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서로의 취약성을 가장 깊이 공유하는 사이이다. 연애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상대안에 이런 취약함이 있을거라 상상도 못했던 모습들을 가장 가까이서 대면하는 사이인 것이다.
결혼생활은 오랜시간 그럴듯하게 숨겨둔 내면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노출시킨다. 함께 자고, 먹고, 싸우고 으르렁대는 동안 내가 선택한 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 믿었던 마음은 조금씩, 혹은 와르르 무너지기도 한다. 내 이상형에 근접했다고 믿었던 사람은 어디로 가고 이토록 속 좁고, 참을성도 없으며, 삶의 지향점까지 다른 사람이 내 앞에 있다니! 상대의 취약성을 이해하지 못해 여전히 표면에 머물러있는 의미없는 싸움이 되풀이기도 한다.
부부사이가 좋다는 것은 상대의 취약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가 맞고 틀렸네가 아닌 당신은 그게 잘 안되는구나, 나는 이게 참 힘들어 라고 말할수 있는 사이. 나는 이 부분이 취약하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라는 마음이 오갈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면 부부는 큰 산 하나를 넘은 것이다. 안정된 부부관계로 진입하는 첫 문을 통과했다 할수 있다.
돌이켜보면 남편을 사랑해 온 시간은 남편의 취약성을 받아들이게 된 시간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그리던 남편의 이미지를 내던지고 내 눈앞에 살아 숨쉬는 이 사람과 다시 살아내자고 결심하기까지, 실은 내 두려움을 마주하는 순간이 먼저 있었다. 그를 통해 보상받고 싶었던 어떤 감정과 가치들이 영영 사라지더라도 내 삶이 무너지지 않을거란 깨달음,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인식이 오기까지 나의 두려움과 싸워야했다. 결국 상대의 취약성을 받아들이는 공간은 나의 두려움을 내던진 만큼 생겨남을 배웠다.
누군가 내 남편에게 아내의 취약성을 가장 많이 발견한 때가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큰 딸을 입양한 후 몇년간이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다섯살짜리 큰 딸을 입양하고 적응해가던 3년 여의 시간은 정말이지 내 안의 괴물을 수시로 불러내는 암흑의 시간이었다. 나는 수시로 폭발했고, 무너진 내 자신에 좌절했으며, 딸 아이를 사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몹시 수치스러워했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싸하게 식어있는 집에 들어서야 했던 남편의 마음은 어땠을까. 행복하게 살자고 진행한 입양이었건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인내심 많은줄 알았던 아내가 매일 괴물로 변해 딸 앞에서 으르렁 대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다가 우리 가정에 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영영 아내와 큰 딸이 잘 지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으로서 어디에도 나누지 못할 내면의 두려움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고마운건 그 시절의 남편은 내게 한번도 비난을 퍼붓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망스럽고, 답답하고, 막막했을텐데 그냥 별 말 없이 나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나의 부끄러워하는 마음에 공감해주고, 진심 아무렇지도 않은듯 잠자리에 들었다. 남편은 공감능력이 뛰어나거나 마음이 무진장 넓은 남자는 아니다. 다만 가장으로서 이 가정을 흔들림없이 지켜야한다는 본능 아래 마음을 굳게 먹고 그 상황을 통과한게 아닐까 싶다. ‘당신한테 실망했어, 정말 네가 그럴줄 몰랐다’고 말하기보다는, ‘오늘 힘들었겠네’ 라는 한마디로 입을 닫기까지 그가 싸운건 이대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 싸움을 결국 넘어선 그였기에 나의 취약성을 그대로 품을수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 역시 남편의 취약성을 알고 있다. 남편이 어느 순간 가장 작은 모습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크다보니 또다른 취약성이 곳곳에서 더 드러나고 그걸 알아차리는 아이들의 레이다망에 자주 걸려든다. 그럴때면 잠시 아차 싶지만, 비로소 내가 등판해야 할 때가 왔구나 싶어 빙그레 웃음이 나기도 한다. 나의 이해와 조력이 필요한 부분을 여전히 달고 사는 남편이 이제는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의 취약성을 잘 이해한 관계만큼 유연하고 단단한 사이는 없을 것이다. 남편과 그런 사이를 만들고 싶어 오랜시간 공을 들였던 것 같다. 성경에서 자주 보았던,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사이’라고 부부를 표현했던 문장을 이제는 ‘서로의 취약성을 받아들인 굳건한 사이’라고 해석한다. 앞으로 50년간은 또 어떤 취약성을 서로에게 내보이고 이해받으며 살아갈지 모르겠지만 내가 약할 때 가장 강해질수 있다는 역설을 부부관계에서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