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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보수적 전통주의자인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사람인가?
공자가 다듬은 예에 대한 이상은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문화의 갈등>(culture conflict)을 알고 있고, 단일 문화권 내에서도 야기될 수 있는 습관과 가치관의 충돌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찍이 공자가 겪지 못했던 하나의 문제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자의 기본 전체는 하나의 예가 있고, 그것은 보다 위대한 우주의 도(천도)와 근원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전제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이 예가 그가 살고 있던 나라의 (당시 다른 나라는 아직 야만적이었다) 예이며, 그의 전통의 선조들도 바로 이 예 속에서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예와 그것이 뿌리박고 있는 우주의 도는 내적인 연관을 갖지며 아주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햇다. 따라서 사회적, 도덕적으로 필요한 것은 (개개의 사람들이) 바로 이 예 안에서 그 자신과 그 자신의 행위를 형성해 내는 것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다수의 문화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문화적 다원성이란 점을 고려할 때 공자의 서로 관련된 이런 기본 가정들에 대한 신중한 재검토가 요청된다.
공자가 다듬은 (예의) 이상에 (비판적인) 이런 이의들에 대한 첫번째 대응은 이런 이의들이란 시대 착오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만약 누가 공자의 이상을 (서로 다른 문화들이나 관습들간의 갈등을 초월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보편 타당한 인간 이상의 가능성으로서 제시했다면, 그런 비판적 논의들은 당연히 공자의 이상에 대해서도 해당됨을 우리는 용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의들이 만일 기원전 5세기 노나라 출신의 교육자인 공자를 비판하는 준거들로서 제기된 것이라면, 그런 논의들은 시대 착오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우리는 논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자는 그가 살았던 당대의 그리스 문화나 이스라엘 문화 또는 보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집트 문명 등 다른 거대한 문화가 있었음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나라 사람들이 알앗던 것은 인접한 아시아권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그들 선조들 중의 몇몇을 특별히 크게 이상화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물론 분명 노나라만큼 수준높은 문화를 가지지 못한 변방의 여러 종족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오늘날 그를 비판하는 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역사 환경, 즉 기원적 5세기 중국에 살았던 공자는 그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인류학적 그리고 역사학적인 정보를 접할 수 없었고, 또한 그런 정보가 잇으리라고 가상할 만한 어떤 합당한 이유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 그런 공자가 반문명 또는 순야만 민족들이 살고 있는 변방으로 둘러싸인 중앙, 즉 만물의 <중심>에 오직 하나의 위대한 문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해서, 그를 비판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떻게 (그 당대에) 자기의 문화와 같은 수준의 다른 위대한 문명들이 존재하리라는 가능성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식의 번호가 아무리 설득력이 잇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공자에 대한 <면호>는 여전히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한다. 왜냐하면 이런 변호는 결국 공자의 가르침으로 더 이상 보편적, 철학적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한) 역사 시대의 그것으로 의미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제야 우리는, 비슷한 지적 한계를 가지고 활동햇던 공자 당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공자의 가르침을 생동적 선택으로 받아들였던가 하는 것을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공자의 가르침은 바로 (현대에 살고 잇는) 우리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의 요점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어쩌면 (인류학적, 역사학적)지식을 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20세기의 현대인들에게는 (비록 이 책에서 나의 논의는 이러한 견해와는 정반대의 내용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지만) 하나의 (지나간 특정 시대의)역사적 본보기 이상의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접근 방식은 아직까지 풀지 못한 몇가지 문제를 남겨두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된 것은 (당시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라는 동일 문화권) 내부의 갈등, 즉 단일 문화권 안에서의 충돌의 문제이다. 공자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흔히 비운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당시에 다수의 난립해 있는, 또한 수시로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여러 제후국들의 존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당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민족들 사이에는 상당한 정도로 생활 관습들이 서로 다르며, 이런 관습들이란 협소한 중심부의 제후국들과 변방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큰 면적의 나라들 사이에서 시대적 간격을 두고 아주 큰 차이를 보이고 잇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라도 옛 전통의 붕괴가 자주 일어나면서, 새로운 제도와 습속이 도입되고 있음을 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상한 이론 논쟁으로부터 마키아벨리식의 종치술, 단순 살인, 처참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문화 내적 갈등에 휩싸인 지역이 일찍이 있었다고 한다면, 분명히 노나라와 그 이웃 제후국들이 바로 그에 해당될 것이다. 그때는 실로 일대 혼란-그러한 혼란이 강하게 의식되는-시대였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노나라의 예 역시 본질적으로는 (다른 변방 지역의 관습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특정 생활 방식의 총체인 것이요, 따라서 당시 세계의 여러 실제적인 도전들을 해결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가증성을, 그렇다면 공자는 어떻게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 <논어>에서 이런 문제를 꼭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더 말할 나위 없이 공자는 상고 시대에 완벽했던 원래의 예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도덕적, 정치적으로 타락한 결과 이런 혼란이 야기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가 제기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왜 이런 식의 대답이 그 어떤 다른 대안적인 문제 제기를 아예 차단해 버릴 수 있을 만큼 (공자에게는) 그렇게 강한 구속력을 가질 수 있었던가? 당시의 일상적 삶에서 분명하게 도출될 수 있는 적어도 (공자가 제시한 대답과) 같은 수준의, 아니 (우리 현대인들의 눈에는) 그것보다 훨씬더 강한 설득력이 있을 수 있는 다른 여러가지 대안의 가능성을 제쳐두고, 어ㄷ게 해서 공자는 오직 이러한 대답에만 도달할 수 있었던가? 우리가 이것을 (공자라는 개인의) 한정된 사고력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위대한 사상가요, 교육자인 공자가 핵심적으로 생각했던 문제들의 구성이나 대답의 방식안에 있을 수 있는 그 어떤, 보다 설득력과 보편성이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 하는 점을 적어도 이제 우리는 우선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근거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공자를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자의 가르침을 단지 당대의 시대작 위기의 본질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하여 아무런 창의력을 제시하지 못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갈등과 혼란에 새로운 비젼을 제시했던 창의적인 대안으로 보아야만 한다. 앞으로의 서술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제시하지 않고 오직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얘기를 새롭게, 내가 희망하는 바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정말 계발적인 방식으로 주장해 보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공자를 단순히 과거의 제도와 문화의 현상 유지만 고집스럽게 변호하는 고풍스런 사람이라기보다는 위대한 문화 개혁가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앞의 어딘가에서 공자가 예의 기존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고 지적했듯이, 공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개념 전체를 변혁시켰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는 새로운 이상의 창조자이지 결코 낡은 이상의 변호인은 아니었다. 우리는 잠시 그를 새로운 이상의 제안자로 보기로 하자. 적어도 무엇보다 먼저 공자의 안목이나 그가 구사한 상투어의 표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갖는 역사적 역할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고대에 있었던 조화의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지니는 실제적인 의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대 중국에서의) 지역적 전통을 다시 해석해 보고 이를 재창조할 수 있는, 새롭고도 보편적인 질서를 산출해 내려는 데 있었다고 하겠다.
공자가 그 당대의 역사적 사실에서 파악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인 접촉 관게를 통해서 (과거 변방과 중심의 제후국들간의 문화적 이질성이 사라지고, 점차) 새로운 유사성의 출현, 말하자면 일찍이 노나라를 포함한 좁은 지역에만 한정되었던 가치 개념들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는 새로운 공유의 현상이 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공자는 문학, 음악, 법률, 정치의 여러 형식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확대 공유되는 현상이 출현하는 것을 보았다. 역사적 증거에 의하여 당시의 상황을 판단해 보면, 과거에 위대했던 문명의 퇴화가 아니라 새롭고도 보편성을 지닌 문명으로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그 당시에 막대한 인구의 급증이 있었다. 그리고 생산 기술과 교통 수단의 확대에 있어서도 일대
약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까지 지역적으로 고립되고, 상이한 문화를 가졌던 다수의 민족들이 이제는 보다 더 긴밀한 접촉을 갖게 되었다. 관념, 생활 양식, 관습, 언어의 교류와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공자는 (당대의 시대적 전환을) 퇴화의 과정으로 보고 당대의 혼란을 세쇠도미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실상 낡고 소규모적이며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보다 원시적이고 촌스러운 여러 집단들이 이제 새로운, 좀더 거대한 단일 사회로 통합되는 진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부수되어 나오는 혼란과 무질서였던 것이다. 과거에 많건 적건 서로 고립되어 이질적이었던 (변방의 반 야만적) 사회들, 그렇지만 (당시의 사회적 대변혁 덕분에 비로소 문화 수준이 높은, 중심의 노나라와 더불어) 거대한 하나의 지정학적 공동체로 성장하는, 면적도 넓고 인구도 많은 (변방 지역들의 저급) 문화들에 대하여, 이제 공자가 노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몇몇 제후국의 (고급스런 중심) 문화의 지배에 주목했다는 사실은 정말 너무나도 자연스런 것이라고 하겠다. 면적이 적은 노나라의 상대벅으로 약한 국력을 감안할 때, 노나라 사람 공자가 (사회적) 질서와 통합을 위한 일차적 근거로서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문화적 정복에 눈을 돌린 것은 오히려 당연한 책략이라고 하겠다.
요컨대 공자는 주변의 강대한 제후국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많은 갈등들을 둘러보았고, 동시에 또한 그들 사이에서 노나라 지역의 고급 문화에서 연원하는 (새로운) 문화 수용의 징후들을 보았음을 우리응 상정하지 ㅇ을 수 없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공자가 모든 민족들이 이제 하나의 단일한 인간적인 실천과 이상의 체계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들 모두가 단합하여 천하가 태평성대할 수 있는 가능성-즉 하나의 이상-을 보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마침내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새로운 사회의 기본 구조로 노나라 문화의 수용이라는, 이미 명백히 드러난 경향을 더욱 자극하고 극대화하는 정력적인 계도 작업을 통해서야만 그러한 이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고 생각된다. 공자의 비젼은, 사실 다른 어느 것보다도 중국이 실제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참된 것이었다. 그것은 노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중심 지역의 통일된 문자, 언어와 여러 예식 형태들로부터 전체적으로 영감을 받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 조직에 기초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통합 문화의 출현에 대한 비젼이었다. 당시의 정황속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이상이 어떻게 정립되어 설득력 있게 설파될 수 있었던가? 당장 드러나는 것은 불가사의한 역설뿐이다. (당대의 사회적 대전환이라는 와중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이상이란 바로 누구나 다같이 동일한 이념과 실천의 체계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거대한 사회에 대한 이상이다. 그러나 실제 사람들이 자기들 관습대로 각기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다양한 방식들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런 방식들은 어떻게 생겨 났고, 어떻게 정당성을 획득했으며, 유지되어 왔는가?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기본적으로 이중적이다. 첫째는 전통에 대한 강조이다. 일반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다양한 인습적 행위들이 확립되는 데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효력 있는 명령, 공동의 합의, 그리고 수용된 전통의 계승이 그것들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공자에 의하여 그 중요성이 암묵적으로 인정된 것들이다. 진실한 왕이 길을 선도하고, 백성들이 동의하여 자발적으로 따르는, 즉 가르쳐지고 따르게 되는 것이 곧 전통이며 이는 선인들의 생활 방식이다. 전통의 내용이 하늘의 의지 즉 <명령>의 다른 형식)라고 여겨진다 할지라도, 그 전통은 곧 선인들의 도와 일치한다. 왜냐하면 하늘의 의지는 멋대로 (새롭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공자는 역시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 선인의 도, 즉 전통에 첫째가는 우위성을 인정하였다.
왜 공자는 궁극적으로 전통을 일차적으로 강조해야만 했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몇 가지 중요하지만, 부차적 이유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은 (남의 가르침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결코 남들을 지도하지는 못한다. 이 점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히 지식과 문화가 결여되어 있고, 타인들에게 바람직하게 행동할 것을 계도할 수 있는 아무런 전통도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의 공동의 합의는 배경적인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그 당대의 통치자들은 흔히 전제주의적이었고 권력 추구에 매몰되어 있었음이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선한 통치지가 필요했으며, 그래서 그런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하기 위해서 통치자는 선에 대한 비인격적인(객관적인) 기준을 가져야만 했다. 비인격적안 가준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전통이나 천명이었다.
공자가 <논어>에서 천에 대하여 언급하기는 했으나 그 역할은 분명하지도 않고 그다지 정교하고 치밀하게 논의된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공자 철학의 결정적 영향력은 그의 정치에 대한 통찰에 있다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통찰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그는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신학>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는 현세에서의 인간의 삶에 보다 깊은 관심을 쏟았다. 공자의 가장 내용적인 철학적 통찰의 하나는 바로 사람의 인간성은 예의 이미지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동물이나 무생물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관습을 잘 배워서 실천하는 일 때문이라고 보았다. 폭력, 협박, 명령에 의한 (강제적, 수동적 행위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잘 배워 익힌
관습의 실천 속에는 얼마나 신비스러우며 얼마나 인간적인 (즉 자발적 능동적인) 힘이 깃들어 있는가를 공자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공자는 인간만이 지니는 존엄성과 관련된 힘이 신성한 의식이나 예식들과의 관계에서 특정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예식은 행위 자체 안에 생리적인 조화와 아름다움과 신성함이 강조되는 관습화된 실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이상은 성스러운 의식과 예식이라는 이미지에 의해 명백히 나타난다. 의식과 예식들이야말로 그 나름대로 다른 그 어느 것보다 더 오랜 옛날 전통에 뿌리를 둔 행위의 형식들이다. 어떤 형태의 행위나 제스처가 도무지 생경하고, 인위적 조작 또는 실리 타산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한 그런 행위나 제스처의 형태에는, 말하자면 예식을 올릴 때 가질 수 있는 궁국적 엄숙성, 또는 예식을 통해서만 인간의 영혼 속에 촉발될 수 있는 그런 깊고 고풍적인 (심리적, 감동적)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궁국적으로 심리학이나 도 다른 어떤 학문을 통해서도 모두 설명 가능한 것이다.
비록 복잡한 예식을 (간소하게) 수정하는 일이 가끔씩 일어난다 해도, 적어도 예식의 재료나 그 구성 요소들은 전통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공자의 사상에 영향을 기쳤을 많은 생각들 중에서, 공자는 인간의 독특한 본성을 예에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데 그의 본질적인 세속관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당대에 새롭게 형성되는) 거대한 문명의 통합은 구성원들의 합의나 명령보다는 우선적으로 전통에 근거하는 것으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물론 (백성들의) 사회적인 합의 또는 군주나 하늘의 명령이라는 관념들은 문화를 규정하는 전통들을 합리화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공자의 사상 속에서 무시 못할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공자에게 있어서 사회적 합의나 천명의 역할은 결국(전통이 갖는 절대적인 중요성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며 별로 다듬어져 논의되고 있지 않다. 예식에 관심을 가진 다른 사상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에 대한 핵심적 강조는 이데올로기적, 철학적 또는 종교적인 면에서 아무리 상이한 그 어떤 틀이 가미된다 할지라도 예를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도덕적, 정감적인 권위, 즉 전통에로 곧바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위대한 통찰력이 공자의 사상 속에는 혼합되어 있다. 정치가로서의 공자는 당시 사회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문명화된 정치적, 사회적 통일의 근본적 토대로서 문화적 통합이 요구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철학적 인간학자로서의 공자는 진정한 에식 행위의 이미지 속에 구현된 삶이 진정한 인간서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라고 확신하였다. 상호 연관되어 있는 이들 주제의 의미 함축은 곧 정치적, 사회적 통일이 바로 예식적인 것이 될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전통 지향적 문화를 바로 예식이 자양분을 공급받는 핵심적인 터전으로서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공자는 다음과 같은 역설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통을 그들 자신의 고유하고도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이상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런 전통들이란 (한 개인의 흥미나) 필요에 따라 임의로 선택되거나 새로 만들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선대에는 합당했었지만 이제 소홀하게 된 전통을 단지 다시 확정짓고 그것에 호소함으로써 새로운 이상을 나타낼 방도는 분명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공자와 같은 시대와 환경 속에 살았던 어떤 사상가는 공자와 전혀 다르게, 즉 전통 지향적이 아닌 다른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이런 (비전통주의적) 대안은 이른바 법가 및 다른-이미 공자 시대에 그들의 철학적 이념들이 정립되어 틀림없이 공자 그 자신에게도 알려졌을-사상가인 제자백가들에 의하여 분명하고도 강력하게 피력되었다. 예를 들면 법가는 상과 벌이라는 두 계기에 의해 강압적으로 통제되는 사회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공자의 관심이, 단순히 사회 공동체의 질서 확립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간 존엄, 즉 인간 존재의 분명한 차원을 아름답고 고상하고 거룩한 존재로 보려는 의미에 바탕을 둔 문화의 창달에 있었음을 아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문화의 통합은 인간성 실현의 극치이어야 했지, 결코 사람의 모습을 지닌 (온순한) 양떼를 (공권력을 통해 강압적으로) 몰아붙이는 질서 유지일 수 없었다. 공자의 새로운 이상 구현에 있어서 두번째의 기본적인 요소 (즉 만백성의 합의의 문제), 말하자면 만인이 공유하는 관례들에 기반을 둔 보편적 공동체라는 이상 실현의 문제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공자가 제안한 내용은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공동체를 건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러한 이념을 보급 확산시킬 수 있는 매우 적합하고 강력한 논의 형식을 이미 치지 냈다고 생각했다. 실로 그는 인류
문화에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림 논의 형식, 즉 이야기 특히 고대의 신화나 일화 이야기를 이용하였다. 모든 사회는 추상적인, 특히 정신적인 문제들을 명료하게 규정짓는 그들 나름의 특징적인 방식에 있어서 서로 차이가 난다. 그러나 그 중 하나의 방법, 즉 이야기의 사용은 모든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며 또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들에 <역사>, <신화>, <전설>등 여러 가지 명칭을 붙인다. 이들 이야기 형식들에서, 예를 들면 (한 위대한 인물의) 탄생이 갖는 도덕적, 법적, 정신적, 심리적 측면은 추상적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탄생신화-즉 사건이나 인물을 묘사하는 이야기-의 맥락에서 제시된다. 이야기는 말로도, 몸짓으로도, 또는 문자로도 나타날 수 있다. 사망, 혼례, 치적, 인간 관계,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 등의 문제들은 모든 사회에서 이야기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왔다. 몇몇 문화권 즉 유럽, 인도, 중국 문명에서 우리는 또한 이러한 문제들에 적용된 추상적, 이론적 교설이나 분석을 찾아볼 수 있다. 삶의 외형적 실상보다는 그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삶에 대한 추상적 개념의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삶과 대비(대칭)되는 사건들의 이야기 형식을 통해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칭의 세계는-우리의 현세와 경쟁 대립되지만-다른 영역(하늘이나 올림푸스 산)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어질 수 있다. 또는 이런 대비적 세계는 지상에 있는 바로 우리집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이야기에 나오는 시대는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보다 훨씬 옛날의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옛날 다른 곳에서 발생한 사건의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다른 시기나 장소로 옮겨서 말하거나, 인물들이 가진 능력들이나 품행을 이상적(또는 극단적)으로 규정해서 이야기를 꾸며내는 방식은, 최근의 진짜 인물이나 실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기억과 꼭 합치하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의 단점을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다. (이야기라는) <다른>세게와 우리 자신의 (현실) 세계 사이의 이런 작용은 우리 인생의 의미가 매일매일의 일상적 삶의 사건들을 초월하기도 하고 동시에 정말 그 속에 구현되기도 하는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회상의 이야기는 역사를 기억으로 보여주지만 다른 이야기(말하자면 신화의
형식)는 역사를 의미로 보기 때문에, 이 두가지 이야기 방식은 모두-그것들이 무엇을 말하든지간에-그들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 회상의 이야기도 의미의 이야기도 모두 현재에로 귀결된다. 나아가서 의미와 회상은 전혀 뚜렷이 구별될 수 없다. 각각 서로 다른 것을 필요로하며, 서로 그 속에 융합되어 있다. 우리는 가금 참으로서의 역사와 허위로서의 신화를 구분하지만 사실 이런 구분의 (이유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은 우선 너무나 과민한 것이어서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 이야기가 회상 이야기보다 눈에 띄는 선명성이 있다고 보는한, 신화 이야기가 보다 의미 깊고 보다 지속적 타당성을 가지기 때문에 그런 구분이 통용된다. 왜냐하면 신화 이야기는 많은 의미를 준다. 즉 이것이 의미 그 자체인 것으로 통용되는 한, 적절한 신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소박하게 이해한 인생보다는 신화의 방식에서 더 중요한 의미가 드러난다. 이 <다른> 영역은 언제나 의미 있는 영역임은 물론 의미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 있는 이야기들은 전형적으로 이중적인 역사성을 지닌다. 첫째, 이야기의 형식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은 바로 (특정) 시간-요컨대 역사의 한 단락-안에서 의미 있게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들로서 나타나는 인생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둘째,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바와 같이, (실제 삶의 생생한 사건들과 구분되는) 이야기라는 <별개성> 또는 <초월성>은 전체 이야기를 먼 과거 또는 아주 먼 장소, 혹은 이 둘다에다 서러정하는 이야기 형식속에 이미 드러나 있다. 내가 의미 이야기(즉 신화)에 대립하여 명명한 회상 이야기(즉 역사)를 신종하는 현대 유럽 문명권의 사람에게는, 의미란 결국 암암리에 회상속으로 섞여 들고 만다. 즉 역사라는 것이 말하자면 그들의 신화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표면상 의미 이야기, 즉 신화들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상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근거하고 있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신화의 무대가 되는 그 해당 시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사건들이다. 의미를 주는 이야기가 먼 과거의 일로 설정될 때는, 일반적으로 그 이야기 자체는 역사적인 과거, 회상된 역사적 과거와 사실상 연관을 갖는, 그런 과거의 일이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구성된 이야기나 계보는 일반적으로 실제의 역사적인 과거의 그 (이야기 속의) <다른>(<옛날의>)과거를 연결시키고 있다. 비록 다른 영역(즉 이야기 세계)의 존재들이 실제 일어나는 인간 역사에 대비되는 그것들 자신의 역사-물론 인간들이 실제 눈을 뜨고 활동하는 동안 보통 눈에 띄지 않지만-를 계속하고 있음을 우리가 적지 않게 자주 발견하게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추상적 이론과 개념적 분석이 발명디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런 이야기를 사용하는 경향은 결코 서구 뭄명권에서는 사라진 적이 없었다. 우리(서구인들)는 역사적으로 참으로 빈번하게 다종 다양한 이론적 이데올로기나, 교설, 구호(<자유 언론>, <인권 보장> 등등)들의 노예였다. 아직도 우리는 (기억된 과거만을 유의미한 것으로 정리하는) 이른바 역사의 연구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 이야기, 정치적인 신화 창조, 상업성을 띤 <인물 만들기>나 <각종 표창>, 그리고 (통속적인) 드라마, 예술, 문학 등을 정말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사고와 감성의 제 양태로 보고 그것들에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그 나름의 독자적인 근거에서 예식의 이미지, 따라서 전통이라는 이미지를 통한 인간다움의 실현을 깨닫게 되었다. 공자가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 형식-즉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것은 아주 독특하게 적절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의 내용은 인생의 의미를 사색하는 모든 형태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마도 가장 의미를 불러일으키기 용이한 형식과 완벽하게 합치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런 방식의 이야기 형식이 <고풍스런> 사유 형식이지만, 그런 이야기 형식은 현대의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완전한 고대로의 순전한 복귀가 아니듯이, 공자에게 있어서도 고대로의 순전한 복귀가 아니었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과 (그의 자율적,능동적인) 능력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통찰에 근거를 둔 이념을 제시함에 있어서 신화적인 과거의 이야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공자의 사유 속에는 (의미를 산출해 내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라는) 형식적인 모습이 그의 (전통에 결정적 역할을 부여하는) 가르침의 내용과 혼융되어 있다. 말하자면 공자는 그의 이사의 내용이 되는 전통에 대한 깊은 존경과 충성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아주 적절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긔 공자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바로 그의 가르침을 서구인의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구해 내어, 그것을 모든 인류에 대한 적절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밝히는 일이 된다. 우리는 옛날 방식에의 <복귀>를 가르치는 사람(즉 공자)을 둘러싼 문화적 갈등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자의 서술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의 가르침은 진정으로 역사적이며 내적 일관성이 있고 단지 전적으로 적절한 전통의 소유(즉 전통에로의 완벽한 복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오히려 공자의 가르침이 주는 과제는 공자 자신이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사실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갈등 많은 현재를 인간답게 하고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을 얻어 낼 수 있도록 자신의 전통에서 (참신한) 영감을 찾아 내라는 것이었다. <옛 것을 되살리어 새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옛 것을 되살리려는 일>(온고)의 목적은 어쩌면 (문제 많은) 현실 속의 전통들에 대한 (진지하고도 철저한 근본적인 새로운 개혁책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전통을) 무책임하고 자기 편한대로 대충 취급하는 미봉책을 호도하려는 완곡 어법, 즉 위선이나 자기 합리화의 일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그 점을 확실하게 부인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옛것을 믿고 또 사랑한다> 즉 전통에 대한 해석은 인간의 과거에 대한 참된 사랑과 존경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 에수, 불타는 모두 그들의 전통에 대하여 진정으로 심오하게 그리고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전통을 되살린 사람들의 본보기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유학자들이나, 기독교들 그리고 불교도들은, 그들의 현재 목적에 영합하는 말씀이나 행위라면-그것이 무슨 맥락의 전통이든지간에-(그 전통의 생생한 현장적 의미 추구를 사상해 버리고 오직 상투화된 죽은 형식적) 전통만을 조금씩 조금씩 뽑아 쓰고만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질적인 전통 묵수의) 태도는 (불가피한 것이 아닌) 자명한 전통 오용인 것이다. 전통적인 형식이나 예식들에 대하여 아무리 그것들이 현재 상황에 부적절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혀 개의하지 않고 아주 완고하고 무비판적으로 묵수하려는 사람들은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이 세 사람의 위대한 전통 개혁자(즉 공자, 예수, 불타)들의 태도와 대비되어 비판을 받아야만 한다.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를 알려는 방법으로서의 꾸준한 온고의 태도는 결코 편협하고 답답한 이상이 아니다. 온고의 태도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다 적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유효 적절한 통찰의 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본능이나 조건에 따라 (물리적, 기게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지성적인 관습적 방식에 따라 (자율적, 능동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독특한 (자율적인) 능력과 존엄성을 갖는 것이다. (이 점은 바로 오늘날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철학적 분석가들이 말하는 바이다) 철학적 분석가들이 관습이 지니는 지성적 측면의 관점에서 보자면, 삶의 여러 형태들은 (천재의 어떤 기발한 순발력에 의해)갑자기 한번에 고안됐거나 수용된 것이 아니다. 삶의 여러 형태들은 우선적으로 앞선 시대로부터 관습으로 전래된 언어와 실천의 방대한 체계를 각 시대마다 계승하여 생겨난 것이다. 오로지 전통적인 방식들을 철저하게 쫓아서 참되게 성장함으로써만이 우리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오직 되살림으로써만, 우리는 우리들 삶의 통합성과 방향성을 유지하게 된다. 똑같은 전통을 지님으로써 사람들은 서로 결합하게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사람이 되게끔 한다. 모든 전통의 포기는 인간들의 분열을 가져온다. 전통을 되살리려는 진정한 온고의 노력은 (분열되는) 인간들을 통합시킴에 있다.
인간 통합에 대한 이런 실제적 비젼은 단순히 정치적인 비젼만이 아니다. 비록 이러한 공자의 비젼이 기록된 역사에 있어서 가장 웅장하고 성공적인 정치적 비젼 중에 하나이자만, 그것은 철학적 비젼이요, 종교적 비젼이기까지도 하다. 공자의 비젼은 전승된 삶의 형태에 뿌리를 내린 공동체, 바로 그 공동체 안에서 생생하게 존재하는 신성스럽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나타내 준다. 우리의 현대 세게는 신기한 호기심, 광적인 변화나 위기에 대한 지향만이 너무나 지나치게 용인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의 세게에서 공자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비젼은 단지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일축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공자의 관점은 그것의 발생지였고, 그 후대에 지나치게 전통에 모든 근거를 두었던 중국에서 보다도, 오히려 오늘의 우리(서양) 세게에 보다더 적합하고, 보다더 시의 적절하며, 버다더 시급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공자의 비젼이 지닌 진리를 깊이 통찰해 볼 필요가 있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 우리 시대에는 너무나 생소하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 참뜻에 무지한 것은 너무나 먼 시대적인 이질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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