건조하게 하여 미라를 만들고,
시신 얼굴에 금으로 만들었거나 금으로 도금한 은제 가면들을 덮었는데, 일종의 데드
마스크 였으며 상당히 강력한 전투민족이었으니 인구가 5천만~ 1억명인 송나라에
반해 200만~ 900만이었던 거란족들은 송나라를 상대로 싸우면 대부분 우세를 보였습니다.
심지어 여진족의 침략을 받고 다 망해가던 1122년에 여진족을 피해 도망쳐 온 거란족
피난민들로 만들어진 군대인 수천명의 수군(瘦軍)이 송나라 10만 대군을 물리친
일도 있었는데.... 거란족이 세운 나라들을 보자면 거란국(이진충이 건국),
요나라(야율아보기), 동란국, 북요, 서요, 동요, 후요 및 쿠틀룩 칸국등 8개 나라입니다.
907년에 야율아보기가 건국한 요나라는 거란 왕조 중에 하나로 영문으로는 '遼(요, 본음은 료)'
의 한어병음 표기를 따라 Liao Dynasty, 거란어로는 "훌지 (호리지/ 胡里只. hulʤi)"
라 부르는데 218년간 존속하면서 거란 문자도 만들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송을 압박했습니다.
약체로 이름난 송군을 몰아붙인게 큰 업적으로 보이지 않을수 있지만, 건국 초기 송군은 고회덕(高懷德),
반미(潘美), 부언경(符彦卿), 양계업(楊繼業)과 같은 우수한 지휘관들과 통일 전쟁을 치른 수십만의
강군을 보유했으며... 게다가 경제적이든 인구학적이든 송은 요에 비해 훨씬 더 높은 우위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제 공격을 가해 온 송군을 번번이 격퇴한 요의 군사력은 상당히 강력했다고
봐야할 것이지만 그러나, 요군 역시 국력이 10배나 앞서는데다가 국경에 두터운 방어선을
세운 송을 멸망시킬만한 힘은 없었는데.... 황성(皇姓) 은 야율(耶律) 이니 거란어로 '옐뤼'
라고 발음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은 '야루드(ei.ra.u.ud)’ 에 가까운 발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요는 단명 왕조처럼 느껴질수 있지만 218년이면 의외로 중국사에서 오래 존속한 왕조이니 진 · 한대 이후
중국 왕조들과 비교하면 1위 청나라 296년, 2위 당나라 289년, 3위 명나라 276년 다음이며 요의 뒤로는
전한 213년, 후한 195년, 북송 167년, 남송 152년, 북위 148년, 금나라 121년, 원나라 97년이 뒤따릅니다.
요 왕조는 2개의 국호를 사용했으니 최초의 국호인 ‘거란’ 은 종족명을 국호로 사용한 것으로서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제정했고 두 번째 국호인 '요(대요)' 는 946년(태종 회동(會同) 7년)에 처음 제정했는데
흔히 요라는 국호를 요하(遼河)에서 따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요산(遼山) 에서 유래했습니다.
거란(契丹)이라는 국호는 빈철(賓鐵)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중앙이나 중국, 시라무렌
을 뜻한다는 설도 있는데 빈철설의 근거로는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가 국호를 정할 때에
"요는 빈철의 강함을 취해 국호를 요라 정했다." 는 금사(金史) 기록과 원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왕반(王磐)이 거란이란 국호의 유래를 빈철이라고 답한 기록 등을 제시하는데 빈철은 단련된
금속, 즉 강철을 의미하며 실제로 요는 광공업으로 유명하고 영토에 지하 자원이 매우 풍부합니다.
요가 구축한 이중 지배체제는 국호의 사용에도 영향을 미쳐서 한인과 발해인 같은 정주민을 대상으로는
요(遼)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유목민과 삼림 수렵 민족을 대상으로는 대거란(大契丹), 또는 합라거란
(哈喇契丹)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는데 합라거란은 거란어를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으로 거란어 원음
은 카라키타이, 또는 카라키탄이니 즉, 서요의 국호로 알려진 카라키타이는 서요나 흑거란(黑契丹)
을 뜻하는게 아니라.... 서요를 세운 요의 유민들이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요 조정은 983년(요 성종 통화(統和) 원년)에 다시 대거란으로, 1066년(요 도종 함옹(咸雍) 2년)
에 다시 대요로 변경하는등, 여러차례 국호를 개정했지만 예전의 국호를 혼용하는 일이
많아서 대중앙 요 거란국, 거란 요국, 요 거란국, 대거란국 등이라 서술한 기록들이 전해집니다.
수가 양제의 폭정으로 쇠퇴하고 수당교체기의 혼란이 발생하자, 초원의 돌궐은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거란을 비롯한 유목민족들을 다시 복속시켰으니 다시 돌궐에
예속된 상태에서 돌리가한(突利可汗)이 폭정을 일삼자, 이에 위협을 느낀 거란은
당에 귀순해 보호를 요청하고, 당은 이를 받아들여 돌궐로부터 이들을 지켜주었습니다.
이후, 당은 거란에 기미제(羈縻制)를 적용하여 대하씨 연맹의 영토에 송막 도독부(松漠 都督府)를
세우고 각 부에는 주(州)를 설치한 뒤, 연맹 수장은 송막 도독(松漠 都督)으로, 부족장들은 각
주의 자사(刺史)로 임명했는데 당의 직접 지배를 받는 독립적인 부족들도 그 수가 많다보니 당
조정은 별도로 영주도독부(營州 都督府)와 유주도독부(幽州 都督府)를 설치해 이들을 관리했습니다.
구당서에 따르면, 대하씨 연맹은 8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고 인구는 200,000명, 병력은 43,000명인데 각
부는 기본적으로 자치와 독립적인 경제 활동을 하지만, 전쟁과 외교는 각 부의 합의나 연맹 수장의 명을
따랐지만 한 수장이 전권을 행사하지는 못해서.... 연맹에 소속된 8부의 족장인 '대인' 들이 다 함께 모여
전쟁과 외교, 수장 선출과 파면과 같은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군사 업무는 번장(番長) 이 전담했습니다.
대하씨 일족 중에서 선출한 연맹의 수장은 일정한 임기 동안 외교, 전쟁을 담당하고 각 부의 관계를 중재
했으니 원래 이러한 유목민 연맹의 수장은 부족장들이 능력 있는 자를 선출하는데, 대하씨 연맹은
수장을 대하씨 일족에서만 뽑았으니 선출제에서 세습제로 발전하는 과도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하씨 연맹 시기의 거란은 당의 통제에 놓여있고 최전선에서 돌궐을 상대해야 했지만, 반대급부로
당의 보호를 받는 것은 물론 조공무역을 통해 부를 누렸으니 연맹 수장과 각 부 대인들은
당 황제가 보내주는 많은 하사품과 관직, 국성(國性)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통치의 정당성까지도 확보할 수 있어서 당과 우호 관계를 맺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인질을 보내주거나 당의 군사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며
수장들은 당 황제가 부족의 통치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거란 연맹이 당을 위해 군대를 파견한 사례로는 고구려 전쟁에서 거란군이 참여해
당군과 함께 여러차례 요동을 공격했고 이후 평양을 함께 공격해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당 - 거란 관계는 우호와 적대를 오가는 관계였으니 정관(貞觀) 연간까지 당과 우호관계를 유지
하던 거란은 무주의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년)에 영주 도독 조문홰의 폭정에 분노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니 진노한 측천무후는 이진충과 손만영의 이름을 이진멸(李盡滅),
손만참(孫萬斬) 으로 개명하고 대군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하려 했으나..... 거란 반군은
측천무후의 조치에 대해 황장곡(黃麞谷)에서 수만의 주(周)군을 참살하는 것으로 답합니다.
거란 반군이 막북(漠北)과 요서(遼西)에서 자립하고 하북(河北)까지 휩쓸자, 진압에 어려움을 느낀 주(周)는
17만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에 더해 돌궐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동협석곡(東峽石谷)
에서 손만영의 유인전술에 걸려 2차 진압군은 궤멸하고 거란 반군은 유주(幽州) 까지 진공하자 이에
주(周)는 재차 20만 병력을 파병하고 돌권의 묵철가한이 거란 반군의 후방을 습격해 남북으로 압박합니다.
남북에서 협공을 당한 결과 이해고와 낙무정(駱務整) 이 항복하고 손만영은 도주 중에 호위병의 칼에
목숨을 잃음으로써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남아 있던 거란의 잔존 세력은 돌궐에 항복했다가 714년
(당 현종 개원(開元) 2년)에 이진충의 사촌 동생 이실활(李失活)이 부족을 이끌고 다시 당에 복속합니다.
730년(개원 18년)에 거란 연맹의 실력자인 가돌우(可突于)가 이진충의 일족인 소고(邵固) 를 죽이고 굴렬
(屈列)을 가한으로 옹립하여 대하씨 연맹이 무너지고 요련씨(遙輦氏) 연맹이 들어서는데 이 시기 거란은
반당파 가돌우가 당과의 전쟁을 벌이고 내부적으로는 부족 대인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가돌우가 죽고 요련 연맹의 두 번째 가한인 조오가한(阻午可汗)이 집권한 뒤부터 거란은 당에
귀순해 다시 국성을 받고 화번공주(和蕃公主)와 결혼해 평화를 회복한 뒤부터 조오가한은 부족의
재건에 주력했으니 점차 경제력이 회복되고 사회 분화가 촉진되었으며 초보적인 법 제도도
제정했으며.... 또한 수장의 권한이 강해지고 이리근도 군사 업무와 사법 업무를 겸하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시기에도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다소 복잡했으니 연맹은 당에 귀순하기 전에는 돌궐에 복속
하고, 당에 귀순한 뒤에도 마냥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는데 당 현종(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하북 3진의 절도사인 안록산이 거란과 그 동족인 해족을 계속 침략하자, 거란은
우호의 상징으로 결혼한 당의 화번공주를 주살하고 안록산을 박살낸 뒤 위구르 제국에 합류합니다.
산하 유목민 세력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던 위구르 제국이 쇠퇴하자, 거란은 당의 도움을 받아 위구르
제국에서 파견한 감독관들을 주살하고 다시 당에 사대했는데 위구르의 강력한 통제에서 벗어난
거란은 경제성장과 세력확장에 힘쓰고 체제 정비에 들어갔으니 마침 돌궐과 위구르 제국이 멸망합니다.
위구르를 무너뜨린 키르기즈는 예니세이로 돌아갔으며 당과 발해(渤海)는 쇠퇴하니 초원 지역에서
거란을 막을만한 세력이 없었던 덕분에 거란은 날로 강성해졌는데, 거란의 요련 연맹은 돌궐과
위구르,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정부의 기초를 세우고 연맹 수장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직조업, 수공업을 장려하고 곳곳에 마을과 유목도성(遊牧都城)을 세웠습니다.
국력 강화가 이뤄진 뒤, 5대 10국의 혼란기에 연맹 수장 자리에 오른 야율아보기는 상비군을
강화하고 자신의 직할령으로 한성(漢城)을 설치해 군사, 경제적 기반을 다졌으니 한인
망명자와 포로들이 다수 거주하는 한성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유목민들에게 귀중한
소금과 철을 다량 생산했으니 이를 토대로 야율아보기는 연맹의 전통을 유지하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동생 및 친척들과 골육상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권력을 공고히 합니다.
거칠 것이 없어진 야률 아보기는 907년 요 왕조를 개창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으니
옥좌에 앉은 그는 정복 전쟁을 개시해 경쟁 민족인 해족을 정벌하는 한편, 막북의
조복(阻卜), 서방의 위구르까지 원정하여 이들 모두를 복속시켰으며.... 또한 중국
으로도 진출하여 하북의 수십개 주를 점령하고 약탈했으나 성공은 여기까지 였습니다.
노용군 절도사(盧龍軍 節度使) 유인공(劉仁恭), 유수광(劉守光) 부자와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을
지닌 후당(後唐)의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勖) 이 요나라 태조의 앞을 가로막았으니, 유인공
부자가 이끄는 노용군은 반측지지(反側之地)의 3대장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여 요군은
모략에 걸려 패하거나, 도리어 노용군에게 요의 경내를 주기적으로 약탈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노용군은 유목 경제와 기병 군단이 근본인 요의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침공해올 때마다 목초지를 불태워
버렸고 또한 5대 십국인 후당의 이존욱은 요군이 여러차례 침공해 주력군이 패퇴당하자, 요 태조와
직접 싸워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존욱과 일전에서 패배한 태조가 하늘을 향해 "하늘이 아직 나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하진 못하는구나!" 하고 외친 일화는 요의 하북 진출 시도가 대단히 어려웠음을 말해줍니다.
발해(渤海) 고구려 멸망후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던 대조영에 의해 698년에 건국되어 926년까지 만주
와 한반도 북부 그리고 연해주에 걸쳐 존속하였던 국가로 가란땅 영주에서 탈출한 걸사비우와
대조영은 추격해온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후 세워졌으며 원래 국호는 진국(振國)
이었으나 713년 발해(渤海)로 변경하였으며 다른 별칭으로는 진단(震旦), 고리(高麗), 북국
(北國), '말갈'(靺鞨), 발해말갈(渤海靺鞨), 북적(北狄), 해동성국(海東盛國), 대국(大國) 등이 있습니다.
9세기 중엽 선왕(宣王)대에 이르러 요동을 점령하였고, 동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니 고구려의
후예가 세운 우리역사로 보지만, 중국에서는 대조영의 아버지가 성이 없이 이름만 “걸걸중상” 이라...
말갈인으로 보며 고구려인들이 대거 당나라에 잡혀간지라 주민의 다수는 말갈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발해가 건국하는데는 거란족 덕을 크게 보았으니 거란이 1등 공신인 셈인데.... 고구려 멸망
28년 후인 668년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켰고 698년 측천무후때 당군이 반란을 집압
하러 영주로 진격해 오니 고구려 멸망때 평양을 함락한 거란군에게 전리품으로 잡혀와
30년간 거란땅에서 농노 신분으로 살아가던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도망칠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거란족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발해의 건국은 있을 수 없었다는 말
인데, 거란족을 진압하고 추격해온 당나라군을 천문령에서 물리치고 더 동쪽인
동모산으로 가서 발해를 건국했고 이후 거란족과는 우호적이었으니.... 무왕 시기
에는 발해, 돌궐, 거란의 3세력이 연합해서 마도산 전투에서 당군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이후 발해의 국력이 선왕 시기에 이르러 강대해졌을 때에는 거란도(契丹道)라는 무역길이 트여서
발해와 거란 양국의 교역이 활발해 지기도 하였으니 이때까지만 해도 우호적이던 양국 사이가
원수가 될 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선왕대를 기점으로 관계가 크게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는 대대로 원수였다."는 말을 할 정도였으며 태조는 하북과 몽골로 진출하면서도
발해와는 치열하게 싸웠는데, 요 왕조의 발해 공세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으니 태조는 대요 전선의 핵심
인 요양을 함락해 발해 요동방어선을 부숴버렸으며 요양에 대대적인 사민사업을 벌여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부족을 통일하고 거란제국을 건국하였는데 924년, 발해가
요주를 급습해 자사를 죽이자, 크게 놀란 요 태조는 925년 12월 말(음력) 발해에 보복성 공세를
시작해 발해와 주요 무역통로인 발해거란도로 침공해 926년 1월 상경용천부로 가는 길목인
부여부(扶餘府) 를 직격하자 부여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불과 3일만에 함락 되었습니다.
거란군은 부여부(扶餘府)가 함락되어 방어선이 뚫려 무주공산이 된 발해의 북부 지역을 질주해
1월 6일(음력) 상경성을 포위하고 불과 사흘만인 1월 9일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를
함락하는데.... 그럼 거란군은 침공 불과 보름만에 발해 상경성을 점령한 것으로 926년
(대인선 21년) 윤 1월 15일(음력) 대인선이 항복을 청함으로써 발해는 멸망하였으며
야율아보기는 발해 옛 땅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맏아들 야율배로 하여금 통치하게 합니다.
발해 유민들의 저항인 발해 부흥운동은 200년 후인 1116년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는데..... 발해의 후예임을 칭하며 건국한 나라는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요나라와 금나라에 의해 병합되었습니다.
발해를 정복하고 돌아오던 태조가 병사하자, 요 왕조는 정치 노선과 황위 계승 문제, 황권
도전 세력에 대한 진압 문제를 놓고 태자 야율배(耶律倍)와 황자 야율덕광
(耶律德光) 사이의 계승 분쟁이 터졌으니 중앙집권화와 황권 강화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한인(漢人) 관료들과 친하고 학문이 뛰어난 야율배 보다는....
군무에 관심이 많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야율덕광이 황제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한 순흠황후(淳欽
皇后)는 동란왕(東丹王)으로 발해 지역을 통치하던 야율배 대신에 야율덕광을 옹립했으며
그리고 황권에 반발할 가능성이 큰 보수 세력, 야율덕광의 계승과 자신의 권력 장악에
저항하는 선황의 측근, 동란왕 지지 세력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관료와 지휘관들이 주살당하고, 야율배 견제를 위해 동란국 지위와 권한을 약화시킨게
독이 되어 발해 고토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고 발해인들의 끈질긴 저항에 시달렸으니,
태종은 상경성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요서로 이주시킨다는 초강수를 써서 발해인들의
저항을 뿌리뽑았지만 발해 고토에 대한 지배력을 거의 포기해야 했으나 성종대에 다시
요동의 발해 고토를 장악하고 동만주와 북만주, 함경도의 여진족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동란국이 건재하던 시점에도 발해 유민들의 반란이 끊이질 않아 수차례에 걸쳐 발해 저항
세력들을 철권으로 찍어누르고 통치력을 재확인해야 했지만, 동란국을 매개로 발해
고토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점진적으로 강화하고 발해인들을 포섭할수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태조 사후 황위계승 분쟁과 태종의 섣부른 요동 포기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골육상쟁을 벌이긴 했지만, 요태종은 황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으며 관제와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인민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며 국력을 신장시켜 가던중, 936년에 후당의 이종가(李從珂)와
내전을 벌이던 후진(後晉)의 석경당(石敬瑭)이 장성 이남의 연운 16주(燕雲 十六州)와 30만필의 세폐
를 줄테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군대를 일으켜 석경당을 용상에 앉혔는데 영토와 돈은 물론
이고 복수도 할수있는 일석삼조 기회였으니 이종가(李從珂)가 형인 야율배를 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석경당에게 받은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 경제력과 세폐를 이용해 국가를 발전시키던 요 태종은 석경당
의 뒤를 이은 석중귀가 세폐를 거부하자, 진노해 친정을 감행해 후진을 멸망시키고 개봉에 입성하여
중국 전체를 통치하려 했는데 그러나 군사들의 약탈, 강간, 살인을 용인하는 잘못된 점령지 정책 때문
에 한인들이 저항하고 후진의 절도사들이 반격을 가해와 태종은 어쩔수 없이 연운 16주로 퇴각 합니다.
요군이 자행한 학살과 파괴는 도를 넘는 것이었으니 태종은 한인을 사로잡으면 얼굴에 자형(刺刑)을 가해
살려준다는 글자를 새긴 다음에 풀어주고, 사촌 동생인 마답(摩遝)은 더 잔인해 한인을 붙잡으면 얼굴
가죽을 벗긴뒤에 눈을 뽑고 팔을 부러뜨려 죽였으며 그러고도 모자라서 마답은 죽인 한인의 손과 발을
잘라다 집에 장신구처럼 걸어두었고 요군은 행군중에 보이는 집은 모조리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으며,
전투를 벌일 때마다 강제로 끌고온 백성들을 선봉에 내세워 적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어 죽게 했습니다.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으니 패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나마 유지하던 연운 16주 이남의 일부 영토
들도 얼마 못가서 상실해 일시적으로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산서에서 자립한 유지원(劉知遠)이 어부
지리를 얻어 개봉에 입성하고 후한(後漢)을 건국했으며 7년후, 요는 후주(後周) 곽위(郭威)와 후한 잔존
세력간의 분쟁에 개입해 후한의 계승자인 북한(北漢)을 위성국으로 삼는 것으로 손실을 메꿀수 있었습니다.
자치통감에는 요 태종이 연운 16주로 퇴각할때 "중국인을 다스리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고 탄식했으며 요사에서는 태종이 여양도(黎陽道)를 지나며 말했으니.... "짐이 이번 원정에서
세가지 잘못을 했다. 군사를 풀어 말 먹이와 곡식을 빼앗은 것이 첫 번째이고, 백성들의 사적인
재산을 빼앗은 것이 두번째이고, 여러 절도사를 서둘러 진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그 세번째이다."
그리고 태종은 황태자에게 전황을 얘기하면서 해결책도 함께 제시했으니.... "하동(河東)
은 아직 귀부하지 않고 서로(西路) 의 추장들도 서로 무리지어 어디로 귀부할까
를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오직 백관의 마음을
구하고 군사들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세가지 방법뿐이다."
이를 통해 요 태종이 개봉에서 돌아오면서 중국의 정치와 문화 전반을 파악하고 한인에 대한
통치법을 어느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추측할수 있으며 그리고 요는 이때의 실패를
교훈삼아 정주민들에 대한 통치방식을 개선하고 중앙집권화된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체제를 정비하기도 전 태종이 급사하여 요의 정계는 긴장 상태에 빠집니다.
비극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동란왕 야율배는 오래도록 거란 귀족들의 동정을 받았고 정계에서는
동란왕 지지 세력과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순흠황후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는데,
태종이 급사하고 본토에서 순흠황후가 세력을 확장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요의 귀족과 관료
들은 19년 전에 태조가 붕어하고 수백명의 귀족과 관료, 장군들이 생매장당한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순흠황후가 황태후의 이름으로 대규모 숙청을 벌이고 3대에 걸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용납할수 없었던
관료와 지휘관, 동란왕 지지파의 잔존세력, 가족이 숙청당해 순흠황후에게 원한이 있는 귀족들이 힘을
합쳐 세종의 자손인 영강왕(永康王) 야율완(耶律阮)을 옹립하자 순흠황후는 막내 아들 야율 이호(耶律
李胡) 와 함께 거병해 맞섰지만 이호는 형들과 달리 역량이 떨어지고 잔인무도해 인망이 없었던데다가
순흠황후 역시 군부와 귀족의 지지를 받지못해 내전에서 패해 아보기의 능묘에 유폐당하는 신세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