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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숙녀시모음 8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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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월의 노래
천숙녀
겨우내
가난했던 침묵 지루하였지만
갈잎이 푸룬 물에 젖는 노래 들으며
수목의 혈관은 거침없이 터졌다
씨앗이 풀려 재잘거리는 골목을 풀고
야산을 풀고 동토마저 풀어
골짜기로 흐르는 물
그의 간지러운 목청까지 튼다
긴 잠 끝에 햇살 털고 일어서
무성하게 돋아나는 갈망의 몸짓
바람 만난 수목들은 어느새
여름 한마당의 황홀한 축제를 그리며
가슴을 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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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뭄
천숙녀
쩍쩍 갈라진 논바닥은 간절하다
문설주 잡고 기대어선 목마른 아침 달
내 눈물
한 말쯤 쏟아
마른 논 적시고 싶다
지친 몸 헹구어서 푸르게 옷을 입고
헐벗은 맨발들이 고단하게 누워있다
세상 일
마음 돌리니
잔잔한 물무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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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을 빈손
천숙녀
말 한마디 못을 치면 빗장 문 닫아걸고
쓸쓸함이 저벅거려 퉁퉁 부운 발 시렸다
명치끝 투망에 걸려 억누르고 지내 온 날
엇갈린 생채기는 몽당몽당 잘라내고
다문 입술 여는 날엔 흐린 안개 풀어내며
울타리 봄빛 파랗게 물들이고 있는 오월
아직은 큼직한 삶의 무게 남아있어
격랑의 너울쯤은 짠 눈물로 삼키면서
마음 밭 파종하느라 빈 손 뿐인 가을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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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을비
천숙녀
촉촉하게 내려주는 가을비를 맞으며
말갛게 얼굴 씻고 분바르는 무궁화
싱싱하게 물오른 목숨 투망질 하는 아침
무늬 걸치던 어깨 위 겉치레는 벗어놓고
보이지는 않아도 끊이지 않는 길 있으니
모래 늪 아득해 와도 끝내 홀로 걷는 오늘
흔들리다 기울어진 비탈에선 나무들도
풍우에 단련이 된 서로를 보듬으며
가을비 귀하게 받아 알뿌리에 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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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을아침
천숙녀
들녘의 풀잎들도 몸 눕히는 가을 아침
코로나 19 폭력에 발목까지 푹푹 빠져
입추에
익사해도 좋을
녹음 숲이 그립다
녹음 꽉 들어 찬 숲 찾아 길을 떠나
무뎌진 쟁기 날 세워 구석배미 도랑치고
물 물려 물꼬를 트고 다시 나를 일으켰다
마음 밭 갈아엎어 물들기 좋은 날에
눈감아 더욱 선명한 깊고 맑은 희망希望의 꽃
말갛게
꽃 물들이며
다복다복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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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갈래 길
천숙녀
첫새벽 미명 속에 입술을 쏙 빼물고
오늘은 어느 방향 갈래 길 서성이면
풀벌레
울음소리가
수묵水墨처럼 번졌다
차분히 숨 고르며 적막을 우려내도
구겨진 종이처럼 쉬 펴지지 않겠지만
웃으며 너울을 넘는 순서를 기다리면
서두르면 더 엉키어 풀 수 없는 가닥들도
오늘일 잘못되면 수정하여 다시 한 번
현주소
수소문하여
나를 바로 검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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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건강한 인연
천숙녀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인연은 건강합니다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는 인연은 아름답습니다
누군가에게 꿈을 갖게 하는 인연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누군가에게 성장이 되게 하는 인연은 행복합니다
당신은 내게 건강한 인연입니다
한 치 혹은 두 치씩 성장이 되게 하는
행복한 인연입니다
갈증을 목 축이는 한 방울 이슬 같은 인연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쏟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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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향 길
천숙녀
산등선으로 떠오르는 보름달 마중 간 다
두 손 모아 소원 빌고 소망쪽지 전할테다
맑은 빛 은은한 둘레 끼어있는 풀꽃반지
오늘만 같아 라는 팔월 보름 한가위
둥근 달 그 속에 형제들 마음 채워가니
동생들 움직이지 마라 큰형의 바람이다
햇볕을 가려주는 담장 밑에 쪼그려 앉아
흙으로 밥을 짓고 풀꽃으로 장국 끓이던
유년의 추억길이다 내가나를 만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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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향 집
천숙녀
고향에서 맞는 아침 양치한 입안처럼
개운한 몸과 마음 들녘만큼 시원했다
구수한 탕국 냄새가 집 안 팍 그득하다
어제 밤엔 실타래 풀고 앉은 귀뚜라미
잠 속으로 들어간 귀 속에까지 따라와
꽉 막힌 귀를 뚫으며 노래를 들려줬다
구순의 시어머니 못 온 자식 언제 보냐며
백신 접종 두 번 맞은 인증 서류 꺼내셨다
여기는 괜찮다 시며 ‘맑은 공기에 코로나 죽어’
과즙 속으로 신선하게 익어가는 꿈이 있네
과실마다 터져 나오는 달디 단 내실의 맛
골고루 풍성해야 할 가을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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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향에서
천숙녀
팔월추석 한가위에 맏형 막내 가족들만
입은 꼭 다물고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서로의 비밀코드를 찾아 읽고 들어야했다
아기 타는 유모차를 밀면서 둘러보는
뒷밭에 큰 밤나무 토실한 알밤 줍는 일
고갯길 가을 정원을 가득 채워 놓았다며
‘뭔 놈의 세상이 일 년이 넘도록 고뿔이냐
길가에 자동차들이 꽉 차도록 오던 집에
마당 안 주차한 자동차 집마다 한두 대다’
마음속 상처들 허리 껴안고 재워주는
방마다 어머니 골수 줄줄이 누웠다가
비비추 싱싱한 꽃대를 쑥쑥 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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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공존
천숙녀
낮게 낮 게 흐르리라 강물처럼 여 여 히
나뭇가지 후려치니 떨구어져 뒹구는 잎
비 맞은 나무벤치가 푹 젖어 있는 몰골
멈춰선 발걸음 언제까지 제자리걸음일까
코로나 백신 만들어도 변이되는 되돌이표
새롭게 생겨난 이름 베타 델타 알파라고
상처 난 마음 갈피 흥건히 고인 핏물
은닉隱匿하는 육신들 헹굼으로 펼쳐 널고
흑싸리 껍데기 같은 허물쯤은 벗어야지
눈 뜬 채 묻혀있는 정신 줄 다시 세워
언제쯤 종식될지 몰라 치명 율 낮춰가며
속 깊은 많은 사연들 스스로 아물 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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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구월 오면
천숙녀
구김살 펴는 다듬이 소리 밤새 벽을 허물어도
얼마나 구겨졌는지 펴지지 않는 오늘
내 꿈은 잎 넓은 토란
무성한 푸름인데
이제 곧 구월 오면 가을이 익는 계절
빛 바랜 사진첩에서 꿈틀대며 살아나
움츠린 산하 휘젓는
자맥질로 뜨겁겠지
때로는 하얀 마음 치자 빛으로 물들이며
보자기 펼쳐놓고 퍼즐조각 맞추면서
내 몫의 푸른 기둥을
철주로 세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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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루터기
천숙녀
막다른 골목길에 도시 불빛 다 꺼졌다
깊은 밤 어둠 지난 뒤 새벽이 내려왔다
온몸이
밤새 젖어도
천 갈래 길을 열자
남모르게 곪은 이력은 열판이 눌러준다
뚝 떠낸 그 자리 딱지로 아물기까지
손톱 밑
푸른 물때도
살아온 날 흔적이지
그루터기 모습에도 의연히 서있어 봐
해 저문 나를 불러 혼례를 올리잖아
깨어난
잠든 근육이
명함 한 장을 건네 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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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길
천숙녀
사람의 만남은 등산길이지요
정성으로
성심껏 만나다 보면 길
생기겠지만
만남의 노력에 수고를
더하고 곱하지 않으면
이미 잡풀이 돋아나
걸어온 길마저 덮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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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다림
천숙녀
초점 잃은 시선, 방향을 잃은 촉각
노을에 밀려 무너져 독백으로 시끄럽다
너와나 유리벽에 부딪쳐 앓고 있는 몸살 중
찢긴 자유는 사하라사막 어느 사구砂丘에서
지금쯤 선인장으로 자라고 있을까
기억을 새롭게 빚는 오늘이란 숱한 허무虛無
뭉개져 몸을 다친, 돌아 휘돌아 저문 길
내 마음 말랑한 속내 편지글로 띄우니
밑창을 뚫고 오르며 타래로 푸는 말씀
늘 푸른 시작은 생기生氣 넘쳐야 사는 길
온 몸으로 받아들여 흔들리지 않는 뿌리로
꽃 물든 가슴을 열어 쨍쨍한 눈물 쏟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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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꽃단장
천숙녀
초점 잃은 시선 방향을 잃은 촉각
한 뼘씩 늘어나는 델타변이 확진 자 수
세상은 유리벽에 부딪쳐 앓고 있는 몸살 중
너무 얇은 생이었나 너무 얇아 터져 버린
푸른 살의殺意 몰매 맞아도 벌떡 다시 일어나는
명줄에 매달린 기도가 저 하늘에 닿았을까?
서산 해 지고 나면 처마 끝에 등불 걸고
명치끝 저리더라도 홀로 깨어 울지 마라
속엣 것 다 비워놓고 달빛 당겨 앉혀라
바싹 마른 풀 더미에 울컥 쏟는 달거리
피돌기가 선명한 초록 꿈 건지러간다
풀 섶에
얼굴 내 밀고
꽃단장 바쁜 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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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꽃씨
천숙녀
꽃씨는
향기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멀리 더 멀리 날아가고 싶은 것이다
윙윙 울어대며
한사코 옷깃 속을 파고드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푸른 그늘을 움틔우려는
꽃씨들의 울음이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나도 그대에게 날아가는 꽃씨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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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나는 늘
천숙녀
철커덕 철커덕 씨줄과 날줄을 잇는다
침묵이 가슴으로 흐를 때 얇아지는 기억을 들춰
반쪽 잎
부비고 살자
뿌리 서로 옭아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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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는 지금
천숙녀
삶의 이랑 지나오며 퍼렇게 멍울진 몸
젖은 땀 닦아주며 토닥이고 싶은 밤
밑둥치 뻥 뚫려
허리 꺾여 넘어질라
명치끝 저린 밤 이리 저리 뒤척이고
입안이 소태맛이다 떫은 감씹은 입맛 같은
육모 초 절여서 짜낸
약 한 사발 마셨으니
그어댄 부싯돌은 흐린 시계視界 틔울까
성근 그물 둘러메고 휘덮인 장막 걷어내는
붉은 꽃 인주를 꺼내
낙관落款을 찍는 새벽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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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낙엽
천숙녀
가을바람에 우수수지는 일몰日沒의 낙엽들
한 방울 수분까지도 다 쏟아 낸 나무의 살
고춧대 서리 푹 맞아 시들고 앉는 먹먹함도
절묘하게 박혀있던 간절한 토씨들이
세상이 쓰러지며 송두리째 쓸려버려
깊은 밤 들이쉬는 숨 뒤척이며 골몰汨沒이다
수분이 빠져나간 내 몸이 앙상토록
오랜 날 키운 열매 제 갈 길로 굴러가면
기꺼이 밑불 이었다 안으로만 여물인 다
오늘도 지나간 흔적 비빌 숲 열지 못해
묵묵히 찬 겨울 들어 나이테 감다보면
환절기 지나가겠지 아물던 딱지 떨어질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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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낮은 길
천숙녀
기웃거리지 말거라 달콤한 덫 근처에는
허공 길에 매 달려 아픔 먼저 돋아날라
그 눈물 다 지운 줄 알고 할 말 꾹 삼켜왔지
?
스무 계단 지하에도 아랫목은 있을 거야
아랫목 덥혀 놓고 맨발 잠시 묻어 두자
도닥인 숨결을 눕혀 한 숨 푹 잠들어봐
저마다의 골진 사연 구름처럼 밀려와도
흩어져 표류하는 시선들 붙잡으면
산 같은 정형의 법도 배워가며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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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느티나무
천숙녀
오금한번 펴지 못해 충혈 된 눈 못 감아도
고비마다 불던 돌풍 맨몸으로 부딪히며
잎가지 넉넉히 피워 우화등선羽化登仙 꿈 키웠다
여름날엔 피서처 되어 딛는 걸음 주물리고
벼랑 끝에 와 있어도 낙원의 꿈 영글도록
그 자리 몫이지 싶어 여태껏 버티고서
멎은 숨 안으로 쉬며 눈감아도 보이는지
문 밖에서 앓는 세상 청대 같은 심경으로
몰골이 누렇게 떠도 혼 살라 불 지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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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달하나
천숙녀
목숨의 분량을 재며
한 줄 노래 부르는 여기
온 몸이 골다공증으로
턱뼈만 남아 삭아져도
묵정 밭
마음 언저리
달하나 심는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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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당신의 당신이기에
천숙녀
당신은 누구시기에
이 가슴 한 구석을 비집고 들어와
지상의 나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십니까
당신은 누구시기에
손길과 동공의 주시와 포옹까지도
함께이게 하십니까
당신은 누구시기에
하얀 속살 드러내 보이며 함께 먼 곳을 향해
준비하게 하십니까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삶과 죽음까지도
함께하라 하신 말씀
기억하며 실행하는
하나뿐인 부부라고 얘기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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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독도수호 언택트 마라톤대회
천숙녀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변화한 문화생활
13회째 마라톤은 언택트 마라톤이다
런너들 원하는 대로 시간과 장소에서
?
2021년 11월 14일 오전 9시 출정식으로
송파잠실 주경기장에 내빈들만 초청하여
만나서 반가운 이들 눈인사만 나누고서
?
첫 해맞이 독도를 나들이 시켜놓고
독도사랑 5,4km 9시 30분 출발이다
오늘은 독도를 향해 걷거나 달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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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동반
천숙녀
춤을 출 때는 같이 나울거리고
땡볕에서는 같이 땀 흘리고
바람이 불 때에는 함께 시원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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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두엄
천숙녀
시골집 대문 밖에는
두엄자리 봉곳했다
짚과 풀 똥 오줌 부어
쇠스랑이 뒤집었다
태우고
섞히다 보면
씨알하나라도 틔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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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들꽃
천숙녀
들꽃이고 싶습니다
비바람 천둥 몰아치는 들녘이지만
다소곳이 피어
그대 달려오면 안길 수 있게
오직
그대 위해 미소짓는
오직
그대 위해 하늘거리는
우리강산
고운 들꽃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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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등나무
천숙녀
뒤틀면서 꾀고 오른 등나무 손길 보아
밖으로 겉돌면서 십 수 년 지난 세월
아직은 푸른 바람에 실려 오는 등꽃 있다
지난 밤 가위눌린 사연들은 쓸고 싶어
뼈마디 성성하던 바람을 다스리며
덮어 둔 일상의 그늘 차일마저 실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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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등불
천숙녀
산 둘러 병풍 치고
논 밭 두렁 거닐면서
고향집 앞마당에
남은 가을 풀고 싶다
속엣 것
다 비워놓고
달빛 당겨 앉히고 싶어
설핏 지는 해 걸음
고향집에 등불 걸고
밭고랑을 매면서
새벽 별도 만나고 싶다
콩나물
북어 국 끓여
시린 속도 달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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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또 하나의 거울
천숙녀
거울을 본 다 비친 얼굴 저 모습이 나다
여태껏 마주앉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
누구는 아주 예쁘게
누구는 조금 예쁘게
누구는 또 하나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다
그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췄을까
한쪽 눈 살짝 감는 다 투영되는 두 모습
입술을 칠하면서 식사를 하고 난 뒤
거울을 봐야하는 그들 중 하나인 나
우리들 마음 비추는 거울은 없을까
열 길 물 속보다 한 길 사람의 깊이
고운 마음 덜 고운 마음 차이를 비춰주는
소중한 사람사이를
아름답게 당겨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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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맏형이 동생에게
천숙녀
추석에 고향가야지요?
시동생 목소리다
형제들 다 모이면 열두 명 이상 되니
추석엔 우리 부부만 고향 다녀 올 테다
한가위 둥근달은 휘영청 밝아 와도
하얗게 날 새운 신음 여태껏 앓고 있어
밤이면 강가에 나가 슬픔 헹구며 견디고 있다
코로나 전쟁 중이니 바깥출입 하지 말자
멈춰진 일상에는 다시 능선 일어나고
허망한 집집 마당에 불 밝힐 날 있을 거 다
걱정이 너무 많아 패이는 주름쯤은
닿아가는 관절처럼 깊어 가는 연륜年輪이다
달뜨는 살 부비면서
모여 살자 우리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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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머리칼을 자르며
천숙녀
미장원엘 갔다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본다
풍파에 덕지덕지 묻은 욕심欲心이 나를 보네
뿌린 물
미세한 감촉이
이슬처럼 신선하다
미용사의 신중하고 능숙한 가위질은
편안한 상념 속으로 잠시여행 떠나는 일
한 올의 실낱 길에도 긴 사연을 줍는다
머리손질 끝났다 귀를 드러낸 쇼 커트
잡초처럼 무성하고 끈질겼던 욕심덩이
잘려진
머리칼에 엉켜
저희들끼리 밟고 선 다
다시는 달라붙지 못하도록 발끝에 주는 힘
단정한 모습으로 거울 속에 서성이는
배시시 웃던 웃음소리 파문으로 퍼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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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메타버스 플랫폼
천숙녀
선택한 미래의 기회 내일로 떠나는 길
가슴에서 울어나는 빛의 팬덤 디자인하자
따뜻이 심장 달구는
메타버스 플랫폼 안
뜨겁던 광복의 횃불 희미하게 떠올라
팬덤을 만드는 힘 대한의 모습 그려보면
BTS 세운 탑들이
공감문화로 우뚝하다
실크로드 찾아다녀도 실크로드는 Korea팬덤
점 잇는 도미노현상에 심성心性을 차곡 쌓아
결집된 탄탄한 열정
뉴노멀 비대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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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무도회舞蹈會
천숙녀
거울에 비친 저 모습 세상사 춤판이다
눈만 빼 꼼 내 놓고 가면을 둘러쓰고
모두가 허우적이며 흔들고 있는 팔다리
얼얼한 날들 속에 더듬이 없이 더듬이며
촉각으로 교신해야하는 암흑시대 사는 오늘
한바탕 벌이는 축제 지나온 날 넋두린가
아프고도 서럽게 풀어내는 몸짓보아
갈 곳 잃은 충혈 된 눈 바닥에 던져지고
천천히 어둠속으로 스며드는 이야기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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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무탈
천숙녀
날금과 씨금을 묶어 이엉으로 엮어가던
부암리 고향집 향해 푸른 폐 일렁이던
불끈 쥔 두 손은 어디, 묵직한 채 누워있다
두 손을 결연히 잡고 푸른 꿈 수를 놓고
산이 산의 어깨를 잡고 문경새재 넘나들던
우리의 튼실한 울타리 쌓던 담장 멈추었다
주말이면 달려가던 고향 길 접어두고
부모형제 만나지 못해 전화로 안부 묻고
외출도 삼가 해야지 확진자수 1,841명이니
오늘은 신축 년辛丑年 음력칠월 스무하루
지축 울리는 저 소리 황소울음 섞여있어
무탈히 해 뜨고 저물어 하룻길 평안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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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묵정밭
천숙녀
옹벽擁壁도 금이 갔고 집은 반쯤 기울어져
내부수리에 들어간 녹아 난 가슴이다
아픈곳 제대로 짚어도 거푸집 차양 치고
어둠의 덫을 열어 몇 점 얼룩만 남겨지길
새 터에 집 짓는 일, 화전민 터 찾아 나선
뒤꿈치 발 시리다고 앙탈부리는 나를 본다
내려놓고 비운 삶 어둠을 걷고 나와
아픈 내부 지켜보다 빈 가지로 올랐지만
목숨은 어디에서나 용수철로 사는 거다
갈퀴 손 훈장으로 햇빛으로 쏟아진 날
묵정밭 일구어서 씨 뿌리고 모종하자
바람도 멈춘 시간 깨워 태엽을 감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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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바닥보기
천숙녀
몸뚱이가 바닥인 넙치 도다리 가오리처럼
바닥만을 고집해야 하루 삶이 무탈하지
후리질
끌어올리면
하얀 배가 눈부시다
오늘하루 버겁다고 깊디깊은 한숨은
내쉬지 말아야해 너나 모두 캄캄해도
바닥만
더듬어 사는
밑바닥생명도 귀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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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벌거숭이
천숙녀
단풍 한 잎도 짐스럽다 떨구어 내려놓고
할퀴면 할퀸 대로 무언속 의젓했던
채워진 족쇄발목을 쓰다듬는 두 손에게
곪아도 너의 삶이 너무 곪아 터졌으니
어둠 속 지나야만 신 새벽 열릴 거다
언제쯤 새살 돋을까 설렘 안고 기다리자
임기가 끝났으니 소임所任은 다 하였다
미련은 떨구어라 머뭇거리지 말거라
한 계절 조용히 엎디어 숙면 속에 드는 거다
☆★☆★☆★☆★☆★☆★☆★☆★☆★☆★☆★☆★
《40》
벼랑에서
천숙녀
옷고름 풀어 헤치며 빈 가슴을 뒤집는다
벼랑 끝 여기에 서면 무엇이 보일까
마음 다 비우고 나면 벼랑 끝도 안전지대다
비워 내기 비워 내기 비워내기 읊으면서
발길 뜸한 모퉁이 돌아 감긴 세월 풀어 본다
무너진 가슴 켜켜이 탑塔 하나 쌓으면서
☆★☆★☆★☆★☆★☆★☆★☆★☆★☆★☆★☆★
《41》
벽화
천숙녀
큰산을 오르다보면 계곡이 깊어지듯
추석 여파 확산으로 최다 기록 2,300명
코로나 직격탄으로 두 발이 부르트고
이름 모를 수레에 실려 어디로 가는 걸까
땅 밑도 들썩이더니 공기마저 사나워져
아물지 않은 딱지를 자꾸만 뜯고 있다
마음 밭 서성이던 좌표 따라 내딛는 발
강토에 뜨거운 기온 표적(表迹)을 남겨놓고
발자국
짙푸른 인연
벽화로 안고 있다
☆★☆★☆★☆★☆★☆★☆★☆★☆★☆★☆★☆★
《42》
별자리
천숙녀
누구나 태어나면서 저마다의 별자리 하나
고귀하게 받는 선물 받은 이의 몫이라고
만나는 인연 마다에 끈을 이어 엮어 간다
인문人文은 사람의 마음 결 품은 무늬 살펴보기
젊은 날 내 영혼은 어디쯤 물들고 있는지
심장을 일으키는 파문 아랫목이 그립다
사랑의 홀씨 되어 가도 가도 끝이 없어
오지랖 넓은 치마를 둥글게 펼쳐놓고
숨 가쁜 오늘 일들은 잠시만 묻어두자
코로나 팬데믹(pendemic)에 살고 있는 오늘 날
단절된 외벽아래 홀로 누워 잠들어도
별 자리 북두칠성으로 반짝이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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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복수초
천숙녀
무던히 소란하던
즈믄 해 잔치 끝
뿌리를 못살게 군
모진 바람 폭풍한설
이른 봄
잔설 헤집고
피어나렴, 복수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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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불씨
천숙녀
넝쿨손 벽을 타고 겹겹 엮인 비늘 갑옷
가파른 목숨 줄잡고 움켜쥔 손아귀가
아파도
다할 수 없는 말
울컥 목에 걸렸다
중심잡고 사는 일이 쉽지 않아 쓰러져도
실바람 기척에도 온 몸 벌떡 일으켜
푸드덕
깃을 퍼덕여
훨훨 날고 싶은 거다
노을지는 서녘에도 혼신의 힘을 당겨
앙다문 가슴 속 불씨 다시 한 번 지피면서
내일의
봇짐을 끌고 가는
개미떼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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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비상
천숙녀
걸어온 길 삼십 여년 젊었던 청춘 뚝 떼어
하나의 일에 몰입하다보면 세상이치 깨닫겠지
내 딛는 발자국마다 갈 빛 곱게 물들이며
침묵의 중환重患 앓으며 이미 다 소진해도
한 시대 소용돌이여도 생명의 끈 놓지 않아
잠들지 않은 강물은 번영繁榮 노래 띄운 다
192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인도 시인
타고르가 말했던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처럼
소나무 바위틈 뚫고 버텨낸 굳건함이
?
후미진 지구촌 시장 곳곳까지도 깃발 꽂은
한국은 동방東方의 등불 환하게 밝히는 날
백의白衣의 대한민국 날개 나래 짓 비상飛上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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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비켜 앉았다
천숙녀
꿰맨다고 남겨진 상처 다 기울 순 없다 해도
한 땀씩 촘촘히 생살을 아무린다
갓길로
주저앉았다
길이 길을 터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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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상경 길
천숙녀
시어머니 막내가족 조카들과 인사한 뒤
배부른 산이 안고 있는 마을을 뒤로하고
물빛으로 번져오는 고향 길 떠나왔다
고향산하 흔들며 코로나 팬데믹 겁을 줘도
불감증시대에 죽어가 는 심장 깨운 보름달
깃발이 바람을 만나 한바탕 춤을 췄다
누렇게 익어가는 시동생 가족 벼 포기들
풍성한 손수건으로 닦을 수 있는 눈물이다
찬 겨울 아랫목으로 뜨끈뜨끈 덥혀질 터
여름 땡볕 물려놓고 가을 풀벌레 잔치 속
내일의 나를 위해 달리는 상경길이
어제의 세월로 입혀져 강물로 흐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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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새로운 손님
천숙녀
어느 날 갑자기 내 이름 부르면서
문 쾅쾅 두드리며 호통 치는 큰 목소리
찾아온 모르는 손님 외면 할 수 없었다
그토록 씩씩하던 나의 몸이 상했다고
생살 찢어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두 눈 꼭 감으라했다 수술대위 눕혀놓곤
오므리기 바쁘게 움켜쥐던 두 손을
손금 선명하게 펼쳐 놓은 그 순간
뒷걸음 물러나면서 공손하게 엎드렸다
사회운동 깃발 들고 30여년 걸어온 길
사그라드는 등잔불에 기름을 붓는 일도
불끈 쥔 두 팔 근육이 힘차게도 버텼지만
성하지 않은 몸이 우선순위 되고 보니
눅눅한 지하벙커 독도사관 녹이 슬고
철커덕 닫혀 버린 문 언제쯤 활짝 열까
짐이 버겁다고 내려놓을 순 없는 거지
햇살 쪼며 걸어가는 길 뭉개지는 몸이어도
온 몸이 골다공증으로 턱 뼈만 남아 삭아져도
떨어뜨릴까 조심조심 꼭 쥔 채 달려왔던
바톤 받아 이어줄 뜻깊은 귀인 어디쯤
누굴까 새로운 손님 버선발로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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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서울 하늘
천숙녀
별빛에 뒹굴다 희븀 하게 동트는 하늘
아침상 차리는 손끝엔 깨소금처럼 고소함이
방바닥 닦는 걸레에도 엉기엉기 달라붙어
진한 송진내 분분한 북악을 보듬고
숨결 토하는 기왓장마다 자존의 피리소리
이끼 낀 돌멩이사이 충치로 곰지락거린 상흔
자주독립 울려 펼친 탑골공원 둘러보면
아직은 먼 길 같은 찢어진 하늘이지만
남산은
여명을 움켜
오늘도 불끈 일어 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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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수묵화水墨畵
천숙녀
다 끓긴 인연 찾는 푸른 인광燐光 일어섰다
더듬어 꿈 깁는 손 한 생애를 투시 하여
내 음각(陰刻) 눈물 꽃피워 수묵화로 앉히는 밤
습진 기억 속에는 아린 피 녹아있다
속 눈물 닦으면서 밤새도록 키워 가는
뜨겁게 떨군 눈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손
섬광으로 꽂혀 질 은밀한 반란(反亂)이다
무시로 내 달리는 입 굳게 다물고서
소리 내 우는 네 설움 여태껏 몰랐었다
그리도 많은 사연을 한 대궁에 짊어지고
분출하는 뜨거운 욕구 꾹꾹 눌러 앉히면서
무쇠 솥 떡시루 얹어 뜸들이고 있을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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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숲답기 위해
천숙녀
숲은 숲답기 위해 벌목 한다는 숙제는
비탈길에 나무들 기진맥진 혼절이다
하늘로 쳐들고 누운 흙 묻은 맨발들이
힘 솟던 어깨가 풀죽은 광목처럼 처져
방향조차 상실하고 몸져누운 이 거리
늘 저린 다리를 끌며 산 능선 오르는 길
숲 전체가 숲다워져 푸름으로 물들도록
이끼 낀 돌멩이 사이 아픈 상흔傷痕 밀쳐내며
스스로 잡목이라고 밑 둥 자르는 손길들
세상사 엉킨 아픔 혼자 다 짊어져도
온 몸이 녹아져도 자리는 지키는 것
고봉밥 차려 올린다 봄 꽃 엽서 등불 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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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숲의 몸짓
천숙녀
질펀한 추억을 꺼내 침목(枕木)으로 밟아간다
영혼의 닻 내려놓을 엉킨 타래 푸는 하루
발효된 와인한잔이 뿌리를 적셔준다
홀연히 깨어난 꽃, 손 내밀면 웃어줄까
풀빛보다 더 진한 그리움을 쌓고 있다
소낙비 우레를 쏟아 가슴 비 적시던 날
탄탄한 줄 알았지만 헐거워진 뼈마디
해 뜨면 그 안에 살아 꿈틀거리는 세포들
씨앗 촉 터트리더니
마음 칩(蟄)도 깨웠다
심지 돋운 무늬 결엔 푸른 기운 가득하다
짙은 생피 쏟으면서 수혈하듯 적셔볼까
겹겹이 무늬 진 속살
숲의 몸짓 일 어 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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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시월이 오면
천숙녀
오월엔 아카시아 내음으로 오시더니
유월엔 아릿아릿 밤꽃으로 오시는군요
칠팔월엔 장대비로 오시렵니까
장마 뒤 쏟아지는 불빛 더위로 오시렵니까
구월엔 얼굴을 붉힌 채 떠나고
하늘이 말갛게 청명을 토하는 시월이 오면
고단한 시한을 쉬고 싶어
뚝뚝 떨어지는 낙엽으로 오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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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시침時針
천숙녀
믿음을 잉태할 적엔 위대한 초침秒針이다
절망이 안겨올 땐 부르뜨리고픈 분침分針
진실과
사랑이 가득 찰 땐
멈추게 하고 싶은 시침時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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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싶습니다
천숙녀
목을 길게 늘이고
발돋움을 높이 하고
앞산 안개자락 걷어찬
바람이고 싶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귀는 활짝 열어
옆 산 구름뭉치 씻어 내린
물소리고 싶습니다
이성은 차거웁게
가슴은 뜨거웁게
이 시대를 걸으면서
얼음덩이 녹이는
눈물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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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아버지
천숙녀
아버지 사랑채에서 담배를 피우신다
젖 냄새 물씬 밴 엄마 무릎 베고 누워
아슴한 기억의 조각 꿰맞추는 여린 흔적
줄줄이 흙벽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아픔이 아픔 인 걸 모르고 지나도록
슬며시 등 내어주는 뿌리 깊은 나무 있어
평등하게 비추는 햇살 부채 살로 펼쳐졌다
“뿌리를 다독이며 꽃밭을 키워라”는 말씀
오랜 날 멈춘 시간을 깨워 오늘부터 새날이다
☆★☆★☆★☆★☆★☆★☆★☆★☆★☆★☆★☆★
《57》
아침 길
천숙녀
하루가 시작되는 일상이 되기 위해
밥줄을 찾아 걷지만 넝쿨로 얽혀진 숲
한시도 숱한 허물을 탓할 수 없는 거다
시를 쓰면 한 끼쯤 굶어도 배가 불러
단풍이 물 져 내릴 때 시심 깨워 흔들면서
어제로 한 켜 쌓으며 내려놓아 살 수 있다
골격 잡아 활자화된 읽힘 글 너울대는
잉크냄새 물씬 풍긴 조간신문 펼쳐들면
투박한 언어의 행간 해 뜨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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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아침 햇살
천숙녀
끝을 알 수 없는 거리 두기 방침이다
사면을 가로막아 눈앞이 캄캄해도
앞치마 허리끈 묶고 오늘을 닦아야 산 다
봉인된 꿈자리 따라 거침없이 유영遊泳하던
한 가슴 풀어놓았던 절창의 꿈 어디쯤
수척한 근심이 살던 집 한 채는 헐어냈다
움켜쥔 것들 궁글이며 걸림돌 떨궈내자
하얀 속살 용광로 열꽃에 아프도록 태워진
넓음과 깊이를 갈망하는 빈 병 하나 건졌다
어둠을 밀어내고 비춰드는 아침 햇살
가지枝를 일으키며 키 재기로 뻗는 힘줄
통통통 살찌는 소리 고봉밥 참 맛있다
☆★☆★☆★☆★☆★☆★☆★☆★☆★☆★☆★☆★
《59》
여행
천숙녀
오늘은 떠나보자 상상의 세계 여행하자
마음티켓 한 장 들고 명상속 떠나는 길
호주의 달링하버 길 강가도 걸어보자
네 뜻을 담을 수 있는 신개척지 찾아 간다
많은걸 잃었지만 지금 여기는 지켜야 해
상상속 마음의 그릇
뽀드득 닦는 두 손 있지
힘내자 씩씩하게 열매로 영그는 가을 왔다
살다보면 나 너 우리 인생은 희로애락
환한 빛 비춰 올 거야 터널 숲 지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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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연하장을 띄웁니다
천숙녀
새해 첫 날 새 아침 신 새벽 먹을 갈듯
밤처럼 깜깜한 가슴을 밀고 밀어
안녕을
물어 봅니다
묵향을 띄웁니다
네 귀를 맞추어 종이를 접습니다
고르게 반듯하게 나누는 가르마로
단단한
아귀를 맞춰
흰 안부를 올립니다
신축(辛丑) 년 새해에는 하시고자 하는 일들
뜻대로 이루시고 늘 평안하시고
또 한해
복 누리소서
즐거운 일 넘치소서
☆★☆★☆★☆★☆★☆★☆★☆★☆★☆★☆★☆★
《61》
오늘
천숙녀
끝없이 펼쳐진 생애를 걷고 있다
지나는 길섶에 앉아 손 흔들며 인사하는
내일이 나에게 안겨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가는 지금이 오늘이고 현재인데
또 한발 내딛으면 지워지고 어제 된다
오늘도 안녕하신지 걷는 걸음 되짚으며
모든 길은 지워지고 지나가야 새 길 이다
지나온 길바닥에 곪아터진 상처 있어
밤 지필 가로등만이 희망 길 품고 섰다
☆★☆★☆★☆★☆★☆★☆★☆★☆★☆★☆★☆★
《62》
외압 속에서도
천숙녀
서슬 퍼런 외압의 봉인 누가 풀어 놓았을까
가시처럼 뚫고 나오는 공포의 코로나
활화산活火山 겁 없는 분출 초토화된 삶의 밭
어둠을 곱씹는 고독한 순례의 길
돌보지 못한 밭 뙤기엔 잡초들만 무성하다
뒤틀린 일상을 세워 잡풀뿌리 뽑아야지
가슴팍 어딘가에 숨어 가만히 뜨는 눈
소망을 펼쳐오는 화신의 모습으로
신 새벽 닭 울음소리 동창을 두드렸다
비로소 몸을 푸는 아침 해 눈 시리다
한 목청 뽑아내며 치마끈을 풀더니
제 색깔 수를 놓으며 신명난 살풀이 춤
☆★☆★☆★☆★☆★☆★☆★☆★☆★☆★☆★☆★
《63》
원앙금
천숙녀
뒤 곁에 머뭇거리던 아픈 상처 잘라내고
내가 다시 돌아와 편히 누울 잠자리에
푹신한 이불깃 당겨 목덜미까지 덮었다
변심 없는 그리움을 가르치는 향기가
온 몸으로 굴러와 얼굴 묻을 때까지
젖살에 살 올리면서 원앙금鴛鴦衾 수를 놓자
여기에 달아오르는 후끈한 길이 있다
맥없이 쓰러졌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니
넉넉한 빈 숲 하늘이 해독할 답 알려줬다
☆★☆★☆★☆★☆★☆★☆★☆★☆★☆★☆★☆★
《64》
위로
천숙녀
베란다에 화분 몇 개 눈을 뜨면 물을 준다
내 몸처럼 간절한 갈증 속에 시달릴까
이정표 간이역마다 계절병 하나씩 내려놓아
입술 물고 밤 밝혀도 밤만 앓다 밝아오는
뿌리로 내려가는 병균 막지 못한 탓 있으니
부황 든 잎 새로 앉아 도리질에 바쁜 몰골
하루를 살아내며 소리 속에 소리를 읽고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에 얹혀 날고 있어
붙박이 지키고 싶어 간절한 기도지만
어쩌면 세상 밖으로 내쳐질 그 날 와도
세월 한 귀퉁이에서도 꿈을 꾸며 살아야해
새롭게 입덧을 한 뒤 만삭滿朔의 가을 짚어 가는
☆★☆★☆★☆★☆★☆★☆★☆★☆★☆★☆★☆★
《65》
이 시대의 나는
천숙녀
병이 들었다 손가락 끝 아니면 정강일까
시퍼런 칼날로 썩은 부위 도려낸 다
도려낼 썩은 자리 곁
뜯겨진 생살이다
묵은 상처 도려내야 다시 살 수 있는 거다
참으로 아픈 부재의 시대 문 밖에 서성이다
무응답 점으로 찍어 선線하나 그었다
창살 없는 사각 방에 두 다리 쭉 뻗으며
끝없는 말 풀 수 있는 자유인 되고 나면
어디로 가야만할까
이 시대의 나는
☆★☆★☆★☆★☆★☆★☆★☆★☆★☆★☆★☆★
《66》
이제야
천숙녀
두 가슴 엉키어져 이제야 집을 짓는
옹이로 맺힌 숨결 눈부처에 갇혀 울어
시간을 포개고 앉은 햇살들이 일어났다
드리운 품안에서 새순으로 날개 돋는
귀 세우며 열어 놓은 젖어 있는 문고리
열 오른 이마를 짚는 네 손 있어 환했다
이랑 따라 쟁기질로 쉼 없이 갈아엎고
가파르게 내 쉬던 들숨 날숨 갈앉히며
둥그런 마음 닮고 싶어 보름달을 그렸다
☆★☆★☆★☆★☆★☆★☆★☆★☆★☆★☆★☆★
《67》
잠긴 문
천숙녀
서 있는 곳 둘러보니 팍팍한 맨땅이다
반평생 조심스레 쌓아오던 무너진 탑
절망의 돌 조각들만 수북히 쌓여있다
깔고 앉은 돌 조각과 비린내 뒤적이던
두 손 툴툴 털고서 주워 담는 시간들
그 모습 씹어 삼키는 잡식동물 되었다
팽개쳐진 등짝은 땅바닥에 드러누워
두 눈은 뻐끔대며 하늘만 올려보다
마음은 어딘지 모를 외계外界를 날고 있다
땡볕에 입술 마른 가시방석 눈빛들
이 시대 땅을 짚고 대문을 두드린다
잠겼다 하늘마저 잠겼다
언제쯤 열릴까 문
☆★☆★☆★☆★☆★☆★☆★☆★☆★☆★☆★☆★
《68》
장막 속에서도
천숙녀
묵은 상처 도지는 가 어김없이 가을 온 다
끝 간 데 없는 들판과 강물 따라 걸었지
하현달 눈꼬리 매달려 초랑 뜨는 뭇별들
사방을 휘둘러봐도 재잘대던 우리 없어
오래도록 풀리지 않을 비밀 같은 부재의 숲
귓전에 닿던 속삭임
혈관 타고 흐르는데
어렵사리 뿌리내리느라 힘겨웠을 터였지
누가 누구의 힘줄 짓밟을 수 있을까
차라리 들녘 둑길에 앉을 자리 잡았다
밤 오면 날 밝기를 아침 오면 저녁때까지
오늘 하루 헛되이 보낼 순 없는 거다
그토록 살고파 했던
어제의 나자아였으니
☆★☆★☆★☆★☆★☆★☆★☆★☆★☆★☆★☆★
《69》
접혔던 무릎 세워
천숙녀
깊이를 잴 수 없는 새벽의 웅성거림
TV속에 특보로 코로나 뉴스 들리지만
어둠은 밀쳐내고서 빛만을 건져야했다
접혔던 무릎 세워 지축 쿵쿵 울리며
꿋꿋한 아침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웃음꽃 재잘거리던 돗자리 펼쳐놓자
너른 바다 깊이만큼 가슴팍도 키우면서
매서운 바람쯤은 저 하늘에 맡겨두고
먼 하늘 한마음 담아 탯줄로 늘여가자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지올리는 두 손 가득
어머니 옷고름 따라 무궁화 꽃피우고저
뼛속에 철주를 박고 축軸으로 다시 세울 거다
☆★☆★☆★☆★☆★☆★☆★☆★☆★☆★☆★☆★
《70》
젖은 목숨
천숙녀
소나기 스친 하늘에 젖은 목숨 걸려있다
여윈 어깨 내 걸고 온 몸을 말려야하는
수척한 영혼도 아파 울대 목을 세우고
코로나 짓밟고 간 길섶 들풀 질경이도
꿰맨 상처 덧나지 않게 손 등을 문지르며
옷섶을 여미고 섰다 뒤쳐진 날 옭아 맨 다
길바닥에 뒹구는 빛바랜 푸른 꿈이
눅눅한 바람결에 퍼덕이는 몰골 되어
멍든 터 설움을 삼켜 벼랑길 오르고 있다
어둠을 깨물다가 지쳐있는 노숙자께
한 가닥 햇살들이 빛살처럼 쏟아지길
엎디어 포복匍匐이지만 불씨 한 톨 키웠다
☆★☆★☆★☆★☆★☆★☆★☆★☆★☆★☆★☆★
《71》
종소리
천숙녀
큰 산을 오르다보면 거기엔 절이 있고
절 안 어딘가에는 큼직한 종이 있다
종소리
듣는 귀 찾아
늘 곁에 머물고 있지
살고 있는 방안에 산하나 그려놓고
중턱쯤 소나무에 종하나 매어달고
한번씩
종치는 시간
마음 밭 갈앉히곤
종소리는 물결로 바람결 폭풍 되어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빗줄기로
시간을
포개고 앉은
햇살들 일으켰다
☆★☆★☆★☆★☆★☆★☆★☆★☆★☆★☆★☆★
《72》
좋은 길
천숙녀
사람의 만남은 등산길이지요
정성으로
성심껏 만나다 보면 길
생기겠지만
만남의 노력에 수고를
더하고 곱하지 않으면
이미 잡풀이 돋아나
걸어온 길마저 덮이겠지요
☆★☆★☆★☆★☆★☆★☆★☆★☆★☆★☆★☆★
《73》
죽비
천숙녀
나무들의 무게를 받혀주며 사는 날들
들숨 날숨 몰아쉬며 서둘러 걷지 마라
헝클진 머리칼처럼 잡나무여도 괜찮다
꿈틀대는 위벽에 닿아 일궈 가는 목숨이니
여문 생각 동여매고 품은 뜻 곧게 세워라
아버지 사랑채에서 죽비로 회초리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탓하지는 말거라
잠시 잠깐 다녀가는 한 다발 꽃밭이다
빈 잔을 가득 채우려 용쓰지 말거라
견디어 살다보면 미륵세상 올 것이다
흩어 진 맘 갈앉히면 연꽃 환히 피어 난 다
눈물 꽃 맺고 풀어라 놋그릇처럼 닦거라
☆★☆★☆★☆★☆★☆★☆★☆★☆★☆★☆★☆★
《74》
지는 꽃
천숙녀
가녀린 대궁 타고 온 몸에 번지더니
생살 도려낸 흔적 위에 목숨 걸고 피던 꽃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밑그림을 그렸다
떼어내도 줄지 않는 피 끓는 가슴으로
덜 여문 생각을 모아 마른 목을 적시면
지는 꽃잎 한 장에 삶의 궤적 그었다
어둠 속에 날 세우며 굳게 다문 붉은 입술
긁히고 밀리던 가슴 허물 한 겹 벗어놓고
메마른 땅 꾹꾹 눌러 인印을 치는 늦가을
☆★☆★☆★☆★☆★☆★☆★☆★☆★☆★☆★☆★
《75》
지문
천숙녀
몸 속에는 둥근 마음 키워가며 사는 날
가슴에 금이 갔다
숨이 턱 막힌 영혼
공기도 굳어져갔다
아무도 모르게 차양을 쳤지
영혼이 가려웠다.
가려워 긁던 손가락 끝
시들시들 말라갔다
지문이 사라졌다
손가락 지워진 지문을
나이테로 더듬어보는 저녁
☆★☆★☆★☆★☆★☆★☆★☆★☆★☆★☆★☆★
《76》
지워질까
천숙녀
가파른 삶 오르면서 아침 오기 기다릴 때
눈 가득 고인 눈물 한 밤을 지새우며
잠이든 폐포肺胞를 깨워 밀봉된 편지를 뜯는다
창문으로 맑은 바람 조심스레 불어들고
조간신문 잉크 냄새가 녹슨 어제를 닦으면
햇볕도 지하 방 벙커에 깊숙이 따라왔다
스무 계단 내려서면 머무는 곳 지하 방
달도 별도 아득하여 숨죽여 흐르는 강
고단한 생의 흔적이 언제쯤 지워질까
싱싱하게 물오른 새벽 강을 기다렸다
가슴에 불 지펴주는 푸른 영혼의 피뢰침
어둠이 길을 내주며 세상 아침 열어주는
☆★☆★☆★☆★☆★☆★☆★☆★☆★☆★☆★☆★
《77》
천만리 할아버지 손녀
천숙녀
세월 냄새 가득한 묵은 궤짝 열었다
퇴색된 문서들 사이 계보系譜가 펼쳐있다
영양 천千
만萬자 리里자 할아버지 손녀
정랑공파 18세손
인의예지仁義藝知 가르치던 아버지 사랑방엔
고요히 전개되는 내밀한 종언縱言있었지
자욱이 피어오르는 무아세계無我世界 여행 길
세월이 힘겨워 삭아빠진 싸리울 따라
꽃말들의 비밀한 침실 문이 열리면
달빛을 다듬이질로 윗목에 펼치는 어머니
고향집 봉당위에 조잘대는 하얀 햇살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지붕엔 청 이끼 붙어살고
이 시대
찢겨진 깃발을
꼼꼼히 깁고 있다
☆★☆★☆★☆★☆★☆★☆★☆★☆★☆★☆★☆★
《78》
출근 길
천숙녀
환승역 상봉역에는 오가는 발길 그득하다
걷다보면 혼자가 아닌 세상 속에 내가 있다
아직은 깨어나지 않은
속 뜰 찾는 출근 길
이리 저리 끌려 다닌 생명의 꽃, 노래여!
우리 언제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땀 흘릴 노동의 들판 수면위로 떠올라라
맹위猛威 떨친 코로나에 단절을 경험하고
낮의 길이 줄여가며 노을에 드는 숲
영혼의 음성만큼은 천지를 진동했다
곧 다가올 미래의 삶이 이렇게 변할 거라고
코로나 팬데믹(pendemic)은 예행연습 시키는 가
늪으로 빠져드는 일
무서운 적도 이웃처럼
☆★☆★☆★☆★☆★☆★☆★☆★☆★☆★☆★☆★
《79》
침묵
천숙녀
휩싸고 도는 침묵沈? 속 아직도 발 시리다
각혈의 이랑 따라 무수한 시침 꽂혀있어
시간時間에 갈길 물으며 떠나가는 봇짐들
봉창 문 열어젖힌 너와 나 한 몸으로
꽈리처럼 터질 듯 서로를 일으켜라
뒤편에 깔려있는 음성 기도소리 박혔다
긴 여름 해 저물어 들판이 컴컴해도
알전구처럼 뜨거운 삶 내게도 있었으니
오늘은
응달진 뒤란에
빛 들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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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편지
천숙녀
초록 잎 사이 차분차분 비 내리면
촉촉한 가슴 풀어
그대 마음 적시렵니다
낙엽 뒹굴어 좋으면
내 육신 타는 불 소리 모아
그대 귓전에 띄우지요
찬바람 윙윙거리면
가슴 다숩게 뎁혀 줄 온기가 되어
그리운 그대 곁에 지피렵니다
팔베개 베고 누워 하늘 바라보면
깜박이는 별 하나
그대 눈빛입니다
장마를 걷어내는
바람입니다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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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푸른 강
천숙녀
조용히 강이 하나 흐르고 있습니다
깊고 푸르게
푸르고도 깊게
햇빛도 머물다 가고
달빛도 쉬어 갑니다
잠시 인 것 같아도 영원
영원인 것 같아도 순간으로
바람이랑 구름
더러는 고요마저
눈을 떴다 갑니다
눈을 감고 갑니다
나도 같이 왔습니다
나도 같이 갈 겁니다
깊고 푸른 강
푸르고도 깊은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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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풍경
천숙녀
바람이 소리 없이 불고 있어
잎 새 몰래 남 몰래 흔들리는 한낮
햇살 살갗에 쨍강거리며 부서졌지
보였어
기어다니며 나르는
물 위 그림자처럼 흔들리고 있는 나를
재잘거리는 저 풀들 좀 봐
나란히 어깨 두른 산이
화폭에 들어앉네
잎 새 몰래 남 몰래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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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함께 가는 길
천숙녀
얼마를 흘러야 저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벌써 닿아 하늘과 땅
그 어디에고 동행이지 않습니까
스스로 일어나 스스로 눕는 풀잎을 쓸며
짓누르는 물결
그 아래, 아래 깊고 고요한
기쁨과 슬픔까지도 같이 호흡하며
낮과 밤이 갈리는 시각
우리는 서로 돌아서지만
불길로 다가오는 그대 눈빛
창가에 매달고
밤마다 밤마다
어둠을 태웁니다
함께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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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향기
천숙녀
오늘도 내안의 나 내려놓지 못하고
목숨 꽃 건지고저 돌무지 뒤집었다
한 뼘 땅
허공에 그리며
가위 바위 보 놀이에 분주했던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매달려
낟알의 꿈 끙끙댄 제증 꾸들꾸들 말리고
비로소
저물고서야
멈춰 세운 파열음破裂音
묵은 공책 뒤져보니 고쳐 쓸 일 많아도
마음 헹궈 둘러보니 방 안 가득 향기롭다
몸속의
나이테둘레
찬찬히 짚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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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휴식
천숙녀
‘잊어라!’하지 않아도 잊어야 했다
별로 뜨고 이끼로 덮여
해묵은 기억들까지……
당신인 듯 잊지 못하게 하는 것들
세상의 인연조각들
한 장씩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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