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노동자, 시민, 학생, 가정주부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하고 앞으로의 수습대책을 토론했다. 또한 그때 파악된 피해상황이 보고되었으며 장례준비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청의 '수습대책위원회'는 시민들의 의사를 수렴하지 못하고 미온적인 태도로 계엄사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방적인 무기반납만을 주장함에 따라 수습위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과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시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 했으며 도청 내부에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다. 시민군 중에도 무기를 반납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 났다.
궐기대회를 준비해 온 청년,학생,노동자들은 YWCA에서 모여 도청의 수습위로는 현재의 상황을 수습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토론에 참석한 청년들이 25일 발족되는 항쟁지도부의 핵심을 이룬다.
무기를 반납해서 희생을 줄이자는 의견과 우리의 요구사항이 전혀 관철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시민들의 피를 팔아먹는 것이니 끝까지 싸워야 다는 의견으로 학생수습위 내부에서도 강.온파의 대립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수습위원 일부가 조직에서 이탈됨에 따라 박남선 등 일반인을 포함시켜 학생수습대책위 기구를 개편했으며,25일 김창길이 학생수습위원장직을 물러나면서 수습위원들이 대부분 빠져나가 윤상원, 정상용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광주민중항쟁 지도부가 발족되었다.
23일 00:40 지원동 숙실부락에서 계엄군과 총격전
* "조선대 뒷산의 숙실부락에서 계엄군이 랜턴을 잠깐씩 비치며 냇가를 지나갔다. 그곳에서 본부까지 약 1백50 미터 정도의 거리였고, 숙실마을 6조와 무등육아원의 7조와는 약 70-80미터 거리밖에 안 됐다. 그곳에 매복해 있던 6조와 7조가 계엄군을 향해 사격을 했다. 이에 다른 조까지 발사하기 시작하자 계엄군 역시 총을 쏘았다. 양쪽에서 불꽃 튀기는 접전이 벌어졌다. 칠흑같은 밤이었지만 양쪽에서 날아온 총탄에 의해 마치 여름 날 반딧불이 날아든 것처럼 주위가 훤했다. 약 20-30분 정도의 격전이 있었다. 배고픈다리까지 계엄군이 쏜 총알이 날아와 다리 난간에 구멍이 뚫렸다. 한참 후 어느 쪽이 먼저 사격을 중지했는지 모르지만 총성이 그쳤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01:00
- 무장시위대가 해남에서 광주 방면으로 나가다 옥천면 소재 우슬재에서 길에 매복중이던 계엄군 1개 중대에 포위, 계엄군은 M16, LMG 난사, 수류탄 투척, 시위대 20명 이상 사망, 다수 부상, 생존자 몇 명만 빠져나감. (1980년대 민주화운동)
02:00 충정작전 계획 건의
- 군사령관 방문(대구 - 서울 - 광주 - 대구)
충정작전 계획 건의 5. 24 02:00)
- 국방부장관 지침
5.25 02:00 이후까지 작전 연기
- 군사령관 작전지침 접수
.상황의 추이에 적합하게 계획 발전 및 만반태세 유지
.5.25 02:00 이전 작전시행 금지(이후 시행도 승인)
.경찰 및 행정력으로 대민질서 회복
.광주시 외곽지역 봉쇄(도주 및 침투 방지)
.사상자 처리는 군. 경. 검.합동검시관, 언론기관 입회하에 실시
.부상자 적극 치료.
.사상자 발생 억제.
.군은 고통을 감내, 시민을 보호한다는 목적 달성. (말, 1988. 8)
03:36
- 송정리 삼양타이어 공장 무장폭도 30여 명 기습 시도. 예비중대 위협사격으로 격퇴, 생포 2명. (전교사 작전일지)
05:00
- 녹동마을에 있는 33대대 숙영지, 폭도들 사격. (전교사 작전일지)
06:00 광주시 안정 되찾아
- 광주시의 표정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는 듯했으나, 시외곽지역에서 들려오는 간헐적인 총성 때문에 여전히 긴장감을 씻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새벽 6시부터 남녀 고교생 7백여 명(여학생 50명)은 시내 전역의 청소작업에 앞장섰다. 이에 대해 수많은 시민들이 호응, 청소를 함께 했으며 대다수의 상가들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신동아, 1985. 10)
- 불탄 자동차의 잔해는 길 옆으로 치워진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학생들은 장례반, 총기회수반, 차 량통제반 등으로 나뉘어 수습중인데, 장례반은 시체 43구가 안치돼 있는 도청 뒤뜰에 사망자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고 사망자 중 신원 미확인자를 찾기 위해 가족들이 우왕좌왕하며 아우성. (월간조선, 1985. 7)
- 도청을 중심으로 한 빌딩 앞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날 처음으로 전일빌딩 앞에 '민주시민 강령'을 공고하면서 '시민군'이란 말이 등장했다. 4개항으로 된 강령에는
1) 시민은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2) 시민군은 위장된 계엄군 및 불순분자를 주의합시다.
3) 질서회복에 힘씁시다.
4) 평소 생활로 복귀합시다.
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월간조선, 1985. 7)
- 해남. 안동리 군부대 앞 국도상에서 시위버스 1대, 군의 총격으로 전복, 다수 사망, 중경상 입음.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광주로 가려고 7,8명이 트럭을 타고 가던 중 해남 우슬재에 도착했을 때 잠시 차를 세웠다. 용변을 보기 위해서였다. 근처 도로변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고개마루에서 청년 1명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동지들! 어서 오시오'라고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나 보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가려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저 사람 사복을 입었으나 총도 M16이고 군인인 것 같다. 아무래도 군 첩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살펴보니 머리에 수건을 둘렀으나 머리가 짧아 보여 더욱 의심스러웠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던 나는 트럭 있는 곳으로 갔다. 그때였다. 오른쪽에 있던 산에서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M16 자동소총 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적재함으로 올라가 머리를 감싸고 엎드렸다. 총탄이 차를 뚫고 들어와 오른쪽 발가락을 관통했다. 운전을 하던 선배가 차를 돌려 군인들의 사정거리를 벗어났으나 모두 부상당한 뒤였다. 나는 강진 도립병원으로 갔다. 그 병원은 부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공격당한 우슬재에서 다른 차량도 여러 차례 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구술 : 강석신, 현사연 조사)
06:47
- 작전 8-6호에 의거, 비아 KBS 송신소 병력 투입(08:00도착). 20사단 61연대 3대대 10/197명 전차 3대 배속. (전교사 작전일지)
07:00
-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질서를 찾아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오전 7시경 금호고교 부근에서 공수부대 3명이 학생 2명과 할머니를 살해하고 도주하였는데, 후에 정부는 이 사건을 시민군의 행위라고 책임전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 해남. 복령리 국도상에서 군과 총격전. 무장시위군 1명 사망. (1980년대 민주화운동)
08:00 교도소 앞 총격
- 담양으로 나가던 시위대가 교도소의 경비계엄군에 의해 저지당하면서 총격 교전, 시민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 교도소는 시외로 나가는 분기점에 자리하고 있어 시위대가 교외로 오갈 때마다 교도소 경비계엄군에 의해 차단당하면서 공격을 받곤 함. 계엄사에서는 이를 교도소 습격이라고 발표.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2 1/2톤 탑승한 폭도 6명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교도소로 접근. 50 미터 전방의 바리케이드에 봉착, 진출하지 못하자 11대대에서 즉각 응사. 2명 사살, 4명 부상을 입고 도주. (특전사 전투상보)
* 대한통운 대형 트럭에 4,5명의 시민이 타고 교도소 앞을 지날 때 교도소에 있던 계엄군들이 그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시민 3명이 사망하고 2명은 총상을 입고 교도소로 실려왔다. 이날 오후에는 장갑차 1대가 정문 앞에 정차하자 계엄군이 총을 쏴서 그 차에 있던 2명이 사망했다고 동료가 말해줬다. 이렇게 죽은 사람의 시체는 헬기가 와서 어디론가 싣고 갔다." (구술 : 홍인표, 현사연 조사)
- 남도예술회관 벽과 충장로 방향 YWCA 부근 벽에는 사망자 명단, 죽은 시체와 부상자들의 흑백사진 부착됨.
- 도청 앞 맞은편 상무관에는 30여 구의 시체를 무명천에 덮어 나란히 안치, 입관하지 못한 시체도 수십 구 있음. 분향소는 상무관 입구에 설치.
- 도청에는 행방불명자 명단 접수, 입원환자와 사망자의 명단 대조하며 확인.
- 도청 정문에 '수습대책위원회'라는 띠를 어깨에 맨 청년들이 사망자를 확인하려는 시민들을 주민등록증 대조 후에 통과시킴. 가족이 확인한 시체는 상무관으로 옮겨 안치. (1980년대 민주화운동)
09:00 녹두서점에 모인 교수, 학생 시민궐기대회 계획
* "오전에 집을 나서 녹두서점으로 갔다. 그곳에 교수와 전남대생들이 있었다. 윤상원 형도 있었다. 상원 형이 '지금 도청에는 학생들이 없으니 우리가 역할을 분담해서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또 우리가 아무런 대책 없이 무기를 반납해서는 안 되며 현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실천 방안으로써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궐기대회에 필요한 앰프, 마이크 시설 등의 물품은 YWCA로 가서 준비했다. 버스를 이용해 시내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오후 3시에 도청 앞 광장에 시민궐기대회가 열리게 됨을 알리고 다녔다." (구술 : 김태종, 현사연 조사)
- 함평. 버스 4대, 트럭 2대에 탑승한 4백여 명 시위 개시. (31사단 전투상보)
- 함평. 시위대는 본부를 함평경찰서로 결정. 영광으로 통하는 도로와 함평다리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자체경비.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목포.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가 목포역에서 구성.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구용상 광주시장, '80만 시민에게 호소합니다' 전단 배포. (조선일보, 5. 24)
- 주한미국고위관리 발표/북한 오판 막기 위해 만반의 조치, 미 결의 이미 전달, 정치일정 공약대로 추진 확신.
- 해럴드 브라운 미국방장관 발표/북한의 대남도발에 대해서는 강력 대응, 한국에 60일분 전쟁물자 비축.
- 미국방성 관리/미국 항공모함 미드웨이 등 필요하면 한국에 급파, 코럴시호 파견 부인. (동아일보, 5. 23)
09:35
- 도청에 학생수습위원회 본부 설치.
- 무기 회수 활동 전개.
09:50
- 31사단장 함평지역 예비군 대대 방문. (31사단 전투상보)
10:00
- 80-7호에 의거 광주시내 변전소 확보 지시
. 광주변전소: 31사 병력 투입
. 계림변전소: 3공수 투입 (전교사 작전일지)
- 목포. 오전 8시부터 시민들 집결. 휴교령으로 중.고생들도 시위에 참가.
- '제2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가 5만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개최. 목포청년회의소에서 연단용 트럭을 제공하는 듯 위장하며 위원장의 연설을 막기 위한 납치 시도, 좌절. '더 이상 김대중 선생을 탄압하지 말라. 김대중 선생은 우리 목포시민이 30년 동안 탄압받으면서 탄생시킨 목포가 낳은 이 민족의 지도자이다!'라고 주장. '우리 겨레와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 결의문' 낭독 후 시가행진. 목포청년회의소 시위행렬 방해.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영암. 영암군 도포면 덕화리 저수지 부근에서 도포지서의 실탄을 싣고 대피중인 예비군 중대장 발견. 그들이 싣고 가던 M1, 카빈 소총, 실탄 2만 1천4백70발을 획득. (1980년대 민주화운동)
- 5. 23 10:00경 영암군 도포면 덕화리 소재 저수지 부근 노상에서 도포지서의 총탄을 경운기에 싣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중인 동면 예비군 중대장 김금호를 발견하고 피고인들이 총으로 위협하며 공포를 발사하여 동 김금호의 반항을 억압하고 경운기에 싣고 가던 카빈 및 M1 소총 총탄 2만 1천4백70여 발을 트럭에 옮겨 실어 이를 약탈하고 (공소장)
수습대책위원회 조직개편
- 도청 도지사실에서 일반수습위원회는 당초 15명 중 5명이 사퇴하고 전남대생 10명, 조선대생 10명을 추가해 30명으로 늘리는 한편, 수습대책위원장에는 윤공희 대주교를 추대했다. 이때 수습위원으로는 고광표, 서정수, 조비오, 윤성원, 이홍길, 심홍순, 한완석, 박찬일, 문행두, 최한영 등이었다.
한편 남동천주교회 유치원에서는 김성용, 홍남순, 이기홍, 조철현, 조아라, 이애신, 위인백, 이영생, 조봉환, 장기언, 김천배 등과 회합, 조철현이 도청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도청내 수습대책위원회는 무력하고 도청 안에서 폭도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을 보면 성직자로서 같이 싸우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하자 이에 모두 동조하고 계엄사에 요구할
1) 광주사태는 공수단의 살상에 대한 광주시민의 정당방위 행위이다 .
2) 구속학생을 석방하라.
3) 공수단의 책임자를 처단하라.
4) 계엄군의 투입을 금지하라.
5) 시민, 학생 처벌 및 보복 엄금하라.
6) 계엄군은 사과하라.
7) 정부 책임하에 피해 보상하라.
8) 무기는 자진회수 반납한다.
등 8개항을 결의한 후 전원이 도청으로 들어가 최한영이 주도하는 시민대표 수습위원회에 참석하여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무력시위를 하기 위하여 도청을 점거하고 있는 폭도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교수들을 지도자로 하자고 제의하여 참석자 전원의 찬동을 얻어 명노근, 송기숙, 오병문을 지도자로 선정했으나 무기를 회수하여 계엄당국에 반납하자는 등의 도청내 수습위의 입장에 이견을 보여 수습위에 합류하지 못하고 폭도들을 앞세워 끝까지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고 결심. (공소장)
무기 회수를 둘러싼 의견대립
- 무기 회수에 반대하는 시민과 학생들은 수습대책위의 수습방안에 불만을 품고 도청 앞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
- 학생수습위에서는 '무기반납으로 사태를 해결짓자'는 주장과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이 관철된 상태에서 반납되어야 한다'고 맞섬. 타결이 되지 않자 회수된 무기 중 1백 정만 계엄사로 갖고 가 반응을 보기로 합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
- 학생들과 시민대표, 도청 간부들 협상중. 어제부터 수습 나섰으나 뚜렷한 결론 못 내었고 일반수습위와 학생수습위의 양수습위에서는 '무기반납으로 사태를 해결짓자' 는 주장과 '지금 이 시점에서 무조건 무기반납을 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며, 시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광주시민을 폭도라 부르는 현 정권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하며 이번 사태로 인한 피해가 정당하게 보상되고 사망자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려 수습전망 흐림.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동월 23일 10:00경 전남대학교내에서 공소외 김상집, 동 정유아 외 성명불상 3, 4명과 함께 동대학교 본관 뒤에 주차되어 있는 동대학교 소유 전남 5가 1155호 스쿨버스 1대와 동대학교 구내매점에서 빵 1상자, 콜라 1상자 및 동대학교 발전실에 있는 앰프 1세트를 들고 나와 앰프와 스쿨버스를 폭도를 규합하기 위한 가두방송에 공하고 (공소장)
10:30 남녀 고교생의 시위
- 남녀 고교생 1백여 명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
- 고교생들이 사망한 친구들의 시신에 태극기를 덮어주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 (월간조선, 1985. 7)
10:40
- 도청내 시체 속에서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듯한 시체 여러 구 발견.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10:50
- 폭도 30명, 소방관으로 가장, 담양 고속도로에서 남영으로 이동중.
- 해남 황산만. 폭도 40명 아군 도로차단 병력과 교전, 폭도 1명 사망, 2명 부상, 그 외 해산 부상자 부대로 후송, 아군 피해 무.
- 해남. 폭도 체포 연행하고, 일부는 군부대장과 협의 후 신병을 인수해 귀가조치. (계엄사 상황일지)
11:00 부녀자 시위대에 식사 제공
- 이날도 그간의 피해상황이 목격되어 오전 11시경 광주세무서 지하실에 시체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김OO 씨 등 4명이 현지로 가서 확인한 결과 유방, 음부를 도려내고 얼굴을 난자당한 여고생의 시체가 있었다. 신원확인을 해본 결과 옷 컬러 속에서 학생증이 나왔다. 전남여고 2학년 학생 이O였다. 시체를 싣고 가서 확인하고 부모들이 시체를 인수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부녀자들 솥 걸고 시위자에게 식사 제공, 총기는 절반 가량 회수.
- 시민들은 미국무성 성명(미군이 진압군 차출하는 것 양해했다는 내용)의 의미가 뭐냐고 궁금해 함.
- 시민대표들 장례절차 논의중. (월간조선, 1985. 7)
- 영암. 영암읍의 아주머니들 시위대에 식사 제공.
* "22일 오후쯤부터 나이 드신 분들 사이에 '저애들은 얼마나 배가 고플까, 저 애들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밥도 못 먹고 저러고 다니는 것을 알기나 할까' 하는 말들이 오고 갔다.
그런 다음날 아침이었다. 시위대가 광주에서 내려온 이후 장사는 전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장사(식당) 준비를 위해 사거리에 있는 상설시장에 갔다. 거기서 평소 언니라고 부르는 분을 만났는데, 언니는 내게 '몇몇 사람들이 돈을 걷어 시위하는 애들에게 밥을 해주기로 했는데 너도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몇천 원 혹은 1만 원 정도씩의 돈을 걷어 10여 명의 동네 아주머니들이 '흥운식당' 안집에 모여 김밥을 말았다. 우리는 11시 30분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있던 시위대들에게 김밥과 음료수를 갖다주었다. 시위대원들의 옷에 피가 묻어 있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먹었다." (구술 : 이서운, 현사 연 조사)
11:00
- 청년운동권 핵심들은 무조건 무기반납을 막기로 논의. 시내 근처에서 많은 수의 학생운동권과 청년, 노동운동 관계자들이 모여 수습위가 시민 의사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승리를 포기한 투항주의적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시민궐기대회를 주도하고 홍보반을 조직하여 대민 선전활동을 하기로 결정. 플래카드 제작, 민주영령에게 조의를 표하는 검은 리본 배부. (1980년대 민주화운동)
11:10
- 영산포-나주. 버스 1대, 타이탄 1대 접근, 바리케이드를 치던 병력이 정지를 명하자 회전, 도주하는 것을 대대장 명에 의해 타이어 사격, 폭도 15명 체포, M1 30정, 카빈 30정, 버스 1대, 트럭 1대 노획. (31사단 전투상보)
11:20
- 수습위원들이 7군데 시외곽을 돌면서 무기회수 권유. 총 5천4백여 정 회수. (신동아, 1985. 10)
11:30
- 전남대 뒷산에서 숨진 광주상고 2년 이성귀 군(16)의 시체가 도청으로 옮겨지면서 한때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수습대책위원회는 22일 결의된 8개 사항 외에 총기를 반납하지 않겠다는 일부 강경파 시위대들의 고집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시민들은 경찰이 나와 질서회복에 힘써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월간조선, 1985. 7)
11:48
- 봉쇄선 작전지침 하달
무기류 든 폭도의 봉쇄선 이탈 절대 거부
폭도 중 반항하지 않는 자 체포, 반항자 사살
차량을 이용 강습시도시는 사살
현봉쇄망은 주도로만 치중치 말고 지선도로도 장악, 폭도 탈출 적극 방지. (말 , 1988. 8)
11:50 계엄군 생포
- 47,48세쯤 보이는 대머리 남자가 도청 광장에서 간첩용의자로 학생들에 의해 연행.
- 민간인으로 위장한 공수대원 2명 체포.
* "배고픈다리에서 수상한 청년 1명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 앞을 태연히 통과하려 했다. 나는 그가 우리 앞을 지나려는 찰나 그를 나꿔채고 총을 들이댔다. 그러는 사이 계곡에서 황급히 도망가는 군인이 있었다. 우리와 70-80미터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쫓아가 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M2 자동소총을 갈겨대며 공중사격을 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도망가지 못하고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몇명의 대원들이 그를 잡아왔다. 그들의 사복을 벗겨보니 군번이 나왔고, 속옷은 군용 포대 팬티를 입고 있었다. 틀림없이 민간인을 가장하여 염탐하러 온 공수부대였다. 그들을 붙잡은 우리는 천천히 조사를 했다.
'너희 아지트가 어디냐?'
'지원동으로 모두 넘어갔고 우리 둘만 남았습니다.'
'그럼 너희 장비는 어디에 있느냐?'
'태봉마을 철탑 밑에 있습니다.'
대원들이 그곳으로 가서 그들의 장비를 모두 가지고 왔다. 배낭, 신발, 총, 낙하산, 건빵 등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포승줄로 묶었다. 주위에 모여 있던 시민들과 다른 대원들 80-90퍼센트가 그들을 죽여버리자고 했다. 총을 겨누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놈들도 잔인한 군인이지만 우리 동포니 죽이지는 말자'고 설득했다. 그때 마침 도청에서 순찰대원 2명이 지프차를 타고 왔다. 나는 군인들을 장비와 함께 그들에게 넘겼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11:53
- 1백여 명의 중고생들이 거리 청소를 한 후 질서회복을 외치며 금남로 행진.
11:55
- 부대이동 지시, 광주지역 소요진압을 위해 3군 예하의 33사단 101연대 2대대 25/447명을 14:00 성남 K-16기지를 출발 광주에 투입. 11:45 부대 출발, 12:25 K-16 도착. 13:24 이 작전은 취소되어 16:00에 부대 복귀. (육본 상황일지)
12:00
- 12시 현재 8백여 정 총기를 회수, 차량통제반은 시위군중들이 몰고 다니는 버스, 장갑, 페퍼포그차 등에 대해 함부로 못 몰고 다니도록 단속하고 있어 무질서한 차량통행은 통제됨. (월간조선, 1985. 7)
* "나는 김원갑과 함께 차량통제를 완벽하게 하기로 결심하고 도청 사무실 앞 에서 모든 차량은 등록을 하도록 지시했다. 차량기사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증'을 발급해 줄 테니까 '증'을 소지한 자만 차를 탈 수 있다고 공고하고 차량번호를 매기면서 등록을 하지 않는 차는 모두 수거했다. 모든 것이 거의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확한 지도부의 부재 속에서 나 혼자 일을 추진한 데다 더군다나 상황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어서 도청 안의 통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도청에서 밖으로 나와 녹두서점으로 가보니 그곳에서는 팀을 구성하여 시민궐기대회준비를 하느라고 부산했다. 이곳에는 박효선, 오재일, 윤강옥, 윤상원 등이 있었다. 나는 다시 도청 안으로 들어와 마이크를 설치하고 이들에게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도청 안의 지도부 청년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분위기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오전부터 1층 상황실의 맞은편 사무실에서는 조사부라는 쪽지를 붙여놓고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민군들이 잡아온 수상한 자, 총기를 들고 시민들을 이유없이 위협하는 자, 물건을 훔치다 잡혀온 사람들을 심문하기 위해 조사부를 설치했다." (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 새벽 5시부터 도청 앞 광장에 시민들이 몰리기 시작, 현재 약 7만-8만 명이 운집해서 도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들의 회의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수습대책위원회들은 오전 10시부터 도지사실에서 회의중에 있고 위원은 30명(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늘렸고 독립투사 최한영 씨를 위원장으로 뽑았다. 수습위원들은 22일 계엄사와 합의한 7개항의 내용을 문안으로 작성해서 마이크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이를 공지하기로 하고, 학생들에 대해서도 설득을 계속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내무국장실 옆방에서는 학생대표들이 회의를 열고 있으며, 대표들 중 온건파는 수습대책위의 의견을 따르자는데, 한편 강경파는 계엄령 철폐 등 기본적 문제가 관철될 때까지는 끝까지 투쟁하자고 주장해 의견일치를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어서 사태수습은 난항. 그러나 강온을 막론하고 광주시내 질서회복을 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어 대학생 7백-8백 명(여대생 50여 명 포함)이 23일 12시 현재 하얀 헝겊에 '대학생'이란 완장을 두르고 질서회복에 나서고 있다. 이들 학생들은 '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은 대책위의 합의를 받아들여서 사태를 수습하자는 것이 아니냐?'는 우리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오산이다. 군 부대에서 연행학생 70명을 석방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무기를 회수하여 반환할것 을 대책위를 통해서 요청했지만 석방한다고 해도 다시 잡아갈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우리는 계속 투쟁할 것이다'고 했다. 학생들은 총기를 회수하여 이를 반납치 않고 시민들로부터 회수한 총기를 학생들만 갖고 학생들이 치안을 맡아 자체경계를 맡겠다는 움직임이 크다.
- 중심지역 주민 대부분, 변두리나 시외지역으로 피난.
- 광주시내 생필품 동나 이웃에서 꾸어서 생활.
-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에서 국군통합병원으로 가는 길목에 탱크 2대를 앞세우고 계엄군과 5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 무장시민 3백여 명이 대치. 이 지점을 시민, 학생들은 제2의 판문점이라고 부르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12:30
- 군부대, 광주변전소 병력투입. 1/44(방위병 40명). (전교사 작전일지)
-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대학생연합회와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 주최로 시민 학생 3만여 명이 모여 목포시민 민주화궐기대회를 열어 '김대중 석방', '계엄해제'등의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며 1시간 동안 성토대회. 시가행진에 돌입. (월간조선, 1985.7)
12:35
- 전교사, 해안경계 강화 지시
해안 경계 강화 지시 : 훈련단장
무기, 탄약 피탈 방지
탄약고 경계 강화 (말, 1988. 8)
- 화순 (?)량리에서 청룡면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버스 3대 발견, 1대는 전복되고 2대는 도로상에 방치한 후 폭도 서성거림. (계엄사 상황일지)
13:00 계엄사 연행학생 34명 석방
- 회수된 총기 2백 정을 장휴동, 김창길 씨가 계엄사를 찾아 반납한 후 연행했던 34명의 신병을 인수해 오자 수습위는 '무조건 무기반납' 측과 '조건부 무기반납' 측으로 갈라져 갈등이 표면화됨. (신동아, 1985. 10)
- 도청내에서 무기관리담당 허규정 등이 회수하여 놓은 카빈 소총 및 M1 2천여 정 가운데 일부인 1백여 정을 시민대표 장휴동 등과 함께 김창길이 계엄분소에 반납한 후 5.18사태로 구금되었던 사람 34명의 신병을 인수해 왔다는 전갈을 김창길로부터 김종배는 전해 듣고, '지금 이 시점에서 무조건 무기반납을 하는 것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 시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주장하는 정부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하며,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가 정당하게 보상되고 사망자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해주는 정부당국의 양해가 있어야만 한다'라는 결의를 표명 (공소장)
13:30
-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 의원 8명과 오찬/광주사태의 원인 등에 대한 의견 청취,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자리에서 카터 행정부는 최근 한국사태를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보다 더 중시하고 있으며 한국방위에 대한 미국정부의 단호한 결의를 모종의 통로를 통해 북한측에 전했다고 밝혔다. 또 광주사태가 해결되면 정치일정이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5. 24)
오후 계엄사령부, 광주지역에 투입된 계엄군의 행동조치 결과 발표
- 계엄사령부는 23일 오후 광주사태 발생 후 광주지역 일원에 투입된 계엄군의 행동조치 결과를 발표했다. 이 발표에서 계엄군은 '시민들이 점차 시위군중에 합세하고 난폭화되기 시작해 계엄군 병력을 증원, 주요시설의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난폭시위자는 연행 조사했다'고 밝히고 군중시위가 과열되자 계엄군은 외곽지대로 철수, 교도소 등 주요시설을 경비하면서 '난동자들이 총격을 가하더라도 발포를 억제하고 전단 등을 활용한 선무활동을 전개해 왔다'고 밝혔다. 이 발표문은 또 '계엄군은 사태의 급격한 악화에 대비하여 국민의 생명과 출동병력 및 주요시설의 보호가 위태롭게 될 때에 한하여 불가피하게 자위권을 행사할 것을 천명'했다고 밝히고 '군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자위권을 발동해야 할 불행한 사태가 오지 않도록 전국민이 공동노력을 경주하자'고 호소했다. (동아일보, 5. 24)
13:55
- 도청 앞 광장 1천 명 운집. 유족들을 도청 안으로 입장시키고 있음. (도청 앞 59구의 시체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14:00 주남마을 양민학살, 18명 사망
- 오후 2시경 시민과 학생 18명을 태운 버스가 주남부락 쪽으로 6백50미터 전방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차 안의 학생 5명은 카빈 소총을 들고 있었다. 주남부락 뒤에 매복해 있던 공수들이 10여 분 동안 M16으로 집중사격을 가했다. 15명이 버스 안에서 즉사했다. 당시 춘태여고 1년생 홍금숙과 청년 2명이 온몸에 피를 흘린 채 끌려나왔다. 한 청년은 눈알이 빠져나왔다. 공수들이 3명을 경운기에 싣고 가다 길이 좁아지자 청년들을 포승줄에 묶어 리어커에 싣고 홍금숙은 걷게 하여 여단본부 쪽으로 데리고 갔다. 무전연락을 받고 온 소령이 청년을 처치하라는 고개짓을 하자 벌집이 된 버스 앞에 청년들을 세우고 중사가 청년의 머리에 M16 3발씩을 쏘자 사망했다. (한계레신문, 1888. 5. 20)
* "여학생 4명을 포함하여 18명이 탄 미니버스가 주남마을 주변에 포진해 있던 공수의 집단발포로 15명이 즉석에서 사망했다고 했다. 내 동생 현숙이도 그때 사망했다." (구술 : 박현옥, 현사연 조사)
* "25인승 미니버스에 18명이 타고 지원동을 막 벗어났을 때였다. 군인 1명이 도로변에서 정지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차를 멈추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속력을 내어 달렸다.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차를 향해 총탄이 쏟아졌다. 누군가 차를 돌리라고 소리쳤다. 기사는 차를 돌리려다 총에 맞아 쓰러졌다. 차에 탔던 청년들도 산을 향해 응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욱 많은 총탄이 쏟아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한 청년들이 총을 높이 들고 항복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총탄세례는 멈추지 않았다. 내장이 터져 차 바닥에 쏟아진 사람, 총에 맞아 아우성치는 비명소리, 총알이 차에 부딪히는 소리 등으로 차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 나는 총알이 직접 맞지는 않았지만 온몸에 파편이 박혔다.
서너 명의 군인이 차 안으로 올라와 군화발로 툭툭 차면서 생사여부를 확인했다. 눈을 다친 남자 1명과 상처가 심한 교련복 차림의 청년, 그리고 나, 3명만 살아있었다. 우리는 간단한 응급치료를 받고 경운기에 실려 산속으로 옮겨졌다.
산에는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잠시 후 높은 사람이 와서 '귀찮게 왜 데려왔냐? 사살해!'라고 명령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두 남자를 손수레에 싣고 갔고 나는 군인 1명의 감시를 받았다. 나는 한참 후 헬기에 실려 송정리 비행장으로 실려갔다." (구술 : 홍금숙, 현사연 조사)
- 수습위원 10명(이종기), 무기 1백 정 지참하고 계엄분소 방문. (전교사 작전 일지)
* "시민들로부터 회수한 무기를 계엄사에 반납하러 가는데 운전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영업용 택시기사였던 내가 지원했다. 내가 운전한 지프차에 최한영, 김창길 외 1명이 탔고 트럭에는 무기를 싣고 계엄사를 향해 갔다. 화정동 잿등 부근에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시민대표가 계엄사로 협상하러 간다'고 하자 여기서부터는 차가 다닐 수 없으니 걸어서 가라고 했다.
시민대표들이 계엄사로 간 후 나는 차를 정차시켜 놓은 채 기다렸다. 잿등에 모인 시민들과 계엄군이 말싸움을 하면서 '광주로 재진입하려면 나를 죽이고 가라'고 길바닥에 누워 악을 쓰는 시민도 있었다. 몇 시간 후 계엄사로 갔던 시민대표들이 왔다.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협상결과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얼굴 표정이 밝지 않은 걸로 보아 협상이 결렬되었던 것 같다." (구술 : 정영동 , 현사연 조사)
14:10
- 영암읍에서 시민군에게 실탄 지급
* "우리는 영암읍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광주 방면으로 올라가는 시민군의 차마다 실탄을 한 상자씩 나눠주었다. 우리는 1시간 동안 10상자 정도의 실탄을 나눠주었다." (구술 : 박재택 외 5명, 현사연 조사)
15:00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 궐기대회가 끝나고 집결한 2백여 명의 대학생과 '들불야학' 학생들 10여 명이 YWCA에서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 기획부, 궐기대회조, 홍보 및 가두방송조, 대자보조로 편성. 기획부는 정상용, 이양현, 윤상원, 윤강옥. 홍보 및 가두방송조는 박용준(들불야학, 27일 새벽 YWCA 2층에서 피살) 등으로 구성. (현사연 조사 종합)
- 장례준비를 위한 즉석 모금운동을 벌여 1백여만 원이 수습대책위에 전달됨.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모여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모인 시민들에게 모금을 했다. 시민들이 낸 돈으로 양동시장에서 광목천을 사서 수의를 짓고 즉석에서 플래카드를 써서 거리에 붙이기도 했다." (구술 : 김결, 현사연 조사)
* "오후 3시 제1차 범시민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궐기대회 식순은 희생자에 대한 묵념, 애국가, 수습위의 공지사항 전달, 민주주의 만세 삼창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날은 노동자, 농민, 시민, 학생 등 각계각층 대표의 성명서 발표가 있었다. 그때 사회를 보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함성과 함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궐기대회가 시작되자 도청 앞 광장 상공에 헬기가 나타나 전단을 살포했다. 궐기대회를 마치면서 내일은 보다 효과적인 집회를 위해 '전두환 화형식'을 하기로 했다." (구술 : 김태종, 현사연 조사)
15:00 지원동 버스 종점에서 총격전
* "지원동 버스 종점에서 계엄군 3명이 버스 밑에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총소리를 듣고 그 부근에 배치된 우리 대원들이 순식간에 모였다. 지원동다리와 건물 옥상 등 사격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서 응사했다. 계엄군과의 거리는 약 4백-5백 미터 정도였다. 나는 신축공사중인 영락교회 현관에 엎드려 사격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실탄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지원동다리로 가서 실탄 1백50발 정도를 가져와 전봇대에 몸을 숨기고 사격자세를 취했다. 계엄군이 또다시 집중사격을 가하자 나 역시 총을 쏘고 있는데, 옆에 있던 20세 가량의 대원이 고꾸라졌다. 그는 허벅지에 총을 맞았다. 그 청년의 허리를 잡고 기어서 옆 건물로 갔다.
이것을 본 우리 대원이 달려오다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뒤쪽을 향해 차를 보내달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지프차 1대가 후진해 왔다. 다시 총알이 핑핑 날아왔다. 계엄군이 지프차를 향해 집중사격을 한 것이다. 운전석 옆에 있던 대원이 다리를 부상당해 쓰러지자 운전수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몸을 피했다. 나는 부상당한 대원을 이끌고 기어서 지원동다리까지 왔다. 그곳에 있던 소대장이 부상자를 차에 실어 병원으로 보냈다.
나는 소대장과 함께 남국민학교 옥상으로 갔다. 거기서는 지원동 버스 종점에 있는 계엄군이 훤히 보였다. 그들도 총에 맞았는지 4,5명의 계엄군이 부상병을 업고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이 도망가자 한 시간여에 걸친 전투를 끝냈다." (구술 : 안성옥, 현사연 조사)
- 계엄사가 '경고문'이라는 붉은 글씨의 전단을 광주시 전역에 살포.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광주 소태동 폭도 50명, 버스 1대 타고 군부대 기습 시도. 11공수 반격 소탕, 생포 3명, 부상 2명, 사살 17명. (전교사 작전일지)
- 사망자수는 오후 3시 현재 우리 기자 확인 121명에다가 조남준 기자가 통합병원에서 4명의 사망자 확인해 총 125명이 확인됨. (월간조선, 1985.7)
- 목포. 학생, 청년 중심의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 집행부 결성. 집행부장 박상규(21세, 목포공전 2년), 총무부장 황인갑(한신대 3년) 선출. (현사연 조사 종합)
* "매형과 함께 밖에 나왔다가 헤어지고 혼자서 무등중학교 부근을 걸어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갑자기 주유소(무슨 주유소인지 기억나지 않으나 무등중학교 부근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음) 앞에서 총소리가 났다. 나는 무조건 뛰었다. '쏴버려!'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때 나는 왼쪽 옆구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푹 고꾸라졌다. 연탄가게 대문을 두드리자 학생 2명이 나왔다. 그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가는데 계속 총알이 날아들었다. 그 집 방으로 들어가 간신히 누웠다. 목이 엄청나게 타기 시작했다. 물 좀 달라고 사정했지만 주지 않았다. 잠시 후에 공수 1명이 그 집으로 들어와 방 안으로 총을 들이대고 쏘려고 하는데 주인이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자 그냥 가버렸다." (구술 : 김삼중, 현사연 조사)
피난가는 시민을 향해 난사.
* "광주시내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었기 때문에 집배원이었던 나는 23일 출근을 하지 않았다. 지난밤 끊이지 않고 계속된 총성에 불안을 느낀 나는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오전에 짐을 정리하여 오후 3,4시경 화순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이 듬성듬성 걷고 있었다. 우리가 논길을 따라 녹동마을(지원동)을 막 지날 때였다. 난데없는 총소리가 콩볶듯이 요란했다. 잽싸게 주위를 살펴보니 광주-화순간 도로변에서 계엄군들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1개 소대 병력 정도가 2줄로 서서 앞줄은 '엎드려 쏴', 뒷줄은 '서서쏴' 자세로 갈겨대고 있었다. 나는 주변 민가를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총알이 내 주위를 핑핑 스쳐갔다. 한참을 뛰어가다 신발이 벗겨지자 나는 그 자리에 섰다. 아니, 내 신발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야 나는 위아래를 살펴 봤다. 오른쪽과 왼쪽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이미 옷을 빨갛게 적셔놨다. 언제 총에 맞았는지조차 모르는 사이 양쪽 대퇴부를 관통했던 것이다." (구술 : 김동식, 현사연 조사)
- 무등산 중계소: 20사 1개 소대 배치(1/40)
비아송신소: 기교 14/255
시월산 탄약고: 포교 1/40(말, 1988. 8)
- 영암 시종지서 뒷산에 매장된 M1 소총 20여 정을 획득하고 광주시내 투쟁 지원을 위해 수차례 진입 시도하였으나 외곽을 뚫지 못함. (현사연 조사 종합)
학운동 자위대 무기반납
* "도청에서 순찰차가 와 무기를 회수한다고 했다. 우리는 무기를 회수할 의향이 없었는데 그들은 간곡히 사정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대원의 절반가량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제2의 생명인 총기를 반납하면 우리에게 죽음뿐이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특히 김춘국 등이 심하게 반발했다. 대원들의 의견통일이 되지 않자 순찰대에게 다음에 오라고 했다. 나는 그사이 대원들을 설득하고 타협한 후 두시간 후에 그들이 다시 오자 총기를 전부 반납했다. 이렇게 해서 학운동 지역방위대가 해체되었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
17:00
- 도청 무장폭도들이 회수된 무기 재지급하여 무장 '정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강경화.
- 저녁 무렵 광주 진입로 지원동 부근에서 계엄군과 또다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군은 무자비하게도 헬기로 기총소사까지 감행해 무수한 희생자가 생겼다. 한편 5월 18일부터 시내 일원에 계속 살포되었던 '투사회보'가 이날로 제 6호가 배포되었다. 이는 허위날조된 당국의 기만보도에 분노하여 허수아비 언론을 규탄하고 광주사태의 진상을 밝힌다는 취지하에 8호부터는 그 명칭이 '광주시민회보'로 바뀌어 광주시민투쟁협의회 명의로 26일까지 발간되었다. 이 외에도 4,5종의 유인물이 계속 나와 시민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투쟁을 고취시켰다. 신문, 방송 등 모든 언론, 외부와 차단된 시민들은 이 신문에 호응이 컸으며 자신들이 배포해 주겠다며 더 달라는 시민들도 많았다.
이날 밤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이 화순탄광에 근무하는 화약 전문가라고 소개해 도청으로 들어온 계엄군 요원이 도청에서 최후 순간 자폭을 위해 보관중이던 뇌관을 제거해 버렸다. 또 이날 밤 수습위는 1층에서 회수된 총기 2천5백여 정을 포함, 상당량의 탄약을 도청에서 회수하였다.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장흥. 버스 3대와 트럭 3대에 분승한 시위대는 '김대중 석방하라', '살려내라, 내 형제'라는 구호 외치며 장흥읍 일대 차량 가두시위.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트럭 한 대에 장치한 확성기로 광주 현지소식 알림. 장흥고교생 중심의 4백여 명의 시위대가 이들을 환영, 관산면의 버스 한 대와 합류.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장흥읍내를 돌며 차량시위를 하던 우리는 면단위 지역으로 가서 광주의 시위 상황을 알리기 위해 차를 몰고 안양-용산-관산면 등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주민들이 대환영을 하면서 음료수, 음식 등을 차에 올려줬다. 관산면 청년들과 함께 버스 2대를 대동하고 해질 무렵 장흥읍으로 왔다. 시위를 마무리짓고 해산하려는데 장흥고등학생들과 청년 2백-3백 명이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그곳으로 왔다. 청년, 학생들이 대열을 이끌고 읍내를 돌며 시위를 하다 어른들의 당부로 해산했다." (구술 : 김영기, 현사연 조사)
21:00
- 목포역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갖고 시내 남녀 중. 고. 대학생, 시민 5만여 명이 횃불시위를 벌였다. 여고생 2백여 명이 횃불을 들고 대열 중간에 서고 남녀학생과 시민이 좌우로 선 횃불대열은 시내 20킬로미터를 보행 시위하면서 구호를 외침. (월간조선, 1985 .7)
- 나주,영산포. 시위대 중 일부는 23일까지 나주, 영산포, 강진군 성전면, 해남군 옥천면 등을 왕래하며 각 지역에서 참가한 농촌청년들(이들은 대부분 대도시에서 잡노동, 행상 등을 하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농사짓던 잠재실업군층)과 함께 광주지역 투쟁지원을 위해 여러 번 외곽지역 돌파를 시도하다가 많은 사상자를 냄. 이들은 광주 진입이 봉쇄되자 23일까지 계속 각 지방과 연결 시위를 주도했으나 헬기 정찰과 계엄군에 의해 거의 모두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체포됨.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무등산 경계병력 투입. (전교사 상황일지)
21:30
- 아세아자동차, 폭도 6명 침입, 장갑차 1대 탈취. (전교사 작전일지)
22:10
- 광주시내 금남로, 백운동, 서방, 광천동, 산수동 등 시내 일원, 목포, 나주 등 도내 일원에서 시위 계속. (전교사 작전일지)
22:40
- 목포. 횃불시위 후 철야농성. 자체경비대 조직하여 시외곽 및 시내 순찰. (1980년대 민주화운동)
23일 도청 상황
* "23일부터 임시학생수습위는 실질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제일 시급한 것이 총기 회수였다. 조비오 신부님이 시내와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총기를 회수해 왔다. 회수된 총을 도청 상황실에 쌓아놓았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 시체의 처리 문제였다. 시체처리반에 일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고생이 많았다. 이들은 궂은 일을 마다 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전남대 부속병원과 조선대 부속병원을 돌아다니며 신원이 파악된 시체는 입관시 고 신원파악이 되지 않는 시신은 지장을 찍어놓았다. 또 공수들이 21일 퇴각하면서 시체를 암매장한 장소를 찾아서 시체를 파오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도청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 시체에 비해 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합판으로 관을 만들어 입관시켰다.
치안유지를 위해 조직된 순찰대에게는 나름대로의 특권이 주어졌다. 총도 가장 좋은 것으로 지급하고 일반인과의 구별을 쉽게 하기 위해 도청에 있던 전경복장을 지급했다. 이들은 주택가와 외곽지역을 순찰하고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했다.
지프차를 25대만 남기고 그외 차량은 통제했다. 도청에 주둔한 시민군의 식사는 여학생과 아줌마들이 맡아서 해줬다. 또 시민들이 집에서 가져온 주먹밥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23일 계엄사에서 회수된 총기를 반납할 것을 요구하자 우리는 3개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광주사태는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한 광주시민의 항거임을 인정할 것.
2.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하고 부상자, 사망자의 피해를 보상할 것.
3. 구속자를 전원 석방할 것 등이었다.
그들은 총기를 반납하면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조비오 신부와 김창길이 총기 5백여 정을 반납했다. 그러자 몇 명의 연행자를 석방시켰다. (구술 : 정해민, 현사연 조사)
24일 새벽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며 무기 회수
* "두번째 수습협상을 위해 상무대 계엄분소에 갔을 때, 부사령관인 김기석 장군이 수습위원들에게 말하였다. '무장헬기와 탱크가 준비되어 있어서 광주를 진압하려 한다면 며칠 안에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명살상을 하지 않으려고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무기를 빨리 회수하여 반납해 달라'는 요지였다. 수습위원들은 '시민들을 지휘 통솔할 권한이 없으나 계엄사측에서 확실한 보장만 해준다면 목숨을 걸고 무기 회수를 하겠다'는 결의를 보였지만 계엄사의 태도는 무기반납만을 요구하는 냉랭한 고자세였다. 협상장소에 갔을 때 상무대 넓은 뜰에서 발진되고 있는 헬리콥터를 보면서 살벌한 분위기에 공포를 느꼈다. 어떤 형태로든 계엄군을 설득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 답답하고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피해를 당했지만 차라리 시민들을 설득하여 무력충돌을 피하는 마지막 가능성을 찾아볼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때부터 무기 회수 작업에 전력했다." (구술 : 조철현(비오), 현사연 조사)
03:00
- 조비오 신부 등 수습위원 4명은 무기 회수를 위해 외곽지역 방문(산수동, 학운동 다리, 계림동, 백운동 철길, 서방, 무등경기장, 화정동 공단 입구 등).
08:00 광주시내 생필품 품절
- KBS 라디오 방송 복구.
- 무장한 학생들이 도청 출입을 통제. 통행증 소지자만 통행 허용.
- 광주시내 쌀, 채소가게 등에 생필품 품절.
- 무기 자진반납 시한 08:00에서 12:00로 연장. (월간조선, 1985. 7)
- 아침부터 시내 곳곳에 대자보, 사진, 플래카드 등이 나붙기 시작. 특히 수습위의 자세를 비난하는 대자보 붙음.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목포시 선무활동, 시내 조기청소(방위병), 교통통제소 운용(10개소 : 예비군 30, 경찰 20, 육군 5/23, 해군 1/15, 차량 7대), 09:00까지. (계엄사 상황일지)
- 광주 시가지에 시민학생수습대책위와 계엄군의 협상내용 인쇄한 유인물 살포.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며, 연행자 9백27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으며, 보상계획 수립과 치료대책 완비, 사실보도에 대한 노력, 폭도나 불순분자라는 용어사용 중지, 비무장 민간인의 시외통행, 사태수습 후 보복금지 약속' 등의 내용. (신동아, 1985. 10)
09:00 충정작전을 위한 부대배치
- 24일-26일 시가지 작전투입을 위한 부대배치 (전교사 작전지시 80-8호. 5월 23일).
- 광주시 상황. 공단 입구 20여 명 경계, 백운동 일대 4명이 검문과 연락임무 수행, 차량행렬 현저히 감소, 영업행위 확대, 시내 정돈된 상태. (계엄사 상황일지)
- 목포. 헌병대 차량이 순찰하며 시민 위협, 시민 침묵으로 응대하자 도주. (1980년대 민주화운동)
09:10
- 증심사 입구 다리에 폭약 설치. (계엄사 상황일지)
09:15
- 조선대 뒷산에 공용화기 설치. (전교사 작전일지)
09:20
- 수습대책위원 및 학생수습대책위원회 합동 명의로 전단 살포. 질서유지, 총기, TNT 회수, 금남로 청소 등의 내용.
- 무기 3천여 정 회수하여 도청에 보관. (계엄사 상황일지)
- 계엄분소장은 이날 오전, 전날 오후 6시 개통된 광주 KBS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 '무기 소지자 중 광주시내 거주자는 국군통합병원에 반납토록 하고 기타 지역은 군부대와 경찰서에 반납하라'는 내용. 이 담화는 계속 '무기를 반납하면 일체 불문에 부치겠으며 만약 시한까지 반납하지 않아 중대결심을 하는 괴로움을 없게 하도록 해달라'는 것. 대부분의 시민들도 무기반납을 원했으며 시위대들은 전일빌딩에 '무기회수반'을 설치. (월간조선, 1985. 7)
09:25 학동 대치지역에서 총격
- 화순 쪽으로 통하는 학동의 대치지역에 시민을 설득하여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갔다.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대치점 중간지역에 사망한 시민 1명이 죽어 있었다. 대치선을 건너가다 총에 맞은 것이다. 계속되는 계엄군의 총격 때문에 시체도 끌어올 수 없었다." (월간조선, 1985. 7 조철현 증언)
09:30
- 광주경찰서, 총원 3백91명 중 64명 집결, 서장 인솔하 대기. (계엄사 상황일지)
10:00
- 목포. '제3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 개최, 각 학교별, 동별 등 단체로 모여듦. 시민들은 대회장에서 '김대중 석방하라'는 혈서를 씀. 군 헬기가 '폭도들은 자중하고 시민들은 흥분하지 말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며 선무방송. 광주시민 영령을 위한 분향소 설치. '경찰, 공무원은 정상근무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경찰은 시내에 나오지 말 것, 교통경찰만 시내버스 운행을 도와줄 것'을 행정당국에 요청. (1980년대 민주화운동)
- 학생대표들이 시민대표에게 지금까지 회수한 총기 3천여 정을 인계하고 시민 대표는 이를 군에 전달하기로 일차 합의. 그러나 학생대표간에 이견이 있어 아직 인계하지 못하는 실정. 현재 학생, 시민이 갖고 있는 무기는 4천여 정이고 이미 회수된 무기는 도청에 보관. 무기반납을 거부하는 학생과 시민들은 절대로 무기를 반납하면 안된다, 무기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저항하느냐며 반발. (월간조선, 1985. 7)
- 목포역 광장에 학생 3백여 명이 서성거리며 시가행진 예상. (계엄사 상황일지)
11:00
-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갖기로 했는데 의견들이 서로 엇갈려 열지 못하고 있음. 23일까지 도청 앞 대형 스피커를 통해 상황을 알려주는 방송도 24일에는 중단. 학생,시민들은 거리에서 발견한 시체 45구를 도청 앞으로 옮겨놓았고 도청 국기 게양대에는 조기가 게양됨.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치안유지반원들을 동원, 차를 타고 다니면서 총기 소지자들에게 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반발 극심. 시내치안은 학생들이 맡고 있는데 어젯밤 학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 통행증 소지자에게만 통과 허용, 차량들도 3백여 대에 일련번호를 붙여 번호부착 차량만 운행토록 허가하고, 기타는 압류해서 도청 앞에 세워두었음. 도청, 시청 등 관공서에는 총을 든 학생이 경비를 서서 학생들이 발급한 '비'자 도장 찍힌 출입증 소지자만 통과시키고 있음. 학생들은 청년회의소, 라이온스 클럽, 여성단체 등 민간단체들과 예비군요원이 함께 치안유지에 나서자고 권고중. (월간조선, 1985. 7)
11:10
- 군사령부, 병참선 개통 지시 접수(광주 - 장성간). (말, 1988. 8)
11:20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무기 회수 작업
- 시민대책위원인 신부, 변호사, 목사 등이 화정동에서 무기를 휴대하고 군과 대치중이던 시민군 38명과 지원동에서 13명 등을 도청으로 데리고 와 울면서 설득. 1시간 만에 무장해제시키는데 성공. 그러나 화정동 등 시외로 빠지는 6개 외곽도로에서는 아직도 일부가 무장, 대치하고 있다. 특히 화정동 공단 입구에서는 인근 서광제재소에서 옮겨온 대형 원목 1백여 개와 버스, 트럭, 지프차 등으로 바리케이드 치고 20여 무장대원이 지키고 있다. 4백여 시민들이 현장에 운집해 있으며 대원들은 신분 확인 후 시내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시민을 통과시키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 1만여 시민 시체확인차 상무관에 운집. 학생들은 어깨띠를 두르고 안내중. (계엄사 상황일지)
낮
- 광주시내 표정은 표면상 평온한 가운데 군데군데 시민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고, 일부 상가는 문을 열고 영업중. 거리는 23일부터 시작된 청소작업으로 많이 깨끗해졌다. 노동청 사무소 앞에는 지난 20일 밤에 불에 탄 차량 7대가 아직 뒤집힌 채 있음. 시체가 안치된 상무관에는 유족들이 찾아와 울부짖고 있고, 학생일부가 내일(25일) 시민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타협이 안 되고 있는 형편. 도당국은 장례방침이 결정되면 시설 등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아직 미결. (월간조선, 1985. 7)
시체 3구 암매장한 계엄군 무전교신 도청
* "점심 무렵 도청 숙직실로 갔다. 거기에 무전기가 있어 주파수를 맞춰보니 계엄군의 교신이 들렸다.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3명을 사살했다.'
'거기가 어디냐?'
'고등학교를 짓고 있는 산중턱이다.'
고등학생을 죽였다는 계엄군의 교신내용을 듣고 나도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사람을 왜 죽였소?'
'그들이 총을 갖고 있었다.'
'장소가 어디오?'
'산밑에 신축공사를 하고 있는 학교다.'
'시체는 어떻게 했소?'
'부근에 땅을 파고 묻었다.'
이말을 끝으로 계엄군의 무전이 끊겼다." (구술 : 김용균, 현사연 조사)
12:00
- 낮 12시가 지나면서 사태수습은 급진전, 총을 들고 도청을 경비하던 학생들이 총기를 회수반에 내주었고, 학생, 시민들이 착용하고 있는 헬멧, 방석복 등 군경복장 및 장비도 '폭도로 오인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하여 반납.
- 중심가 일부 사무실 직원 출근. 음식점, 다방 등도 영업 시작.
- 광주역 직원들 출근, 역장은 전화선 연결하여 외부와 통화.
- 광주시장을 비롯 전직원 출근, 영세민대책과 피해복구에 부심.
- 시내 각 병원은 이날부터 산소와 의약품이 부족하여 전남의사회에서 대한의사협회와 적십자사에 이를 요청. (월간조선, 1985. 7)
- 목포. 역전 광장에 시내 고등학생 2천여 명 집결,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치며 질서정연하게 17:45까지 시위. 익일 14:00 목포역전에 재집결키로 하고 전원 귀가. (계엄사 상황일지)
12:30
- 공수 3여단, 20사단 62연대에 교도소 방호 임무 인계. (특전사 전투상보)
12:45
- 호남선 열차 연장운행. 서울-이리구간에서 서울-송정리로 연장. 첫 열차 송정리 도착. 현재까지 열차운행이 중단되어 있는 구간은 순천-광주, 광주-목포간.
13:00 계엄사 무기반납 시한을 오후 6시로 연장
- 시체 45구가 안치돼 있는 상무관에는 유족이 흐느끼는 속에 일반 조객이 2백여 미터나 줄지어 기다리며 분향.
- 학생들, 전남일보 빌딩과 도청에 무기회수반 설치. 군당국이 밝힌 총기 4천 3백여 정 중 3천여 정 회수(24일 오후 1시 현재). M1, 카빈 등은 많이 회수되고 있으나, 권총 40여 정과 TNT 1백 개, 폭약 4상자는 거의 회수되지 않고 있음. 시가는 평온한 속에 시민들 도청 주변에 모여 학생들이 뿌리는 전단을 읽거나 마이크에 귀기울이던 한 시민, '이젠 무엇보다도 질서회복이 문제다. 빨리 총기를 회수해서 정상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느냐', 다른 한 시민, '정부에서 이번 사태 유발했다.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떻게 수습이 되겠느냐'는 회의론도. (월간조선, 1985. 7)
- 대책위는 도청 2층에 1천명분을 공급할 수 있는 취사시설을 갖추고 학생 등에게 식사를 제공.
- 현재 광주시내에는 2개의 대표위원회, 즉 시민들로 구성된 5.18수습광주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최한영), 학생수습위원회(위원장 김창길, 전남대 농경과 3년)가 있다. 시민대책위원회는 30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날마다 위원이 바뀌고 영향력도 크지 않다. 이 위원들은 23일 오후 3시에 대표 8명을 계엄분소에 보내 7개항 합의하고 7시에 돌아왔다. 학생수습위는 오후 1시쯤 7개 요구사항을 초안, 민간 수습위와 협의하고 있는데, 민간수습위원 대부분이 더 강경한 내용으로 하자고 제의, 난항을 겪기도.
학생위원회는 강. 온으로 2원화. 온건파는 무기 회수 반납, 강경파는 무기 반납하면 반항할 수 없다고. 군과 대치하고 도청을 지키는 측이 강경파, 온건파는 거리 청소, 질서회복 호소. 학생 온건파가 학생대책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는데, 이들의 입장은 우선 당국에서 광주시민, 학생들을 폭도로 몰아붙이고 있고, 이 같은 원인은 학생, 시민들이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기를 회수, 군당국에 인계, 오명을 씻고 질서를 일단 회복시키자. 그다음에 처음에 주장했던 정치적인 이념을 관철하기 위해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자고 했으나 학생과 청년들은 무장시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 24일 현재 일부 고교생, 과격시민들이 회수무기를 보관하고 있는 도청에 찾아와 총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이를 학생들은 간신히 제지하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 남동성당에서 김성용, 홍남순, 명노근, 송기숙, 이기홍, 조철현, 장두석, 조아라, 이애신, 오병문, 김천배 등이 김성용의 주재로 회합, 이들이 별도 수습위원회를 만들 것이냐, 아니면 도청 수습위원회를 밀고 들어갈 것이냐를 논의한 끝에 도청 수습위원회에 합류하기로 합의하고 이날 오전 11시경 YWCA에서 이미 합의한 '김대중 석방, 계엄해제, 정치일정 단축하고 명확히 밝혀라'는 주장을 재확인하고 이들과 합심하여 이를 관철할 때까지 같이 투쟁하기로 결의. (공소장)
13:30
- 11공수, 주남마을 출발, 차량 2 1/2톤 45대 철수개시. (특전사 전투상보)
14:00 군부대 이동
- 군 이동. 20사단 60연대: 기동예비군 대기, 14:00 송정리에서 상무대로 이동 .
- 효천역 전방 1킬로 지점, 11공수와 보병학교 병력 오인사격으로 특전사 : 사망 9명, 부상 27명(미확인)
민간인: 부상 6명
폭 도: 사망 2명, 부상 7명
장 비: APC 1대, 2 1/2톤 8대 파손
조 치: 사망 및 부상자 광주통합병원 후송. (계엄사 상황일지)
- 80년 5월 24일 01:30분에 전교사로부터 제 1특전 여단은 현지역(주남)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여 전교사 예비로서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하라는 작전명령을 수령 후, 전교사 상황실에서 부대이동에 필요한 차량지원 및 경계대책을 협조 후 예하대에 이동명령을 하달. 동일 08:30분경 제 20사단 61연대가 전교사에서 출발, 819번 도로와 1번도로를 경유하여 송암동 삼거리에서 무명도로(효덕국교 앞 도로)를 경유, 소태동에서 15번 도로를 따라 주남마을에 10:30분에 도착하여, 여단은 제 20사단 61연대에 주남지역에서의 임무를 인계 후 2 1/2톤 차량 45대에 탑승, 제 1제대에 63대대와 직할대, 제 2제대에 61대대와 7여단 치중대, 62대대를 편성, 동일 13:30분에 주남마을을 출발, 광주비행장으로 이동 도중 송암동 삼거리 지점에서 수미상의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산발적인 총격전을 재개하면서 부대는 계속 차량으로 이동하여 효천역 전방 5백여 미터 지점에 선두 도착시, 도로를 차단하고 매복근무중인 보병학교 교도대가 폭도들의 주간 강습 탈출작전으로 오인, 90밀리 무반동총으로 선두 APC에 사격을 개시하면서 도로 주변에 배치된 아군이 총격을 개시, 소총과 크레모어 수류탄을 투척하여 아군이 피해를 입었음. (특전사 전투상보)
* "우리 집에서 약 4백 미터 떨어진 고속도로의 커브지점에서였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것이 하늘로 솟았다가 떨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관포에 맞은 지프차의 앞부분이 공중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때 장교 1명과 다수의 사병이 자기들끼리의 오인사격으로 죽었다. 헬기가 20여 회 이착륙하면서 너덧 구씩의 시체를 실어갔다." (김복동, 청문회 증언)
진월동 양민학살
* "점심을 먹은 후 고단해서 좀 누우려는데 난데없는 총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서는 순간 양철벽을 뚫고 날아온 총알이 오른쪽 팔과 옆구리에 박혔다. 그 경황중에도 병원으로 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피를 흘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집 앞 도로에 군용 트럭과 탱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군인들이 실수로 총을 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손을 들고 나서자마자 놈들이 나를 향해 총을 갈겼다. 그때는 다행히 총에 맞지 않 았다" (구술 : 노득기, 현사연 조사)
* "점심을 먹은 후 효덕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동네 형들이 야구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오후 2시경 백운동 쪽에서 시민군 7명이 탄 군용 트럭이 효덕국민학교 옆으로 와서 시민군을 내려주고 그 차는 방향을 돌려 시내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공수를 태운 수십 대의 차량이 원제마을 쪽에서 밀려왔다. 그들은 장갑차에서 쏜 신호탄을 신호로 M16을 허리에 대고 사방을 향해 갈겨댔다. 약 30-40분간 쏘아대던 총소리가 멎자 거리는 계엄군이 쏜 탄피로 뒤덮였다. 그날 계엄군끼리의 오인사격으로 방 안에 있던 사람이나 집 밖에 나와 있던 주민 수십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동네 청년들은 상무대로 붙잡혀갔다." (구술 : 김문수, 현사연 조사)
* "그날 우리 집에서만도 3명이 죽었다. 내 아들 근립이도 그때 죽었다. 데모나 하다가 그랬으면 덜 억울하겠는데 방에 있는 아이를 끌어내 총으로 쏴서 죽인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내려 지금까지 아들 제사를 지낸다. 점심을 막 먹고 났는데 집 앞 도로에서 쾅! 쾅! 쾅! 전쟁을 방불케 하는 총소리, 대포소리가 났다. 벽을 뚫고 방으로 들어온 총알이 방안 여기저기에 박히자 나는 정신없이 뛰어서 큰방 지하실로 갔다. 한참 지난 뒤 총소리가 잠잠해지자 우리 방으로 가서보니 방 안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계엄군이 온 방을 뒤져서 어지럽혀놓고 이불이며 옷가지들까지 방바닥에 꺼내놓았다. 아들이 보이지 않자 맨발로 뛰쳐나가 온집안을 찾아봐도 아들은 없었다. 옆방에 살던 청년 2명(임병철, 김승우)도 없었다. 겁이 더럭 난 나는 아들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 철로변에 승우가 죽어 있었다. 내 아들과 병철이도 신작로 옆 도랑에서 죽어 있었다. 병철이는 총에 맞아 죽었고, 아들은 총구멍뿐만 아니라 손을 대검으로 짓이겨놓았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아들을 보자 눈이 뒤집히고 가슴이 떨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구술:김금순, 현사연 조사)
* "진월동 개방대학 입구 도로변에서 동네 어른들과 그간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천지를 뒤흔드는 총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다 쏟아지는 총탄에 오른팔이 맞았다. 한참 후 총소리가 멎는가 싶더니 총을 든 계엄군이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와 다짜고짜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개머리판에 피곤죽이 된 나를 끌고 나가 지프차에 태웠다. 그들은 송암동 연탄공장 앞에서 차를 멈췄다. 놈들은 나를 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철로 건너편에 있는 빈터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최철진, 김행남, 김영묵 씨 등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로 땅바닥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옆에는 군인의 시체도 약 20여 구 있었다. 잠시 후 헬기가 와서 군인들의 시체와 부상자를 싣고 갔다. 군인들을 다 옮긴 후 우리를 헬기에 싣고 통합병원으로 갔다." (구술 : 윤영화, 현사연 조사)
15:00 수백 명의 공수부대, 송정리 비행장에서 이동
*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찾아 송정리로 갔다. 송정리로 가는 도중 통합병원 앞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무장한 계엄군이 지키고 있었지만 별다른 제지 없이 그곳을 통과했다. 오후 2시경 송정리 비행장에서 완전무장한 수백 명의 공수들이 광주를 향해 행군하는 것을 봤다. 내가 다가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알 것 없다며 딱부러지게 말했다. 그들과 헤어져 광주로 오던 중 서창 입구 검문소에서 검문에 걸려 운전면허증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상무대로 끌려가 6월 4일 석방되었다." (구술 : 김정균, 현사연 조사)
송정리에서도 헬기 기총소사
* "21일 남평으로 가서 무기를 탈취해 22일 새벽 광주로 들어오던 중 효천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되돌아갔다. 3일간을 광주에 들어오지 못하고 시위대들과 함께 남평, 나주 등지에서 보냈다. 24일 송정리를 거쳐서 가기로 합의하고 송정리 비행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계엄군과 우리측 대표가 한참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나는 차에서 내려 주변 마을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조그만 냇가를 따라 걷고 있을 때 헬기가 나타나 나를 향해 총을 쏘아댔다. 나는 그때까지도 총을 메고 탄띠를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헬기는 계속 나를 따라오면서 총을 쐈으나 다행히 적중시키지는 못했다." (구술 : 이정섭, 현사연 조사)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 청년들에 의해 '제2차 민주수호 범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 이름을 궐기대회라는 딱딱한 용어를 피해 '자유성토대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대회는 도청 광장과 금남로 그리고 인근 도로를 꽉 메운 10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스피커 소리가 끊기기도 했는데, 주최측은 도청에서 방해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궐기대회 방해공작
* "궐기대회 도중 마이크가 자꾸 꺼져버렸다. 그때는 앰프시설이 좋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궐기대회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정보원이 도청으로 들어가 방송시설을 분해해서 들리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 사실을 우연한 기회에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그는 광주에서 '소망소리사'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공화당 때부터 새마을운동에 앞장서 여당활동을 했던 사람이다."(구술 : 김결, 현사연 조사)
-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아침부터 운집한 5만여 군중이 도청 앞에서 전두환 화형식을 비롯한 성토를 시작하여 대대적인 시가행진을 벌였다. 합동장례식은 연기되었다. 계엄분소에 다녀온 수습위는 계엄사측으로부터 약속받은 8개 사항을 인쇄한 '계엄분소 방문협의 결과보고'라는 전단을 배포했다. 이날도 도청내에서는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시체가 여러 구 발견되었으며 시내 외곽에서는 계엄군과 시위대가 서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대치,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다.
8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계엄군의 시가진입을 일절 금지하라.
답: 시민측이 먼저 발포하지 않는 한 진입이나 사전발포하지 않겠다. 또한 지금 시내엔 1명의 계엄군도 없다.
2. 5.18 공수부대의 지나친 진압을 인정하라.
답: 현장설명을 듣고 과잉진압임을 인정한다.
3. 연행자를 석방하라.
답: 연행자 927명 중 79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으며 수습대책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추가로 34명도 80년 5월 23일자로(어제 오후) 석방했다.
4. 사망부상자의 보상 및 치료는?
답: 보상은 물론 대책을 세우고 있으며
5. 방송재개 및 사실보도 촉구
답: 지역방송이 속히 회복되는 대로 사실보도하도록 힘쓰겠다.
6. 자극적인 어휘 사용 금지(예:폭도)
답: 순수한 시민을 폭도라 함이 아니요, 악용하는 자를 말하며 상부에 부드러운 어 휘를 사용토록 진정했다.
7. 시외통행로에 통로를 주라.
답: 민간인은 출입할 수 있으되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면 보호해 주며, 단 자동차나 무기휴대차는 접근할 수 없다.
8. 사태수습 후 처벌금지
답: 사태수습 후 절대 보복하지 않겠다(군 지휘관과 대책위원회의 명예를 걸고 약속함). -1980. 5.24. 5.18 수습위원회 일동-
이 궐기대회에서 녹두서점에서 제작한 전두환 화형식을 하기도 했다. 이 대회에는 계층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민이 참가하였으며 김밥을 들고 나와 나눠 먹기도 했다. 대회가 한창 진행중인 16:30분경부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시민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음에도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계속 비를 맞으면서 대회를 지켜보았다. (10일간의 취재수 첩)
* "전날에 이어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궐기대회에 앞서서 투항주의적인 수습위를 성토하는 절차 및 전두환 화형식을 거행했다. 시민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도청 앞 광장을 꽉 메웠다. 궐기대회 진행 도중 쏟아지는 비로 인해 잠시 소란스러워지자 '이 비는 5월 영령들이 눈을 못 감고 흘리는 피눈물이니 모두 우산을 갭시다'라고 말하자 모든 사람이 우산을 갰다. 이날도 묵념, 애국가, 경과보고, 민주시 낭독(극단 광대, 최인선), 각 대표의 성명서 낭독순으로 진행되었다. 신영일은 '현상황을 어떻게 뚫어야할지 모르겠지만 무기반납은 절대 안 된다. 무기를 반납하면 엄청난 탄압이 올 것이다. 우리는 싸우는 길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식순이 끝날 무렵 대학생들은 남도예술회관 앞으로 모이고, 시민들은 동별로 집결하라고 했다. 집회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시위대열을 형성해 가두행진을 했다. 집회가 모두 끝난 뒤 YWCA에 모여 평가와 반성을 하고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논의하면서 일을 분담해서 조직적 체계를 갖추기로 했다. 기획부(윤상원), 궐기대회조(광대팀), 가두방송조(박정열), 대자보, 유인물조(들불야학)로 나누어 각자 맡 은 일을 했다. 여학생들은 주로 취사와 대자보조 일을 맡아 했다." (구술 : 김태종, 현사연 조사)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대한 불신
- 임시시민수습위원장 이종기 변호사가 마이크를 잡고 그동안의 수습대책위원의 협상결과를 보고하려 하자 여기저기서 '집어 치워라', '필요없다', '간단히 말해라'라는 소리가 나오는가 하면 심지어 '끌어내 쳐라'라는 심한 말까지 나왔다. 시민수습위원 등에 대한 어떤 불신감이 그대로 노출되는 광경이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15:30
- 도청 앞, 폭도군중 1만 5천여 명이 모여 학생이 데모일지 및 공수부대 투입상황 광고, 우리가 폭도냐고 선동. 군중심리 및 폭도동태 탐지. (계엄사 상황일지)
16:30
- 도청 앞 상무관에 시체(미확인 40여 구) 안치, 시민들 줄지어 분향중.
17:00
- 궐기대회 도중 계엄군이 시내로 진주한다는 소문이 퍼져 시민들 웅성거림.
- 궐기대회 2시간 반에 걸쳐서 끝나고 시민들 해산.
- 현재 많은 시민들은 도청 뒤뜰과 도청 앞 상무관에 마련된 시체안치소에 몰려가 분향. 가톨릭 광주대교구회에서는 '우리의 모든 원한과 감정을 풀어버리고 민주적인 사랑과 단합으로 더욱 굳세게 정진하자'는 성명서를 냈다. 시내 곳곳에서는 민주시민 강령을 공고하기도. 학생수습위는 24일 오후 경찰 책임자와 연락, 경찰이 치안에 직접 나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궐기대회의 열기 때문에 경찰의 시내 진출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월간조선, 1985. 7)
- 박승렬은 도청 앞에서 어떤 폭도로부터 카빈 1정을 지급받고 군용 트럭에 폭도 약 20여 명과 함께 승차하여 지원동 속칭 '배고픈다리'까지 가서 하차한 후 동소에서 어떤 청년 1명과 함께 익일 05:00까지 경계근무를 하고(공소장)
17:06
- 송정리 근교 강둑에서 폭도로 보이는 1명, 사이드카 타고 10여 명이 탄 버스 1대를 인솔하고 전교사 후문 쪽으로 이동.
- 공수 출동, 10명 체포. (계엄사 상황일지)
17:15
- 이동중 피해상황. 매복해 있던 폭도에 의해 116호 운전사 사망, 1명 실종(이관영, 5월 26일 13:10분 시체로 발견). (계엄사 상황일지)
17:30 궐기대회 준비를 위한 집행부 구성
- 광주시 대의동 소재 YWCA 소강당에서 정상용은 김영철, 이양현, 윤개원, 박효선, 김상집,이행자, 정유아, 정현애 등과 성명미상 청년대학생 10명이 모여 그간의 도청 앞 시민궐기대회의 성과를 분석한 후 시민들의 호응도가 높아 좋았다는 결론을 내린 다음, 계엄당국과 유리한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시민 선동 궐기대회를 계속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를 준비하기 위한 위원회 집행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하고
1) 기획부: 이양현, 정상용, 윤강옥
2) 홍보부: 윤개원, 박용준
3) 집행부: 정현애, 정유아, 이행자
등으로 편성하였다. 윤강옥과 이양현은 기획부에 소속되어 시민궐기대회의 일정 및 식순, 기타 선언문과 경과보고서 문안 등을 작성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공소장)
17:35
- 31사, 11병참선 경비대대 광주-장성간 고속도로 배치 완료 : 8개 지역 11/325(말, 1988. 8)
18:00 기동순찰대 활동
- 도청에서 순찰대 편성 지시를 받은 김화성 외 15명은 4개조로 편성하여 군용 지프차를 타고 카빈총 등으로 무장한 채 계엄군 동태 파악 및 거동수상자를 체포하고 광주시 충장로 일대, 금남로, 동명로 일대 등 완행 주변도로 등을 순찰하였 다. 동월 24., 18:00경 도청에서 위 김창길로부터 순찰대 편성 지시를 받아 도청 폭도 15명을 4개조로 편성하여 각 조로 하여금 군용 지프차를 타고 카빈총 등으로 무장한 채 계엄군 동태 파악 및 거동수상자 체포, 연행을 위하여 광주시 충장로 일대, 금남로 일대, 동명동 일대, 완행 주변도로 등을 순찰토록 지시하고. (공소장)
18:14
- 시민대표 주동 무기 회수, 카빈 3백 정, TNT, LMG, 수류탄 등. 강경폭도 20명 무기반납 방해. (전교사 상황일지)
19:30 궐기대회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논의
- 호남동 소재 보성기업 사무실에서 김영철은 정시윤, 이양현, 정상용, 정해직, 윤기현 등과 함께 광주사태에 관하여 논의를 가진 결과
1)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투항이며 사북사태와 같은 처벌을 받게 되므로 정부당국 고위층으로부터 처벌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무기반납하자.
2) 정부, 군인, 국민, 광주시민, 경상도민에게 광주사태를 알리는 글을 작성하여 궐기대회시 발표한다.
3) 적십자를 통해서 전국적인 헌혈운동을 전개하여 은연중에 광주사태가 유혈사태임을 알리고 생활필수품을 지원받도록 한다.
4) 인권운동 경력이 있는 재야인사와 학생을 영입하여 집회 및 시위를 주도하도록 한다.
는 앞으로의 대정부투쟁 방향을 결정. (공소장)
* "궐기대회가 끝난 후 보성기업으로 가서 정상용, 이양현 선배와 윤강옥, 안길정(도청 지휘부)과 모여서 '궐기대회는 계속해서 개최하자, 현재의 도청수습위는 체계가 잡히지 않았으니 우리가 장악해야 한다'라는 논의를 하고 헤어졌다." (구술 : 김태종, 현사연 조사)
20:00
- 시내는 행인의 왕래가 뜸해지고 인적이 끊김. 그러나 도청앞 쪽 상무관에는 1백여 유족들이 지키고, 오후 5시부터 계엄군이 다시 들어온다는 루머 때문에 외곽지대 경비에 나서고 있음. 5시에 결렬됐던 수습대책위의 시민, 학생대표들은 6시부터 회의를 개최. 대책위는 1. 5.18사태의 근본적인 이념을 의거라고 정해야 한다. 2.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예비군과 경찰이 나와 질서를 잡도록 조치해야 한다. 3. 사상자 전원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지난 22일에 결의된 7개항과 함께 다시 계엄사측과 협의키로. (월간조선, 1985. 7)
- 목포 10만 명의 시민 횃불시위, 철야농성. (1980년대 민주화운동)
21:00 민간인으로 위장 시내투입
* "80년 5.18 당시 육군상사였던 내 사위는 21일 밤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후로도 사복을 입고 시내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우리 사위는 그때 시내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구술 : 김결, 현사연 조사)
- 무장한 시민군은 민간인 옷으로 바꾸어 입고 퇴각한 공수부대들을 죽이기 위해 건물 옥상 등에 올라가 시가지를 살피며, 사복 차림에 군화를 신고 머리를 짧게 깎은 자들은 일단 공수부대로 규정, 발견되면 쏘았다. 이 소식을 들은 공수부대 쪽에서는 시가지 외출을 일체 삼간 채 지난 5월 17일 병영집체훈련에 임했던 전남대 사대, 법대 1학년 학생들을 통금시간인 밤 9시를 기해 풀어서 해산시키도록 했다.
- 도청. 강경파 폭도 실권장악, 요구사항 결의
1. 사망자 시민장
2. 5.18은 폭동이 아니고 민중봉기라고 언론기관을 통해 사과
3. 구속학생 전원 석방
4. 충분한 피해보상 (전교사 작전일지)
23:45
- 광주 변전소 정문 앞 70미터 지점 폭도 3명 체포(1명은 계엄군이 발포한 유탄으로 부상). 익일 06:52 1명 사망. (계엄사 상황일지)
- 광주사태로 이리-장성 마지막 운행되던 완행열차 24일부터 송정리역까지 연장 운행. 현재 열차운행이 중단되어 있는 구간은 순천-광주-목포간.
25일 01:00 학생수습위원회의 조직개편
- 정해민, 양원식 등 일부 학생들이 상호 의견충돌로 인하여 조직에서 이탈하자 일반인도 포함하여 새로이 학생수습대책윈원회의 기구를 개편하기로 결의하고, 위원장에 김창길, 부위원장 겸 총무 및 대변인에 황금선, 부위원장 겸 대변인 및 장례담당에는 김종배, 상황실장에 박남선, 경비담당에 김화성, 기획실장에 김종필, 무기담당에는 강경섭 등으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고 홍보부장에 허규정이 임명되어 가두방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함. (공소장)
* "학생수습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김종배와 김창길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자주 대립했다. 김종배는 '계엄사와 무조건 협상하면 안 된다. 협상이란 동등한 입장에서 하는 것인데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무기를 반납하면 우리에게는 힘이 없어진다. 그러니 무기를 반납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김창길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기를 회수, 반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김종배의 의견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아 나는 김창길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24일에도 무기반납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김종배와 양원식이 못해먹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저녁에 회의를 속개했다. 그때 학생수습위의 조직개편을 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학생수습위에 속하지 않았지만 나도 나서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했다. 나는 부위원장 겸 내무위원장, 총무를 겸하게 되었다. 그때가 25일 새벽 1-2시 사이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무조건 타협해서 무기를 반납해서는 안 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니 일단 시민의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수습에 임하자는 쪽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구술 : 황금선, 현사연 조사)
- 목포. 경찰서장(이준구)이 안철을 찾아와 시위 종결 요청. 안철은 광주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평화적인 방법으로 계속하겠다고 거절. (1980년대 민주화운동)
06:00
- 동월 공소외 정해민, 양원식 등 일부 학생들이 의견충돌로 조직에서 이탈함에 따라 개편된 새로운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기구에서 홍보부장으로 임명되어 가두방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되자, 동월 25. 06:00경 공소외 박영순과 함께 폭도들이 탈취한 경찰 지프차에 탑승하고 학동-지원동-소태동-양림동-방림동 등 시내 중심가를 순회하면서 '시민은 생업에 열중합시다. 분향소가 상무관에 설치되어 있으니 뜻이 있는 시민은 오셔서 분향합시다. 무기는 도청으로 반납하십시오. 사망자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답시다'라는 등의 가두방송을 하여 흥분상태에 있는 시민들을 자극하여 계엄당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공소장)
06:52
- 변전소 출현 폭도 1명, 총격부상으로 사망. (계엄사 상황일지)
07:00 신고된 행방불명자 2천 명에 달함
- 광주시내 각 병원에는 중환자 5백여 명, 경상자 2천여 명이 되었으며, 사망자는 병원에 안치되어 있으며 신원 확실한 시체는 169구, 형체를 알 수 없는 40구, 충장로 지하상가에서 집단 발견된 시체가 20구로 계엄군이 미처 이송해가지 못한 시체가 도합 2백30여 구에 이르렀다. (이 외의 다수의 시체는 계엄군이 상무대로 이송했다.) 그 외 25일 현재 홍보처와 동사무소에 신고된 행불자수는 약 2천여 명이 된다. 이중 31사단과 상무대로 연행된 사람은 수천 명(계엄사는 927명이라 발표)이고, 그 외 피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흔적없이 사라진 것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08:00 조작된 독침사건
- 도청에서 1층 변소에 다녀오던 자칭 특공대장 장계범(24, 광주시 황금동 86)이 20대 괴한에게 등을 찔려 쓰러졌고 같은 특공대원인 정향규(31)가 상처난 부위를 빨아내다가 역시 중독, 전남대 부속병원에 옮겨졌다. 그러나 의사의 진단 결과 두 사람의 몸에서는 이상한 물질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에 따라 학생들은 이들을 수상한 자로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도청에서 김종배가 확인을 지시, 당시 순찰대원이던 윤석루(19, 양화공), 이재희(33, 회사원), 이재춘(20, 방위 병) 등 5, 6명이 급히 차를 타고 전대병원으로 가보니 이미 장계범은 도주한 후였고, 정한규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도주하려다 붙잡혀 도청 조사과에서 조사를 받다 장계범을 잡으려고 세무서 맞은편에 있는 장계범이 경영하는 술집으로 갔으나 없었다.
그런데 5월 29일 헌병대 영창에서 도청의 주요간부들이 조사를 받고 있을 때 장계범이 복면을 쓰고 나타나 수사관에게 피의자들의 도청에서의 직위 및 역할 등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1차 조사가 끝나 모두 보안대로 넘어가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며 조사를 받던 때 장계범은 담배를 피우며 돌아다녔다. 이리하여 독침사건은 후에 계엄사측의 조작극으로 판명되었다. (현사연 조사종합)
* "조사과에서 함께 일하던 장계범이 '독침에 맞았다'고 소리치며 왼쪽 어깨를 틀어잡고 쓰러졌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도청 안에 침입한 불순분자가 나를 찔렀으니 상처부위를 빨아달라'고 했다. 그의 옷을 벗기고 입으로 상처부위를 빨아줬다. 장계범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나는 정향규와 함께 장계범을 지프차에 태우고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가서 내려주고 곧바로 도청으로 왔다. 그로부터 몇 분 후 아무래도 이상하니 전남대 응급실로 빨리 가보라는 명령을 받고 가서 보니 장계범은 도망가고 없었다. 이것이 조작된 '장계범 독침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도청내에는 불신풍조가 난무하여 친하지 않는 사람은 가까이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구술 : 신만식, 현사연 조사)
* "오전 8시경 장계범이라는 사람이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쳤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으로 빨았다. 도청에 있던 차에 장계범을 싣고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독침을 맞았다던 장계범은 이날 오후 병원에서 도망쳤다고 했다. 이 조작된 독침사건으로 도청 안은 간첩이 침투되었다는 등의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도청을 빠져나간 사람이 많았으며, 시민들 사이의 불신이 심화되는 등 아주 혼란스러웠다. 그리하여 집행부에서는 '증'을 발행하여 이를 소지한 사람만이 도청을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구술 : 구성주, 현사연 조사)
08:55
- 도청 신원 미확인 시체 45구, 상무관 확인 시체 17구. (계엄사 상황일지)
09:30
- 전남지역 동향. 격화된 시민감정이 전일 제1군 사령관 윤성민 장군의 자제호소 방송에 반성과 자제의 경향이 현저, 계속 방송 요망. (계엄사 상황일지)
09:33 - 11:00
- 도청 광장에서 합동장례식 거행 예정이라고 방송하고 많은 시민 참석 요구. (계엄사 상황일지)
09:50 시위차량으로 외곽지역 주민, 도청으로 수송
* "25일 오전 새로운 차량운행증을 도청에서 발부받아 도청과 변두리 지역을 오가며 노선버스 역할을 대신하는 시민 수송을 했다. 시외지역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에 계엄군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은 차량이 보이면 M16을 난사했기 때문에 조심해서 운행해야 했다. 주로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궐기대회에 참석하려는 외곽지역 주민을 태우고 도청으로 왔다가 집회가 끝나면 다시 태워다주는 일이었다." (구술 : 오인수, 현사연 조사)
09:50
- 도청에서 자칭 과격파와 온건파 학생간의 싸움 있었음. 주민들도 평정작전 요망. 시내 차량통행 없음. 행인 왕래, 상점문 개방, 치안 유지, 학생 외 무기휴대자 없음. (계엄사 상황일지)
10:00
- 수습위 대변인인 천주교회 김성용 신부가 계엄사 부사령관실을 찾아가 부사령관에게 호소했다. 다음은 김신부의 호소내용 및 수습위에서 나온 전단내용이다.
「앞으로 우리는, 아니 도민은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한다. 어찌 사람처럼 두 발로 다닐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짐승이다. 공수부대는 우리 모두를 짐승처럼 끌고 다니면서 때리고 찌르고 쏘았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또 폭도라고 왜곡된 보도를 하였으니 이 사태가 수습된다 해도 우리는 모두 폭도가 될 것이 아닌가? 우리 도민 모두가 폭도요, 새로 태어난 자식도 폭도의 후손이 될 것이다. 외지에서 누가 어디서 왔소? 하고 물으면 전남이 고향인 사람들은 무조건 폭도로 몰릴 것은 사실이 아닌가? 자, 이러한 상태 속에서 단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책임있는 당국자, 즉 국가의 최고 원수인 최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사과하여야 한다. 보상과 복구를 하여야 한다. 보복을 절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온 국민 앞에 천명하여야 한다. 이 길만이 무장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요, 원칙적인 해결방법이 될 것이다. 이 조건이 수습위원회의 결의요, 온 전남 도민의 바람인 것이다. 우리는 피의 값을 받아야 한다. 받지 못하면 다 죽어야 한다. 그리고 수습위 대표가 최대통령을 직접 만나 사실을 알릴 수 있도록 계엄사당국은 빨리 만날 수 있는 길을 주선해 달라.」 (5.18 광주 민중항쟁자료집)
10:40
- 도청 및 전일빌딩 폭도, 시민 30명 연행, 15명 조사 후 귀가시키고 15명 억류. 폭도 도청파, 양동파로 분열. 도청에 시체 65구 안치. (전교사 작전일지)
10:46
- 회색 옷을 입은 중년 신사가 도청 무기고 경비원을 사살. (계엄사 상황일지)
10:50
- 광주경찰서 및 서부경찰서, 경찰 142명 출근(대기상태중). (전교사 작전일지)
10:58
- 황금동. 무장폭도, 금은방 및 병원 침입 3백만 원 강탈. (전교사 작전일지)
11:00
- 학생, 청년 수습위는 시내 민주인사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YWCA 2층에서 회의를 개최.
홍남순(변호사), 이기홍(변호사), 이성학(장로), 송기숙(전남대 교수), 명노근(전남대 교수), 장두석(신협 이사), 윤영규(장로), 조아라(YWCA 회장), 이애신(YWCA 총무), 박석무(대동고 교사), 윤광장(교수) 등이 참석했고, 학생.청년대표로는 정상용과 윤상원이 참석했다. 명노근 교수는 '더 이상의 시민희생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박석무는 '그것은 너무나 굴욕적인 협상이다. 최소한 김대중을 비롯한 구속인사들이 석방되고 폭도라는 말도 취소해야 협상이 되지 않겠느냐'고 발언하고, 이기홍은 '강경파 학생들이 도청으로 들어가서 학생위원회와 경비원을 장악하고 김대중 석방시까지 투쟁을 해야 한다 우리 재야인사들도 도청 수습대책위원회를 장악할 것이니 염려 말고 투쟁하라. 다른 것은 몰라도 김대중 석방은 관철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홍남순도 이를 적극 지지하며 반복하여 이를 재강조하고, 장두석은 '우리들도 시민대표를 장악하겠다'고 말하여 정상용, 윤상원으로 하여금 도청 폭도조직을 장악하도록 하고 최종적으로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을 정부에 요구하여 관철될 때까지 강력하게 계엄군과 대치하여 투쟁하기로 결의하였으며, 학생.청년측은 '민주화를 앞당기고 지금까지의 투쟁을 무의미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싸워야 하며 무기반납은 할 수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특히 학생.청년들은 '싸움은 우리가 할테니 어른들은 새로운 도청 수습위에 합류하여 우리들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도청 강경파 학생 완전 주도권 장악. (말, 1988. 8)
- 변사체 발견:
사망일시 - 5.22 12:00 추정
장 소 - 나주군 영산포읍 이창리 버스 정류소. 인상착의 만 22세 정도의 남자
조 치 - 뒷산에 매장 (계엄사 상황일지)
11:05 초교파적 모금운동
- 강경파 학생 계속 저항 결의.(말, 1988. 8)
- 합동장례식 5월 29일 09:00로 연기하고 오전, 오후로 구분하여 장례식을 실시하기로 함. 시체 99구에서 120구로 늘어감. 연고자 74, 이중 7구를 가지고 감. 미확인 46구. (계엄사 상황일지)
- 광주 각 교회에는 예배를 보는 자리에서 부상자 돕기 1천만원 모금운동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모금에 들어가 이날 하룻 동안 1백만 원 모금. 광주시내 목사들은 24일 저녁 초교파적으로 모금 결의. (월간조선, 1985. 7)
12:00
- 윤공희 대주교가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연행자 중 간첩을 제외한 전원을 석방하라고 요구함.
12:35 목포, 비상구국기도회 열림
- 목포. 기독교인 6백 명 모여 '조직적인 양민학살이다', '학살군경 처단하라' 구호 외치고 시위. (전교사 상황일지)
- 목포. 12:30경 역광장에서 '목포시 기독교연합회 비상구국기도회' 열림. 여기에서 '광주 시민혁명에 대한 목포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 채택, 낭송.
목포 연동교회에서는 '광주사태는 명백히 계획적, 조직적인 양민학살 사건이다', '핏값에는 외상이 없다, 즉각 보상하라'고 플래카드 전시.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목포에서는 '광주 시민혁명에 대한 목포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을 집회군중에게 배포.
- 동월 25. 07:00경 피고인이 동일 목포역 앞에서 개최하기로 된 구국기도회에서 낭독하기 위하여 피고인이 직접 작성한 '광주, 목포 사태는 동학혁명, 3.1운동, 4.19 민주구국선언의 법통을 잇는 시민혁명이다', '광주사태는 군벌독재를 구축하려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의로운 투쟁이다', '광주사태는 시민학살극이므로 그 책임자를 처형하라', '언론은 광주, 목포의 참상을 바로 보도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광주 시민혁명에 대한 목포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을 상 피고인 이남결에게 인쇄 의뢰하여 이중 1천 매를 집회 군중에게 배포함과 동시에 동소에서 개최된 구국기도회에세 낭독하고 이어 동일 14:00경 공소외 박광용으로 하여금 동소에 모인 군중 5천여 명과 함께 목포시 전역을 가두시위하도록 하고 (공소장)
13:00 각 병원에 산소공급
- 군통합병원으로부터 그동안 모자랐던 환자치료용 산소 1백여 통을 받아 전남대병원 70통, 기독병원 30통 전달. 이 산소통은 전남의사회가 중앙에 의뢰한 것임. 이날은 총을 든 청년들의 모습도 거의 눈에 안 띄었고, 광주경찰서와 시내 일부 파출소는 경찰관들이 출근. 시민들과 함께 부서진 책상과 서류, 집기 등을 챙기는 모습.
- 계엄분소는 25일 오후부터 26일까지 군.검.경 합동으로 기자 입회 아래 시체 검안작업 펴기도. (월간조선, 1985. 7)
13:30
- 시국수습을 위한 목사 동향. 광주 제일교회 목사 한완식 등 50여 명은 제일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피를 덜 흘리기 위해 무기를 회수하나 보복을 막아야 한다.
수습을 위해 일하다 보면 원망을 듣기 쉬우니 계엄당국과 절충하라는 등 시국수습에 자체적으로 나서고 있다(5.26 09:00에 제일교회에서 재차 모임을 갖고 협의 키로). (계엄사 상황일지)
13:35 피난가던 청년, 산속에서 사망
* "전날 진월동 동네 앞에서 무고한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파렴치한 만행을 목격하고 무서워서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인성고 너머에 있는 노대마을로 피신을 갔다. 다음날 날씨가 무척 더워 인근에 있는 저수지로 목욕을 하러 갔다.
저수지에서 낚시질하고 있는 후배들을 만나 놀고 있는데, 갑자기 '엎드려!'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9명의 계엄군이 인근지역을 수색하던 중 우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잠수'라는 명령과 함께 발로 차서 우리를 물속에 빠뜨렸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내가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20대 청년 2명이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피난가는 길인 것 같았다. 계엄군이 그들을 향해 '서!'라고 말을 했으나 그대로 도망갔다. 총을 쏘면서 2명의 군인이 그들을 쫓아가면서 계속 총질을 해댔다. 계엄군이 그곳을 떠난 후 주변을 살펴보니 저수지 둑 밑에 24세 가량의 청년이 숨져 있었다." (구술 : 박노용, 현사연 조사)
- 과격분자가 점점 조직화되어 가는 것 같다.
- 도청에 있는 전화도 도청하고 있는 것 같다.
- 아침에 독침으로 찔린 학생은 조선대병원에 입원, 현재는 의식이 약간 회복된 상태임(사실무근). 따라서 학생들은 서로 불신, 무장화하는 것 같으며 경계가 더욱 삼엄해진다.
- 현재 도청에는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 시민 왕래 잦음.
- 수습위원회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거처 이동. (계엄사 상황일지)
- 광주 남동성당, 재야강경세력 홍남순, 이기홍, 조철현, 은명기, 장기언, 김성용, 조아라, 조경창 등 밀회. '중대사태, 피의 댓가 없이 좌시할 수 없다', '김대중 석방' 요구, 배후조종. (말, 1985. 7)
14:00 남동성당 수습위, 도청으로 합류
- 남동성당 유치원에서 홍남순, 김성용, 명노근, 송기숙, 이기홍, 오병문, 조아라, 이성학 등과 김성용 주관하에 회합을 갖고 김성용으로부터 도청내 시민대표 수습대책위원회가 무능하여 체계가 없이 산발적으로 운영됨으로써, 대치하고 있는 계엄군과 조직적인 투쟁을 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폭도들과 합류하여 목적달성을 위하여 투쟁을 하기로 하고서 YWCA에서 결의한 3개항인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 '정치일정 단축'을 재확인하고 이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제의를 받아 전부가 찬동. (공소장)
- 남동성당에서 수습위원회 회의가 속개된 끝에 시민의 여론과 계엄분소간의 대화창구를 일원화하기 위해 기존 수습위와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오후 4시에 도청 부지사실에서 연석회의를 속개. 27명이 서명, 김성용 신부가 제안한 4개항 내용.
수습위의 요구사항
1. 국가 최고 원수인 최대통령은 광주사태를 인정할 것
2. 사과하고 용서를 청할 것
3. 보상과 복구를 책임질 것
4. 정치적 보복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정부는 온 국민 앞에 공개, 천명 할 것을 만장일치로 통과. (1980년대 민주화운동)
14:30 계엄사 탄약검사반 도청 투입
- 목포. 시민, 학생 5천여 명, 목포역전에 집결 '광주사태 책임져라' 구호 외치며 농성.
* "도청 지하식당에 TNT가 있었다. 그곳은 평소에는 폐쇄되었다. 25일 밤으로 기억된다. 김창길이 나에게 와서 '지금 군대에서 폭약을 다루던 사람이 지하실에 와서 뇌관을 제거하고 있으니 함께 가보자'고 했다. 그는 우리가 가까이 가도 모르는 채 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는 그에게 '일단 제거는 하되 다시 조립해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구술 : 황금선, 현사연 조사)
15:00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 무기반납식을 도청 앞 광장에서 갖기로 했던 것이 백지화되고 다시 도청 앞에서 제3차 시민궐기대회가 3만-4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
- 폭도 시내 요소에 벽보 부착, '장기전대비 식량비축', '강도 행위는 계엄군 행위니 속지 말라'. (전교사 작전일지)
- 5만 인파가 모인 가운데 개최된 궐기대회에서 애국가를 부른 후 사망자에 대한 묵념과 상황보고에 이어 우리의 결의,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껍데기 정부와 계엄당국을 규탄한다, 희생자 가족에게 드리는 글, 전국 종교인에게 보내는 글, 전국 민주학생에게 보내는 글 낭독.
- 제3차 대회 후 YWCA에 학생 1백여 명이 모여 회합을 가진 후 도청에 들어가 학생수습위와 합류하여 대폭적인 조직개편을 함.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17:20
- 시민궐기대회 후 검정 리본 달고 가두시위에 들어감. '계엄 철폐하라'는 등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며 도청 앞을 출발, 금남로, 광주역, 광주고속버스터미널, MBC 등을 돌아 도청 앞 광장에 집결. (월간조선, 1985. 7)
- 동일 17:00경 상 피고인 홍남순, 동 이기홍, 동 김성용, 동 명노근, 동 오병문, 동 조아라, 동 이애신, 동 장두석, 동 위인백 등이 도청내 수습위원회에 합류하여 동위원회를 장악하고 위원 중 위 김종배, 위 정상용 등을 불러 상 피고인 홍남순은 동인들에게 '현단계에서 총기를 반납해서는 안 되며 계속 강경하게 투쟁하라.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목욕까지 하고 왔다'고 말하고, 동 김성용은 '학생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하라'고 말하여 동 폭도대표들에게 대정부 투쟁을 강력히 지시하는 등 폭동을 일으켜 국가의 통치기능을 마비시킨 다음 강압에 의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폭도들을 지휘하는 등 중요임무를 수행하여 폭동하고 (공소장)
17:30
- 목포역 광장에 광주 희생자를 위한 분향소를 설치하고 1천7백여 명 가두시위 (구호: 김대중 석방, 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야간 횃불시위가 예상되나 난동 행위는 없을 것으로 타진됨. (계엄사 상황일지)
18:00
- 한 청년이 피곤한 모습으로 김성용 신부를 찾아와 도청 지하실의 TNT를 어른들이 지켜줄 것을 요구. 목사와 신부가 신뢰할 수 있는 청년을 데리고 지키기로 결정. (1980년대 민주화운동)
18:10
- 광주시내. 폭도들 벽보 첨부, 시민타격대 조직, '7함대는 우리를 위해 왔다', '매일 15:00. 궐기대회', '장기전 대비 생필품 준비', '식량은 이웃끼리 나누어 먹자'. (전교사 작전일지)
18:12
- 귀빈(최규하 대통령인 듯-편집자주) 상무대 도착. 주영복 국방, 최종완 건설, 진기종 보사, 이광표 문공 등 4개 부처 장관을 비롯, 이희성 계엄사령관, 윤자중 공군참모총장,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 서기원 청와대공보수석, 이원홍 민원수석비서관 등 수행. 소준열 계엄분소장, 장형태 지사로부터 현지 상황보고를 받고 '광주시민에게 고하는 특별방송' 담화 발표. (육본 상황일지)
19:00
- 광주시 당국은 영세민에게 가구당 5천 원씩 지급하고 정부미 6천 가마를 시장에 방출함.
- 전교사, 충정작전 명령 4호 하달
3개 학교 외곽선 봉쇄 실시
3개 공수부대 철수 후 비행장에 집결(말, 1988. 8)
- 전기와 같은 시민 선동 궐기대회를 끝낸 후 윤상원의 제의로 박효선, 김영철, 이양현 및 7, 8명의 대학생들과 함께 폭도들이 점거하고 있는 도청 2층 식산국장실로 들어가 당시 도청 폭도 집행부 강경주동자인 부위원장 정상용은 김종배로부터 '위원장 김창길이 무기를 반납하고 평화적으로 시위하자며 온건한 태도로 나오는데 그럴 수는 없다. 우리 힘을 합하여 강경하게 대처해 나가자', 윤상원으로부터 '앞으로는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정치일정 단축 등 정치적인 문제도 요구사항에 포함시키도록 하자'는 제의를 받아 뜻을 같이하기로 결의하고, 김창길의 위원장직 사의 표명. (공소장)
20:00
- 김성용 신부 등은 사태악화 문제에 대해 부지사에게 항의. 협상대표 부지사에게 폭도 식사제공, 무기고 서치라이트 가동 요구. 부지사, 동요구에 야간처리 불능하다 일축. (전교사 작전일지)
21:10
- 최규하 대통령 귀경. (조선일보, 5.26)
- 수습파와 항쟁파의 대립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김창길 등 조직이탈, 항쟁파가 도청 실권 장악.
- 이즈음 매스컴에서는 연일 광주는 생필품이 동나고 의약품과 피가 부족하다고 떠들어댔다. 군이 시외곽을 봉쇄하여 물자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실제로는 쌀은 광주시청 공무원들의 적극적 지원으로 시청 비축미를 도청에서 사용하였으며 생필품 가게도 전혀 매진현상이 없이 시민들에게 무료로 생필품을 나눠주었다. 총상자를 위한 의약품도 약간 부족한 건 사실이었고, 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 청소에 나서 광주시내는 말끔히 단장되었다. 그리하여 매스컴이 떠드는 시내 전체가 무질서해 치안부재 운운의 말도 무색하게 완전히 자치적으로 질서를 잡고 있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