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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밤 광주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증 언 자 : 정현택(남)
생년월일 : 1956. 6. 19(당시 나이 25세)
직 업 : 회사원(현재 회사원)
조사일시 : 1988. 11
회사에 나가면서 야간대학에 다녀
나는 장성에서 태어났는데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쭉 장성에서 생활했다. 아버님은 장성에서 조그맣게 장사를 하셨는데 뜻대로 안 되어 집에 계셨고 어머님은 교편을 잡고 계셨다.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해서 중학교 때만 해도 집안 사정이 상당히 어려운 편이었다. 농사를 짓는 것도 없이 공무원의 월급만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는 광주에 있는 동중으로 진학하였으면서도 인문계로 진학하는 것은 포기했었다. 집안사정이 어려우 니 상고로 진학하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를 다닌 뒤로부터는 장성에서 통학을 하기도 했고, 동생과 자취를 한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친척집에 있기도 했었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시험을 봤는데 떨어지고 말았다. 내 성적은 중간 정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합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불경기여서 인원수를 감축해서 그랬는지 나는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공무원 시험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갔다 오면 상황이 좀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여 전경대에 지원을 했다. 논산서 훈련을 받고 영광경찰서, 강진, 완도 해안초서에서 복무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전경에 대하여 친근감 내지는 그쪽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부상을 당했던 날도 군인들이 설마 쏠까 하는 마음이었으니까!
1979년 3월에 군복무를 마치고 4월에 곧바로 삼양사에 취직하였다. 내가 부상 당하기 전까지는 임동에 방을 얻어 고등학교에 다니던 동생과 자취를 하면서 열심히 회사에 다녔었다.
10·26사태는 군복무 중에 맞았었다. 군에 있을 당시에 나는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박정희는 욕을 하기도 했었다. 특히 윗사람들은 욕을 많이 했었는데 너무한다, 어쩐다는 둥 말이 많았다. 10·26사태는 라디오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나는 "아, 잘했다"고 하면서 박수를 쳤다. 악독한 놈 잘 죽었다라는 생각을 했다.
1980년 당시 나는 주간회사에 근무하면서 야간에 전문학교를 다니고 있었다(성인경상전문대학 세무회계1). 5월이 되면서 나는 사무실에서 시내를 왔다갔다하면서 데모하는 것도 많이 봤다. 호기심에서 데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학생들이 뜻이 있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은이들이 공부하기가 싫어서 데모하는 것이 아니라 뜻이 있어서 더운 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하니 동참은 못 하더라도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특별히 운동에 대하여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반정부적 성격은 암암리에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위를 구경
5월 16일에는 시내에서 횃불시위를 하는 것을 보았다. 이날은 회사에 근무했던 어른들과 저녁 식사를 하러 시내에 나갔다가 시위하는 것을 보았다. 전경들의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열을 지어서 노래를 부르고 하는 것이 참 좋았다.
나는 다음날도 시내에 나갔다. 처음에는 구경만 하다가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대열의 끝에 따라다니면서 같이 노래도 불렀다. 시민들은 금남로를 점거하고 도청 앞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도청 앞에 있던 군인들과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원호청 쪽에서 군인들이 착착 발을 맞추면서 내려왔다. 시민들은 우르르 사방으로 흩어졌고 나도 도망을 갔다. 나는 나이를 먹어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또 회사에 다녔기 때문에 시위에 참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회사가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시내에 나갈 틈도 없었다. 시내에 나간다고 해도 업무차 금남로 2가에 있는 은행에 다녔기 때문에 돌아가는 상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시위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이날 학교에서는 도청에서 시위하는 데 참여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의했던 것이 생각난다. 18일에는 내가 옛날에 군복무를 했던 곳에 친하게 지내는 형님이 계셔서 찾아뵈러 갔었다. 이날 오후에 광주에 올라가려고 하니까 광주에 통행금지가 됐다고 하시면서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다음날 출근해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올라가야겠다고 우겨댔다. 그러나 차가 끊어져버려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참 동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낚시 온 사람들이 있어서 광주에 올라갈 수 있었다.
오후 9시경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내려 자취집을 향해 걸었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임동 쪽으로 차도 안 다니고 통행금지가 됐는지 어쨌는지 모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금남로 쪽으로 들어갔는데도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수창국민학교 근처에 오니 군용트럭 10대 정도가 정차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길 건너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군인들은 내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뒤에 들어보니 군인들이 사람들을 때리고 잡아가고 했다 는데 그날은 나를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뒀다. 이런 것으로 보아 당시 군인들은 막 도착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나는 군인들 차가 세워져 있어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을 뿐 공수대였는지 아닌지는 식별할 수 없었다. 임동 쪽으로 가니까 사람들이 나와 있어서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출근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사무실은 요한병원 앞에 있었는데 밖에 나와 있던 아주머니들은 날더러 도망가라고 했다. 또한 군인들이 지나가던 차를 세워서 학생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내리게 하여 두들겨패서 잡아갔다는 말도 했다. 나는 당시 스물 다섯 살이었으므로 학생처럼 보였다. 나는 그냥 가겠다고 말하고 골목길로 걸어가서 회사로 갔다. 이날은 하루 종일 근무를 했다. 그러나 마음은 온통 시내에 있 었다.
19일날도 시내에 나갔다. 가톨릭센터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숨어서 무전을 친다고 하여 학생들이 잡으러 올라갔다. 공수대의 총을 빼앗아 던지고 헬멧을 벗겨 던져버렸는데 군인들이 이것을 알고 대거 밀고 들어갔다. 여러 명의 학생들이 잡혀갔는데 사람들은 학생들을 놔둔 채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이때는 정말 가슴이 아팠다.
20일 낮에도 시내에 나갔었다. 그러나 특별한 것을 본 기억은 없다. 나는 군중들 틈에 끼어 유동으로 해서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거쳐 광주역 쪽으로 갔다. 광주역 쪽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는 공포탄을 쏘는 소리를 들었다.
20일 오후에 시내에서 업무를 보고 회사로 들어갔다. 이전날과 별 특이한 상황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오후 7시쯤 회사에서 하던 일을 정리도 못 한 상태에서 다음날 나와서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평상시보다 일찍 퇴근했다. 밖이 시끄러워 일하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에 일찍 퇴근했던 것이다.
퇴근 후 나는 곧바로 자취집으로 갔다. 나는 동신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남동생과 함께 임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밖에 나가면 시끄럽고 해서 동생에게는 위험하니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이르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12시쯤이었을까. 깊은잠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는 시끄러운 소리로 들끓고 있었다. 자취집이 서림국민학교 앞길에 위치한 길가였는데 시민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애국가를 부르면서 지나가는 시민들의 소리에 웬일인가 하고 2층에서 밖을 내다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를 장악하고 요한병원 쪽에서 무등경기장 쪽으로 발길을 옮겨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힘차게 울려퍼지는 애국가 소리에 묻힌 시민들의 모습은 웬지 나의 마음을 찡하게 했다. 나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는데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면서 동생에게는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집을 나왔다. 시민들과 합세하여 애국가도 부르고 주변의 돌아가는 상황도 살폈다. 무등경기장에서 돌아 유동 삼거리까지는 시민들이 길을 메웠는데 시민들은 걸어서 가기도 하고 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무등경기장 앞에서는 경상도 트럭이라고 하는 8톤 트럭이 전복된 채로 있는 것을 목격했고 유동 삼거리로 해서 광주역을 향해 갔다. 다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지나 MBC 방송국 근처까 지 갔다. 광주문제에 대해서 편파적이고 허위보도를 했다 하여 시민들에 의해 MBC방송국이 불에 타는 것을 보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인파는 계속적으로 비슷한 수를 이루면서 다녔다. 시민들이 MBC와 더불어 왜곡보도만 일삼는 KBS 방송국을 불태우러 가자고 해서 시위대를 따라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 쪽으로 갔다. 그러나 광주역 청과물시장 부근에서 공수부대들과 대치상태에 빠져 앞으로 가지 못하고 말았다.
광주역에서 총상 당해
나는 당시 선두에 서지는 않고 뒤에서 따라다니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시위군중들이 KBS 방송국을 향해 가다가 대치상태에 빠지는 것을 보고 이제는 집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 1시경이었다. 골목길은 캄캄했고 곳곳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는 소문에 도저히 무서워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내일 아침 사무실에서, 그리고 학교에 가서 내가 봤던 것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위군을 계속 따라다녔다.
몇 시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시민들은 휘발유를 갖다가 드럼통에 넣어 가지고 광주역 쪽으로 굴려서 보내기도 했다. 한 1천 명 정도 되는 군중들 사이에서 총알이 날아다니기도 했다. 임동 성당 쪽 하늘을 향하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을 향해 날아다니는 총알은 공포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처음에는 하늘 쪽으로 총을 쏴서 예광탄이나 공포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나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공포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열 뒤의 청과물시장 쪽으로 있는 힘을 다해 도망을 쳤다. 대열 뒤쪽에 있던 나는 앞으로 나아가 사람들에게 공포탄이라고 하면서 도망가지 말라고 소리치며 말렸다. 이런 와중에 앞으로 앞으로 나가다 보니까 나는 대열의 가장 앞에 서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선두에 서 있게 되었으면서도 설마 쏠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총질이 잠시 멈추었을 때도 나는 계속 거기에 서 있었다. 청과물시장을 지나 대열의 맨 앞쪽에서 때마침 휘발유통에 불이 붙어 활활 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앞쪽에서 빵 하는 소리가 나더니만 뭔가가 망치로 땅 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총에 맞았는지 몰랐는데 등에 손을 대보니 피가 흘러내려 총에 맞은 것을 알았다. 그 순간에도 "나 총 맞았어" 말하고 쓰러졌다. 나는 아마도 내 앞쪽에서 타오른 휘발유통의 불빛으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공수부대들이 광주역 쪽에서 나의 심장을 겨누어서 쏜 총에 맞지 않았나 생각한다. 내 주위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몇 명이 다쳤는지 모르나 내 뒷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도 보았다.
사람들은 정신차리라고 하면서 나를 부축해서 대열 뒤쪽으로 데려가더니 수건으로 상처를 싸매주었다. 옆에 있던 세 사람이 나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가려고 시위대에서 빠져나왔지만 한참 동안 못 가고 서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터미널과 광주역 사이에서 광주고속버스가 와서 차를 세워 올라타게 되었다. 나는 앞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의 뒤쪽에 앉아 있었다. 조금 있다가 부상자 한 사람이 올라탔는데 올라서자마자 푹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길에서 총을 맞아 사람들이 차를 세워주어서 올라탔던 것인데 밖에서 날아온 총에 맞아 그만 죽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부상당한 뒤로 쭉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고 버스는 양동 쪽으로 빠져나가 병원을 찾아다녔다.
어느 일반병원 앞에 이르러서 사람들은 문을 두드렸으나 문이 열리지 않자 화를 내며 유리창을 깨고 소동을 피웠다. 그러나 병원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우리가 탄 차는 한참을 헤매고 다녔다. 차 안에는 몇 사람이 부상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타고 있었는데 쭉 같이 있어주었다. 차가 대인동 한미쇼핑 앞 일반병원에서 멈추었다. 그 병원이 김정형외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응급치료를 받았다. 전문치료를 받아야 되기 때문에 병원측에서는 치료할 수 없다고 해서 응급치료만 받고 다시 전문병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나는 '억울하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좀더 투쟁을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다. 또 이렇게 총에 맞아 죽든지 아니면 병원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차가 어디로 가는지 또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지만 도착한 곳은 적십자병원이었다. 거기서도 다시 응급처치를 해주고 포도당 주사를 놓아주면서 전문치료를 해야 된다고 했다. 적십자병원에서는 전대병원으로 가라고 했지만 전대병원이 차단되어 갈 수 없다는 소문이 나돌아 걱정이 되었다. 마침 앰뷸런스 기사가 한번 가보자고 해서 4명의 부축을 받으면서 전남대병원을 향해 달리게 되었다. 이때가 아마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였을 것이다. 차 안에서 나를 부축하던 사람들은 "당신, 죽으면 안 돼요. 당신 용감했소"라고 위로의 말을 해주기도 했다.
9개월간의 병원생활
전남대병원에 도착해 보니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내가 응급실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는 나를 부축해 주었던 사람들은 다 돌아가고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의사가 연락처를 물었다. 회사로 연락하면 회사원들이 나와 있을 거라고 대답을 했다. 오전 10시쯤 회사원들이 병원으로 와서 의사가 수술을 하자고 한 것에 승낙을 해주는 서약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정신이 들어 둘러보니 나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21일 오후 2-3시 사이에 깨어난 것이다. 나는 그 뒤로 총알이 왼쪽 가슴 부근을 지나 등 쪽으로 박혀 심장막을 스쳐 지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로 인해 횡경막, 폐, 대장은 찢어지고 췌장은 아예 없어져버렸다. 처음 수술은 잘되어 1주일 후에 병실을 10층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한 달쯤 뒤에 상처부위에 농이 생겨 터지는 바람에 다시 수술을 받게 되었다. 1차 수술 후에 나는 워낙 건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곧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수술기구의 소독을 철저히 해야 되는데 소독할 겨를이 없어서 소독을 소홀히 한 결과 상처부위에 농이 생겨 터져버린 것이었다. 재수술을 받고 난 10일 후에 다시 농이 생겨 상처가 터져버렸다. 대장에서 가슴으로 똥이 나왔다. 다시 수술을 해야 하는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10일간 누가 왔다 갔는지 치료를 어떻게 받았는지 알지 못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의사는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 다시 시도를 해봤다고 내게 말했다. 내가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자 장성에 계시던 부모님은 학교도 그만두고 21일 바로 올라오셔서 잠도 못 자고 지켜보셨다. 3개월 동안 4번의 수술을 받았다. 약도 국산을 쓸 수 없어 수입제품으로 살았다. 처음에 병원측에서는 약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부담할 수 없다고 해서 본인 부담으로 했었다. 이로 인한 경제적 부담은 대단한 것이었다. 장성에 있던 집을 팔아 병원비로 대고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해서 개, 소 등도 몇 마리씩 사다 먹었다. 그러나 먹기만 하면 위가 터져 가슴으로 새어 나와버려 고생도 많이 했다.
21일 아침 병원에 들어가 수술받고 난 후에 밖의 이야기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데모하는데 군인들이 총도 쏘고 시민들은 무장해서 대치상태에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26일 아침엔가는 밖에서 총소리가 나 내다보았다. 나는 10층에 있었는데 병실 안으로도 총알이 들어와 유리창이 깨지고 천장에 박히기도 했다. 이 일로 간호원이 손을 다쳤었다.
27일 새벽에는 잠을 자는데 갑자기 밖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학동 쪽에서는 "시민 여러분……." 하면서 이제 우리는 죽게 됐다고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6시쯤 밖을 내다보니 군인들이 학동 쪽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러 대의 탱크로 군인들이 양쪽 벽에 붙어 도청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병원에 있으면서 조사는 딱 한번 받았다. 수술받고 3, 4일 지난 27일쯤에 회복실에 누워 있는데 군경 합동조사반이 나와서 조사를 받았다. 나를 조사했던 사람의 직책, 계급은 잘 모르겠으나 사복차림이었고 보안대, 정보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경찰에서 근무하는 사람으로 추측된다. 같은 병실 환자들도 그 사람에게 조사를 받았다. 어떻게 해서 다쳤느냐고 물어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 사람은 폭도라고 하면서 C급으로 매겼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사실대로 말했는데 사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당시 조사받았던 사람 중에 말을 잘못했거나 또 학생도 아니면서 전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주동자들은 통합병원에 끌려가서 두들겨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학생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다음에 기록을 보니 학생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학교에도 조사를 나갔다는 것을 뒤에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해 폭도로 몰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니까 우연히 다친 사람들은 위로금이라고 해서 2, 3백만 원씩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폭도로 몰려 위로금도 못 받았다.
1981년 2월, 9개월 만에 퇴원했다. 완치는 아니었으나 병원 생활도 어렵고 갑갑하기도 했고 또 부모님까지 고생이 심할뿐더러 잘먹어야 한다는데 병원에서 마땅히 요리할 곳도 없고 하여 퇴원을 하게 됐다. 병원측에서는 통원치료가 가능하다고 해서 일단 집에 가서 통원치료를 받기로 했다. 나는 강제퇴원 한 것은 아니었다.
9개월간의 병원생활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생이었다. 날마다 썩은 냄새에 무얼 먹기만 하면 흘러내려 아침 저녁으로 배설물을 씻어내야 했고 두 번씩 드레싱을 해야 했다. 계속 포도당 주사를 맞다 보니 나중에는 주사맞을 곳도 없었다. 입원 후 얼마간은 같은 병실에서 6명이 생활하다 나중에는 3명이 쓰게 됐다. 그러나 냄새 때문에 같이 지낼 수 없다고 해서 병원측에 말해 1등실로 옮겨 생활했다. 2개월쯤 뒤에 3차 수술하고 나서는 속에서 썩어 똥이 나오고 냄새가 너무 심 해서 다른 환자들과는 도저히 같이 생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특별조치를 취해 병실을 혼자 쓰게 되었다. 좀 나아지자 다시 2인용 병실을 쓰게 됐다. 처음에는 혼자 쓰면서 방값은 내지 않았는데 좀 좋아지자 언제까지나 방값을 대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3등실로 갈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어서 5개월 이상 2등실에서 생활하면서 2등실과 3등실의 차액을 집에서 부담하게 됐다. 입원비, 약값은 경제적 부담을 크게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내가 벌어놨던 돈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2월에 퇴원하고 나서는 잘먹어야 했기 때문에 집에 있는 돈을 많이 써 버렸다. 장성 집에서 1년간 쉬었는데 1982년 겨울에 재발했다. 감기만 걸리면 담이 나오고 해서 병원치료를 했다. 조금씩 좋아져서 1983년부터는 회사에도 출근했다. 회사에서는 많이 봐주는 편이었다. 오전근무만 하고 병원에 가서 주사맞고 치료 후에는 장성으로 돌아갔다. 당시에 나는 월급을 받기 위해 형식상 회사에 나가는 형편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해 겨울 무리를 했던지 감기에 걸려 갑자기 열이 오르고 다시 재발했다. 그때가 12월경이었는데 폐가 썩어 냄새가 나면서 핏덩어리가 올라왔다. 2차로 전남대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옛날 것이 굳어버리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어려워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가망이 없으니 약으로 치료를 해보자고 했으나 약의 효과는 없었다. 나는 원광대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았다. 1980년 당시에 주치의로 있던 의사가 전문의가 되어 원광대병원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다시 찾아간 것이었다. 3월달까지 약물치료를 받고 원광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20일이 지났을 즈음에 재발했다. 위가 터져 2차 수술을 받았는데 병원에서는 잘 됐다고 했으므로 안심을 했다. 그러나 다시 농이 생겨 원광대병원에서 재차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일곱 번의 수술을 받았다. 2년간의 투병생활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다. 지금도 감기만 걸리면 농이 나와 운동하는 것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다. 왼쪽 가슴이 허물어져 갈비뼈를 뜯어냈기 때문에 오래 앉아 있지도 못한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술 먹고 어울려야 하는데 내 형편이 이러니 아예 아는 사람, 친구들은 만나지 않고 있다. 퇴근하면 집에 가서 누워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루이틀이지 옆구리가 결려 잠을 자려면 밤새 몇 번을 일어나곤 한다. 어떤 때는 너무 아파서 울다 잠이 들기도 했다.
자살을 기도하기도
자살을 하려고 몇 번을 생각했다. 밤에 포도당 주사를 맞다 보호자가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죽으려고 주사바늘을 빼기도 했다. 주사바늘을 빼면 피가 흘러 죽는다는 소리에 이렇게 했지만 이것도 탄로나는 통에 실패하고 말았다. 전기 콘센트로 해서 죽으려고도 했고 창밖으로 몸을 던져버리려고도 했다. 그러나 10층 병실에서 겨우겨우 걸어나갔지만 부모님의 모습이 눈앞을 가려 죽을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인가는 죽는 것을 포기하게 됐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다가 죽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영부영하다 죽은 사람은 병신이라는 생각도 했다. 지금은 스피노자의 말처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언제 죽을지 몰라도 사는 데까지 살아 보자는 마음이다.
성경책을 보면서 아플 때는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말할 수 없는 아픔 속에서 음식물이 썩어 새어나올 때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가벼운 부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나는 옆에서 성경을 읽었고 또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잘 몰랐으나 병상에 있으면서는 다르게 다가왔다. 나를 다치게 하실 때는 날 더 사랑하사 이런 고통을 이겨내게 하시어 연단에 이르도록 하 려하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자 오히려 나의 고통이 연단에 이르는 과정으로 생각되어 좋았다.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신념이 생겼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 고통이 많은데 죽지 않는다면 고통을 이겨 나가는 것을 시험으로 생각하고 단련과정으로 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니 하루하루가 고통스런 나날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이 신념으로 살고 있다. 나의 고통이 시험으로 생각되면서부터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런 마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 속에서 성경을 보면서 생활했다. 나의 이런 투병생활은 갓 대학을 나왔던 간호원을 감동시켰다. 어떻게 저런 고통을 참을 수 있을까 의심이 갈 정도였단다. 1985년도 5월에는 나를 돌봐줬던 간호원과 결혼을 했다. 집사람은 전주 태생으로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생활에만 전념하고 있다. 나를 위해 희생해 주려고 결혼을 했는데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그 어렵던 병상에서 고통을 이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부터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아들에게 대신하게 해야겠다고 부인과 약속을 했다. 아들을 낳으면 하나님께 보내자고,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가 되려면 고생도 많이 하고 시골에도 내려가서 활동을 해야 한다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들이 가엾어진다. 세 살짜리 아들의 잠자는 모습을 보면 웬지 안쓰럽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때도 있다.
내가 부상을 당하면서 온 집안이 흔들리게 되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었지만 온화한 가정생활이었다. 나로 인해 동생들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질 못해 항상 마음이 아프다. 나로 인하여 동생들이 너무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부모님은 더더욱 많은 고생을 하셨다. 마음고생, 몸고생 참으시고 열성으로 간호해 주셨다. 내가 병원생활을 할 때는 직장에서 병원으로 들렀다가 밤을 새우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시는 어머님의 고생은 말할 수 없을만큼 크다. 아버님은 위장병으로 고생하셨는데 내 문제로 긴장하셔서 오히려 위장병이 좋아지기도 했다.
내가 결혼하여 분가해 살게 되면서부터는 조금이나마 부모님께 걱정을 덜어드리게 됐다. 내가 분가함으로써 잠시라도 나를 잊고 사실 수 있게 됐으니까! 나는 항상 열심히 살려 했고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생활은 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상황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전두환을 나쁜 놈이라 생각하고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찌할 수 없다. 옆에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이제는 자식들을 둔 가장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그 마음만은 남아 있다. 먹고살려고 하다 보니 큰 신경을 못 쓰고 스스로 당했다고 생각하고 위로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원수를 갚는다고 하면 도와주고는 싶다.
7, 8년간의 고생스럽고 한스런 생활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1985년도에 지역개발협의회에서 보상금이라고 하면서 7백만 원을 주었고 얼마 전에 3백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주위 사람들은 보상금이 얼마나 나오냐고 하면서 한 몇 천만 원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정말 그 동안에 내가 겪은 고생은 몇 억을 준다 해도 보상받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5·18에 대해서는 강제적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였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온건하게 하다가 나중에 군인들에게 심하게 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더운 날 최루탄 가스를 맞아가며 고생한 것은 순수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5·18은 뜻있고 큰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학생들 데모하는 것을 보면 지나가다가도 지켜보고 있다가 끝나면 돌아간다. 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겨운 고마움을 느낀다. 의사는 내게 최루탄은 독약과 같다며 만류하지만 나이 먹어 참가는 못 해도 옆에서 지켜보면서 힘이 되어준다는 생각으로 학생들을 지켜본다.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운 마음을 느끼면서 산다. 그들은 나의 권리를 찾아주겠다고 싸우는데 나는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 미안한 마음뿐이다. (조사.정리 박현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