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식사
- 김선우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던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으니 이제 참으로 두려운 것은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
* 김선우(金宣佑) :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지, 2007)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 2012) 『녹턴』(문지, 2016) 『내 따스한 유령들』(창비, 2021)과, 청소년 시집 『댄스, 푸른푸른』(창비교육, 2018) 『아무것도 안 하는 날』(단비, 2018),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 개정판, 단비, 2012 / 재개정판, 2021)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미루나무, 2007)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새움, 2007)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청림출판, 2011) 『부상당한 천사에게』(한겨레출판, 2016) 『사랑, 어쩌면 그게 전부』(21세기북스, 2017), 그리고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캔들 플라워』 『물의 연인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외에 다수의 시 해설서를 출간.
타자와 하나가 되는 방식은 그 당위성을 만들기 위해 자아 성찰의 모습으로 지평을 확장한다. <깨끗한 식사>의 시적 주체는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 간다”고 ‘나’의 퍼 스낼리티를 규명한 후,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 작용인 노에시스(noesis) 속으로 잠입한다. 따라서 시적 주체는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음”을 골똘히 생각한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하나 되기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자연의 한 조각이 되는 역동성 이다. 그 두렵고도 미안한 감정은 타자의 죽음이 상품으로 쌓여 있는 시장에도 없음을 확인하고 시적 주체는 빤 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이다. 천 년 전이나 만 년 전이나 한결같았던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 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나’에게 없어 괴롭다. 즉 시장은 타자와 내가 마주 쳐다보며 꿈 틀거리던 욕망이, 고마움이, 두려움이 ‘상품과 화폐’로 거래되는 공간이다. 이런 성찰로 인해 주체는 타자를 현재의 프레임에 가두는 것을 경계한다.
이렇게 정신적 유전자 속에 잠재된 의식을 정치하게 드러내는 것은, 타자와 하나 되기의 당위성에 방점을 찍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되는 타자에 대한 메타 인지적 연민 때문이다. 또한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와 타자가 즉자와 대자의 모습으로 고정되게 놓아두지 않는다. 이것은 누가 먼저 소유를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유동적인 관계이다. 내 밥상 위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나도 타자(식물)의 밥상 위 에 언젠가는 얹힐 것이다. 시인은 양가적 고민에 빠져 소리친다.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라고.
고광식 시인ㆍ문학평론가 /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 ‘타자를 소유하는 두 가지 방식’ 발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먹는 일만큼 거룩한 일도 없다.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었던 생명의 공양을 받는 행위다. 채식이든 육식이든 잡식이든 다른 생명을 먹어서 우리 삶을 이어가는 것을 뜻하고, 우리 또한 누군가의 삶을 위해 먹이가 되어야 한다는 암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풍요 속의 많은 먹을거리는 먹는 일 조차 천박하게 만들고 있다. 내 손을 거치지 않고 식탁에 오른 맛있는 먹을거리는 먹는 행위의 엄숙함을 잊게 만들었다. 내 밭에서 씨를 뿌리고 기른 채소였다면, 내 우리에서 새끼를 받아 기른 돼지였다면, 그렇게 올라온 먹을거리라면 아마 조금은 고맙고 미안하게 입으로 가져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비닐하우스에서 사육장에서 내가 보지도 못하는 가운데 길러진 생명들을 지폐 몇 장으로 바꾸어 먹는다. 그들이 어떻게 길러졌는지는 관심이 없다. 오직 맛있는 것을 찾아 탐욕스럽게 게걸스럽게 먹으면 된다.
김선우 시인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떨림이 없다. 고맙고 두렵게 먹는 법을 잃어 버렸다. 독립운동은 마치 무한도전에서나 기억하듯이 우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다.
박성율
시인이란 참 희한한 족속입니다.
밥 한 끼 먹으면서도 저리 생각이 많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시인입니다.
밥 한 끼가 허투루 넘어갈 일이 아니라
어쩌면 우주적 사건이란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하니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핏줄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무속을 흐르는 수액을 잘안다. 우리는 이 땅의 한 부분이며 땅 또한 우리의 일부다. 향기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다. 곰과 사슴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바위, 수풀의 이슬, 조랑말의 체온, 사람 이 모든 것이 한 가족이다."
- 『시애틀 추장』
세상에 남이란 없습니다. 天下無人
네 이웃 보기를 네 몸 같이 하라 視人若其身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근대사는 타자화의 역사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을 타자화하고 자연을 대상화해온 역사였습니다.
- 신영복, 『처음처럼』
"천지만물에 두루 성스러움과 존엄함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받들어 대접하는 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 전우익,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김선우의 「깨끗한 식사」를 읽으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떠올릴까 궁금합니다. 저는 시애틀 추장이 떠오르고, 신영복 선생과 전우익 선생이 떠오르더군요. 정확히는 그 분들의 어떤 책과 그 안에 담고자 했던 마음을 잠시 떠올렸더랬습니다.
'밥이 치욕스럽다. 먹어야 사는 생生이 비정하다'(함순례 시인)고도 하지만, 먹어야 사는 그 순환구조가 우주의 구조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을 겁니다.
문제는 "떨림"입니다. 김선우 시인의 말처럼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올 한 해는 한끼 식사를 위해 차려진 밥상 앞에서
"두렵고 고마운 마음의 기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의 떨림"
을 가질 수 있기를, 김선우 시인의 저 측은지심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가질 수 있기를 소원해봅니다.
박제영 시인 / 박제영 시인 네이버 블로그 <안녕 오타 벵가> 2009. 1. 5. '소통의 월요시편지_120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