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나는 네 웃음소리를 좋아했어
아침에 잠에서 깨어 맨 먼저 하는 일은 커튼을 젖혀 반지하 창으로 햇빛을 들이는 일이야. 내가 얇은 파자마 차림에 맨발로 창틀에 기대 서서 몸을 한번 흠칫 떨었다면 너는 당연히 추워서라고 생각하겠지? 또 자동차 소리마저 끊긴 적막한 시각에 혼자 불빛 아래 앉아서 식빵을 굽는다면, 토스트에 아주 천천히 피너츠버터를 덧바르고 있다가 갑자기 탁자유리 위에 빵칼을 내던지며 벌떡 일어서는 내 모습을 본다면 넌 내가 외로워한다고 여길지도 몰라. 그러나 틀렸어. 그때마다 부리나케 방으로 뛰어들어가서 내가 뭘 하는 줄 알아? 엄마가 쓰던 경대의 둘째 서랍을 열고는 호들갑스러운 몸짓으로 귀이개를 꺼내는 거야. 입안에 고이는 침을 삼켜가면서 귓속을 후벼파고, 그러는 중에도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반쯤 감은 눈을 꿈벅이며 연신 킥킥대고 있는 나를 상상해봐. 대체 어떻게 해서 네 웃음소리가 내 몸속으로 들어와 돌아다니는 걸까.
모든 연인들처럼 우리도 함께 극장에 간 적이 있었지. 너는 극장에서만 안경을 썼어. 번호를 찾아 좌석에 앉자마자 너는 주머니에서 안경집을 꺼냈고, 나는 그것을 빼앗듯이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알을 만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안경을 꺼냈잖아. 마치 너의 옷 속 깊이 손을 넣어 심장을 꺼내듯이. 너의 안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오래오래 알을 닦는 일이 행복했어. 그런 나를 어둠속에서 말없이 내려다보는 너의 얼굴, 대형 스크린의 빛이 반사되어 천둥이 치는 날처럼 순간순간 표정이 바뀌는 것도 기분좋았고 말이야.
그리고 또 내가 좋아한 것? 그것은 양쪽에 각기 여덟 개의 구멍이 뚫려 있던 너의 갈색 구두야. 너무 매끄러운 끈이었던지 자주 매듭이 풀어졌지. 어? 끈이 또 풀어졌잖아?라고 소리치는 내 목소리는 모래밭을 걷다가 은빛 동전을 발견한 아이의 탄성처럼 들떠 있었어. 너의 한쪽 발을 거리의 화분대 위에 올리게 하고 무릎을 구부려 끈을 묶어주는 게 너무 좋았거든. 그때마다 네가 내 목덜미에 후, 하고 입김을 불어주지 않았대도 그랬을까? 어쨌든 너는 다 알았을 거야. 내가 좋아한 너의 엄지손톱 속의 하얀 반달, 내가 좋아한 너의 왼쪽 무릎의 흉터, 그리고 웃을 때 잡히는 콧등 위의 주름. 언제나 추운 날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걷는 걸음걸이와 오후 네시의 그림자가 들어갈 만한 너의 긴 보폭까지, 그것들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그걸 알면서도 죽었단 말이지. 나쁜 자식.
오늘은 ‘자끄 데쌍주’에 나가지 않았어. 일요일이냐구? 그렇다면 내가 왜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 이렇게 천장 벽지의 패턴을 쳐다보며 누워 있겠어. 몸살이 나서 쉬는 것뿐이야. 나를 찾아왔던 손님들이 다음에 오마고 그냥 돌아가버리면 원장이야 속으로 짜증이 나겠지만, 솔직히 난 요즘 통 일할 마음이 안 나. 손 안에서 자주 가위가 미끄러지고 뜨거운 드라이어를 잡아당길 때마다 어깨가 빠질 듯이 무겁게 느껴진다구. 너한테도 얘기한 적 있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릴 때에도 난 팔이 두 번이나 빠졌다잖아. 얼마 전에는 손님 머리에 중화제를 바른다는 것이 얼굴로 몽땅 흘려버렸어. 글쎄, 파마액을 개어놓은 플라스틱통을 바닥에 떨어뜨리기까지 했다니까. 다행히 걸쭉한 액체라서 쏟아지지는 않았지. 네가 꼭 면도 크림 같다고 해서 내가 콧등과 뺨에 연지처럼 한 점씩 찍어주었던 하얀 스트레이트파마액 말야. 버터빵을 먹을 때에도 생각난다고 했잖아. 그러고 보니 정오가 지났는데도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았구나. 냉장고에 식빵이 있을 거야.
아까 전화를 걸었을 때 원장이 한 말이 생각나. 그럼 쉬어, 많이 아프면 병원에 가보고, 내일은 나올 수 있지? 모두들 나를 걱정하고 있어. 재작년 엄마가 죽었을 때도 그랬어. 내가 슬픔 때문에 앓아누운 거라고 생각하나봐. 그래도 내 급료에서 여지없이 하루 일당을 제할 테지만 말야. 그동안 네가 나를 만나러 와서 손님들 틈에 끼어 앉아 패션잡지를 뒤적이는 걸 원장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했니. 네가 죽고 난 지금 그게 조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야. 왜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 관대하지? 모두들 죽음을 나쁜 소식이라고 안됐다고 말하는데,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손해인가? 이 세상이 그렇게 좋은 곳이야?
물론 죽은 사람에게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오지 않지. 모두들 내일이 온다는 말을 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쓰고 있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리라,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내일을 향해 뛴다…… 그런데 내일이 오는 것,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희망이라는 걸까? 나에게 내일이란 시끄러운 유행가와 각종 헤어 제품의 독한 냄새와 드라이어의 열기 속에 서서 종일 상한 머리카락들과 씨름을 하는 끝없는 시간일 뿐이야. 하루 한끼를 탈의실에 서서 순두부나 유부국수로 때워가며. 자신의 용모에 대한 손님들의 착각을 요령껏 부추겨야 되고, 게다가 요즘은 손님이 부쩍 줄어 원장의 신경질까지 견뎌내야 하거든. 하지만 그런 건 괜찮아. 그 정도 힘들지 않고 어떻게 돈을 벌겠어. 그보다는 말야, 내일이 와도 네가 내 곁에 없으리라는 사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내일이라는 말을 희망의 의미로 쓸 수 없게 만드는 거야. 거꾸로 오늘 다음에 어제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도 살아 있을 테고, 그??또 지나온 시절이 좋았던 건 결코 아니지만, 내가 이미 다 아는 일들이 닥쳐올 테니 적어도 두렵지는 않을 거 아냐.
아무튼 내 생각은 그래. 너의 죽음이 너에게보다 나에게 훨씬 나쁜 소식이라는 거야.
빵이 차갑고 딱딱해서 토스터에 넣어야겠어. 버튼을 누르니 금방 코일에 빨간 불이 들어와서 빵을 달구는구나. 찰칵. 노릇해진 식빵이 카메라 셔터 같은 소리를 내며 토스터의 하얀 몸체 위에 반쯤 올라앉았어. 타이머가 30에 맞춰져 있으니 정확히 30초가 지났을 거야. 너, 혹시 시계를 보고 있는 거 아니니? 당연해 보이는 일일수록 일단 의심하는 게 너의 못된 버릇이잖아. 하긴 네 손목시계는 걸핏하면 죽어 있었지. 네 말로는 너의 몸이 무슨 특수한 자장을 지녀서 세상의 시간과는 톱니가 물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솔직히 순 싸구려만 차니까 그런 거지. 네 몸에서 죽어나간 시계가 내가 알기로도 열 개는 넘을 것 같은데?
너 지금 나를 빤히 쳐다보는구나. 또 그걸 지적하려는 거지? 죽었다는 말을 함부로 쓴다고 말야. 미안해. 이제 정말 고칠게. 엄마가 그러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형광등ㆍ석유풍로ㆍ전화기ㆍ라디오 따위의 물건이 고장나면 모조리 죽었다고 표현했대. 그래도 제 몸에 타이머가 달려 있어 꺼지는 시간을 스스로 아는 토스터 같은 것한테 죽었다는 말을 써본 적은 없어. 내가 알기로 죽음이란 늘 뜻밖의 시간에 오니까. 있잖아 만일 사람의 목숨도 타이머를 맞춰놓은 동안만 작동되다가 멈춘다면 너는 너를 몇살의 시간에 맞추고 싶니? 30년? 40년? 그러고 보니 너에게는 선택할 기회가 없구나. 그런 시시껄렁한 상상도 못해보고 스물네살에 죽어버렸으니 너에게 죽음이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 손해이긴 하구나. 넌 시시껄렁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했잖아. 제아무리 나쁜 생각에 도통한 너라도 자신이 그렇게 일찍 죽을지는 몰랐던 게 틀림없어.
너는 강을 끼고 있는 유원지의 외딴 공중전화 부스 안에 죽어 있더라지. 네 주머니에는 몇장의 지폐와 동전뿐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 다행히 안경집을 발견한 경찰은 거기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안경점을 찾아냈고 안경점 이층에 있는 ‘자끄 데쌍주’로 나를 찾아왔지. 나는 그들에게 뜨거운 녹차를 타다 주었어. 아직도 믿지 못하겠어. 네가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왜?
경찰도 그걸 궁금해했어. 난 해줄 말이 없었고. 그들이 하도 다그치는 데 질려서 한 번만 더 물어보면 네 시계가 늘 죽어나가더란 말이라도 해줄까 했지. 네가 죽을 때 차고 있던 시계는 아직 살아 있더냐고 물어보고 싶은 건 꾹 참았고. 그들은 네가 유서를 써놓지 않아 자기들을 귀찮게 한다고 불평하더라. 그래 참, 그들이 주고받는 말로는 너의 안경집이 들어 있던 반대편 주머니에 사진이 한 장 있었던 모양인데 그건 내게 보여주지 않았어.
아무튼 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살아 있는 편이 천 배는 더 좋았겠지만 죽어버렸으니 어떡해. 그냥 죽은 너를 사랑할 수밖에. 네가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리도 없잖아. 이미 생겨난 것인데 그 사랑이 어디로 사라지겠어. 어릴 때 난로 위의 주전자를 한나절씩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는 말을 너한테 했던가? 기운차게 치솟던 하얀 김이 점점 흩어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서운했어. 어디로 간 걸까. 그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여전히 공기 중에 다른 형태로 떠 있다는 사실을 자연시간에 배우고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지. 죽음이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바뀌었다는 뜻일 뿐 사라진 건 아니야. 죽은 너를 사랑하는 일이 조금 외롭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런 건 두렵지 않아. 두려운 건 너를 잊는 일이야. 너를 잊게 되면 나는 단 한 번의 사랑, 그것을 영원히 잃는 거니까.
으음, 구운 빵 냄새가 제법 고소한데. 너도 함께 있으면 좋았을걸.
태어나기 전부터 죽음은 나를 따라다녔지
앨범을 보고 있어. 엄마 사진. 아니 아버지 사진도 돼. 두 분이 함께 있으니까. 나까지 셋이 찍은 사진? 그런 건 당연히 없지. 난 유복자잖아. 내가 아무리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지만 무슨 수로 태어나기 넉달 전에 죽어버린 아버지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겠어.
너도 기억하겠지, 처음 이 방에서 함께 지냈던 그 밤. 그날 너도 이 앨범을 봤잖아.
비가 오던 밤이었어. 습기 때문인지 네 몸은 차갑고 감촉이 좋았어. 이마 위로 흘러내려온 네 머리카락이 젖어서 마치 코팅이 잘된 촉촉한 머릿결을 만지는 기분이었어. 우리가 아무 말 없이 빗소리만 듣고 있었던 게 몇분이나 되었을까. 네가 물었지. 넌 왜 브래지어를 안 하니? 그래서 내가 엄마 얘기를 하기 시작한 거야. 작년 봄 벽제에서 엄마를 화장할 때……라고 말을 꺼냈던 것 같다. 엄마가 쓰던 물건까지 태우고 나니 눈이 너무 매워서 울었다고 말야.
……엄마 물건 중에 옷이 제일 많았지. 모두 오래전에 유행이 지나간 그 옷들. 가슴에 아쁠리께 스티치로 포도가 수놓아진 흰색 리넨 블라우스와 기계주름이 반쯤 풀어진 분홍색 주름치마는 엄마가 처녀 때 입던 옷이었어. 모조 보석과 핸드백, 모자 들도 다 색이 바래거나 귀퉁이 칠이 벗겨진 것들이고. 무엇이든 잘 버리지 못하는 엄마에게는 늘 귀신 보따리 같은 구닥다리 물건이 한짐이었지. 그렇게 이사를 자주 하면서도 왜 그것들을 한사코 끌고 다녔는지 몰라. 어쨌거나 엄마는 멋쟁이라고 봐야 할 거야. 나는 그저 면 남방에 청바지 스타일이잖아. 머리는 늘 숏컷이고. 하지만 엄마는 머리를 길게 길렀고 밤마다 낡은 플라스틱 바구니에서 색 바랜 클립을 꺼내 머리를 말고 잤어. 물론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였지만 말야.
엄마는 내게도 여자다운 차림새를 가르치려 했어. 엄마가 여자다운 것만도 지겨운데 내가 그 말을 곱게 들었을 리가 없지. 고등학교 때 엄마가 사다준 거들이란 것,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왜 브래지어를 안 하냐고?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야. 갑갑해서 싫기도 했지만 무슨 알러지인지 몰라도 고무줄 닿은 자국이 밧줄처럼 붉게 부풀어올라서 밤이면 피가 나도록 긁는 게 일이었거든. 그땐 가정선생님이 검사를 하니까 브래지어야 안 할 수 없다지만 거들이라니, 거머리떼 같은 고무줄을 몸에 친친 감고 다니라고? 엄마는 예뻐지는 데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나를 달랬지. 뼈가 굳기 전에 몸매를 만들어놓아야 한다나. 나는 몸매 따위를 위해서 손톱에 피를 묻히느니 차라리 혈서로 쓴 성경책을 만들어 모기에게 선물하겠다고 어깃장을 놓았어. 여자로서의 고통을 참는 건 엄마 하나로 충분하다고 말해 결국 엄마를 울리고 말았지.
텔레비전을 볼 때도 우린 걸핏하면 채널을 갖고 다투었어. 난 드라마를 좋아했는데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리 화면 가득히 드라이아이스가 뿜어져나오는 화려한 쇼를 더 좋아했거든. 그리고 내가 월급날 저녁을 사겠다고 하면 꼭 양식집을 찾았고, 비싸서 주문하지 못할 게 뻔한데도 언제나 메뉴 앞장에 있는 코스 요리를 꼼꼼히 살펴보는 거야.
정작 엄마 자신의 요리솜씨는 형편없었어. 몇십년을 해왔는데도 밥은 어김없이 되거나 질고, 김치는 싱거워서 일찍 시어빠지거나 아니면 마늘 생강을 고춧가루에 버무릴 때 너무 치대서 풋내가 났지. 그런데도 김치는 간 맞추기가 워낙 어렵기 때문에 여럿이 모여 담그는 전통이 생겨났다고 근거없는 핑계만 대는 거야. 그런 엄마가 파출부를 했을 때는 어땠는 줄 아니? 의사 부부의 집에서 다섯살짜리 딸아이 하나를 돌보는 좋은 자리였는데 금방 쫓겨나고 말았지. 집안일은 제쳐놓고 아이 머리핀이나 레이스 달린 양말 따위를 사준다고 상가만 돌아다니니, 처음에는 교양있고 깔끔한 사람에게 아이를 맡긴다고 좋아하던 주인들도 머리를 흔들 수밖에. 엄마는 우는 것 빼고는 잘하는 게 거의 없었어. 눈물의 여왕이었지. 난 가난한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그것을 탄식하는 엄마의 청승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 엄마의 울음에 하도 넌더리가 나서 내가 울지 않게 된 건가? 아니면 엄마가 울 때마다 속으로 따라 울다 보니 눈물이 다 말라서 나 자신을 위해서는 울지 못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함부로 말한다고 내가 엄마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오해야. 너를 알기 전에 나는 엄마만 사랑했어. 네가 우리 엄마를 한번 봤어야 하는 건데. 오십이 되어도 그렇게 예쁜 여자의 딸이라면 분명 넌 나를 더 마음에 들어했을 거야.
여기까지 말했을 때 네가 윗몸을 반쯤 일으키고 내 입술에 입맞추며 물었어. 너의 엄마 사진까지 다 태워버렸니? 한번 보고 싶은데. 그 말을 할 때 너의 눈은 웃고 있었고 목소리가 너무도 다정했어. 나는 이불깃을 가슴 위까지 끌어당겨 쥐고는 앨범을 꺼내기 위해 일어났지. 내가 책장 쪽을 향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너의 몸에서 이불이 점점 벗겨져나갔어. 너는 아랫도리를 가리기 위해, 나는 내 벗은 뒷모습을 네가 볼까봐 서로 제 쪽으로 이불을 잡아당겼던 거 생각나니? 팽팽해진 이불이 텐트처럼 거의 공중에 떠 있었지.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고 밤이 깊었어. 선 위에 선을 자꾸 겹쳐 긋듯이 빗소리는 점점 두터워지고 창문에는 어둠이 꽉 들어차서 마치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차단해주는 듯했어. 둘 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우리는 일 나간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외딴 집의 가난한 오누이처럼 나란히 이불을 쓰고 사진을 보기 시작했지. 나이로 따진다면 내가 한살 위니까 누나가 되겠지만.
무슨 앨범이 이렇게 많아? 하고 네가 물었고 나는, 아직 정리 못한 사진이 두 상자 더 있어, 난 사진이 잘 받거든, 디피점 주인 말이 렌즈가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대,라고 대답했어. 그러자 너는 천장을 향해 짧게 휘파람을 휙 불고 나서, 그놈도 나하고 생각이 같네, 했지. 디피점 주인? 아니 렌즈.
그런데 그날 왜 우리는 싸웠던 걸까. 앨범 첫장을 넘기자마자 너는 얼굴빛이 나빠지기 시작했지. 첫번째 사진이 엄마가 처녀 때 놀러가서 친구들과 찍은 것이었는데 그걸 볼 때 네 얼굴은 참 이상했어. 단순히 놀랐다기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어. 내가 앨범 끝장을 넘길 때까지 넌 무서울 정도로 침묵을 지켰지. 멀리 천둥소리가 꼭 우리의 머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가까이 느껴지더라. 왜 그래? 조심스레 말을 붙여보았지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앨범을 덮자마자 반듯이 드러누워버리는 너에게 내가 또 한번 물었지. 사진 보는 거 안 좋아해?
사진은 끔찍한 거야. 대답하는 네 목소리는 음산하기까지 했어. 어쩐지 불안하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해서 나는 아는 체하며 따졌어. 사진은 시간의 기록이래. 사진이 없으면 나처럼 기억력 나쁘고 일기도 안 쓰는 사람은 대체 무엇으로 지나간 일을 기억할 수 있겠니? 너는 천천히 대꾸했어. 지나간 일을 기억한다고? 뭣 때문에? 그거야…… 나는 네가 그렇게 당연한 것을 걸고 넘어질 때마다 대꾸할 말이 없어 화가 나곤 했지. 너는 빈정거리듯이 중얼거렸어. 과거를 뭐하러 찍어두었을까, 알리바이도 아니고.
하도 기가 막히고 분해서 나는 너와 그만 헤어져버릴까 생각하기도 했어. 그러나 그건 무리였지. 금방 세수를 마친 듯이 늘 반들반들 윤기가 나는 너의 귓바퀴 돌기를 이미 좋아하기 시작해버렸거든. 그리고 말야 조금 전 너를 안았는데 어떻게 헤어진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어. 그게 그냥 말이지 어디 진심이겠니. 대신 나는 네가 뭐라든 여전히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복수해줬지. 눈 오는 날 장흥에 놀러갔을 때가 작년 1월이었던가? 그때는 너도 내 성화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사진을 찍어주었어. 첫눈에 짐작했지만 넌 네 자신이 자기라고 알고 있는 그 사람보다 열 배는 마음이 약해. 연안부두에서는 까페 주인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창가 자리에서 셔터를 눌러주었잖아. 하지만 그다지 멋들어진 복수는 아니었던 것 같아. 너 자신은 한 장도 찍지 않았으니까.
그 생각을 하니 좀 우울해진다. 억지로라도, 아니면 몰래 네 사진을 찍어둘걸 그랬어. 혹시 내 사진들 어딘가에 너의 조그만 뒷모습이 들어 있지 않은지 찾아볼까. 그럴 리는 없구나. 내 사진을 찍은 건 언제나 너였고, 그리고, 만나고 있는 동안 너는 언제나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으니.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카메라 렌즈처럼.
지금도 날 보고 있지, 그렇지?
가까이 와줘. 그날 밤처럼 너와 함께 다시 앨범을 보고 싶어. 그러고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과거의 기록이 끔찍하다고 잘난 체하더니 왜 죽을 때 사진 따위를 갖고 있었던 거야? 어쨌든 좋아. 이번에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못할걸. 이제 죽었으니 네까짓 게 무슨 고집을 부릴 수 있겠어. 죽은 너, 더이상 변할 수 없고 내게서 벗어날 수도 없는 존재, 이제야말로 넌 완전히 내 거야. 나만의 냉동실에 들어 있는 영원한 사랑이라구. 그러니 투덜대지 말고 먼저 이 첫번째 사진부터 함께 보자. 엄마와 아버지가 서로 사랑하기 전의 사진이야.
사진 1: 처녀시절 엄마의 즐거운 한때
바닷가인가봐.
여자 셋이 앞줄에 나란히 서 있고 그 뒤로 남자가 둘, 넷, 다섯 명이야.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뜨린 여자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처녀다운 탐스러움을 느끼게 하는구나. 셋 다 플레어스커트와 흰 블라우스 차림에 쌘들을 신고 있어. 모래에 파묻혀 굽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포즈 잡기가 꽤 불안정할 텐데도 처녀들의 미소는 아주 싱그럽고 행복해 보여.
앞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고 서 있는 맨 오른쪽의 처녀는 약간 뚱뚱하다. 세 처녀 중 혼자만 양산도 없이 한 손을 허리 부근에 척 걸치고 있는 걸 보니 괄괄한 성격 같지? 거기 비하면 다른 두 처녀는 새침하고 여간 태를 부리고 있지 않아. 왼쪽 처녀는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콧망울이 좁다란 게 서구적인 인상을 풍기지만 꿍꿍이속이 있고 샘이 많을 것 같은 얼굴이야. 쌩긋 웃고는 있지만 한 손으로 가슴께에 내려온 목걸이 줄을 잡고 있는 모습이 정서불안 같지 않니? 관상을 보냐고?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돗자리를 깔지 않고 대신 헤어디자이너 명찰을 달았다뿐이지 내 하루 일의 태반은 여자들의 관상에 따라 비위를 맞추는 일이잖아.
가운데 처녀는 정말 천진하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똑같은 흰 블라우스에 플레어스커트지만 물방울 무늬의 머리띠를 하고 허리에도 같은 천으로 된 벨트를 묶고 있는 그녀는 단연 눈에 띄어. 통통하고 하얀 팔과 이를 다 드러낸 웃음, 그리고 자세히 봐. 그녀의 쌘들 속에 들어 있는 건 모래알이 묻은 맨발이야.
뚱뚱한 처녀와 가운데 처녀의 사이에 서 있는 남자. 키가 크고 바지 주름이 깨끗한 남자 말야.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가운데 처녀의 양산 밑을 향해서 약간 얼굴을 기울이고 있잖아. 시원한 이마와 낙천적인 웃음, 멋지지 않아? 우리 아버지야. 이 사진에 있는 남자 중에 눈길을 끄는 사람은 아버지 한 사람뿐이야. 또 다른 남자들? 아버지 왼쪽에 서 있는 알록달록한 남방셔츠를 입은 남자는 볼 필요도 없으니 건너뛰고, 맨 왼쪽의 남자? 일행과 한 발짝쯤 떨어진 곳에 혼자 서 있는 그 남자는 물론 건너뛸 정도는 아니겠다. 짙은 눈썹과 먼데를 보는 듯한 깊은 눈빛을 보면 그 나름의 분위기는 있다고 해도 좋아. 혼자만 웃지도 않는데다가 약간 옆모습이다 보니 음영이 뚜렷해서 섬세해 보이는 점도 있고 말야. 근데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나 요령부득으로 허벅지께에 내려뜨리고 있는 긴 손가락을 봐. 내가 아주 싫어하는 소심한 타입이야. 분명 집안이 가난하거나 열등감이 많은 사람일 거야. 사연이 있을 것 같다고? 어쨌거나 우유부단해 보여서 내 마음엔 들지 않아.
세 명의 처녀와 그녀들을 둘러싼 다섯 명의 남자 모두는 스무살 초반인 것 같지? 하나같이 바캉스철 해수욕장의 노점에 매달린 비치볼처럼 탄력이 있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활기에 차 있어. 처녀들이 비껴 쓴 양산 위로 한낮의 햇빛이 차르륵차르륵 쌓였다 미끄러진다. 해변에서 모래장난하는 아이가 손을 높이 쳐들고 뿌려대는 모래처럼. 그들 뒤로는 해송이 몇 그루, 그리고 하늘이야. 구름도 머물고.
넌 벌써 알아봤겠지? 맞았어. 세 처녀 중 가운데 처녀가 우리 엄마야.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니? 다섯 명의 남자 모두가 우리 엄마를 좋아하고 있다는 거.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잖아. 앞줄부터 처녀들, 남자들, 나무, 하늘, 이런 순서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그 모든 것이 엄마를 둘러싸고 있는 거야. 남자들은 엄마 쪽을 쳐다보고, 혹은 엄마가 쳐다보리라고 의식하면서 웃음을 짓고 있어. 아버지의 한쪽 팔이 엄마의 어깨와 겹쳐져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어쩜 아버지는 엄마의 허리에 살짝 손을 갖다대고 있는지도 몰라. 사연 있어 보이는 그 사람?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엄마를 좋아하고 있어. 애써 눈길을 멀리에 두고 있을 뿐이야. 두 처녀 역시 엄마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하늘과 구름과 바람인들 왜 엄마를 둘러싸주지 않겠어. 숨을 죽이고 엄마의 눈부신 젊음을 지켜보고 있잖아.
시간은 한낮이고 모래는 뜨거워. 처녀들의 웃음소리에 양산은 가볍게 흔들렸지. 소나무숲으로 먼저 뛰어간 남자들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처녀들의 자리를 마련했을 거야. 노래를 불렀을까. 엄마는 음치지만 박수를 아주 잘 치니까 모두들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겠지. 해가 점점 기울어가고, 땀에 젖어 달라붙은 블라우스를 헤집고 등뒤로 바람이 스쳐가듯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겠지. 수건놀이를 하는 시간처럼.
수건돌리기 놀이를 해본 적 있니? 누군가 등뒤로 몰래 다가와 불길한 술래의 수건을 떨어뜨리고 가지. 그렇지만 돌림노래를 부르는 데 정신이 팔린 순진한 아이는 술래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등뒤로 돌아올 때까지 박수만 치고 있는 거야. 그 아이만 빼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그 수건을 보겠지. 그 아이에게 닥친 운명의 악의를 알아채고 더욱 신이 난 아이들은 즐겁게 노랫소리를 높여. 아이의 등뒤를 향해 술래의 걸음이 한 발짝씩 가까워질수록 공모자들의 합창은 커지고 박수소리도 착착 박자가 맞아.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드디어 와아! 함성이 터지고, 갑자기 공포를 느껴 등뒤를 돌아보는 아이. 그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자기의 운명이 되어 불길하게 웅크려 있는 수건의 또아리.
엄마도 그랬어. 박수를 치느라 등뒤를 돌아보지 않았지. 심지어 수건의 또아리가 온몸을 친친 감아 완전히 결박당한 뒤까지도 엄마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어. 이럴 리는 없어. 이건 내 인생이 아니야. 꿈일 거야. 이 악몽에서 깨어나면 진짜 내 인생이 있다구. 아주 멋진 인생이…… 그러고 마지막에는 또 우는 거야.
그냥 지나칠 뻔했구나. 뚱뚱한 처녀를 자세히 한번 봐. 너의 고모잖아.
너의 고모가 엄마의 병실로 처음 들어왔을 때 정말이지 새 원피스를 맞춰입은 하마 같더라. 엄마를 보자마자 쿨쩍거리기 시작하는데 그 콧김이 가습기보다 세더라니까. 그렇게 울기 잘하는 엄마는 오히려 머리에 쓴 뜨개질 모자의 매무새를 고치면서, 오랜만이다, 어떻게 알고 왔어, 하고 의젓하게 인사를 했는데, 항암제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앙상하게 야윈 엄마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 몸짓에는 마치 꽁지 빠진 공작이 깃털을 펼쳐 보이는 것처럼 안쓰러운 데가 있었어. 쟤가 네 딸이니, 정말 몰라 보겠다. 그런 엄마에게서 애써 눈길을 돌리며 너의 고모는 내게 말을 붙였지. 나 기억 안 나니? 하긴 그게 벌써 몇년 전이야, 이십년은 됐겠다. 너의 고모는 다시 엄마를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어. 사진 안 찍겠다고 하는 애를 잡아당기다가 그때 쟤 팔까지 빠졌잖아. 고집이 그렇게 세더니 예쁘게 잘 컸네. 엄마도 물었어. 창경원 갔을 때 말이지? 참, 그때 데리고 왔던 그 조카애도 이제 총각 다 됐겠네? 그럼. 제 아빠를 쏙 뺐지. 나 여기 데려다준다고 같이 왔어. 밖에 있는데 들어와보라고 할까. 고개를 젓는 엄마의 표정은 좀 쓸쓸했어.
너의 고모를 배웅하러 복도로 나왔을 때, 그때 처음 너를 보았지. 헬멧 두 개를 창턱에 올려놓고 담배를 피우던 뒷모습. 나는 너의 뚱뚱한 고모가 그 헬멧 중 하나를 머리에 쓰고 네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시내를 가로질러왔을 생각을 하니 키득 웃음이 나왔어. 자, 서로 인사해라. 너의 고모가 나를 소개하자 창틀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던 너는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어. 그때가 오후 몇시쯤이었을까.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들어와 우리 사이에 먼지와 빛의 베일을 만들었지. 눈부신 빛 뒤에 있어서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어.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 거의 동시에 너도 한 걸음 물러서고 있었어. 그리고 우린 잠깐 그대로 서 있었던 것 같아. 겨우 3, 4초밖에 안되는 시간이었을 거야. 내게는 아주 긴 시간처럼 생각되었어. 시간에도 밀도가 있나봐. 농도가 진한 스트레이트파마액은 잘 흐르지 않거든.
너희들 전에 한번 만났었는데 너무 어릴 때 일이라 생각 안 나나보구나. 너의 고모의 말소리가 시간의 저편에서 아득하게 들렸어. 나중에 크면 결혼하자고 손가락까지 걸더니, 잊어버렸어? 그때 네 고모의 웃음소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제로 있었던 일 같지가 않아.
너와 네 고모를 병원 현관까지 배웅하며 나는 계속 현기증을 느꼈지. 안 그래도 난 빈혈이 좀 있었거든. 너를 뒤따라 계단을 내려가는데 왜 그렇게 다리가 휘청거리는지. 너는 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네 고모만 장황하게 우리의 인연을 설명했어. 여고 때 친하게 지낸 친구가 일곱 명 있었는데 그중에 우리 엄마와 너의 고모, 그리고 너의 엄마까지 다 끼여 있었다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엄마 앨범에서 쎄일러복을 입은 일곱 명의 소녀들이 두 줄로 어깨를 나란히하고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었거든. 사진 아래에는 ‘금단의 칠선화’란 흘림체 글씨가 씌어 있었고.
너의 고모는 네 자랑을 늘어놓는 데도 장황했어. 몇년 전 너의 아버지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뒤 네 엄마는 네가 하루 빨리 고시에 합격해서 아버지처럼 존경받는 공직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너는 대학원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싶어한다고. 그때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주말드라마 같은 데 흔히 나오는 얘기잖아. 정말 드라마 같았던 건 너의 고모가 현관 쪽으로 가려다 말고, 참, 아주 들렀다가 가야지,라며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네가 내게 한 말이야. 전화해도 돼요? 나는 너를 쏘아보며, 왜요?라고 기쁨과 열등감을 감추며 거만하게 대꾸했지. 하고 보니 그 역시 드라마에서 본 적 있는 장면 같더라만.
사진 2: 새색시가 된 엄마, 그 남자의 약혼식에 가다
이 사진 귀퉁이에는 흰색 흘림체 글자로 날짜가 씌어 있구나. 74. 2. 14.
1974년, 그해에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어. 1월에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을 했고 8월에 아버지가 죽었지. 12월에는 내가 태어났고 말야. 이 사진은 아버지와 엄마의 행복한 신혼이 채 한달도 안된 때야. 친구의 약혼식에 가서 찍은 사진이래. 인물들의 면면을 봐. 두어 명이 빠지긴 했지만 첫번째 사진에 있던 그 사람들이야.
가운데 앉아 있는 한 쌍이 그날 약혼한 주인공들이겠지? 여자는 첫번째 사진에서 서구적이고 신경질 많게 보이던 호리호리한 처녀야. 남자는…… 안경을 써서 몰라볼 뻔했지? 일행에서 한 발짝 떨어져 우수에 찬 듯이 보이던 그 남자잖아. 여자의 찢어질 듯 벌어진 입을 봐. 좋아하는 데서 지나쳐 자못 의기양양하게까지 보이는데? 약혼자 쪽으로 너무 몸을 기울이다보니 오른쪽 옆에 앉은 엄마를 거의 따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흰 망사장갑을 낀 오른손을 살짝 뒤로 빼서 엄마의 손을 붙잡고 있어. 우정이 아니라 견제의 몸짓이야. 아무래도 요사스런 성격인 것 같지? 머리카락을 두 쪽으로 갈라서 반은 이마 위에 둥글게 올려붙이고 나머지는 어깨 위로 내려뜨려 끝을 말아올린 헤어스타일하고……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여자들의 성격이 어떤지 내가 충분히 알지. 허영심 많고 가식적인 여자들이야. 그리고 잔머리가 얼마나 많으면 머리 올리는 데에 실핀을 저렇게 줄줄이 꽂았을까. 잔머리 많은 여자가 얼마나 성정이 까탈스러운데. 너무 그 여자를 나쁘게 보는 거 아니냐구? 너야말로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 여자 편을 드는데?
남자 쪽의 표정은 좀 달라. 그날 약혼한 사람으로 보기에는 너무 덤덤하거나 오히려 우울하지 않니? 여전히 먼데를 보는 듯한 눈빛. 그것이 안경 속에서 초점이 굴절돼 보이는 탓인지 꼭 약혼녀가 아니라 그 옆의 엄마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새색시인 엄마는 한복을 입고 ‘우찌마끼’ 머리를 해서 약간 성숙해 보여. 그래서인지 엄마의 미소에도 첫번째 사진에서의 터져나갈 듯한 탄력 대신 어딘지 수척한 향기가 들어 있어. 첫번째 사진 속에서는 햇빛과 바람이 생기를 불어넣어주었잖아. 이 사진의 배경에는 그 당시 사진관 그림답게 버드나무 가지가 축축 늘어져 있는데, 누각으로 통하는 둥근 다리가 마치 다다르지 못할 아련한 곳을 향한 그리움과 어긋난 인연을 말해주는 것 같아. 엄마는 인생을 약간은 안다는 듯이 애잔한 눈을 하고 있어. 엄마 목에 걸린 가느다란 금목걸이가 보이니? 엄마는 죽는 날까지 저것을 목에서 벗어본 적이 없어. 두 차례에 걸친 수술 때만 빼고.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할 때 나는 금방 완치될 줄 알았어. 그런데 몇개월도 안 남았다니, 그럴 리 없잖아. 나도 그런 말을 안 들어본 건 아니야. 고생하던 사람은 겨우 살 만해질 때 덜컥 병이 든다든지 수절과부는 자식 다 키워놓으면 맥을 놓아버려 힘없이 죽는다든지 그런 얘기 말야. 혹시 내가 미용학원 동기 중에서 혼자만 취직이 되어 엄마의 남은 운을 다 뺏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들더라. 왜, 가족들은 정해진 양의 행운을 나눠 가진다는 말이 있잖아. 한 집안에서 둘이 시험을 보면 하나만 합격하고, 두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하나만 아들이라는 얘기 말야. 하지만 그게 말일 뿐이지 어디 이치에 닿기나 하니? 그리고 엄마는 수절한 것도 아니란 말야. 이제야 말이지만,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았어.
엄마가 사랑한 건 안경을 쓴 그 남자였지. 아버지에게 청혼을 받던 날 엄마는 그 남자의 옹색한 자취집으로 찾아가 청혼받은 사실을 털어놓고 자기의 마음은 남자에게 있을 뿐이라고 고백했어. 그러나 남자는 아무런 약속도 해줄 수 없다고 했나봐. 엄마는 상처를 갖고 아버지와 결혼했던 거야.
그러니 남자의 약혼식에 참석하는 엄마의 마음속은 얼마나 복잡했겠어. 남자에게 자기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복수심과 그 남자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그리움. 그리고 죄의식과 질투.
그날 밤 축하연은 약혼한 여자의 집에서 꽤나 늦게까지 이어졌다고 해. 엄마는 못 마시는 술을 계속 들이켰고 마침내는 취해버렸어. 많이 깔깔댔고 그러다 보면 눈물까지 나오는 법이라 이따금 옷고름을 눈 쪽으로 가져갔는데, 옷고름이 미처 눈시울에 닿기도 전에 시답잖은 농담이 들리면 발그레해진 볼을 더욱 붉히며 또 한번 소녀처럼 깔깔 웃었겠지. 엄마는 아마 첫번째 사진 속의 시간으로 되돌아가 있었던 것 같아. 엄마도 그 남자도 결혼하지 않았던 시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고 아직은 무엇이나 가능했던 그 시간으로. 무서운 운명이 달빛 뒤에 숨어서 취한 엄마가 비틀거리며 뒤꼍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 두번째 사진의 시간, 그때에도 엄마는 자기의 등뒤에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지 않았던 거야.
그 남자가 엄마의 어깨를 뒤에서 안았을 때 엄마는 커다란 감나무의 무시무시한 그림자를 쳐다보았어. 그 남자의 그림자가 얼마나 사악하고 불길한지도 보았겠지. 바람이 불 때마다 감나무 잎들이 저주의 주문을 외듯이 스산하게 수런거렸어. 엄마의 뜨거운 뺨이 차갑게 식어갔어. 그러나 허리를 억세게 껴안은 남자가 한 손을 뻗어 목걸이를 움켜쥐자 엄마는 온몸에 힘이 빠지더라지. 그 목걸이는 남자의 선물이었어.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면서 엄마가 그걸 목에 걸고 남자 앞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변명할 수 없는 거잖아.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덮쳐오자 엄마 역시 거기서 모든 게 끝나도 좋다고 생각해버렸을 거야. 그리고 그날 밤 생긴 아기가 나야.
그래서 엄마는 내 앞에서 그렇게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하게 울었던가봐. 나야말로 엄마의 인생을 일그러지게 한 그 남자가 세상에 남겨놓은 얼룩이니까. 그날 밤 엄마가 입은 새색시의 본견 속치마를 더럽힌 체액을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생겨난 것을 알고 엄마는 엄마와 내게 닥쳐올 운명이 얼마나 두려웠겠어. 그런데 배가 불러올 무렵 아버지가 사고로 죽은 거야. 엄마는 운명의 기복과 속도에 놀라 슬픈 것조차 몰랐어. 뱃속의 아이를 핏줄의 인연 하나 없이 유복자로 낳아 키우든지, 이제야말로 잘못 꼬인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 제대로 아버지를 찾아주든지, 둘 중 하나라는 생각뿐이었지.
아버지 장례식에는 친구들이 많이 왔대. 스물여덟살에 친구의 장례에 참석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엄숙하고 비통한 일이었으니까. 그 남자도 물론 왔어. 그 여자도 곁에 바짝 붙어서 왔고. 문상객이니만큼 그들은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고 약간 고개를 숙였는데 그 남자는 엄마의 목걸이를, 그 여자는 엄마의 희고 고운 목덜미 선을 보았지. 그 여자는 부엌까지 엄마를 따라들어와서는 구슬백을 열더니 다음달로 날짜가 잡힌 청첩장을 건네주었어.
삼일장을 치르고 그 남자가 돌아갈 때까지 엄마는 남자에게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어. 그 남자는 화투판에도 끼지 않고 혼자 마루 끝에 앉아 ‘고 강형식 영가 발인식전’이라는 가로글자와 ‘한 생각 청정하올 때’라는 세로글자를 멍청하니 쳐다보곤 했지. 너처럼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이었나봐. 엄마와 언뜻 마주칠 때마다 긴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끼워져 있었대.
발인제 때에는 엄마가 곡을 너무 서럽게 하는 바람에 그 자리의 모두가 울었어. 상여가 집을 떠나는 순간 실신할 듯 넘어지는 모습이란. 그 마음을 알겠니? 그 남자의 약혼식 날 자기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때와 똑같은 마음이야. 이번에는 자기의 불행한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게 복수라고 생각했던가봐. 그러나 그 자리의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듯이 그 남자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은 아버지에 대한 애끊는 추모 아니었겠어? 남자는 엄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돌아가버렸어.
우리 엄마, 어리석지? 그 남자는 또 어떻고? 아니야.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그 악의를 사람 힘으로 어떻게 막겠어.
넌 운명을 믿지 않지? 언젠가 그런 말을 했잖아. 어떤 나쁜 일이 닥쳐오든 너는 운명의 예상을 거슬러서 보란 듯이 반대 방향으로 가버릴 거라고. 나도 그랬어. 운명이란 불행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변명 같은 거라고 생각했지. 엄마가 늘 팔자를 한탄하는 게 지겨웠거든. 하지만 지금은 약간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대체 왜 내 곁에는 늘 죽음이 따라다니는 걸까. 운명이 아니라면 이런 우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말해봐. 너는 왜 죽었지? 더이상 새 시계를 맞추기가 싫었던 거야? 아니면 내게서 떠나기 위해 죽었어? 그럴 리 없잖아. 그놈의 운명 때문이겠지. 너를 사랑한 탓에 내가 널 죽게 했을지도 몰라. 누군가 날 저주하고 있어.
행복한 사람들의 시계
방금 커피를 탔어.
나는 커피를 달게 마시는 편이야. 그것도 하루에 보통 대여섯 잔은 마시는 것 같아. 세 잔 이상이 되면 기호식품이 아니라 중독성 마약이라고 여성지에서 읽었지만 종일 서서 일하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정신이 나거든. 집에서 쉬는 날까지 줄창 커피를 마셔댄다고 엄마는 늘 잔소리였지. 엄마 자신은 암포젤 엠과 게보린을 대놓고 먹었으면서 말이야. 엄마는 깊이 생각하는 걸 싫어했어. 뭐든지 잊어버렸다고 하기 일쑤이고 언제나 약을 많이 먹어서라고 핑계를 대는 거야. 우리 엄마,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하나도 기억 못하면서 옛일은 어쩌면 그렇게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는지.
너는 너의 어린시절을 얼마나 기억하니? 몇살 때의 일부터 기억해낼 수 있어? 엄마 말로는 신기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의 일이 또렷히 기억난다더라. 오십이 넘으면서부터는 두어 살 때 할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손짓하여 부르던 모습까지 보인다고 했어. 내가 맨 먼저 기억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늘 앨범을 보고 있었어. 초등학교 때는 금호동에서, 중학교 때는 봉천동과 신림동, 고등학교 때는 신당동, 지금은 아현동, 장소는 자주 옮겨졌지만 말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엄마가 보고 있는 사진 속의 얼굴이 당연히 아버지라고 생각했어. 그 남자라는 걸 안 것은 스무살 무렵이었어.
그 엄마의 딸인데 내 인생이라고 해서 운이 따랐을 리 없지. 유복자이니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잖아. 뱃속에서 아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망하지 않을 태아가 어디 있겠어? 불행해질 줄 알면서도 세상에 나올 때는 이미 이 세상이 그저 그런 곳이고 별 기대할 게 없으리라 각오를 한 거야. 난 사실 인생에 별 기대 없어.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런 데에도 관심없고 그냥 주어진 시간을 무심하게 보낼 뿐이야. 그런 내가 점을 치러 갔다면 이상한 일이겠지? 바로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라니까. 나한테는 정말 뭐가 따라다니나봐. 내 친구 중에 앙큼하고 속없는 애가 있어서 유부남하고 사귀는 중이었거든. 걔가 고민 끝에 점쟁이를 찾아갔어. 나는 그냥 따라가준 거고. 근데 그 점쟁이가 내 얼굴을 기분 나쁘게 빤히 쳐다보더니 그러는 거야. 귀신하고 붙어다니는구먼. 네? 저거 봐, 귀신이 따라들어왔잖아. 죽은 사람이 씌었어. 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그 점쟁이한테 화가 났지. 그래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꾸해줬어. 그래요? 우리 아버진가봐요.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런데 그 점쟁이가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 게 아니겠어? 정말로 내 등뒤에 사람이 서 있고 자신은 그 사람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갸웃 위아래로 잡아빼며 중얼거리는 거야. 아니야, 저 너덜거리는 살점 좀 봐라. 물에 빠진 게 아니고 공중에서 터져 죽은 귀신이야.
저녁 밥상에서 엄마에게 그 말을 했지. 오이냉국을 뜨려던 엄마는 숟가락을 퐁당 빠뜨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어. 무서워서 밤새 잠을 못 자고 떨더라. 그 다음날이었던가. 앨범을 가져오게 하더니 맨 앞장에서 그 남자를 짚어 보이는 거야. 그때 기분? 말하고 싶지 않아. 그전까지는 엄마가 울기 시작하면 나는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올드 팝송을 틀어주곤 했어. 그런데 그날은 「파이프 라인」 「채플 오브 러브」 다음에 「아이 웬트 투 유어 웨딩」이 나올 때 불현듯 왜 엄마가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긴 한숨을 내쉬었는지 깨달았고, 벌떡 일어나 오프 버튼을 눌러버렸지.
그 이후에도 나는 우리 아버지만을 아버지로 생각했어. 20년 동안이나 아버지로 알고 좋아했는데 갑자기 바뀔 수 있겠니? 내 납작한 이마나 올라간 눈썹, 그리고 낙천적인 성격을 여전히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 아버지 쪽에서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글쎄 모르겠어.
그 남자는 아버지만큼 좋아지지 않더라. 점쟁이 말대로라면 그는 왜 나를 따라다니는 거지? 그 간교하게 생긴 여자와의 사이에 나보다 한살 어린 아들을 낳았다는데 왜 아들한테 가지 않고 내게 왔을까? 죽은 다음에야 내가 자기 딸이란 걸 알았나?
지금 막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제 나를 따라다니는 귀신이 셋이겠구나 하는. 엄마와 그 남자와 그리고 너까지. 아버지는 빼더라도 말야. 이제부터는 문을 닫을 때 주의할게. 세 사람이 따라들어올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고 생각될 때에 문을 닫을 테니 안심해. 참, 엄마는 아버지한테로 가야 했을까. 죽은 다음의 세계에서도 이곳에서의 호적이 유효한 거니?
엄마는 아주 고생스럽게 살았어. 처음에는 윗동서의 한복가게에서 몇년 동안이나 허드렛일을 했고 그 대가로 조그만 수예점을 차리게 되었는데 얼마 안 가 망해버렸지. 보따리 장사, 식당 일, 화장품 외판도 했지만 제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어. 손재주도 없고 기운도 없고 변죽도 좋지 않은데다 속일 줄도 과장할 줄도 모르고, 게다가 도무지 남의 비위를 맞출 줄 모르니 될 리가 있어? 우리 엄마는 정말이지 예쁘다는 것 빼고는 사줄 만한 점이 없었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엄마가 예뻐서 좋았어. 엄마 대신 중학교 때부터 김치를 담갔고 집안 살림을 도맡았지만 불만스럽지 않았거든. 엄마가 장사를 할 때는 계산에 약한 엄마 대신 내가 밤마다 물건을 헤아리고 장부정리를 다 했어. 식당 일을 할 무렵이 제일 안 좋았지. 일도 힘들었지만 짓궂게 구는 손님들이 좀 많았어야지. 여상에 다니고 있던 나는 주산 부기 급수 딸 준비는 팽개치고 학교가 끝나는 대로 식당으로 달려가 엄마와 함께 홀 심부름을 하곤 했어. 엄마는 나처럼 살성이 좋지 않은데 손에 물이 마를 날 없으니 손톱 밑이 헐고 가려워서 잠을 못 잤어. 밤마다 내가 연고를 발라주었고 내친 김에 손톱 손질과 매니큐어를 해주기도 했지. 퉁퉁 붓고 갈라진 손가락끝의 붉은 매니큐어. 어쩐지 처량했지만 엄마는 환하게 웃었어. 미용사가 되면 엄마가 좋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부터 한 것 같아.
엄마가 무거운 화장품 가방을 든 채 계단에서 넘어진 일이 있었어. 팔이 부러져 두달을 쉬었지. 그 사이 아랫동네 세들어 살던 아가씨 둘이 이사를 가버려 외상값을 몽땅 못 받게 되었다고 우는 엄마의 손을 붙들고 그 아가씨들이 일한다는 술집으로 찾아갔던 거 아니? 도저히 술집 안으로 못 들어가겠다는 엄마를 골목에 세워놓고 나 혼자 씩씩하게 나섰는데, 여기쯤이면 엄마한테 내 뒷모습이 보이지 않겠지 싶으니까 그때부터 어찌나 다리가 후들거리던지.
엄마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 마싸지야. 그것만은 그래도 적성에 맞았던가봐. 집안에 마싸지 손님이 드나들던 그 무렵이 엄마하고 나한테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 단골도 꽤 많았고 손님들은 모두 나를 좋아했지. 엄마 옆에서 스팀타월을 만든다, 오이를 간다, 하면서 손님들의 말상대를 해주었고 안마까지 곧잘 했으니까. 미용학원에 다닌답시고 머리스타일에 대해 충고를 해주기도 하고 모발 마싸지도 이따금 해주었어. 부지런하고 싹싹하고, 쟨 시집가면 사랑받고 살겠어. 손님들이 나를 칭찬하면 엄마는 마싸지 크림이 잔뜩 묻은 손끝으로 그들의 입가에 나선형을 그리며 말하곤 했어. 애가 덤벙대기만 하고 얌전한 맛이 있어야죠 뭐. 누가 데려가기나 할는지. 그러면서 나를 향해 눈까지 흘기던 엄마의 모습, 천사처럼 천진했어.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지. 부끄러워서가 아니야. 지금 생각하니 행복했던 건가봐. 행복이란 다 그렇게 짧은 거니? 그로부터 몇달도 안돼 엄마는 병원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죽었어.
죽기 며칠 전 엄마의 머리를 감겨주었지. 너무 말라서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는데 초등학교 과학실에 서 있던 모형해골의 머리통을 만지는 기분이었어. 너 머리 참 시원하게 감긴다. 그것이 평생 엄마가 내게 해준 첫 칭찬이었어. 마지막 칭찬이었고.
지금은 안하지만 나도 보조일 때는 지겹도록 손님 머리를 감겼어. 남자 손님 중에는 쑥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아. 이발소에서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게 하고 감긴다며? 머리를 젖히고 누우라고 하면 남자 손님들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하더라. 너도 그랬어. 머리를 감겨주겠다고 하니 이마를 찡그렸잖아. 하지만 결국 너를 의자에 앉히고 머리를 뒤로 젖히도록 하는 데 성공했지. 세면대가 높아서 내 젖가슴이 너의 얼굴에 닿았어. 도리어 어색해진 나는 미용실에서 하듯이 네 얼굴에 수건을 덮었어. 수건 아래에서 새어나오는 너의 고른 숨소리, 너무 평화로웠는데.
네가 죽던 날 밤 나는 두번째로 네 머리를 감겨주었어. 우리 둘 다 비를 맞았었잖아.
비오는 거리를 걸어보자고 네가 먼저 말했던가? 밤이 깊어 무척 조용했지. 이따금 자동차 바퀴가 번들거리는 포도의 물을 튀기며 지나갈 뿐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어. 서대문에서 아현 지하철역까지 가로수가 백스물일곱 그루라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빗속에서 천천히 그것을 세어나갔어. 한 개의 나무 밑에 다다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서서 입을 맞추었지. 백스물일곱 번. 그 모든 나무 아래에 우리의 마지막 시간을 조금씩 떨구었던 거야.
집으로 들어와 내가 젖은 머리를 감겨주겠다고 하자 너는 웬일인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어. 기운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는 듯도 싶고. 나는 네 머리를 가슴에 안듯이 하고서 빗질을 하기 시작했어. 따뜻한 물을 적신 뒤 머리 안쪽부터 샴푸를 풀었지. 거품을 씻어내다가 불현듯 손을 멈추었던 건 네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서였어. 잠들었나 하고 수건을 가만히 젖혀보았을 때, 너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눈을 똑바로 뜬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몇시야?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네가 물었고 그걸 듣자 내 입에서는 뜻밖에 의젓한 농담이 튀어나왔지.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라고.
사진 3: 너의 알리바이
어제 또 경찰이 왔어.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몇가지 하더니 내 대답이 무슨 결정적 단서라도 주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더라. 너의 죽음은 자살로 마무리된다나봐. 그들이 빨리 가주었으면 해서 나는 창밖만 물끄러미 쳐다보았지. 그게 슬픈 모습으로 비쳤을까. 네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던 오래된 사진을 선심이라도 쓰듯이 꺼내 보여주었어.
벚꽃나무 아래에 서 있는 여인 둘이었어. 뚱뚱한 여인과 가느다란 목걸이를 한 여인. 그들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각기 대여섯살로 보이는 계집애와 사내애가 서 있었지. 계집애는 울고 있더라. 사내애? 그애의 얼굴은 보지 않은 채 그냥 사진을 돌려줬어. 경찰은 역시 아무것도 아니죠? 하는 싱거운 표정으로 그것을 도로 받아넣었어.
과거를 뭐 하러 찍어두었을까, 알리바이도 아니고, 하던 너의 말.
알리바이란 현장에 없었다는 걸 증명하는 거라면서? 부탁이 있어. 네가 그 사진 속에 없다는 걸 증명해줘. 너는 다른 곳에 있어야만 해. 그래야 결백해질 거 아냐. 어서 도망쳐. 너를 속박하는 시계와 사진,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죽은 자의 저주가 산 자의 운명을 파멸시키지 못하는, 과거가 없는 태초의 죄없는 시간으로 가란 말야. 엄마의 첫번째 사진 속으로…… 나? 나는 이미 틀렸어. 팔이 빠진 것도 모르고 렌즈를 쳐다보며 울고만 있잖아. 나는 여기 그냥 시간의 얼룩 속에 남아서 너한테 가지 못하도록 세번째 사진 속의 시간을 붙들고 있을게. 너, 가고 있지? 어서. 이 사진 속에서 도망쳐야 해. 가고 있는 거지, 내 사랑.
뭐라구? 아예 없어져버렸다구? 오, 안돼!
첫댓글 네!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