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26일 정오 무렵, 서울 경교장 2층 서재에서 총소리 네 발이 울렸다.
붓글씨를 쓰고 있던 백범 김구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일제와 싸우며 평생을 보낸 사람이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동포의 손에 생을 마쳤다. 안두희의 흉탄이었다.
올해로 서거 77주기.
서거 한 해 전, 백범은 법정 증인석에 앉은 적이 있다. 1947년 12월 2일 한민당 수석총무 장덕수가 제기동 자택에서 암살됐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문제를 두고 백범과 대립했고,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도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알려져 있던 탓에, 백범은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는 처지가 됐다.
장덕수 사건은 미군정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당시 남한은 미군정 통치 아래 있었고, 이런 중대 정치사건은 한국인 법관이 아니라 미군 장교로 구성된 군사법정이 미군정 포고와 법령에 근거해 다뤘다.
백범에게 증인 출석을 명한 곳도 이 법정이었다. 소환장을 보낸 이는 재판장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었다. 일개 살인사건의 증인을 부르면서 미국 대통령 명의로 소환장을 발부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점령 통치기 군사재판이었기에 가능한 형식이었고, 동시에 누가 봐도 백범을 흔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1948년 3월 12일, 백범이 증인으로 입정했다.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테 안경, 손에는 검은 중절모를 든 차림이었다. 검사의 인정신문이 시작되고, 직업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직업이 무엇이오?"
백범은 망설이지 않았다.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그 자리에서 취재하던 한 기자는 뒷날 회고록에 이 순간을 적었다. 가슴이 뻑뻑해지도록 뜨거운 것이 치밀어 눈시울이 젖었다고 했다. 죄인 취급하듯 몰아세우는 법정에서, 그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흘 뒤 다시 증인석에 선 백범은 "죄인으로 보거든 차라리 기소해 체포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소원'에 적힌 문장은 그래서 수사가 아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또 물으시면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셋째 번 물음에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직업을 묻는 자리에서 독립운동이라 답한 사람의 말이었다. 글과 삶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이 무렵 백범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1947년 말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자,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김규식과 함께 분단을 막기 위한 남북협상에 나섰다. 통일된 나라를 세우려는 마지막 시도였지만, 단정 수립이 기정사실로 굳어가던 정국에서 그의 노선은 점점 고립됐다.
그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는지는 한국독립당 당원 명부 한 장에 드러난다. 1947년 작성된 명부에는 1번 김구, 2번 조소앙, 4번 조완구, 6번 신익희, 7번 지청천이 차례로 적혀 있다. 임시정부를 떠받친 민족주의자들이자, 상당수가 대종교를 정신적 뿌리로 삼은 이들이었다.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내내 만주 무장투쟁과 임시정부의 인적 모태 노릇을 했고, 그 그물망이 해방 후에도 백범 주위에 그대로 이어져 있었다. 백범을 겨눈 총탄은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그물망 전체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를 노린 것은 정치적 고립만이 아니었다. 김구 암살은 그가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에서, 1949년 6월 전후의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특위 습격사건'처럼 친일세력이 청산 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던 일련의 사건들과 같은 흐름 위에 있었다. 백범의 죽음은 그 흐름의 정점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정오 무렵 현역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가 경교장에 나타나 김구 면담을 청했고, 선우진 비서는 먼저 온 손님과의 면담이 끝나자 안두희를 2층 서재로 안내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군인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검문 없이 통과한 그의 허리춤에는 권총이 있었다. 몇 분 뒤 2층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고, 비서들이 뛰어올라갔을 때 안두희는 스스로 권총을 내던졌다. 12시 45분경이었다.
안두희는 평범한 군인이 아니었다. 월남 후 '서북청년회'에 가입했고, 미군 방첩대 정보원이자 우익 테러조직 '백의사'의 자살특공대원이었다. 1949년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의 추천으로 한독당원이 됐는데, 이는 김구에게 접근하기 위한 포석이자 당내 내분으로 위장해 배후를 감추려는 시도였다.
당국의 대응은 빨랐고, 방향은 한결같았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한독당 노선을 두고 언쟁하다 김구를 살해했다고 발표했고, 7월 2일 이승만 대통령도 한독당 내분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특별성명을 냈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이 사건을 정부 전복을 꾀한 한독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로 규정했다. 암살범에게 의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후 안두희가 받은 것은 처벌이 아니라 특혜였다. 재판 중에 2계급 특진을 했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했다. 무기징역은 석 달 만에 15년으로 감형됐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잔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포병 장교로 돌아갔으며, 1953년 완전히 복권됐다.
사람을 죽인 자가 떳떳하게 살아가는 동안, 죽은 이의 진실은 묻혔다.
반면 국민들의 슬픔은 깊었다. 암살 후 장례식까지 열흘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만 명으로 추산됐고, 7월 5일 서울 장례식에는 40만에서 50만의 인파가 몰렸다.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그날 무거운 관을 어깨에 멘 청년들 중에는 백범이 세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잇는 홍익대 학생들이 있었다. 백범이 인재를 기르려 세운 양성소는 그가 떠난 뒤 대종교 인사들이 세운 홍익대로 옮겨졌고, 대종교 원로 우천 조완구가 소장을 맡아 그 명맥을 이었다. 백범의 정신을 잇겠다는 대종교 민족주의 진영의 뜻이 그 승계에 담겨 있었다.
조완구의 삶은 백범의 죽음이 한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임시정부를 27년간 떠받친 대종교 원로였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며, 백범 피살 후에는 한국독립당 위원장을 맡아 그 빈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단정이 굳어진 정국에서 한독당은 더는 힘을 쓰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납북됐고, 1954년 "통일을 못 보고 가는 게 한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북녘에서 숨을 거뒀다. 백범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의 마지막은 그렇게 하나둘 저물어갔다.
진실을 향한 추적은 오래 걸렸다. 민주화가 진전되며 진상규명 요구가 커졌고, 1992년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오자 국회는 1993년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렸다. 그러나 안두희는 증언할 때마다 말을 바꿨고, 1994년 1월 국회 진상규명 소위에 증인으로 나왔을 때도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금까지의 조사를 종합하면,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였고, 이승만은 직접 개입의 증거는 없으나 사건의 뒤처리에 개입한 것으로 확인된다. 미국 역시 사건에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나,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핵심 인물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누가 마지막 방아쇠의 명령을 내렸는지는 끝내 확정되지 못한 물음으로 남았다.
직업을 묻는 자리에서 독립운동이라 답한 사람.
분단을 막으려 가장 외로운 길을 걷다 동포의 총탄에 쓰러진 사람.
'나의 소원'에 적힌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라는 한마디가 평생의 진심이었던 사람.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가 쓰러진 자리다. 일제의 감옥도, 망명지의 추위도 견뎌낸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해방된 조국의 자기 집 서재에서 같은 민족의 손에 죽었다.
그를 쏜 자는 처벌 대신 특혜를 받으며 늙어갔고, 그 곁을 지킨 동지들은 납북되거나 잊혔다. 백범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친일청산과 통일을 꿈꾸던 한 시대 전체가 그 네 발의 총성에 함께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그 정신마저 끊긴 것은 아니다. 운구를 멘 청년들과 양성소를 이은 사람들 속에서, 백범이 답한 그 직업은 다음 세대로 건너갔다.
77년이 지났다. 그가 답한 직업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나라는 그가 원하던 그 나라에 얼마나 가까워졌는가.
그날의 기상과 그분의 뜻을 오늘에 다시 새기며, 민족을 사랑했던 백범 김구 선생을 깊이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