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유튜브에서, 서른 중반의 어떤 젊은 남성이 20대 청년 시절에는 조경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나무 심기 같은 것을 배우다가 지금은 독립을 해서, 여기저기 7만 평의 땅에다가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심고 가꾸고 팔아서 이젠 기반을 잡을 남성의 이야기를 관심있게 구독하고 있습니다. 제가 톱을 들고 다니면서 나무 정리하는 데 관심이 생겨서 보게 된 유튜브인데, 그 남성은 유튜브를 통해 나무 심는 법, 가지치기 같은 나무 가꾸는 법, 나무를 팔아 수익을 남기는 법, 요즘 인기있는 수종 같은 걸 가르치는데, 그의 얘기는 나무 사업은 절대 조급해서는 안 되고, 돈이 될 만한 나무를 키우려면 몇 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정성껏 나무를 돌보는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처음에 불과 몇백 원짜리 묘목이 4년 뒤엔 몇만 원, 혹은 십만 원짜리 중형 나무로 자라서 확실한 수익을 보장해 줄 것이고, 너무 빠른 성과를 기대하면 반드시 실패할 거라고 충고를 해줍니다.
이 유튜버의 이야기처럼 나무 심는 일은 그 당시에는 금방 효과가 드러나질 않는 법입니다.
이와 연결시켜 보면 예수님이 전한 복음도,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대에는 아주 작은, 미약한 외침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진정한 가치가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란 것은 금방 눈에 보이게 결과가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마치 나무 심는 일처럼, 몇천 개 중에서 겨우 몇 개 싹틔우는 정도? 그리고 신앙이란 것은 대체 그 신앙의 나무가 지금 제대로 자라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아볼 수도 없게,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어느 날 거대한 거목으로 자라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성장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무궁한 가능성을 보고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야 하는 것이 신앙이기에 그래서 신앙의 길이 힘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서도 십자가(고난)을 회피하면서, 그저 지금 당장 눈앞의 성공, 즉각적인 효과, 효율성, 내 선행에 상응하는 즉각적 응답 ... 이런 것만을 쫓고 있는 건 아닐까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