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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12년, 1년 염불하고 도움염불(助念)로 극락 간 고춘순(高春順) 보살
오영복(吳永福, 1943년생)
1) 만주 벌판에서 농사짓던 부부의 신앙관
아들의 권유로 염불하고, 마지막 목숨이 다할 때 조념助念을 받아 극락 가서 태어난 아내 고춘순高春順(1944년생)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내는 아직 만주국 시대인 1944년 흑룡강성 임해시林海市 신안진新安鎭에서 태어났다. 제주 고씨인 아버님은 경상북도 대구 달성에서 살다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학정을 피해 만주로 와서 임해에 정착하였다. 일제 강점기 가족을 데리고 기회의 땅 만주로 온 남한 사람들도 서간도 압록강 부근에 평안도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고, 동간도 두만강 부근에는 이미 함경도 사람들이 터를 닦았기 때문에 넓고 개발이 가능한 땅을 찾아 북간도 흑룡강성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흑룡강성에는 전라도를 비롯하여 특히 경상도 출신들이 북만주에 많이 정착하였다.
북만주 지역에서 조선인들은 논을 개발하여 벼를 심기 시작한다. 동녕현에서는 1916년 이주한 최동환과 14명의 조선인이 소수분小綏芬으로 와서 수전을 실험, 재배하였다. 소수분의 벼농사 성공은 목단강 · 목릉하 · 수분하를 거쳐 송화강의 통하 · 삼성 · 부금 등으로 전파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경상도 사람들이 해림현 마도석에 들어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인들은 동청철도 동부연선과 동경성 · 목릉 · 밀산 · 위하현 등지로 흩어져 살면서 벼 논을 개발하였다.
아내와 나는 바로 그런 조선인 가정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하면서 컸다. 1967년 겨울에 결혼해서 딸(71년생)과 아들 오동일吳東日(75년생)을 키우며 목단강 시 서쪽에 붙어 있는 해림海琳에서 살았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뒤 시골에서는 1956년 8월 전국적으로 인민공사가 설립되고 농민을 생산대에 소속시켜 생산대대生産大隊라는 단위로 조직되었다. 우리가 결혼한 1967년은 1966년 시작된 문화혁명이 진행되고 있어 10년 동안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개방되면서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2년 한 · 중 수교가 이루어져 한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왕래가 자유로워지면서 동포사회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우리 부부가 불교를 접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의 변화와 관계가 깊다. 사업을 하고 있던 아들은 한국을 자주 다니며 불교에 심취하였고, 2008년 아들이 시골에 있는 우리에게도 불교책을 보내 읽도록 권유했지만 노란 보자기에 싸 놓고 보지 않았다. 미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기 전 주변에 교회가 있어 사탕 · 과자 얻어먹느라 교회를 다녔고, 부모님이 기독교 신자라 집에 기독교책이 많아 읽을 기회가 많았다. 비록 문화대혁명 때 모두 없애 버렸지만 그런 기독교책의 영향도 있었다. 개혁개방 이후 한국에서 목사님들이 와서 우리 집에 세 번이나 찾아왔으나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내 마음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님을 믿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뒤 목단강에 천주교가 들어왔는데 아내가 ”천주교를 믿겠다“라고 해서 내가 ”믿지 말라“고 했지만, 아내는 목단강 성당에서 영세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2) 말년에 맞은 아내의 암 투병과 아미따불과의 만남(往生因)
2010년 8월 25일 아내가 미리 받은 약을 먹고 해림 시립병원에 가서 내시경을 했는데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바로 심양에 있는 아들과 상의했더니 비행기를 타고 와서 심양에 있는 중국 의과대학에 직장암에 대해 유명한 의사가 있어 그곳으로 가서 수술했다. 아내에게는 암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치질 수술을 한다고 했다. 수술을 마친 의사가 말했다.
”수술은 잘 되었으나, 암은 이미 말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아는 전문가들과 많이 상의했지만 앞으로 많이 살면 2년이니 힘들게 항암치료 하지 말고 중이약을 쓰라고 조언하였다. 그래서 중의약을 쓰면서 심양 아들 집에서 지냈는데, 이때 우리는 불교와 가까워졌다. 심양 아들은 집안에 불당을 만들고 서방 극락세계 아미타 부처님과 관음 · 대세지보살, 세 성인을 모시고 매일 염불을 했다. 아내가 수술을 받은 뒤이므로 병이 나으라고 함께 염불을 시작하였다. 1년 전부터 성당에 나가지 않던 아내도 아들의 정성을 따라 염불을 시작하였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정공 법사가 낸 『불설 대승 무량수장엄청정평등각경 친문기』란 책을 보았다. 한국어 번역본(삼보제자 출판)까지 보았지만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믿을 수가 없어 의심을 많이 했다. 그러나 아내의 병을 낫게 한다고 하여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인사하고 염불을 하였다. 당시 심양의 거사와 하루 한 시간씩 염불했던 기억이 난다. 아침저녁 염불하고 부처님께 인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렇게 2년이 지난 다음 해 2012년 아내의 병세가 악화하여 북경으로 갔다. 이때는 아들 부부가 북경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중앙암센터에서 정밀 검사를 하더니 이미 말기가 되었다면서 입원시켜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사립병원에 갔는데 의료보험 관할 구역인 목단강을 떠나면 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비싸 일주일 뒤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비싼 병원을 나와 싼 병원으로 옮겨 간 것이 아내가 극락으로 가게 되는 인연이 될 줄은 몰랐다. 아내가 입원한 병원 옆에는 조념염불당助念念佛堂이 있었다. 비영리 단체로 스스로 병원에 딸린 건물 방을 빌려 병원에서 죽어 가는 불자ᅟᅳᆯ에게 무상으로 조념을 해 준다. 이 단체에서는 조념을 해 준 뒤, 1년 동안에는 그 집에서 원해도 절대 보시를 받지 않고, 1년이 지난 뒤에는 조금씩 받아서 운영에 보탠다고 한다. 나는 처와 함께 바로 옆에 있는 염불당에 가서 염불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었다. 염불당에는 서방 삼성의 상과 함께 많은 염불 관련 책들이 있어 거기서 책을 보기 시작하였다. 아내가 아프므로 임종을 맞이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쓴 책들이 아주 마음 깊이 와닿았다.
아들은 어머니 병실에다 부처님 족자를 4면에 붙여놓고 어느 쪽을 봐도 부처님이 보이도록 해서 병실에 있으나 조념당에 가거나 늘 아미타 부처님과 함께하는 환경이 되었다. 며칠 지나자 이제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아들이 잘 아는 안휘성 난양의 절 주지와 통화했는데 어머니가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고, 심양에서 함께 염불했던 도반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 뜨기 일주일 전 아들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부처님 보셨습니까?“
”그래, 봤다.“
우리가 함께 2년 가까이 염불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영험이 없었으므로 솔직히 아내의 답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3) 이승 하직하고 극락 가는 길 – 놀라운 조념(助念)의 힘
세상 뜨기 5일 전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여보, 나 이제 갈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 잘해 달라.“
”그래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잘할게.“
이렇게 아내가 세상을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기 전날 저녁 아들이 집에 간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얼마 갈 것 같지 않으니, 집에 가지 말고 지키는 것이 낫겠다.“
그러나 당시 며느리가 임신 중이라 할 수 없이 가 보고 아침 일찍 오기로 하고 나 혼자 옆을 지켰다. 그날 밤 12시까지 지켜보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벽 4시에 옆에 있는 조념불당으로 갔다. 단장은 집에 가고 여성 팀장만 있어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잘 관찰하다가 운명하면 알려 달라“라고 하였다.
2012년 11월 13일 7시 55분, 아내는 68년의 삶을 접고 눈을 감았다.
바로 조념불당에 가서 알렸더니 팀장이 5~6명의 팀원과 함께 왔다. 이 순간 누구에게 의지하고 이 상황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 정말 큰 위안이고 버팀목이 되었다. 팀장은 나를 비롯해서 아무도 주검을 만지지 못하게 하고 의사를 부르라고 하였다. 조금 뒤 의사가 와서 보고 사망하였다고 진단했다.
팀장이 한 대원에게 무엇인가를 시키고 자기는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한 뒤 주검을 갈고 덮은 요로 감싸 20m 떨어진 조념염불당으로 옮겼다. 아내가 조념불당으로 옮겨간 뒤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 생각도 없고 평생 잘못해준 일만 생각나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때 단장 부부가 와서 말했다.
”사람은 언제나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부가 한날한시에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좋은 데로 갈 수 있으니 마음을 진정하십시오.“
차가 밀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아들이 와서 조념염불당으로 들어갔다. 조념 팀은 두 시간씩 또는 1시간씩 교대로 들어가서 염불하는데 방에 들어갈 수 있는 만큼 인원이 들어갔다. 이렇게 하루 내내 조념염불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밤새 자지 않았기 때문에 자는지 눈을 뜨고 있는지 비몽사몽의 시간을 보냈다. 조념 염불은 한밤중에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다음 날 7시 아들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해서 “어머니는 왕생했느냐?” 물었더니, ”아직 안 했다”라고 한다. 그런데 문 앞에 있는 팀원들이 이야기했다.
“마음속에 걱정이 있어 그런다.”
“연꽃이 왔는데 한 발 올리고 한 발 안 올린다.”
나는 이내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최근 자식들이 부딪친 어려움이 걸려 못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장이 팀원들을 격려하였다.
“우리가 성심성의껏 염불 안 해서 그러니 더 열심히 합시다.”
이날은 마침 법회가 있어 보살계를 받은 신도들이 많아 조념염불단이 많이 보강되었다. 이때는 나와 아들도 함께 들어가 염불하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얇은 스티로폼을 깐 바닥에 앉아서 모두 열심히 염불하였다. 그런데 나는 들어가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서 너무 힘들었다. 1시간 간신히 버티고 나오는데 아들도 그렇게 머리가 아프고 답답했다고 한다. 조념염불단에는 염불이 끝날 때마다 망인이 극락에 왕생했는지 못했는지를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아직도 왕생을 못 했다고 한다. 나는 아들에게 아까 생각했던 이야기를 하며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떠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단장이 아들에게 와서 말했다.
“아무래도 너의 엄마가 걱정이 있어 떠나지 못하는 것 같으니 네가 가서 이야기해 봐라.”
그래서 아들이 들어가 1시간쯤 엄마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며 걱정하지 말고 떠나시라고 간곡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다시 들어가 1시간 염불을 하는데 답답하지 않고 머리도 맑아졌다. 나는 나와서 아들에게 “엄마 간 것 같다”라고 했더니 아들도 “나도 그렇게 봅니다”라고 하는데 조념방 안에서 난리가 났다. 26시간 조념염불한 끝에 드디어 아내가 왕생한 것이다.
당시 나는 69살인데,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보고 주검을 처음 봤다. 세상을 뜬 지 26시간이 지났지만, 사람들이 팔을 흔들면 흔들리고 무릎 관절도 흔들린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딸과 사위가 오는 것을 기다리느라 시체 보관실로 옮기지 않고 5일장을 했지만 살아서 자는 것처럼 살결이 보들보들하였다. 이런 사실은 이미 조념염불방에서 이미 읽었지만 믿지 않았는데, 눈앞에 실제 벌어진 사실을 보고 불교를 믿어야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생겼다.
5) 아내가 극락 가며 남긴 회향(回向)
아내가 운명했을 때 나는 딸에게 전화해서 당부했다.
“절대 울지 말고 염불하라. 울면 네 어머니 극락 못 간다.”
그래서 딸이 혼자서 염불하는데 갑자기 창문으로 1m 너비의 밝은 빛이 날아 들어왔다. 깜짝 놀라서 자세히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에게 전화해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하자 “문도 안 열어놨는데 무엇이 들어왔느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뒤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평소에 뱃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몇 번 병원을 가도 원인을 알 수 없어 괴로움이 컸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빛이 들어온 뒤 몇 년 계속되던 그 소리가 싹 사라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인화 법사님에게 했더니 “어머니가 부처님에게 이야기해서 딸의 병을 가지고 갔다”라고 했다.
팔보산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북경 동쪽 120k, 떨어진 곳에 있는 청나라 황제가 모셔진 동릉 옆에 안치할 수 있었던 것도 극락 간 인연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행운이었다. 2016년 한국에 나와서 살기 이전에 몇 번 갔는데 그 뒤로는 못 갔지만, 아내는 극락에 있으니 북경과 서울 같은 차이는 없을 것이다.
나는 아내가 극락에 간 뒤 정말 깊은 신심을 가지고 염불을 열심히 하고 매일 108배를 하였다. 내 방에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하루 24시간 계속 염불기에서 낮은 염불 소리가 이어진다. 이렇게 염불하니 부처님의 큰 가피도 받는 것 같다. 내가 전에 주역을 좀 보았는데 내 사주에 내 명은 76살이 끝이었다. 바로 그해인 2019년 크게 아팠다. 여름에 폐렴이 걸렸는데 같이 앓은 친구는 죽고 나는 살았다. 걷지를 못해 친구 초상에 가지도 못했다. 작년에는 대상포진에 걸렸고, 올해는 코로나 걸렸으나 죽지 않고 나았다. 전생과 현생에 진 죄를 갚고 있는 것이고 염불한 공덕으로 고비를 넘기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108배를 못하였지만 32배를 하고 끝나면 앉아서 속으로 염불한다.
더 큰 증과證果도 있다. 2년 전부터 귀에서 염불 소리가 들린다. 첫 일 주일 동안은 그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고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안 들릴까 봐 겁이납니다. 자다가 일어나면 염불 소리가 들린다. 이야기할 때 안 들리지만 조용하면 들린다. 관정 스님이 쓴 책을 보니 이것을 자성염불이라고 했다. 지금도 어떤 날은 왼쪽 귀에서, 어떤 날은 오른쪽 귀에서 염불 소리가 나는데, 왼쪽은 세고 오른쪽은 약하다.
나는 옛날부터 산골을 좋아했다. 앞으로 남은 삶 산에 들어가서 수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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