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한국의 국어운동의 비교*
-A comparison on the national language mouvement in France and Korea-
김 형 길
(전주대)
차 례
서론 4. 국어운동의 방법과 전개과정
본론 1) 운동의 방법
1. 국어운동의 시작과 그 배경 2) 전개과정
1)운동의 시작 5. 국어운동의 목표와 성과
2)운동의 배경 1) 운동의 목표
2. 주체세력의 형성과 국어운동의 동기 2) 운동의 성과
1)주체세력의 형성 6. 국어의 세계화를 위한 전망
2)운동의 동기 1) 국어의 우수성
3. 저항세력의 형성과 저항의 동기 2) 세계화의 전망
1) 저항세력의 형성 결론
2) 저항의 동기 참고문헌
R sum
서 론
국내외적으로 한글의 우수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미국의 제어드 다이어먼드Jared Diamond는 과학전문지인 『디스커버Discover』지(誌)에서 한글은 그 독창성과 기호배합의 효율성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파브르Fabre도 세종이 한글을 창조한 사건을 인류사상 유일한 것으로 지적하고, 이 사건을 세종대왕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적 창조력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아직도 해결해야할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우선, 한글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이후 아직까지도 한자(漢字)의 도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채 사용되고 있다. 그에 비해서 프랑스어는 라틴어의 오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마침내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언어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한글이 당면하고 있는 또하나의 문제점은 한국국민들 가운데서 이 글의 우수성과 유용성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도 매우 많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 논문에서 프랑스와 한국의 국어운동을 비교연구함으로써 한글이 나아가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어떠한 방법들이 있을 수 있는지를 탐색해 보려고 한다.
1. 국어운동의 시작과 그 배경
1) 운동의 시작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 사전』에 의하면, 국어운동이란 "제 나라 말을 사랑하여 지켜 닦아쓰고 발전시키자는 운동"이다. 한글창제 이전의 우리 민족은 우리의 말은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의 글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중국 말을 표기하는 중국 글자를 빌어다 썼다. 그러나 워낙 우리나라와는 언어구조가 다른 남의 나라의 문자를 사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것이었으므로, 표기상 많은 곤란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민족은 우리 글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다. 세종의 한글창제는 바로 이러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글은 창제 당초부터 언문이라 불리어 한문의 중압 밑에 놓이게 되었고, 그 결과 이 문자는 창제로부터 500 여년이 지난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와서야 겨우 온 국민의 문자로서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 마저도 국어운동의 끈질긴 노력이 없이는 얻어낼 수 없는 성과였다.
한국과 프랑스의 국어운동을 비교하면서, 우선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국어운동이 시작된 시기를 어느 때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국어운동의 시작을 훈민정음이 창제된 시점(1443년)으로 설정하는 것이 좋을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한글창제가 입으로 말하는 국어를 그대로 만족스럽게 옮겨 적을 수 있는 문자의 발명이면서 동시에 우리민족의 한글문화가 새롭게 창출되는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국어운동의 시작을 16세기 플레이야드 학파의 선언문(1549)이 발표된 시점으로 설정하는 것이 좋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선언문은 그 때까지 프랑스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산발적으로 표현되었던 국어운동에 대한 의사표시들을 집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국어운동을 공식적으로 천명(闡明)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스의 국어운동은 한국에 비해서 한 세기 늦게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경우는 한국의 경우처럼 새로운 문자체계의 발명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의 문자체계를 끊임없이 손질함으로써 이루어진 문자의 개혁이었다.
여기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한글창제를 국어운동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어운동에 대한 정의를 따르자면, 국어운동은 오히려 한글창제 이후에 일어났던 '한글을 애용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들'과 관련시키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글창제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간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글은 창제 이후 국가의 문자로서 지위를 확보하고 다수의 국민들에 의해서 사용이 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다. 뿐만 아니라 한글은 이 기간동안에 수많은 억압과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한글창제가 국어운동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국어발달사에서, 훈민정음 창제(1443) 이전을 고대국어로, 훈민정음 창제 이후부터 임진왜란 종전(1598) 시기까지를 중기국어로, 임진왜란 종전부터 서양문물이 도입되는 갑오경장(1894)까지를 근대국어로, 그리고 갑오경장 이후의 시기를 현대국어로 구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은 학자들 간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프랑스어 발달사에서는 최초의 프랑스어 문헌이 발견되는 9세기부터 13세기까지를 고대불어로, 14-5세기를 중세불어로, 16세기는 불어 해방기로, 그리고 17-8세기를 고전불어로, 19-20세기를 현대불어로 구분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 논문에서 이러한 시대구분을 따르지 않고, 종합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방법이 양국의 국어운동의 비교를 보다 더 용이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 운동의 배경
프랑스어는 라틴어로부터 파생된 언어이다. 부뤼노Brunot의 말에 의하면, 프랑스어의 어머니는 라틴어요, 할머니는 그리스어, 그리고 더 먼 옛날의 어머니는 히브리어였다고 한다. 오늘의 프랑스 지역에 해당하는 골Gaule 지방에 서기 전 500 년경부터, 셀트족(혹은 켈트족)들이 들어와 살았다. 로마인들은 그들을 가리켜서 갈리아인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서기 전 154-125년 사이의 약 30년동안 로마의 정복에 맞서 저항하다가 항복하였고, 또다시 그때까지 남아있던 세력들이 기원전 57-52년에 저항하다가 마침내 로마의 시저에게 완전히 정복을 당하고 말았다.
갈리아인들은 글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군인들이 사용하던 속어 라틴어를 받아 들였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이 지배자의 언어가 갈리아인들의 토착어 속으로 이식되었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이 당시 갈리아인들이 그들의 토착어가 아닌 라틴어의 문자로 글을 쓰고 있었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들은 말을 할 때는 계속해서 그들의 토착어를 사용하였다는 것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언어의 발달과 관련하여 몇가지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어는 음성적 요소와 문자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음성적 요소는 구어(口語)langue orale로, 문자적 요소는 문어(文語)langue crite로 나타난다.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언어의 양면에 해당하지만, 서로 완전히 상응(相應)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구어와 문어가 모두 변화하지만 후자는 전자에 비해서 그 변화 속도가 매우 느리다.
라틴어는 구어와 문어가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지방에서 사용하던 토착어는 구어 라틴어와 접촉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서기 842년에 쓰여진 "스트라스부르의 선서Serments de Strasbourg"속에서 사용된 글은 이미 라틴어와는 다른 고대 프랑스어에 가까웠다. 프랑스의 학자들은 이것이 불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보고 있다. 라틴어나 프랑스어는 모두 알파벳 문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라틴어에서 속어 라틴어로, 그리고 다시 고대 프랑스어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문자 자체를 개량해 사용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중세불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프랑스문자를 사용하는 일반대중과 라틴문자를 고집하는 지식층과의 충돌이었다. 중세 프랑스 사회 속에서 프랑스어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프랑스어와 라틴어의 관계를 좀더 면밀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로마의 역사 천년동안에 라틴어는 여러 지역에서 거의 절대적인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래서 중세의 많은 작가들은 자기 나라의 모국어를 가리켜서 지방어langue verticulaire라 불렀으나, 라틴어를 가리켜서는 문법 자체이거나 언어를 지배하는 규칙이라고 불렀다. 이탈리아의 문호 단테조차도 "지방어는 변화무상하지만 라틴어는 시공간을 초월한 안정된 언어"라고 보았다. 참고로 당시 출판계의 사정을 보면, 1500년 이전에 출판된 서적들의 77%가 라틴어였고, 이탈리아어가 7%, 독일어가5-6%, 그리고 프랑스어는 4-5%에 불과하였다.
이 무렵,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하급학년에서만 불어가 사용되었을 뿐, 모든 교육이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프랑수아 1세가 설립한 꼴레쥬Coll ge des lecteurs royaux(1530) 에서는 세 개의 언어들, 즉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가르쳤는데, 모든 교육은 물론 라틴어로 이루어졌고 불어는 초보반에서 주제를 설정하거나 설명할 경우에만 허용되었다. 도미니크 교단의 지도자 로망H. de Romans의 말에 의하면, "라틴어를 사용하게 하고 중세 불어인 로망어를 금지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로망어를 쓸 때에는 수치심을 느낄 때까지 회초리로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1401년 꼬르누아이유Cornouaille학교의 학생들은 라틴어를 쓰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선생님을 고발하기까지 하였다.
당시의 교육체제에 대해서, 꼴레쥬의 교수였던 로아Louis le Roy는 다음과 같이 의미있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사람들이 의례히 하듯이 고대어 습득에 그처럼 많은 세월을 보내고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주어져야 할 시간들도 단어를 익히는데 소모해 버리므로, 이 사물들을 아는데 필요한 수단이나 여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큰 오류가 아닐까? ... 곡식 대신에 잡초를, 과일 대신에 꽃을, 나무 대신에 나무 껍질을 취하는 행위를 언제 그칠 것인가? ... 완전한 지식을 갖추어 국가나 정부에 진실로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고대어들과 거기에 따른 흥미에만 스스로를 국한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적 언어에도 역시 노력을 기울여, 현시대의 사태를 잘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라틴어의 지배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모든 형태의 언어개혁을 이단시하였다. 12세기에,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성서의 번역을 금지하였고 모든 예배의식을 라틴어로 행하게 하였다. 카톨릭의 신학자들은 라틴어 성서를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가리켜서 '중대한 오류의 씨앗'이라고, 또는 '사탄의 발명품'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런데 홀란드의 에라스무스Erasmus(1469-1536)의 영향을 받아서 1515년부터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성서를 번역할 필요가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답하였다.
"프랑스인은 프랑스어로, 영국인은 영어로, 독일인은 독어로, 인도인은 인도어로, 각자가 태어날 때부터 사용한, 각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서를 큰소리로 읽는데, 불편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러한 주장의 영향으로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성서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르 페브르Le F vre d'Etaples에 의해서 1523년에 신약이 번역되었고 다시 1528년에 성서전체가 번역되었다. 16세기의 대중언어가 불어였다면, 학자의 언어는 여전히 라틴어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어와 라틴어를 동시에 사용하던 칼빈Jean Calvin은 1536년에 발간된 자신의 라틴어 판 기독교 강요L'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 tienne를 2년 후에 다시 불어로 번역하여 일반대중에게 보급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의 국왕들은 불어의 사용을 지원하였다. 1539년 8월 15일에 프랑수아 1세는 사법제도를 개혁하는 빌레 코트레 칙령(l'Ordonnance de Villers-Cotterets)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모든 판결과 함께 기타의 모든 소송 절차를 당사자들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말하고 기록하여 전달해 줄 것을 바라며, 다른 언어로써 행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 칙령은 발루아Valois 왕조의 마지막 왕들, 즉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 샤를르 9세, 앙리 3세가 라틴어보다는 불어에 더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이것은 200여 조항들 가운데 2개의 조항만이 불어와 관련된 것이어서 혁명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라틴어가 이 때부터는 대중적인 사용으로부터 너무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의미상의 모호함이나 불확실함을 너무 많이 야기시키게 되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건이었다. 지방의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이 법령이 발표된 후로 마르세이유와 아미엥에서는 불어로만 재판이 이루어지고 판결문이 작성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교회에서, 그리고 각종 학술활동이나 문학활동에서는 여전히 라틴어가 지배적이었다. 불어의 사용이 사회의 각 분야로까지 확산되기 위해서는 어떤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했었던 것이다.
라틴어가 중세의 유럽 각국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중국의 한자는 한국을 비롯한 동양 각국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한국어와 프랑스어를 비교할 때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라틴어가 문어로서 뿐만 아니라 구어로서도 동시에 사용되었던 것에 비해서 중국의 한자는 주로 문어로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중세 프랑스의 학교교육은 대부분 불어가 아닌 라틴어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라틴어와 불어 사이에는 문어에서 뿐만 아니라 구어에서도 역시 전면적인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그에 비해서 한국어는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구어로서만 사용되었고, 반대로 중국의 한자는 주로 문어로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두 언어들 사이에는 경쟁적 관계보다는 상보적 관계가 맺어졌던 것처럼 보인다. 참고로, 한국인들에 의한 중국의 한자 연구는 서기체, 이두체, 구결체, 향찰체 등 주로 표기법에 관련된 것이었음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다가,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비로소 두 언어들 사이에는 문어의 충돌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2. 주체세력의 형성과 국어운동의 동기
1) 주체세력의 형성
한국의 국어운동의 주체자는 세종임금(1397-1450)이었다. 그는 한글의 창시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엇갈린 주장이 있다. 그러나, 세계사에서 최초의 발명이나 발견의 공로를 국가의 최고 통치자에게 돌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게다가, 그는 한국의 국어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장본인이면서 동시에 문자의 창제를 주도했던 학자이기도 했었다. 그는 훈민정음 서문에서 한글의 창제자가 자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의 한글창제를 도왔던 신하들, 정인지와 강희안도 역시 훈민정음이 "전하의 친제"라고 밝히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한글창제를 반대하였던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문 가운데 나타난 기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알려진다. "세종이 한글의 창제에 밤낮으로 애썼기 때문에 안질이 나서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청주 초정에 거동하실새, 특히 연사가 나쁜 것을 염려하사, 시종이며 모든 절차를 열에 아홉은 덜고, 정무까지도 다 정부에 맡겨 버리게 되었는데, '훈민정음'의 연구 발명의 일만은 요양을 위주하는 행재소에까지 가지고 가서, 쉬지 않고 그 연구에 골몰하였다."
한 나라의 문자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짧은 시일에 끝마칠 수 있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임금의 주위에 있던 당시의 학자들이 협력하였다. 이들은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여덟 사람이었다. 이들이 주로 참여했던 작업은 한글의 창제 자체라기보다는 창제된 한글의 해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에는 "훈민정음(예의편)"과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는데, 예의편은 세종 25년(양력으로 26년)인 1444년에 반포되었고, 해례본은 세종 28년인 1446년에 반포되었다. 위의 8인의 학자들이 참여하였던 것은 바로 이 후자였었다. 세종은 당시 한국의 최고 권력자이면서 동시에 학자였기 때문에 직접 유생들을 선발하여 진두지휘할 수 있었고, 또 반대파들의 여론을 적절히 통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국어운동의 주체세력은 16세기의 시인들, 즉 롱사르Ronsard(1524-1585)를 중심으로 모인 플레이야드Pl iade 학파의 시인들이었다. 롱사르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인들 가운데서 가장 유력하고 가장 화려한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에 무관이나 외교관 생활을 꿈꾸었으나, 15세 때 질병으로 인해서 청각에 장애가 생기게 되자 이 꿈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그의 장애를 극복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는 23 세 때 뒤벨레Du Bellay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그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귀족가문의 출신인 데다가 청각장애자였고, 또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들은 파리의 코케레Coqueret학교에서, 이 학교의 교장이었던 도라Dorat에게서 문학 수업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의 시인 펜다로스Pindaros와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라틴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와 비르길리우스Vergilius, 이탈리아의 문인들인 단테와 보카치오, 페트라르카를 배웠다. 그들은 이 학교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브리가드Brigade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후 롱사르의 문학적 성공에 힘입어, 그들은 이 모임을 확대하고, 이것을 플레이야드라고 불렀다. 이 문학동인회에 참여한 시인들은 롱사르와 뒤벨레를 포함하여, 벨로Belleau, 조델Jodelle, 바이프Ba f, 퐁튀스Pontus de Tyard, 펠르티에Jacques Peletier du Mans였다. 특히 롱사르는 2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생전에 모두 5000행 이상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는 생전에 궁중시인으로서 여러 왕들의 총애를 얻었고, 전 유럽에 걸쳐서 '시인들의 왕자'라는 칭호를 들었다. 요컨대, 프랑스에서는 문인들에 의해서 국어사용의 좋은 모델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2) 국어운동의 동기
세종이 한글을 만들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훈민정음 첫머리에 밝혀져 있는 것처럼, '백성들이 글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것은 세종 자신이 우리에게 밝혀 준 첫 번째 동기이다. 그리고, 두 번째 동기는 우리나라도 우리의 문자를 가져야 한다는 자주정신에 있었다. 강희맹의 『문충공행장』에는 당시 주변국들과 비교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즉, "각국이 모두 나라 음과 글이 있어 제 나라 말을 적는데 유독 우리나라 만 글이 없어 임금께서 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니" 라고 적혀 있어서, 당시 조선의 주변국들이 각기 자기의 문자를 만들어 쓰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여진어, 위글어, 서장어, 등에 문자가 있었고, 일어도 자기 문자에 한자를 차용해 썼었다. 서장 문자는 서기 640년대 전후에 인도의 범자를 본따 그 일부를 고쳐서 만들어졌으며, 여진어자는 한자를 고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몽고의 파스파(八思巴) 문자가 한글이 창제되기 약 170년 전인 1269년에 창제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정인지의 글에는 한글창제의 또다른 이유가 언급되어 있다. "대개 중국 이외의 말에는 그 소리만 있고 글자가 없어서 중국 글자를 빌어서 그 쓰임에 통하고 있으니 이것은 모난 자루와 둥근 구멍의 서로 어긋남과 같아서 어찌 능히 통달해서 막힘이 없겠는가?"이것은 한국 말에 중국 글자를 빌어서 쓰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말과 글의 불일치 현상을 가리킨다. 이 불일치로부터 오는 불편의 해결은 이미 신라시대 때부터 인식되어 온 우리 민족의 숙원이기도 했었다. 그러므로, 세 번째의 동기는 우리말 표기에 맞는 우리 글자를 만들고자 함에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시인 롱사르의 경우에는, 국어운동의 동기가 모국어를 빛나게 만들고자 하는 애국심의 발로에 있었다. 그의 동기는 1549년에 뒤벨레를 통해서 발표된 선언문, 『프랑스어의 옹호와 선양La D fense et Illustration de la langue fran aise』 속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선언문의 요지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프랑스어를 옹호'하고 '빛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당시의 문인들과 학자들은 라틴어로 쓰는 것을 고집하였다. 그들은 프랑스어가 그들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대해서 이 선언문의 저자는 이렇게 프랑스어를 옹호한다. "프랑스어가 빈곤해진 이유는 선조들이 이 언어를 갈고 닦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틴어도 본래는 빈곤한 언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이 갈고 닦은 결과 오늘처럼 풍부한 언어가 되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어도 갈고 닦으면 풍부한 언어가 될 수 있다. 만약에 프랑스인들이 라틴어로 글을 쓴다면 고대인들과 비교할 만한 작품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어로 쓴다면 쉽게 불후의 작품을 쓰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언문의 저자는 문인들에게 모든 작품을 프랑스어로 쓰자고 권고하고 있다.
이 선언문은 프랑스어에 관한 문제 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또한 상당수의 문학적 이론에 관계되는 문제들도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플레이야드의 시인들에게는 국어를 사랑하는 충정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위대한 시인을 꿈꾸는 욕망과 재능을 과신하는 오만이 또한 그들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들이 발표한 선언문의 문투는 매우 도전적이고 호전적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시들어 가는 시 문단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고 국어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불어사를 쓴 부뤼노는 뒤벨레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그는 이 사람의 『불어의 옹호와 선양』이 이탈리아인의 글을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불어의 장점에 대해서는 10줄도 쓰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라틴어의 식민통치로부터 프랑스어를 해방시킨 공로를 플레이야드 학파에게 돌린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의 변호는 정확성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시는 전 프랑스인들에게 감격의 충동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시나 예술에 있어서, 어떤 개념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이론보다는 모범이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 롱사르가 주었던 모범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비판을 막아 주기에 충분할 만큼의 찬사를 얻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3. 저항세력의 형성과 그 동기
1) 저항세력의 형성
프랑스의 국어운동에 반대하였던 세력들은 라틴어를 쓰기 좋아하는, 당시의 다수의 예술가들과 시인들, 그리고 인문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불어를 멸시하면서 모든 작품을 라틴어로 쓰기를 좋아하였다. 이들은 불어 속에도 그만큼 좋은 어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외래어들을 끌어들여 사용하였다. 롱사르와 뒤벨레의 공격의 표적이 되었던 대표적인 사람들은 마로Marot와 생줄레Saint-Gelais, 세브Sc ves, 그리고 시빌레Sibilet였다. 16세기 초반의 분위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은 별 가책 없이, 그리고 불어의 장래에 대한 별 염려 없이,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와 라틴의 시인들을 모방하였다. 마로는 프랑스 궁정의 궁중시인이었던 부친의 뒤를 이어 그 역시도 궁중시인이 된 사람이었다. 그의 샹송과 시의 성공은 당시 시인을 꿈꾸고 있던 롱사르에게 경쟁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생줄레는 마로의 제자로서 이 사람의 뒤를 이어 궁중시인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롱사르의 시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롱사르가 바친 시를 왕 앞에서 불성실하게 읽어 주면서, 과장되고 모호한 구절들을 일부러 부각시키려 노력하였다. 한동안 궁정의 분위기는 이 두 사람 때문에 양파로 갈라지게 되었으나 나중에는 두 사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고, 1558년에 생줄레가 죽자 롱사르가 그의 뒤를 이어 궁중시인이 된다. 세브는 국어운동의 취지에 적대감을 표시한 리용학파 시인들 중 대표적 인물이었다. 뒤벨레가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었다. 뒤벨레는 리용학파의 대변인인 시빌레Sibilet가 1548년에 시론Art po tique을 발간하자 이에 응수하기 위해서 서둘러서 앞서 말한 선언문을 발표했었다.
저항세력으로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플레이야드 학파의 동시대인들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뒤에 오는 시대의 사람들이 더 문제였다. 왜냐하면 다음 세대가 잘 계승해 주지 못한다면, 국어운동은 실패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 시대의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은 말레르브Malherbe(1555-1628)였다. 그는 앙리 4세의 보호를 받는 궁중시인으로서, 리슐리외가 정치에 행사했던 것과 비교될 만한 영향력을 17세기 프랑스의 문단에 행사하였다. 그는 롱사르의 문학이론에 가장 능동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매우 다행스러운 것은 국어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모두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말레르브는 문학이론에 있어서는 롱사르의 주장을 배척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프랑스어를 빛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있어서는 이 후자 못지 않은 집념을 보였다. 결국 그는 그 스스로가 프랑스어 순화운동의 챔피언이 되었다. 그에 의하면, 시인에게는 훌륭한 연장이 필요하다. 그 연장은 바로 "순수한 언어"이다. 그러므로 시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를 정화시켜야만 한다. 플레이야드의 시인들과는 정반대로, 그는 고어나 지방어, 전문용어 또는 복합어나 파생어, 신조어, 차용어, 그리고 비속한 용어 등을 철저하게 배척하였다. 이것은 불어를 빈곤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를 정화시키는 성과를 가져왔다.
한국의 경우, 훈민정음 창제에 최초로 반대하였던 인물은 집현전의 부제학이었던 최만리였다. 그는 한글이 창제된 직후, 다시 말해서 한글창제 한 달만에 세종에게 반대의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당시 사대주의와 보수주의에 물든 한문숭상주의자들의 견해를 대표하였다. 그의 견해는 또한 당시 지배계급 내부에 있었던 일부 보수세력의 사조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었다. 그의 반대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던 사람들은 정 4품직의 김 문과 종 4품직의 정창송이었다. 이 외에도 신석조, 하위지, 송처검, 조근이 동조하였다. 말하자면 당시 집현전의 정원 20명 중 최만리를 포함한 7명의 학자들이 상소문에 참여한 것이다. 세종은 이들의 상소문이 너무 과격한 것에 분노하여 이들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정창손과 김 문 만을 파직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다음날 석방시켰다.
한 가지 프랑스와 다른 점은 한글의 보급이 종교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옹호되거나 또는 배척되었던 점이다. 고려왕조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건립한 조선 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그 대신에 유교를 숭상하였다. 그런데, 유교숭상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한글을 창제한 세종은 불교를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서 제 7 대 임금이 된 세조 역시 불교를 숭상하였다. 세종과 세조를 거치는 동안 한글로 편찬된 많은 서적들 가운데서 유학자들의 비위에 맞는 서적은 『용비어천가』 단 한권 뿐이었고, 그 외의 많은 서적들은 모두 불교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유교를 숭상하던 신하들의 불만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는 족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실제로 세종 23년 11월에 흥천사에서 열린 불교행사에 반대하여 집현전, 의정부, 육조, 사헌부, 사간원, 성균관 등의 여러 기관들이 총 연대하여 30여회에 걸쳐서 세종에게 반대의 상소문을 올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세종 30년 7월, 창덕궁 주변에 불당을 건립하려 하자 신하들이 50 여회에 걸쳐서 반대의 상소문을 올린 일도 있었다. 불교를 배척하던 대부분의 학자들이 한글창제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한글이나 불교의 보급이 유교나 한문의 보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이들은 언어와 종교가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이들은 세조임금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예종과 성종이 유교를 숭상하게 되자 적극적으로 불교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연산군에 이르러서는 한글의 사용이 완전히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연산군의 한글탄압은 종교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모친 윤씨의 폐비(廢妃)사건이 한글 투서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을 알고나서 관련자들을 처벌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산 10년 7월, 왕의 잔학정치를 비방하는 익명의 한글투서사건이 발생하자 투서의 필자를 체포하고자 한글의 교수학습을 금하고, 한글사용자들의 필적을 대조하는 등 한글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강신항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연산군으로 인하여 국어학이 침체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으나, 우리들이 보기에는 한글의 보급이 한창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할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탄압으로 인해서 한글의 사용이 위축되고 보급이 지연되었다는 사실은 그래도 역시 부인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실제로 이 때로부터 조선왕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국어운동은 지지부진하였다.
2) 저항의 동기
최만리의 상소문에 나타난 한글창제 반대의 핵심근거는, 첫째는 중화주의(中和主義)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즉, 한글창제는 중화주의에 어긋나며 그것을 쓰면 오랑캐와 같다. 한글은 학문의 도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만 된다. 중국은 대국이며 문명국가이고 조선은 작은 중국이다. 중국 글을 익히고 중국경전에 충실한 것만이 학문의 전부이다.
이러한 중국문화 숭상은 프랑스인들에 의한 라틴문화 숭상과도 비교가 된다. 라틴주의자들은 불어가 국어의 위치를 굳히게 되는 17세기에도 계속해서 라틴어로 작품을 쓸 것을 고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7세기 말에 일어났던 "신구논쟁(新舊論爭)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논쟁의 발단은 파리의 개선문 위에 국왕의 명예를 나타내는 글을 불어로 써야 하느냐 라틴어로 써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이것은 비교적 가벼운 논쟁으로 끝났으나, 뒤이어 뻬로Perrault가 발표한 시는 문인들로 하여금 신파와 구파, 양 진영으로 나뉘어 불꽃 튀는 논쟁을 벌리도록 만들었다. 신파들에게 있어서, 언어는 의미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파들은 언어가 영원한 진리의 출생지lieu originaire라고 생각하였다. 1687년 1월 26일에 발표된 뻬로의 시의 내용은 "고대의 아름다움은 아름답기는 하나 숭배할 정도는 아니며,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와 족히 비교될 만하다"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프랑스의 문화가 라틴의 문화 못지 않게 칭송받을 만하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한 반대파의 의견도 만만치 않아서 이 논쟁(1687-1697)은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것은 한 나라의 국어운동이 하루아침에 간단히 끝날 수 있는 과업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국어운동의 방법과 전개과정
국어운동의 방법과 그 전개과정에 있어서, 양국에 나타난 양상들이 사뭇 다르다.
프랑스의 국어운동은, 플레이야드 학파의 선언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매우 급진적이고 전투적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지성계와 종교계의 지배적인 언어가 불어가 아닌 라틴어였기 때문이었다. 1501년 파리에서 출판된 80권의 서적들 가운데 불어로 출판된 것은 8권에 불과하고 나머지 72권은 모두 라틴어로 출판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라틴어의 위치는 거의 흔들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시간이 경과할수록 이 운동은 세력을 확장해 나가서 거의 1 세기만에 불어가 국어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 운동의 방법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국어운동을 전개했었던가? 플레이야드의 시인들이 사용했던 방법의 핵심은 '모방에 의한 창조'에 있다. 즉 그것은 고전작품들 속에 나타나 있는 풍부한 수사학(copia)을 연구모방하여 프랑스인들의 말과 글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들자는 주장이다. 뒤벨레의 선언문 속에 나타나 있는 이 주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나, 그래도 역시 그 속에는 독창적인 어떤 것이 있었다. 모순되어 보이는 이유는 불어가 라틴어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우수한 언어라고 주장한 뒤에, 불어를 빛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은 바로 조금 전에 못하다고 주장했던 그 라틴어를 모방하는 데에 있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점이 있다고 보는 이유는 불어가 우수한 언어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당대의 가장 우수한 언어인 라틴어를 모방하여, 라틴어 작품들 못지 않는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 내어야 한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모방에 의한 창조'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문화를 바라 본 것이었다. 뒤벨레에 의하면, 모방의 역사는 제국의 권력을 따라서 '문화가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의미의 라틴어, "translatio sudii"의 이론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고대 트로이의 문명은 그리스를 거쳐서 로마로 이전 되었다. 마찬가지로 로마의 문명은 다시 이탈리아를 거쳐서 프랑스로 이전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모방'이 고대의 제국들, 즉 그리스와 로마의 풍부한 문화를 프랑스로 이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언어는 항상 고대의 언어를 재해석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문화 창조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일까?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하면 그들의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로마의 최고의 작가들을 모방하는 데에 있다. 로마인들을 보자.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었었던가? 그들은 그리스의 최고의 작가들을 모방함으로써 그들의 언어를 계발하였었다. 예를 들어서 키케로와 비르길리우스는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데모스테네스 또는 호머와 같은 작가들을 모방하여 오히려 이들의 것들보다도 더 좋아할 만한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 점에 있어서 키케로의 말은 매우 교훈적이다. 그는 당시에 라틴어로 쓰여진 작품들을 멸시하고 그리스어로 쓰여진 작품들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라틴어는 빈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보다도 더 풍부한 언어이다."
뒤벨레는 불어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리들은 고대인들만큼 그들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언어들은 우리들의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언어로 작품을 쓰자. 우리들은 우리들의 모국어를 가지고서도 고대인들 못지 않게 학술적인 혹은 철학적인 사상들을 표현할 수가 있다. 우리말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휘의 수를 늘려야 한다. 오래된 고어들과 방언들, 전문용어들, 그리스어나 라틴어의 파생어들, 그리고 신조어들을 도입하여 어휘를 풍부하게 만들고, 부정법-명사나 실사-형용사, 복합-수식어, 등을 사용하여 구문을 개조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 언어 속에 없는 것들은 고대 언어 속에서 차용하여 새로 만들어 내자는 것이다. 이렇듯 문인들 중심으로 전개된 프랑스의 국어운동은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에 비해서,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다. 1689년에 서포 김만중이 그의 소설 구운몽을 한글로 집필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라 하겠으나, 한국의 국어운동은 주로 국왕과 그를 돕는 신하들에 의해서, 국가의 부속기관들이 주축이 되었다. 한글창제 이후, 이의 보급을 위해서 조선왕조가 취했던 정책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학술연구기관인 집현전이 창설되었고 둘째로, 어문청(語文廳)이 창설되었고, 셋째로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치되었으며, 넷째로 인재를 선발하는 국가고시에서 훈민정음을 시험과목으로 부과하였다. 다섯째로 도서의 인쇄출판에 한글을 사용하였고, 여섯째로 한자음 통일안인 동국정운을 발표하였고, 일곱째로 국가의 각종 공고, 게시, 교서문서에 한글을 사용하였고, 여덟째로, 군주의 서간에 한글을 사용하였으며, 아홉째로, 외국서적을 번역출판하는 기관인 사역원을 설치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조선왕조는 한글의 대중성과 실용성을 위해서 프랑스 못지 않게 실효성이 있는 어문정책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어운동의 전개는 상당히 부진하였다. 이근수는 그의 "조선조의 어문정책연구"속에서 부진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첫째는 최만리 일파의 반대상소사건으로 표출된 유학자와 지식층의 저항이 있었다는 것, 둘째는 세종의 죽음(1450)이 있었고, 셋째는 정변으로 인해서 한글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폐지되었다는 것(세조 2년), 넷째는 연산군의 폭정이 있었다는 것, 다섯째는 한글보급의 센터였던 어문청이 폐지(중종 원년)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인들로 인해서 한글이 국어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말하자면, 국왕과 관청의 주도에 의해서 전개되었던 우리나라의 국어운동은 후대의 다른 임금들의 정책변화에 따라서 갈팡질팡하게 되었고, 때로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2) 전개과정
프랑스의 플레이야드 시인들의 주장에 따라서 국어운동이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선언문이 발표될 무렵, 왕의 신하들은 불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국왕은 불어와 라틴어를 동시에 사용하였다. 지방은 불어를 사용하는 중앙권력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고, 행정계통은 매우 효과적인 언어보급의 조직이 되어 주었다.
불어사를 연구한 두 사람의 역사가들 코엥Cohen과 부뤼노는 불어가 라틴어로부터 해방되는 중요한 증거들을 이렇게 언급한다. "1624년에는 불어로 논문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1636년 경에는 르노도Renaudot가 불어로 공개 강연을 하였다. 1641년에는 리슐리외가 신설 도시에 불어로 강의하는 중학교Coll ge를 설립하였다. 1680년에는 수상 콜베르Colbert가 프랑스의 법률강의를 불어로 하게 만들었다."
학술분야에서도 불어가 발전하고 있었다. 1541년 카나프Canappe는 "의술은 전혀 언어의 문제에 좌우되지 않는다."라고 썼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듯이 파레Pare는 "의학적 지식을 라틴어로 가르친다고 해서 더 잘 가르칠 것이 전혀 없다." 라고 썼다. 부뤼노에 의하면, 포르카델Forcadel은 아르키메데스와 유클리트, 프로커스의 라틴어 논문을 불어로 번역하였고,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는 그의 예언을 불어로 작성하였다. 데카르트는 그의 『방법서설』을 불어로 출판하여 불어가 철학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1637). 파스칼 역시 그의 『시골 친구에게 보낸 편지Les Provinciales』(1656-57)를 작성하여 당시 불어 표현의 특징들을 정교하게 담아내는 산문의 모델을 남겼다.
17세기부터 불어의 공식적인 대표는 사전과 문법서였다. 리슐리외는 1635년 1월 2일에 프랑스의 학술원인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창설하고, 이 학술원으로 하여금 사전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 작업은 1640년에 시작되어 54년만인 1694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로 이 사전은 재판을 거듭하다가 1931-35년에 제 8판까지 발행이 되었다. 이 사전은 말레르브의 프랑스어 순화운동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는데, 그 정신이란 바로 언어를 국가에서 강력하게 통제하는 "언어의 국가주의"였다. 국가의 통제가 반드시 성공적이었다고 만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또다른 두 개의 불어사전들이 아카데미 사전보다 앞서서 외국에서 발간되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1680년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리슐레Richelet의 사전이 발간되었고, 1690년에 홀란드에서 퓨르티에르Fureti re의 사전이 발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했던 아카데미 사전과 이 두개의 사전들은 모두 라틴어가 없이 불어로 작성되었다는 데에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불어와 라틴어의 충돌은 16세기 사회의 전반적인 현상이었지만, 17세기에 와서는 이 사전들의 편찬으로 인해서 불어가 국가의 언어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17세기 초에 모파스Maupas가 『프랑스의 문법과 구문Grammaire et syntaxe fran aise』 (1607)이라는 문법서를 발간했다. 그리고 보줄라Vaugelas는 『불어에 관한 고찰Remarques de la langue fran aise』(1647)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랑슬로Lancelot에 의해서 처음으로, 불어로 쓰여진 라틴어 문법책인 『신라틴어 방법La Nouvelle M thode Latine』(1644)이 발간되었다.
17세기에는 프랑스어가 국어의 위치를 거의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가 국민들의 생활 속에서 폭넓게 사용되기까지에는 아직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18세기에 쓰여진 몇 가지 기록들을 통해서 확인이 된다. 1719년 교육자 롤랭Rollin은 '교육의 본질을 더 이상 고대언어에 바치지 말고 불어교육을 덧붙일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달랑베르D'Alembert도 고대언어에 집착하는 세태에 대해서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나는 옛날에 그리스어로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나는 논문을 불어로 발표하지 않는 것을 더욱 안타깝게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기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정부가 불어의 국어화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1793년 10월 21일에 혁명정부는 "교육은 불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라고 불어교육의 역할을 규정하였다.
우리나라의 국어운동이 조선왕조의 최고 권력자인 왕과 그를 중심으로 한 엘리트 집단의 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일반 대중의 호응을 얻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국왕들의 협력에 관해서 말할 것 같으면, 한국과 프랑스가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연산군 등 일부 군주들이 훈민정음의 보급을 탄압하였던 것이 사실이나, 그에 못지 않게 국어에 대한 확고한 언어철학을 가지고 어문정책을 펴나갔던 왕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왕실에서 발행하는 서적이나 교서, 공고문 등에 훈민정음을 사용하였다. 조선왕조를 통해서 왕이 직접 만들게 했던 언해본(諺解本)이나 언문본(諺文本) 만도 모두 48종에 이른다. 그러다가 1895년에 마침내 고종 황제에 의해서 프랑스의 빌레 코트레 칙령과 비교될 수 있는 법령이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다.
"법률 명령은 다 국문으로 써 본을 삼고 한역을 부하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
갑오경장 이후, 서양의 문물과 함께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왔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프랑스에 비해서 뒤늦은 20세기 초의 일이긴 하였으나, 한국의 경우에도 성서의 번역이 국어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는 일찍이 전도용 교리서와 성서들을 모두 한글로 번역하였다. 개신교에서도 스콧틀랜드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acintyer목사가 이응찬, 백홍준 등 5인의 도움을 받아 신약성서를 부분적으로 번역하였다. 그 후, 1900년에는 마침내 『신약젼셔』가, 그리고 1911년에는 『구약젼셔』가 순한글판으로 완역 되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첫발을 들여 놓았던 것은 1836년 프랑스의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서였다. 그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리델F. C. Ridel 신부는 『한불사전』과 『한국어 문법』을 발간하였다(1881). 그리고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콧틀랜드 선교사 로스는 한국어 문법서인 『Korean Speech, with Grammar and Vocabulary』를 발간하였다(1882). 프랑스에서는 17세기 초반에 이미 사전과 문법서들이 발간되었으나 한국에서는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이것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 선교사들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 리봉운의 『국문졍리』가 1887년에 출간되었고, 1908년에 유길준의 『대한문전(大韓文典)』이, 1909년에는 김희상의 『초등국어어전(初等國語語典)』이, 그리고 1910년에는 주시경의 『국어문법』이 출간되어 나왔다. 그 후, 1930 년대부터는 박승빈, 최현배, 이희승, 이숭녕, 김민수 등의 연구에 의해서 한국의 국어문법이 확립되게 된다. 그리고 언론계에서는 1896년에 서재필,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국문 만으로 신문을 발행하였다.
20세기 초에 주시경(1876-1914)에 의해서 국어순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필연적으로 한자의 사용 문제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한자의 사용문제는 크게 한자폐지론과 한자활용론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한자 폐지론자들은 한자의 글자수가 너무 많고 성격상 외래문자라는 점 때문에 발생하는 한자의 3 가지의 결점과 5 가지의 해독을 논거로 삼는다. 한자의 결점으로서는 첫째, 학습이 너무 난감하고 둘째, 인쇄가 너무 불편하며 셋째, 기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독으로서는 첫째, 한자로 인해서 정력이 낭비되었고 둘째, 모어(母語)가 위축되었고 셋째, 사대(事大)가 조장(助長)되었으며 넷째, 독창(獨創)이 저해(沮害)되었고 다섯째, 문맹이 과다(過多)하였다는 것이다. 이 한자폐지론자들의 주장은 '언어란 한낱 사고(思考)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편리한 것으로 바꾸면 편하게 일하고 잘살게 된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 반면에, 한자활용론자들은 한자의 구조 및 성격상의 결함을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오히려 한자활용의 효능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한자는 하나하나가 문자인 동시에 어소(語素)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3-4 천자만 배우고 나면, 그 굉장한 조어능력(造語能力)과 자통능력(自通能力)으로 수십만자를 쉽게 터득하게 되며 둘째, 장구한 문화사를 지닌 우리의 민족정신이 한자에 의해서 성장, 유지, 계승되었기 때문에 한자는 이미 남의 글이 아닌 우리 글이다. 따라서 우리 글은 한자와 한글의 이원적(二元的)요소로 된 언어이므로 그 중 한 요소를 제거하지 않는 것이 스스로 불구를 면하는 것이다. 이 한자활용론에 의하면, 한자는 오히려 학습이 쉽고, 정력이 절약되며, 그 근원은 외래문자이나 이미 우리문자가 되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모어(母語)의 발전이나 독창계발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대조장(事大助長)이란 극히 폐쇄적이고 편파적인 견해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다만 기계화 문제에 있어서, 인쇄불편이나 문맹과다에 대해서는 뚜렷한 반론이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3-4 천이라해도 많은 숫자임에는 틀림이 없고, 한글에게 인쇄상 장애가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두 가지 주장들 외에, 한자절감제한론이 있다. 이것은 앞선 두 가지 방안들의 절충안(折衷案)이다. 그런데 이 한자절감제한론은 서로 전혀 다른 두 방향의 주장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그 중 하나는 한자의 점진적인 폐지론이요, 다른 하나는 제한적인 이용론이다. 어쨋든 이 한자절감제한론에 따라서 1964년 9월부터 한자의 수를 1300자 이내로 제한하여 학교교육에 반영하였다. 그러다가 1972년 9월부터는 한자의 제한수를 1800자로 늘렸다. 한국의 언론사들은 학교보다도 한자의 사용을 더 강화하였다. 각 언론사들마다 한자의 제한수를 늘려 가다가, 1968년 정월부터는 한국신문협회에서 상용한자의 수를 2000자로 선정하고, 각 언론사가 사용해 줄 것을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국어의 한자로부터의 해방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국어운동에 있어서, 유사점은 불어와 라틴어 사이에 적대관계가 성립되었듯이 한글과 한자 사이에도 동일한 적대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것, 그리고 국어운동의 성패는 바로 새로운 국어가 기존의 고대언어를 물리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이점은 불어는 17세기에 이미 국어의 지위를 확보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국어순화운동에 의해서 불어의 사용범위를 점차로 극대화하였다는 것, 그에 비해서, 우리나라의 한글은 조선왕조 말기인 19세기 말에 와서야 국가의 문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의 장애로 인해서 국어순화운동이 아직도 부진하다는 것이다.
5. 국어운동의 목표와 성과
1) 운동의 목표
그렇다면, 국어운동의 목표는 무엇인가? 프랑스의 플레이야드 시인들이 생각했던 국어운동의 목표는 '프랑스어 전용'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프랑스어만으로도 모든 문화생활을 충분히, 그리고 아름답게 누리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 목표를 설정함에 있어서 우리들은 먼저 언어의 보편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약에 우리들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언어들 가운데 몇몇 소수의 언어들에게만 어떤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려 한다면, 그로 인해서 국어운동의 목표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수의 언어들, 예를 들어서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독교의 시조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가르침은, 이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언어로 전달되었다. 진리의 메세지는 어느 특별한 국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해서 준비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부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라틴어만이 이런 사명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진리의 보편성은 인류의 다양한 언어들을 모두 다 필요로 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지식이나 사상, 감정 등의 보편성은 인류의 다양한 언어들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이것은 16세기 플레이야드의 시인들로 하여금 국어운동에 뛰어들 수 있게 만들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만이 문화인이며 주변의 모든 민족들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중국인들에게서도, 그리고 로마인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었다. 로마인들은 라틴어가 신성한 언어, 합리적인 언어라고 믿었다. 이것은 주변국들, 특히 프랑스에 그대로 전파되었다. 질 드롬Gilles de Rome은 왕의 자녀들에게 라틴어를 조기에 가르쳐야만 한다는 논리를 이렇게 전개했다(1279년경). "라틴어의 지식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배움을 얻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라틴어는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언어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그들이 논하고자 하는 사물의 본질, 인간들의 윤리, 별들의 흐름들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완전한 속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실제적인 목적에 적합한 라틴어 또는 문학언어라 부르는 이 언어를 만들어 내었다."
라틴어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려는 이러한 논리에 맞서서, 플레이야드의 시인들은 이렇게 반박하였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어떻게 해서 불후의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가? 그들은 그들의 모국어로 작품을 썼었다. 그들도 역시 웅변적 표현을 위해서 그들의 모국어 외에는 다른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그들처럼 하지 않는가?
한국의 경우, 국어운동의 목표를 맨처음에 '한글전용'으로 설정한 사람은 주시경이었다. 그는 1907년에 "국어와 국문을 공용문(公用文)으로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1910년 4월에 간행된 『국어문법』에서 한자어를 배척하고 우리말식(式) 신조어(新造語)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한자어는 천 수백년 동안 우리말 속에 나날이 그 수가 더해져서 전체 어휘의 절반이 넘었다. .
그러나, 주시경은 한자어의 축출과 본래의 우리말의 부활을 애국애족정신과 직결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제자들의 마음 속에 우리말 애용의 정신을 깊숙히 심어 놓았다. 이것은 프랑스의 플레이야드 시인들의 외침과 매우 흡사하였다. 주시경의 영향을 입어 발족된 "조선어학회"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일어의 잔재를 일소하는 일에 앞장섰다. 1948년 문교부는 『우리말 도로찾기』라는 소책자를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는데, 그 책머리에 밝힌 방침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일어에 대하여 있는 우리말은 찾고, 2) 우리 옛말에라도 비슷한 것이 있는 것은 찾고, 3) 전혀 없는 것은 비슷한 것으로 새말을 만들고, 4) 우리가 전부터 써 오던 식의 한자어를 쓴다.
1962년 1월에는 문교부에 "한글전용특별심의회"가 설치 되었고, 다음과 같은 심의 규정을 만들었다. 1) 일반 국민생활에 쓰는 글은 모두 한글로 쓴다. 2) 한글로 적어서 잘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적당한 쉬운 말로 고치어 쓴다. 3) 한글로 적어서 혼동될 염려가 있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어 쓰기로 한다. 4) 한자말이나 외래어들을 쉬운 말로 고침에 있어 너무 어색한 새 말을 만들지 아니 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 후에 우리나라의 국어운동은 일관성이 없이 표류하게 되었다. 그 주된 원인은 한자어에 대한 방침을 정함에 있어서 국어학자들 간에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이었다. 1930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기 위해서 대표들이 모였을 때, 이희승은 한자병용론을, 최현배는 한글전용론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의견차이는 그 후의 우리나라의 국어정책에서도 그대로 표출된다. 1948년에 한글전용법령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49년에는 이것이 한자병용론으로, 1963년에는 한자노출정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다시 한글전용정책으로 바뀌었고 1974년에는 또다시 한자병용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1963년에는 문법파동이 있었다. 그 발단은 해방 직후부터 문법용어에 이름씨식(式)과 명사식이 병존해 오던 중 1961년 12월 문교부가 '교육과정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이를 통일하려고 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용어의 통일은 말본파와 문법파, 최현배와 이희승, 한글학회와 국어국문학회로 구분되는 양파의 논쟁과 대립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에서는 그렇게 일찍이, 그리고 확고하게 설정될 수 있었던 '국어전용'이라는 목표가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도 오랜 시간 동안 표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2) 운동의 성과
지금까지의 국어운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무엇이었던가? 한국의 경우에, 우선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글자를 빌어서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던 문화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민족은 우리 고유의 한글문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 현명한 왕의 창조를 후대사람들이 계승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얻어 낼 수 있었던 결실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이 "한글만으로도 문화생활을 충분히 그리고 아름답게 누리며 살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질 때, 아쉽게도 우리들은 거기에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선 국내의 대표적 일간지들부터가 아직도 한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프랑스는 프랑스어 만으로도 충분히 그리고 아름답게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는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일간지들을 비롯해서 모든 저널과 메스컴들이 불어만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에는, 이탈리아가 프랑스인들의 눈에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후자는 전자의 문화적 위대성과 화려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질투와 적개심이 섞인 유혹을 느끼기까지 하였다.그러던 프랑스가 불과 1 세기 만에 라틴어의 종주국인 이탈리아어와 경쟁하여 불어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심어 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의 국어운동은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 창조라는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양국의 국어운동을 비교해 볼 때, 프랑스의 것, 즉 모방에 의한 것이 좀더 현실적인 것이었다면, 창조에 의해서 시작된 한국의 것은 좀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뒷받침을 어떻게 찾아 내느냐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6. 국어의 세계화를 위한 전망
1) 국어의 우수성
프랑스어의 특성은 부드러움과 명료성에 있는 것 같다. 뒤벨레가 불어에서 발견해 낸 유일한 장점은 "타고난 부드러움naturelle douceur"이었다. 여기에 바르트부르크Wartburg는 명료성을 추가한다. 그는 언어들을 정태적 언어langue statique와 동적인 언어langue dynamique로 분류하면서 불어는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하였다. 불어에서는 동사의 표현들보다 명사의 표현들이 훨씬 더 풍부하다. 불어는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보다는 사물들을 밝게 인식하는 명료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볼테르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냇물과 같다. 나는 깊지 않기 때문에 명료하다." 그래서인지 불어는 개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일보다도 사회의 여러 구성원들 간에 의사소통을 하는 일에 더 적합한 듯하다. 불어의 이같은 사회성은 국제어로서의 장점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앞서 말한 것들이 바로 불어의 특성이면서 또한 우수성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언어들 가운데서 좋은 특성들이 부각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우수성의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글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는, 한글의 특성과 우수성은 문화의 각 분야에서 이 글의 애용이 충분히 이루어지면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보기에, 한글의 세계화에 대한 전망은 일반인들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밝은 것처럼 보인다. 한글은 국내에서보다도 국외에서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미국의 메릴렌드대학의 램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글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서방 세계의 알파벳이 발명된 것이기보다는 수백년에 걸쳐서 수많은 민족의 손을 거치면서 개량되어 온 것인데 반하여, 한글은 실제로 발명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발명된 언어가 한 민족 전체에 의해서 발전되고 실용화되는 것을 지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파브르Fabre 역시 "발명자가 분명한 문자체계는 오직 한글뿐이다. 그러므로 한글을 창조해 낸 한국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라고 하였다. 콜롬비아 대학의 레드야드 교수도 그의 논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세종은 한국사람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자랑이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아직도 한글의 진가와 세종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내용들은 모두 한글이 '창조된 문자'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지만, 창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한글의 우수성을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문자의 우수성은 우선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가 편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의사소통을 정확하게 할 수 있고, 우리들의 사상이나 감정을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자의 조직이 과학적이어야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자는 이 기준을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는가?
다행스럽게도, 한글은 이러한 장점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훈민정음은 상형원리(象形原理)를 적용하여 만들어졌다. 먼저 자음은 발음기관을, 모음은 하늘, 땅, 사람을 본따서 기본자(基本字)들을 만든 후, 이것들을 서로 배합하거나 아니면 여기에 획(劃)을 더하여 만들어졌다. 20세기의 외국학자들은 처음에는 이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0년에 세종의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그들은 이것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한글은 음절문자와 음소문자의 장점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한글은 음표문자, 즉 소리글자이다. 소리글자의 장점은 그 글자로서 표기할 수 있는 소리의 수가 많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문어로서 구어에 가장 가까이 근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자로서 표기할 수 있는 소리의 수는 427개이고 일본문자로서 표기할 수 있는 소리는 201개밖에 안된다. 그에 비해서 한글은 8778개나 된다. 그리고, 한글은 음운부호 하나가 하나의 음을 나타내는 음소문자이다. 자음부호는 원, 직선, 빗선, 네모꼴 등의 기하학적 부호로 되어 있고, 모음부호는 수평 또는 수직의 선으로 되어 있어서, 이들 부호가 조합하여 하나의 음절문자를 이룬다.
미국의 대표적 언어학자인 미시간대학의 맥콜리 교수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는 한글날(10. 9일)을 맞아 학생들과 교수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축하 파티를 마련해 온 지 20년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글은 세계의 문자체계 속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문장을 단어로, 음절로, 그리고 음소로 분해하며 동시에 기본적으로는 음절문자의 형태를 유지하는 유일한 문자체계이다."
우선 중국의 문자와 일본의 문자를 우리의 문자와 비교해 보자.
중국문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 즉 뜻글자이다. 박양춘에 의하면, 한자의 문제점은 글자 수는 많고 소리의 수는 적다는 점이다. 그래서 동음이의어들이 많다. 보통 한 개의 소리에 100개 정도의 동음이의어들이 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 중국인들은 4 성이라는 발음법을 만들어 사용한다. 말하자면 이 동음이의어들을 넷으로 나누어 발음하게 되면 하나의 소리에 평균 25글자의 동음이의어가 있게 되는 셈이다. 중국 T.V.에 한자 자막이 나오는 이유는 이 많은 동음이의어들이 일으킬 수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글자의 획이 너무나 수가 많고 복잡하다는 점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간체자(簡體字), 즉 약자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고서도 복잡성을 해결하기 어려워, 중국인들 스스로가 표음문자인 알파벳을 사용할 것을 검토하고 있는 실정이다.
구로다 카쯔히로씨는 『한국인은 한국인이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한글은 한자와 전혀 관계없이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매우 독창적인 문자이다. 이에 반해 일본의 가나는 '히라가나'나 '가다까나'를 막론하고 한자의 초서체나 획 등에서 따온 글자인 것이다. 따라서 독창적이라고 하기보다는 한자의 형태를 살리면서 모양만 바꾸어 놓은 글자라 하는 것이 옳겠다. 즉, 한국의 '한글'은 한자에 대해 '혁명적'이고 일본의 '가나'는 '개량적'이다.
일본문자는 50%이상을 한자에서 차용하여 쓰고 있다. 소리의 부족과 글자의 부족 때문에 같은 글자를 여러 소리로 발음하는 현상이 생긴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외래어를 많이 쓸 수밖에 없다. 일본어는 이미 표의문자인 중국어를 많이 수입해서 썼기 때문에 이제 와서 표음문자화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중국 글자와 일본의 글자의 치명적인 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서, 한글은 그 자체의 과학성이나 편리성 또는 활용성 면에서 족히 세계의 공용문자로서 공인받을 수 있을 만큼 우수한 문자인 것이다.
2) 세계화의 전망
그러나, 한글이 아무리 우수하고 아무리 전망이 밝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밑받침 되지 않으면 그 미래가 결코 밝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에게서 처럼 한국인들에게도 자기 나라 말을 세계적인 언어로 만들고자 하는 긍지와 신념이 필요하다. 프랑스는 이미 세계 120개국 이상에 알리앙스 프랑세즈를 설립하여 불어보급에 힘쓰고 있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49개 국가에서 불어를 사용하며 유엔 등 여러 국제기구에서 이 언어를 공식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국어운동의 목표가 어느 정도 실현된 후에는 또다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지 않으면 아니 되리라. 그것은 고대의 그리스어나 라틴어 또는 중국어와의 경쟁이 아닌, 현재 살아 있는 언어들, 그리고 각기 우수성을 자랑하는 언어들과의 경쟁이다. 롱종이 말했던 것처럼, 언어는 정치적 지배의 도구이다. 이 정치적 지배는 남의 민족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민족 스스로를 잘 다스리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통일은 민족의 동질성을 찾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문화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일은 바로 이 언어를 잘 가꾸는 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선진국들이 그 좋은 예들이다. 어느 국가이든지 간에 통일된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고유의 문화를 창조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일이겠는가? .
결 론
프랑스어는 17세기에 그 근본체계가 모두 정립되었다. 다시 말해서, 전반적인 발음, 동사 및 명사와 대명사의 형태, 단문과 복문의 구성, 전문적인 용례 외에 기본 어휘 등의 구조가 모두 체계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국어운동의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마르셀 코엥은 그의 불어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교양불어를 배울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불어에 의한 프랑스의 정복이 끝이 났다. 라틴어는 점점 덜 사용되어 교과과목의 하나에 불과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교양인들도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별 어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즉, 그것은 한마디로 '프랑스어 전용'이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국어운동의 목표 역시 이와 다른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한글만으로도 모든 문화생활을 충분히, 그리고 아름답게 누리는 데에 있다. 우리들이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일도 그 후의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의 흐름, 아니 국가들 상호간의 문화적 교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라틴의 문화가 이탈리아를 거쳐서 프랑스로 이전되었던 것처럼, 이 문화적 흐름이 다시 한국이나 혹은 어떤 다른 나라로 유입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이치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우리들이 기대하고 있는 문화적 흐름이 어떤 특별한 계기나 어떤 집단의 집결된 노력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프랑스의 문인들이 생각했던 '모방에 의한 창조'는 문화 교류의 보편적 개념이다. 우리 민족이 창조해 낸 한글은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문자체계들 중의 하나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이것을 어떻게 '옹호하고 빛나게 만들 것이냐'에 있다.
- 끝 -
*** 핵심어mots-cl s: 국어운동, 프랑스어, 한국어, 훈민정음, 플레이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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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sum
KIM Hyung-Kil(Univ. de Jeonju)
Le but de notre tude est de savoir quel est l'objectif ultime du mouvement de la langue cor enne, et quels sont les moyens pour y arriver. Pour ce faire, nous allons comparer le mouvement de deux Langues Nationales : celui de la France et celui de la Cor e.
C'est partir de l'an 1443 que le mouvement pour la nationalisation de la langue cor enne a commenc c'est- -dire au lendemain de la cr ation de l' criture cor enne par le roi Sejong, alors que le mouvement pour la nationalisation de la langue fran aise a commenc en 1549, c'est- -dire au jour du manifeste de "la D fense et Illustration de la langue fran aise", publi par un groupe de po tes connu sous le nom de la Pl iade. C'est ainsi que l' mancipation de la langue fran aise du r gne colonisateur du latin a commenc au XVIe si cle; il tait alors in vitable que le fran ais ait lutter contre le latin qui s'employait en langue orale aussi bien qu'en langue crite. La langue cor enne, quant elle, s'employait seulement en langue orale, son criture n'ayant pas encore t cr e. Elle avait une relation n cessaire avec la langue chinoise, dont elle empruntait l' criture. C'est peu apr s sa cr ation que le Hangul, criture cor enne, a commenc lutter contre l' criture chinoise.
Les personnages centraux du mouvement de la Langue Nationale en Cor e sont le roi Sejong et ses partisans, un groupe de savants, alors qu'en France, c'est un groupe de po tes, constitu s sous le nom de la Pl iade, qui a jou ce r le. Les opposants principaux ce mouvement en Cor e sont les savants sinophiles, admirateurs de la culture chinoise, c'est- -dire une force conservatrice cette poque, alors qu'en France ce sont les humanistes, les po tes, les artistes latinophiles, admirateurs de la culture latine.
La m thode pour cultiver la langue fran aise, employ e par la Pl iade, tait "la cr ation par l'imitation", c'est- -dire la cr ation d'oeuvres immortelles en fran ais, imitant les chefs-d'oeuvre en latin. La Pl iade a donc invit les crivains et les savants composer leurs oeuvres en fran ais. Pour ce qui est de la Cor e, l' volution de la Langue Nationale, dirig e par les rois et les autorit s, tait souvent la merci des changements de politique linguistique; les utilisateurs de la Langue Nationale devaient recommencer leurs travaux au point de d part malgr leurs bons r sultats.
La langue fran aise a consolid sa position en tant que Langue Nationale partir du XVIIe si cle, et a continu largir son champ d'emploi par un travail d' puration linguistique jusqu' aujourd'hui. Son objectif est l'usage exclusif de la langue fran aise en France, c'est- -dire que tout son peuple puisse jouir de sa vie culturelle suffisamment et l gamment avec cette Langue Nationale, comme langue unique. Il nous semble que la langue fran aise a r ussi accomplir cet objectif.
L'objectif de l' volution de la langue cor enne, lui aussi, revient peut- tre au m me. Pourtant, le Hangul, criture cor enne est encore loin de l'accomplir cause de l'obstacle de l' criture chinoise jusqu' aujourd'hui. Il nous semble, quand m me, qu'il a une potentialit suffisante et la perspective d'avenir pour sa r ussite est tr s positive, pourvu que le peuple cor en le comprenne, parce que les savants l'int rieur et l'ext rieur du pays reconnaissent l'unanimit la structure scientifique de l' criture cor enne, son caract re pratique et son excel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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