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음원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에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진가가 최고조로 발현한 장르는 역시 협주곡을 포함한 피아노 음악이었다. 그는
탁월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였기에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닌 가능성을 극대화한 음악들을 작곡하고 나아가 직접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는 그중에서도 지명도와 인기도 양면에서 단연 첫손에 꼽히는 작품이다. 이
협주곡의 극적 흐름은 이른바 ‘베토벤적인 구도’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 물론 그 호흡과 표현은 지극히
‘라흐마니노프적’이지만.
첫
악장은 마치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시작되어, 무겁고 두꺼운 어둠의 장막을 헤치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며
점차 열기와 강도를 더해 가는 투쟁을 연상시킨다. 그 투쟁은 끈질기고 장엄하다. 느린 악장에서는 탄식과 고뇌, 절망과 희망이 교차한다. 그
지독한 서정성! 애절하지만 감미롭고, 화려하지만 진솔하다. 마지막 악장은 춤곡이자 행진곡이다. 역동적인 리듬과 정열적인 어조로 마침내 광명과
승리를 쟁취해내고야 만다. ‘고난을 극복하고 환희로!’
그런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런 흐름에는 라흐마니노프 생애의 단면이 투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협주곡은 작곡가가 경력 초기에 겪었던 좌절,
그로 인한 실의와 고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분투의 과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협주곡을 통해서 그는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나 환희를 향해 나아갔다.
야심작의
실패와 침체기
라흐마니노프의
나이 25세 되던 해인 1897년 3월 28일, 그의 교향곡 1번 d단조(Op.13)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다. 5년 전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한 이래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로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가고 있었던 그는 이 열의 충만한 대작이 자신의 경력에
한 획을 긋는 회심의 역작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 초연은 재앙에 가까운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일단 연주가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지휘를 맡은
글라주노프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을 가진 것이 패착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혹평이 쏟아졌고, 그중 ‘5인조’의 일원인 세자르 퀴는 “‘애급의 재앙’에 관한 교향곡 같다”며 비아냥거렸다. 젊은 작곡가는
절망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실의에 빠진 나머지 신경쇠약에까지 걸렸다. 무엇보다 작곡에 자신감을 잃은 그는 그로부터 3년간 거의 아무 곡도
쓰지 못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러져버렸다. 여러 시간 스스로 질문하고 또 회의해본 결과, 나는 작곡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뿌리 깊은 무감각이
날 점령해버렸다. 나는 낮 시간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 누워 파괴되어버린 내 생애를 한탄하면서 보내고 있다.” ◀1890년대
중반 러시아 이바노프카 지방에서 찍은 사진. 맨 뒷줄 좌측에서 두 번째가 라흐마니노프, 맨 앞줄 좌측에 앉아 있는 여성이 뒷날 그의 부인이 되는
나탈리아 사티나.
다만
그동안 다른 방면의 활동까지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유력한 철도 기업가이자 예술 후원자인 사파 마몬토프가 그에게 자신의 사설 오페라단의 부지휘자
자리를 제안했고, 그는 거기서 평생 친구로 지낼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을 만나기도 했다. 또 1899년에는 런던의 퀸즈홀에서 성공적인 영국
데뷔 공연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력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혹시 격려를 받을 수 있을까 싶어 평소 존경했던 톨스토이를 찾아갔지만, 대문호는 오히려 그가
샬리아핀과 함께 들려준 가곡(베토벤의 교향곡에서 착안한 ‘운명’이라는 곡으로, 그가 교향곡 1번의 실패 이후 가까스로 써낸 몇 안 되는 소품 중
하나)에 비판을 가했다. 또 사촌이자 동료 피아니스트였던 나탈리아 사티나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했지만, 러시아 정교회와 그녀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시름을 더했다.
달
박사의 치료와 재기
결국 그는 수소문 끝에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 박사를 찾아갔다. 달 박사의 처방은 일종의 ‘자기암시 요법’이었는데, 환자에게 가벼운 최면을 걸어 놓고
그 귓가에서 필요한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라흐마니노프의 경우에는 “당신은 새로운 협주곡을 씁니다. 그 협주곡은 성공을 거둡니다.”라고
읊조리는 식이었다. 이 치료를 3개월 정도 지속하자 효과가 나타났다.
자신감을
되찾은 라흐마니노프는 새로운 대작에 도전했다. 그의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이 된 이 작품은 1900년 가을에서 1901년 4월 사이에
작곡되었다. 먼저 2악장과 3악장이 완성되어 1900년 12월 2일에 작곡가 자신의 독주로 시연되었고 1악장은 그 후에 완성되었다. 그 음악에
그가 겪었던 상처, 회한, 몸부림의 환영이 드리운 건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그는 자신의 화려한 피아니즘과 장대한 관현악 서법,
풍부한 상상력을 한껏 투입하여 새 희망을 향한 갈망과 의지를 힘차게 노래했다. ▶니콜라이
달 박사(1860-1939)
1901년
11월 9일, 마침내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가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피아노, 알렉산더 질로티가 지휘한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정식 초연되었다. 결과는 대성공!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으로 다시 한 번 글린카 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했고, 자신의 재기에 결정적 도움을
준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작품을 헌정했다. 아울러 그의 재기는 장차 러시아 낭만주의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거인의 나래가 비로소 활짝 펼쳐진
사건이기도 했다.
1악장:
모데라토
2/2박자,
c단조. 이 드라마틱한 악장은 묵직한 피아노 독주로 출발한다. 낮고 어두운 화음과 깊숙한 베이스 음이 교대로 울려 퍼지는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심상은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주요 아이콘인 ‘종소리’이다. 점점 크게 들려오는 그 종소리는 마치 재기를 향한 각성과 의지를 촉구하는 신호처럼
들리기도 한다.
일련의
종소리가 정점에 도달한 다음 순간에 현악 파트에서 제1주제가 터져 나온다. 공간을 폭넓게 휩쓸어가는 듯한 이 러시아 풍 선율이 음울하게 흐르는
동안 피아노는 그에 대응하는 장식적인 음들을 연주하는데, 이는 러시아 협주곡의 전통 가운데 하나인 장식 변주의 일환이다. 이 장면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효과적인 통합으로 창출되는 긴밀한 앙상블과 강렬한 이미지는 실로 인상 깊다.
이
음울하고 강렬한 흐름이 일단락되면 피아노가 제2주제를 등장시킨다. 이 E플랫장조 선율은 음계를 보다 빠르게 오르내리며, 현악 파트의 선율과
어우러져 작품에 서정적 이미지를 더한다. 이어서 장엄한 금관의 화음 연주와 함께 발전부로 진입하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한층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흐름을 타고 격렬한 드라마를 구축해 보인다.
재현부
이후의 흐름은 더욱 흥미로운데, 제1주제는 행진곡 풍으로 재등장하고, 제2주제는 길게 늘어져 호른의 나직한 소리로 노래된다. 카덴차는 생략되어
있으며, 종결부는 이완된 분위기에서 출발하여 수수께끼처럼 흐르다가 다시 힘을 모아 강력한 울림으로 막을 내린다.
2악장
: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4/4박자,
c단조 - E장조. 이 중간 악장은 여러모로 라흐마니노프의 멘토였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B플랫장조를 연상시킨다. 일단 시작 부분에서
오케스트라에 의한 짧은 경과구가 나타나 앞선 악장의 조성(c단조)에서 본 악장의 조성(E장조)으로 이행하는 수법이 그렇고, 그 다음에 주제를
꺼내 놓는 플루트 및 클라리넷 솔로가 나타나는 부분도 그러하다. 아울러 악장 중간에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스케르초 풍 섹션이 삽입된 점도
마찬가지이다.
이 악장의 느린 부분은 몽환적인 기운으로 가득하여 마치 최면 상태에 빠진 라흐마니노프의
의식의 흐름을 그린 듯하다. 그 흐름 속에서 갖가지 환영들이 스쳐 지나가고,
의식은 때로 그 수면 아래 잠겨 헤매기도, 솟구치려 몸부림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 모든 아픔과 고뇌를 뒤로하고 밝은 세계를
향하여 뚜벅뚜벅 나아가는 주인공의 의연한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3악장
: 알레그로 스케르찬도
2/2박자,
E장조 - c단조 - C장조. 먼저 다소 경박한 춤곡 풍 리듬 위에서 진행되는 오케스트라의 전주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화성은 앞선 악장의
E장조에서 본 악장의 c단조로 움직인다. 계속해서 피아노가 현란한 연결구를 연주한 다음 격앙된 제1주제를 펼쳐 놓고, 그로 인한 흐름이
일단락되면 제2주제가 오보에와 비올라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이 러시아 풍 선율은 제1악장의 제2주제와 연계되어
있다.
발전부와 재현부를 대단히 긴박하고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 후에, 마지막 절정부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오케스트라의 격앙된 합주로 제2주제를 커다랗게 부각시킨다. 흡사 승리의 함성
또는 선언처럼 들리는 이 희열 넘치는 클라이맥스를 기점으로 음악은 환한 C장조로 완전히 전환되고, 그 기세를 그대로 몰고 나가 강한 긍정과
확신을 나타내는 C장조 으뜸화음을 장쾌하게 울리면서 마무리된다.
Yuja
Wang -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Yuja
Wang, piano
Yuri
Temirkanov, conductor
Verbier
Festival Orchestra
Salle
des Combins, Verbier
2011.07.27
추천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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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피아노)/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스타니스와프 비스워츠키(지휘), DG,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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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 음악 감상실 ‘무지크바움’ 실장과 한국바그너협회 사무간사를 역임하였다. 무지크바움, 부천필 아카데미, 성남아트센터,
풍월당에서 클래식음악 교양강좌를 맡고 있다. <객석>, <스테레오뮤직>, <그라모폰>, <라무지카>
등에 칼럼을 기고했고 현재 서울시향 프로그램 노트를 담당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문화예술>음악>기악합주>협주곡 2014.11.07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6&contents_id=720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