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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상무대
증 언 자 : 박태성(남)
생년월일 : 1959. 8. 14 (당시 나이 21세)
직 업 : 대학생 (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10
개 요
조선대학교 학생이던 박태성 씨는 사학재단과의 싸움을 하던 중 5·18을 맞이하게 되었다. 18일 시위진압에 투입된 공수들과 맞서 투석을 하다 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날 오후 조선대 운동장으로 끌려가 온갖 구타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다 상무대로 연행되었다. 7월 3일 석방되었으나 조선대에서 유기정학 처분을 당했다. 1984년 복학하여 졸업을 했다.
비상계엄령 확대소식
1980년 당시 나는 조선대학교 행정학과 2학년으로 행정학과 학회장을 맡고 있었다.
1980년 3월부터 재단과의 싸움이 계속되자 교수들이 중재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교수들은 교수에 대한 재단측의 일방적인 물리력 행사에 대응하게 되고 결국은 입장이 완전히 학생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재단과의 싸움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싸움이 개학 때부터 4월말까지 계속되었다. 4월말이 되면서 외부상황이 급격이 변화하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독재 재집권 음모가 전국 대학에 알려지면서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 재단문제로 인한 싸움도 당분간 보류하고 전국 대학과의 연대를 하면서 보조를 같이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조선대학교 민주화투쟁위원회(이하 민투)로 그 위원이 20여 명이었다. 민투는 각 단대별 학생회 조직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조선대는 침체된 학생운동 역량을 확산시키고 대중 결집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단과의 싸움을 터뜨렸던 것이다. 5월 8일 이전까지는 학내에서 시국문제에 대한 것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민투가 결성되면서부터 더 이상 학내문제로 내부 운동역량을 소모시키지 말고 앞으로 급박하게 전개될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슈 전환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2개월간의 싸움에서 얻은 것은 없지만 일단은 뒤로 미루고 전남대와 보조를 맞춰가면서 상황에 대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때까지 활동했던 학회장단도 뒤로 물러나고 교문 싸움부터 시작해서 가두시위는 민투 중심으로 이끌어 나가기로 하자는 요청이 들어왔다. 민투와 학회장단 양측이 서로 합의하여 학회장들이 50여 일간 끌어왔던 점거농성을 해체하고 종합운동장에서 8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해산식을 하였다. 학내문제는 잠정적으로 보류하고 실질적으로 닥쳐오는 현안문제인 군부독재 재집권 저지 투쟁으로 나아가기로 하면서 발전적인 해체를 한 것이다. 해체하면서 곧바로 주도권은 민투로 이양된다.
그 뒤 나는 5월 12일까지 광주에 있다가 순천으로 도망을 갔다. 재단측으로 부터의 납치, 폭행 등 개인적인 테러를 피해 간 것이다. 개별적 테러가 시작되자 우리들은 이틀 동안의 개인행동을 끝내고 재집결을 했다. 12일, 17명이 화순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갔다. 선암사에서 1박을 하고 있는데 그곳까지 재단측으로부터 매수된 자들이 쫓아왔다. 자가용 3대에 교수와 깡패까지 동원해 오자 다시 전주로 갔다. 5월 14,15,16일 가두시위에 관한 광주소식을 TV를 통해서 듣고 17일 이후의 진로에 대해 논의했다. 전북대 사대부고 앞 나나여관에서 5월 18일 새벽에 있을 비상조치 전국확대에 관한 내용을 까마득히 모르는 가운데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면서 정세분석을 했다. 정세분석도 제대로 못 했지만 우리들 대부분의 생각은 낙관적이었다. 군부세력이 재등장한다 해도 국민의 의식수준이 5·16 때와는 다르니까 분명 민주세력들의 승리로 끝나지 않겠는가라는 예상을 했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은 했지만 충돌 자체가 군부독재 세력의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한테 유리한 방향으로만 정리했다. 그때 사실상 17명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는 것이 몹시 불편했고 소요되는 경비도 더 이상 충당할 수 없었다.
결국 개별적으로 광주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17일 해산식을 했다. 17일 밤 12시에 회의를 하던 중 TV 뉴스를 통해서 계엄확대 조치를 알게 됐다.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각지에 비상계엄령 확대와 휴교령 등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여태까지의 회의 내용이 백지화됐다. TV를 끄고 조금 있으니까 탱크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때가 새벽 1시경이었다. 그 여관은 남원에서 전주로 오는 국도 옆에 있었다. 굉음이 들리기 시작해서 밖을 보니까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전주에 들어오는가하고 생각했다. 1시간쯤 후, 어마어마한 대부대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시야에 잡히는 길에는 온통 탱크와 장갑차로 들어차 있었다. 그때가 18일 새벽 2시쯤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당시까지 우리들과 연락을 하고 있던 10여 명의 교수님들께 계속 전화를 했는데 그때까지도 광주에는 아무런 상황변화가 없다고 했다.
18일 아침이 되면서 우리는 광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학내문제로 수배중이던 몇몇 사람은 2주일 정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피신기간을 2주일로 잡았던 특별한 이유는 없었으나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아무리 설쳐도 2주일 이상은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17명이 서로가 있을 연락처를 각자 적어서 자주 연락을 하면서 안부를 묻기로 하고 헤어졌다.
18일 아침 나는 광주로 향했다. 광주고속터미널에 12시 30분쯤 도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터미널 부근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온한 상태였다. 방림동 집으로 가기 위해 5번 버스를 타고 가는데 일고 앞에서 길이 차단되었다. 버스에서 금남로 쪽을 보니까 학생수는 500명 정도였고 진압하는 전경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그때 이미 금남로 길은 최루탄가스로 안개처럼 뒤덮여 있었다. 버스기사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했다. 모두 차에서 내려 도청 쪽을 보니 입구 부근은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금남로 2, 3가는 최루탄 쏘는 소리가 진동하면서 최루가스가 자욱해 앞을 제대로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 속에서 간간이 학생들이 한두 명씩 뛰어다니는 모습과 철모를 쓴 전경들이 학생들을 한일은행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 어슴프레 보였다. 전경들은 YMCA 앞과 한일은행 앞,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에서 3중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시민 2천-3천명 정도는 전경들을 둘러싸고 있는 형식으로 시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즉 금남로 2, 3가에 5백여 명의 학생들이 전경에게 포위되어 있고 그 전경을 시민들이 외곽 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첫날의 싸움
금남로에 있던 학생들인지 확실치 않지만 외곽 쪽에서 구경만하고 있는 시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구경만 하면 되겠습니까?" 하면서 시민들 틈에 끼어 노래를 부르고 스크럼을 짰다. 직접적인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2-3천 명의 시민들이 서서히 악도 쓰고 돌도 던지는 등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전경들은 자신의 뒤쪽이 소란해지자 신경질적으로 시민들에게 최루탄을 쏘았다. 이때부터는 자발적으로 시민들이 돌을 던지고 학생들의 선창에 맞춰 구호를 외치며 밀고 들어가자 전경의 저지선이 조금 와해됐다. 안쪽에 있던 학생들과 합류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잠시 후 밀려오는 전경들에 의해 시민, 학생들이 금남로 5가를 중심으로 계속 분산되었다. 계속해서 학생들이 맞으면서 끌려가자 밖에서 보고 있던 시민들은 악을 쓰면서 시위를 지원하였고 전경이 밀리면 계속 따라가 돌을 던지는 등 뒷쪽에서도 교란작전을 펴는 형식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나는 3월에 학내문제로 시위를 하면서부터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해 그때까지도 두꺼운 겨울 점퍼를 입고 있었다. 덥기도 하고 또 그런 행색으로는 도저히 돌아다닐 수 없을 것 같아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 위해 집 쪽으로 갔다. 택시는 이미 다니지 않고 버스들도 노선과는 거의 무관하게 돌아다녔다. 할 수 없이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충장로 쪽으로 접어들었다. 충장로 5가에서 4가까지는 최루탄 가스만 자욱할 뿐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시 충금지하도 공사를 하기 위해 파놓은 곳의 주변에는 시위대에게 무기가 될 만한 자갈이 많이 있었다. 충장로파출소 쪽으로 가보니 전경과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한일은행 쪽과는 달리 그쪽에서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합류해서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지하도 공사를 위해 파놓은 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전경은 계속 선무방송을 했다. 여기에 있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경들이
"돌 던지는 것이 민주화냐, 빨리 집으로 가라!"
라고 얘기하면 시민들도 받아서 농담도 하는 형태의 시위였다. 후에 전개될 적대적인 상황에 대해 피차 모르고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은 낭만적이었다.
충장로 파출소 앞에서 1시간쯤 공방전을 펴며 싸우다가 전경들에게 밀려 도청 뒤 쪽으로 해서 조선대 입구 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공수들은 있었지만 탱크도 없고 아직까지 시위 진압에는 나서지 않은 상태였다. 오후 2시쯤 전경들이 쏠 최루탄이 떨어졌는지 일시적으로 밀리자 그때 시위군중이 충장로 파출소를 깨버렸다. 구 원호청 앞으로 해서 백제호텔을 지나 다시 충장로2가로 갔다. 그곳은 이미 전경들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다시 미문화원 앞으로 가자 평소 알고있던 조대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들과 함께 대도호텔 앞으로 갔다. 그곳에도 조선대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부터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거의 없고 투석전을 펴다 밀려나면 최루탄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나서 구호를 외치는 식의 것이었다.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치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최루탄이 터지지 않고 뚜껑만 열려 분말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주위 인가와 상가에서 퍼주는 물을 양동이에 담아가서 용해시켜 버리는 일을 하였다.
진행되는 싸움이 거의 육탄전을 벌이는 것 같았다. 거기에서도 전경들에게 밀려 도청 뒷담으로 가서 보니 그 길을 시민들이 빽빽히 메우고 있었다. 약 1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10여 분 그곳에서 쉬다가 다시 스크럼을 짜고 대도호텔 쪽으로 가니 최루탄을 엄청나게 쏘아 다시 밀려 양영학원 쪽으로 몰렸다. 그 길로 많은 사람이 뛰어나가자 노동부 부근에서 쉬고 있던 전경들이 허둥지둥 방독면을 쓰고 최루탄을 쏘아대 그곳에서 또 다시 공방전이 벌어졌다. 나는 잠시 뒤로 빠져나와 방림동 집으로 전화했다. 당시 숙모집에서 살던 때라 숙모님이 전화를 받아 오지 말라고 했다. 어젯밤에 4, 5명의 사복경찰이 와서 온 집안을 다 뒤지면서 조선대 학생회 간부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서 빨리 말하라고 난장판을 만들었다고 했다. 당분간 절대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지낼 돈이 없어 사촌동생을 노동청 앞에서 만나 돈을 건네받기로 했다. 올 시간을 대강 계산하고 나는 다시 시위대에 합류했다. 시위군중에 밀려 산수동 쪽으로 가보니 시민들이 거기에도 많이 나와 있었다. 동명동 파출소에는 학생이 잡혀 있었는데 산수동 쪽으로 밀리던 시위대들이 파출소를 빙 둘러싸고 밀고 들어가니까 학생을 붙잡아두었던 경찰 8명 정도가 반대로 시위대에게 붙잡힌 꼴이 되었다. 그 상황까지 보고 나는 동생을 만나기 위해 양영학원 앞으로 갔다. 동생을 만나 3만 원을 전해 받고 가져 온 봄점퍼를 입고 겨울 파카를 동생에게 보냈다.
다시 MBC방송국 앞 도로로 오는데 헬기가 다니면서 선무방송을 시작했다. 3시가 조금 못 되었을 것이다. 시위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최루가스와 최루탄 파편, 돌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4시경 처음 진압에 투입된 공수들에게 붙잡힐 때까지 나는 동명로와 노동부 앞, MBC 방송국 앞을 오가며 투석전을 벌였다. 투석전을 벌이다, 최루가스 때문에 견디기 어려우면 세수하고 바람 좀 쐬다가 다시 시위대에 합류하고는 했었다. 한참 시위를 하다 광주여고 뒤 쪽에서 눈물을 닦고 동명로 쪽으로 나오니 시위대가 보이지 않았다. 구경하는 시민들 말에 의하면 산수동 쪽으로 쫓겨갔다고 했다. 주력부대를 따라가기 위해 산수동 쪽으로 가는데 장동 사거리 부근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가서 보니 구경하는 시민들이었다. 동명로를 따라 산수동으로 가는 길의 상공에서는 헬기가 계속 선무방송을 해대고 있었다. 시민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었다. 앞을 봐도 시위대가 보이지 않자 다시 장동 사거리 쪽으로 가니 흩어졌던 시위대가 다시 MBC 방송국 앞에서 집결하고 있었는데 아주 소규모였다. 아주머니의 말대로 그전의 시위대는 다른 곳으로 간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착검한 계엄 공수부대의 만행
오후 3시 30분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쪽에서 군용트럭 몇 대가 줄지어 왔다. MBC 방송국 앞에서 급정차를 하더니 동시에 트럭 양쪽으로 용수철처럼 튕겨 내리는 것이 마치 영화를 보는 듯했다. 그때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안경이 최루가스와 먼지, 땀방울로 얼룩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아줌마들 틈에서 안경을 닦고 있었다. 군인들이 차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고는 방위라고 소리쳤다. 전경들만으로는 시위진압이 힘드니까 광주 인근지역 방위들을 데려다 31사단에서 곤봉을 들고 진압훈련을 했다고 하면서 그들을 드디어 오늘 풀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무방비상태로 그냥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MBC방송국 앞에는 40-50명의 시위대가 있었다. 원형을 그리면서 공수들이 '얏!' 하고 악을 쓰며 퍼져갔는데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M16에 착검된 상태로 뛰어다녔는데 그 움직임으로 보아 그간 봐왔던 전경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나는 MBC방송국에서 약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데다 그동안 비록 투석전을 했더라도 그들이 지나갈 때 인도의 시민들과 같이 서 있으면 잡아가지는 않겠지 하고 아주머니들과 함께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성을 상실해 버린 것 같았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개머리판으로 짓이기면서 우리가 있는 바로 앞까지 왔다.
쓰러진 사람들을 양쪽에서 바짓가랑이를 잡고 질질 끌고 가서 트럭에다 던져버리는 것을 보니 저놈들에게 잡히면 현장에서 죽겠구나 싶어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학내시위와 관련해서 피신해 갈 때 순천에서 구례까지 약 70킬로미터 정도를 걸어 발에 물집이 잡힌 데다, 17일 밤 계엄군이 전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거의 한잠도 자지 못해 몹시 피곤해 있었다. 그런데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시위대와 함께 다녔으니 그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주여고 앞까지 몇몇이서 도망을 가다 뒤돌아보니 공수 7, 8명이 뒤쫓아오고 있었다. 광주여고 정문 쪽까지 와서 보니 교육위원회 쪽에도 공수들이 곤봉을 들고 이쪽을 향해 보고 있었다. 다시 뒤로 돌아서 뛰어가려 하니 공수들이 벌써 가까이 와 있었다.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어서 바로 눈앞에 있던 기름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주머니 4, 5명이서 기름을 짜고 있었는데 헐레벌떡 뛰어오는 우리를 보더니 기름집 안집으로 통하는 쪽문을 열어주면서 빨리 나가라고 했다. 나와 같이 뛰어왔던 사람들은 모두 그 문을 통해 안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름 짜는 기계 뒤에 숨어 있었다. 겨우 3, 4분 정도 숨어 있었을 텐데 그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그때 기름집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밖의 상황을 보기위해 문 앞으로 갔다. 나도 밖을 내다보기 위해 아주머니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를 발견한 공수들이 곤봉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그런 후 끌려나가서 2명의 공수에게 머리, 어깨를 수없이 맞았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정신을 잃었다. 그 광경을 본 아주머니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너희놈들은 동생도 없냐고 하는 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려 하자 2명이서 양쪽 팔을 끼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가하면서 또 때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네 동료들을 소리쳐 부르자 공수들이 달려오더니 그대로 내 가슴을 군화발로 찼다. 온몸이 발길에 채고 곤봉세례를 받아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르자 MBC방송국 앞에 있는 트럭 쪽으로 끌고 갔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있으면 여지없이 구타했다.
끌려가면서 힐끗 보니 노동부 앞에서는 공수들에게 잡혀 실신한 사람들이 양쪽 바지가랑이를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더 이상 반항해 봤자 안 될 것 같아 그때부터는 내가 걸음을 더 빨리 하면서 따라갈 테니 때리지 마라고 했다. MBC방송국 앞에 있던 트럭에 타자 위에서 감시하고 있던 다른 공수에게 또 수 없이 얻어맞았다.
트럭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엎드려 있는데 실신한 사람들이 계속 짐짝처럼 던져졌다. 한참 후 우리가 탄 트럭이 장동 사거리와 산수동 쪽으로 나 있는 동명로를 왔다갔다하면서 시민, 학생들을 태웠다. 트럭이 멈출 때마다 공수들이 우리 등을 밟고 다니면서 때리고 차에 태워진 사람들을 개패듯이 팼다. 트럭에 사람들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태워지자 옆사람과 잠깐씩 말도 할 수 있었다. 동명로 어디쯤에서 트럭이 정차하더니 안쪽에서부터 한 명씩 세워놓고 또 구타를 시작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귓속말로 한 명씩 조사해서 학생증이 나오면 때린다고 해 나는 몰래 학생증을 꺼내 고개를 푹 쳐박고 씹어 삼켜버렸다. 전주에서 학생회 간부 17명과 헤어질 때 받은 전화번호가 적인 종이가 두 장이었는데 그것도 꺼내 한 장은 삼켜버리고 나머지 한 장은 씹으려는 순간 들켰다. 나는 일으켜세워져 또 맞기 시작했다. 그때 턱 주위가 찢어져 피를 많이 흘렸다. 그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 있었고, 술냄새가 풍긴 것으로 보아 술을 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구타당하고 나서 붙잡힌 지 3,4시간 만에 조선대 운동장으로 실려갔다. 운동장 한가운데쯤 가서 내렸는데 그곳에는 이미 300여 명이 붙잡혀 있었다. 트럭에서 막 내리자마자 그곳에 있던 공수들이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조선대 운동장에 도착한 시간이 약 6시 30분쯤 되었을 것이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운동장 가운데 둥그렇게 모여 손을 머리에 올리고 그 주위를 공수대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계속 밖에 있는 사람을 때리니까 맞지 않으려고 안으로 계속 들어왔다. 보니까 원은 점점 작아지고 사람들이 겹겹이 쌓였다. 마치 구더기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에게서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뺏어갔던 공수가 지휘관에게로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겁이 나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겉에 입고 있던 점퍼를 몰래 벗어서 그 자리에 버렸다. 잠시 후 쪽지를 갖고 온 공수가 이름을 부르면서 해당자는 나오라고 했다. 서너 명을 부를 때까지 아무도 나가지 않았는데 그 쪽지에 적힌 이름과 동명인이 있었는지 대답하면서 나갔다. 그러자 그 사람을 실신해서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때렸다.
밤 9시경부터는 구타를 하지 않았다. 화장실 갈 사람은 손 들고 나오라고 해도 조금 전의 광경을 본 사람들이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괜찮으니까 나오라고 서너 번 정도 말하자 한 사람이 나갔는데 정말 때리지 않고 운동장 가로 데리고 갔다. 때리지 않고 한 명씩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화장실은 급하지 않았지만 한 명당 한사람의 공수가 따라가니까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총으로 쏴버릴 것만 같아 도저히 도망칠 수가 없었다. 붙잡혀서 처음으로 맞지 않고 한 시간 정도 쉴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상대편의 얼굴이 사람같아 보이지 않았다. 얻어터져서 피범벅이 된 데다 퉁퉁 부어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10시쯤 되자 헌병대 트럭이 왔다. 그들은 우리들을 50여 명씩 긴 밧줄로 굴비 엮듯이 줄줄이 묶었다. 손이 뒤로 묶인 채 군용트럭에 올라가라고 하면서 구타를 했다. 뒷사람이 어깨나 머리로 앞사람을 받쳐주는 방법으로 모두 탔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 트럭은 사방이 꽉 막힌 차여서 뒷문을 닫아버리니까 안은 완전히 빛이 차단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옥의 상무대
10시쯤 곧바로 광주경찰서에서 내렸다. 광주경찰서에서는 이름과 주소, 신분조사만 했다. 전경들이 타는 차에 우리들이 나뉘어서 타기 전에 경찰이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키라고 하면서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광주경찰서에서 2시간 이상을 체류하고 상무대로 갔다. 상무대 연병장에 도착하자마자 겉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은 채로 올챙이 포복을 시켰다. 1명당 군인 1명이 붙어다니면서 야구방망이로 뒤에서 계속 구타하다 새벽에야 영창에 밀어넣었다. 영창은 1호실부터 7호실까지, 4호실은 없으니까 모두 6개였다. 방 1개당 크기는 약 8평 정도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한 방에는 80명 정도 수용됐다. 각 방은 부채꼴 모양으로 방사형태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앞에 앉아서 감시하면 각 방이 한눈에 보인다.
19일부터 개별조사가 시작됐다. 아침 6시에 기상해서 밤 10시 취침 전까지의 생활은 기합받는 것의 연속이었고 잠시 중단될 때는 정좌하고서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한다. 이때 조금만 움직여도 불려나가서 각 방을 왔다갔다하면서 맞는다. 그러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20일 밤에는 6호실에서 기합거부 투쟁을 했다. 애국가를 부르면서 거부를 했다. 다들 철창을 붙잡고 일어나서 우리는 아직 재판도 받지 않은 사람인데 왜 죄수 취급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진압되어 버렸다. 그날 주동자 색출작업 때 조선대 박동철 교수와 성균관대생이 0.5평의 징벌방으로 끌려가서 24시간 후에 돌아왔는데 성균관대생은 그 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소문에는 그가 죽었다고 했으나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그 후로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광주경찰서를 통해서 왔던 우리들은 21일까지는 광주서에서 식사를 가져와서 먹었으나 22일부터 차량통제가 심해져서 가져올 수 없다 하여 상무대에서 밥을 주었다. 도시락에 단무지 2쪽과 된장이 전부였다. 21일부터는 석방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개별조사 때 분류한 A급, B급, C급, D급 중에서 D급에 속하는 80명 정도를 오전에 소령이 들어와서 호명했다. 오후에 다시 이들을 불러내어 상무대에 처음 들어와서 벗어놓은 옷이며 신발이 든 보따리를 나눠주었다. 그때 아마 구속된 시민, 학생을 석방하라는 요구의 시위가 확산되자 D급에 해당하는 자만 석방한 것 같다. 상무대에 도착해서 석방될 때까지 팬티만 입고 살았다. 그때 안에서는 끌려나가면 죽는다는 소문이 있어 80여 명이 나가자 창문을 통해서 지켜봤는데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을 보니 석방된 것 같다고 화장실 창문을 통해 망을 보던 사람이 말했다. 그 후 안의 분위기는 조금 좋아졌다.
22일은 2차 석방 작업이 있었다. 아마 180명 정도였던 것 같다. 그간 방이 비좁아 서로의 몸에 반쯤 기대어 잠을 잤는데 두번째 석방이 있고 나서 넓고 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23일날도 오전에 소령이 들어와서 명단을 불렀다. 그때 정확한 숫자가 18명이었는데 전남대총학생회 부회장 이승룡, 자연대 학생회장, 위경종, 나도 불려나가 숫자와 이름을 확인하고 들어왔다. 예전과 같은 형식으로 진행하니까 우리는 석방될 것으로 알았다. 점심 후 다시 소령이 와서 우리를 불러대더니 "18명 맞지?" 하고 물었다. 그래서 그때 숫자가 18명인 것을 정확히 기억한다. 우리한테 처음 올 때 소지품을 담아 놓은 보따리를 가져오라고 했다. 짐을 가지고 왔더니 7호실 문을 열고 우리 18명을 밀어넣었다. 당시 7호실에는 일반죄를 저지른 사람이 10명 정도 있었다. 나머지 다섯 개의 영창문을 열더니 그들을 트럭에 태워 모두 석방했다. 남아 있던 우리들은 이제 포기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 대대적으로 잡혀오기 시작했다.
27일 밤에는 우리가 처음 잡혀왔을 때처럼 방이 붐비기 시작했다. 23일 석방됐던 고등학생 한 명이 27일 다시 잡혀왔다. 그 아이 말에 의하면 버스를 타고 가서 화정동에 있는 시민군에 인도되었는데, 시민군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영해 줘서 막 울었다는 것이다. 인수인계가 끝나자 집에 갈 사람은 가고 가지 않을 사람은 같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상무대에서 군인들에 의해 날마다 구타, 기합을 받다 보니 군복만 봐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는데, 나와 보니 자기와 똑같은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해 주자 자기편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해 도저히 집에 갈 수 없어 계속 시위에 참가하다 27일 다시 붙잡혀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아이를 통해 구속자들이 시민군 측에 인도되는 과정을 들었다. 27일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무대 영창에서 정동년 형의 자해사건이 있었다. 처음에는 정동년 형과 같이 있지 않았는데 23일 18명만 남아서 7호실에 옮겨왔을 때는 같이 있었다. 각자 숟가락 하나씩을 목에 걸고 있었는데 그것을 날카롭게 갈아가지고 배를 그어버렸다. 그 사건 이후로는 화장실도 자유롭게 가지 못하고 2인 1조로 해서 감시병에게 보고하고 가도록 했으며, 또 개인당 한 개씩 갖고 있던 숟가락을 다 빼앗아버렸다. 27일 대규모의 시위대들이 붙잡혀 들어왔다. 총상당한 사람들과 파편 등에 맞아서 찢어지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다음날 통합병원으로 전 원 후송됐다. 그때 잡혀온 사람들은 등에다 총기소지, 김대중 추종자, 권총소지, 기동타격대 소속 등등의 글자가 빨간 매직으로 씌어져 들어왔다. 그때 붙잡혀 온 사람들을 보니 밖의 상황을 실감할 수 있었다. 먼저 잡혀와 있던 우리들은 그들의 웃옷을 벗겨 씌어진 매직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찢어서 화장실 변기에다 쑤셔넣어 버렸다. 상무대 영창 화장실은 수세식이어서 잘 들어가지 않아 손을 변기 구멍 안쪽으로 집어넣어 눌러가며 버렸다. 너무 많아 변기 안에 다 들어가지 않자 입 속에 넣고 잘근잘근 깨물어 글씨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때 우리들끼리의 이야기가 등에 매직 글씨가 씌어져 있으면 사형당한다는 말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가 발각되어 또다시 기합과 구타를 당했다.
23일부터는 반찬이 거의 없었다. 군인들이 먹는 식판에다 꽁보리밥 세 숟가락 정도와 된장에 소금 넣은 국물, 그리고 멸치 서너 개가 다였다. 기합과 구타를 이기지 못해 졸도를 많이 하니까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금을 많이 주었다. 며칠째 계속 이렇게 먹다 보니 견딜 수가 없었다. 밥도 부족하여 숟가락을 떼는 순간부터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27일부터는 반찬이 약간 좋아진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5월말쯤이었을 것이다. 영창 안에서 정좌하고 있는데 전남대학교 오병문 교수님이 조금 움직였다고 밖의 감시병이 나오라고 하니까 전남대생들이 '그분은 연세도 많고 우리 교수님이시니까 우리가 대신 벌을 받겠다'고 감시병에게 사정했다. 하지만 감시병(정근석)은 학생들을 밀어내 버리고 교수님의 손을 철창 밖으로 내밀라고 하고는 곤봉으로 손바닥을 10대나 때렸다. 손바닥을 맞을 때도 제자들 앞에서 소리 한마디 지르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와 무릎 사이에 두 손을 감싸쥐고 계시는데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일병 정근석'에게 우리는 심한 적대감을 가졌다. 그 녀석이 근무할 때면 화장실에 간다고 보고할 때도 그 녀석의 얼굴과 계급장 그리고 이름표를 째려보고 가기도 했다. 우리가 영창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적대표시였다.
6월 3일부터는 분위기가 약간 누그러졌다. 그날 밤에는 집에다 편지를 쓰라고 했다. 6월말쯤 되니 석방될 거라는 예고가 있었다. 7월 3일 나를 포함한 몇 명이 석방됐다. 처음에는 A급으로 분류됐다가 27일 대규모의 시민군들이 잡혀오자 재분류돼 석방된 것 같다. 우리들은 7월 3일 영창을 나와 소준열 계엄사령관에게 상무대에서의 일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두 시간 동안 교육을 받은 뒤 학교로 인도됐다.
석방 후 보름간 집에서 쉬면서 몸조리를 했다. 그간 갖은 구타와 기합으로 몸이 많이 상해 있었다. 며칠 온몸이 퉁퉁 부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운신을 하자마자 학교에 가보니 유기정학 처리가 되어 있었다. 학교는 계속 나갔는데 문교부에서 지시가 왔다며 지도교수가 휴학을 요구해 버티다가 결국은 휴학했다. 1984년 복적이 허용되어 재입학한 뒤 1986년에 졸업했다.
나는 5·18 당시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공수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끝까지 투쟁하다 먼저 가신 분들과 부상으로 고생하시는 분들께 항상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1986년 5·18 당시 다른 곳에서 시위를 하다 18일 잡혔던, 친구 박채영을 만나면 지금도 5·18 광주민중항쟁 기간에 참여하지 못한 부분을 살아 있는 동안 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 보답하자고 서로 다짐하곤 한다.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 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