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의 부활을 위한 탐색探索 평론가 박방현
詩의 꽃 다시 피우기 위해
오늘의 우리시가 방향감각을 잃은 채 시 자체의 존립마저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고 앞으로 시가 다시 부활의 홰를 치며 비상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해왔기에 이에 대해 필자의 소견을 나름대로 서술해보고자 한다. 시를 쓰는 창작의 주체자인 한 사람의 시인이 이 세상에 입지를 굳히며 명망을 얻는 시인으로 서기까지는 참으로 힘든 이정里程을 거칠 수밖에 없다. 그런 시인으로 입지를 굳히며 존립하게 되기까지는 우선 시적 재능이나 기질을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함이 제일차적으로 중요한 부분일 것이고 또한 그 시인을 둘러싼 생존의 배경이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다. 크게는 그 시인이 처해 있는 역사라는 시대적 배경과 문예사조의 영향과 그 시인만이 단독적으로 겪게 되는 탄생과 성장 등의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한 시인이 탄생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환경과 여건들이 그 시인의 시적 풍토나 지향성이나 그리고 타시인과 차별화가 되고 개성을 지닌 시인으로의 자질과 풍모를 갖추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시인도 그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이나 문예사조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받듯 한 시대를 관통하는 시 정신이나 시의 유형도 시대적 배경이나 문예사조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으며 오늘의 시가 시적 위기를 맞고 있는 것도 그런 복합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도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본 필자는 그런 문제들을 밀도 있게 고려하면서 우리시가 부활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어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중점을 두고 이 글을 개진해보겠다. 오늘의 시가 위기국면에 처해 있다고 보는 시각은 시적 형식이나 내용을 전제로 해서 검토하고 분석할 수도 있지만 그에 앞서 오늘날 우리 시를 두고 너나할 것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날이 갈수록 시가 독자들로부터 점점 소원해지고 망각되어지고 있다는 근거 때문이다. 1960년대 전후만 해도 우리들은 푸슈킨의 시라든가 바이런이나 릴케나 예이츠나 워즈워스나 보들레르의 시들이나 한국의 서정시인들의 시작품을 몇 편 정도는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기억하고자했고 때로는 암송을 하며 문학에 대한 관심은 물론 시적 흥취에 빠져들곤 했었다. T.S 엘리엇의 황무지에 나오는 ‘4월은 잔인한 달’이란 시행을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일지라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시구였고 그 시구를 유달리 많이 인용해서 대화를 풀어가곤 했다.
1)T.S 엘리엇(Thomas Sterns Eliot, 1888년9월 26일 - 1965년1월 4일)은 미국계 시인, 극작가 그리고 문학비평가이었다. 그가 쓴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황무지》(The Waste Land), 《4개의 4중주》(Four Quartets)와 <<형이상학파 시인들>>(The meta-physical poets) 20세기모더니즘에서 아주 중요한 작품들이며 1948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시의 독자들은 그런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고 한국의 시인 중에서도 수차례나 노벨문학상 수상에 거명된 바가 있음에도 그런 유명시인들의 시 작품이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관심밖에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런 지경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집이 출간 되어도 지명도가 높은 시인의 시집일 경우에 만권내외의 판매부수를 기록할 뿐이라 하니 우리의 시에 대한 관심과 인기도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실정이다. 시대의 추이에 따라 사람들이 인터넷 속의 카페나 블로그 등에서 시와 스스럼없이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한 여과 없는 작품들이 대부분이기에 시의 초심자들이나 독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을 뿐이고 그런 기류가 오히려 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저해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온라인상에서 일고 있는 문학의 열기에 대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항은 그 시들이 어떤 절차를 통해서 여과되고 정제되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런 무분별한 시들이 줄 수 있는 악영향에 대해 대처할 방어벽이 전연 없다는 사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오늘날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등단절차로 인해 자격미달의 시인들이 시인으로 등단을 하고 그런 시인들이 기준미달의 작품들을 온라인상에 대량으로 게재해고 있는 점들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인 것이다. 오늘날 시에 대한 독자들의 무관심과 외면이란 문제는 굳이 독자들만을 탓하거나 힐난할 수 없는 일이고 오히려 시를 쓰는 당사자인 시인들에게 더 큰 책임과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독자들의 기호만을 좇아가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가 독자들로부터 외면이나 무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고 시의 위기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시가 독자들로부터 관심밖에 존재하거나 외면을 받는 원인을 찾아야 하고 그 시발점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거나 분석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 주된 이유나 배경에 대해서도 진단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시에 대해서 <형이상시의 특징과 현대적 이해>란 평론에서 한국형이상시회 회장인 최규철시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격돌하는 산업사회 속에서 물질문명과 배금주의 사상에 떠밀려 갈수록 시의 입지조건은 열악해지고 그 존재의의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이때에 이렇게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시의 관심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2) 최규철 시인*1977년『시문학』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후 30여 년간 시작활동 *문학평론가 *한국형이상시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시문학문인회 부회장 *응시동인회 회원. *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고문 *한국민족문학회 고문 *한국기독시인협회 자문위원 *지구문학작가회 고문. *한국크리스쳔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제33회시문학상 수상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
시가 과연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등의 제반문제를 다시금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다. 오늘의 가속도가 붙은 시류의 흐름은 앞선 지식 정보와 첨단기술에만 눈독을 드리고 관심을 집중할 뿐 우리들의 감성이나 영성靈性의 문제엔 지극히 소홀하기에 시 역시 외면당하는 처지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규철 시인은 이어서 “적어도 앞으로의 한국시가 오늘의 시대적 문제점을 직시하고 종말론적인 위기의식을 극복하면서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예언자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의 기법과 시 정신(esprit)이 무엇보다 요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의 위기는 사물시만을 지향함으로 통합적 감수성의 메커니즘이 결여된 데서 온 것인 듯 하다. 오늘의 복잡다단하고 다원화된 시대 속에서 시가 건전하게 육성발전 되고 독자들로부터 관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편도偏道된 현상적 사물시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을 지양止揚하고 사상성과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가 서로 혼연일체를 이룰 통합과 조화의 감수성이 강조되는 시의 등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 독자들의 관심도 회복될 것이며 균형 잡힌 시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 분명하다. 오늘의 한국시는 누가 머라든지 위기국면에 처해있음이 사실이고 이 위기로부터 탈출하여 독자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고 미래지향적인 건전한 시로의 이행과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와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시의 흐름이 19세기의 주관적이고 지극히 개별적인 감성의 섬세함을 기조로 써왔던 서정적인 낭만주의 시에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지성과 회화성과 이미지즘(imagism, 寫象主義) 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을 지향했고 위에서도 거론한 바 있는 T.S 엘이엇을 주축으로 조이스나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주도되어온 문예사조이고 그 모던이즘의 뒤를 이은 문예사조의 하나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 포스트모던이즘은 2차대전의 종말과 함께 대두되었고 모더니즘이 지향해왔던 시의 결구력을 해체하고 풀어쓰기 시, 이야기 시 등 산문화와 분방한 시법을 구사하는 해체이론이 주축이 되는 시를 이른다. 우리시단에서는 미래파 라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주축이 되어 지향하는 시풍이라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시의 풍토로 하여 우리시는 방향감각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3)이미지즘(imagism, 寫象主義)은 애매한 일반 관념을 피하고, 하나의 형상을 표현하여, 그 때까지의 시보다는 일상의 적확한 용어에 의한 운율에 중점을 두고, 명확한 심상의 표현을 도모한 영국의 자유시 운동이다.
4) 모더니즘(modernism)은 사상, 형식, 문체 따위가 전통적인 기반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나려는 창작 태도. 20세기 서구 문학·예술상의 한 경향으로, 흔히 현대 문명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미래에 대해서는 반유토피아적이다. 또한 현실 비판의 한 방법으로 예술의 비인간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5)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1882, 2, 2~1941, 1, 13)는 아일랜드 블린 출신, 소설가, 시인, 극작가다. 유명소설은<율리시즈 1922.>와 <피네간의 경야 1939편으론 <더블린 사람들 1914.> 그 외 다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이용한 작품은 <율리시즈 Ulysses>(1922)가 대표적 작품.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서구를 풍미하였던 모더니즘 문학을 주도한 대표적 소설가이다
6)파운드[Pound, Ezra Loomis / 1885.10.30 ~ 1972.11.01] 이미지즘 운동을 전개하고 영미시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1909년 영국으로 건너간 뒤에 신문학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어 엘리엇과 조이스 등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반미 활동의 혐의로 오랫동안 정신 병원에 연금되었으나 시인들의 운동으로 풀려났다.
모더니즘은 전래의 기존 사회조직이나 종교 도덕 윤리 등에 의해 형성되어 왔던 자아개념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해왔던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드, 프레이져 등에 의해 철학적 모더니즘의 개념이 주창되었고 1차 세계대전의 대변혁과 사회혼란으로 서구문명과 문화의 기조가 무너지고 흔들린 데서 모더니즘이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문학에서는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엘리어트 등의 문학인들이 그들의 문학작품에 모더니즘을 도입했었다.
7)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모더니즘이 확립하여 놓은 도그마, 원리, 형식 따위에 대한 거부 및 반작용으로 일어난 예술경향. 특히 1960년대 전후의 미국, 프랑스 소설의 실험적 작풍이나 구조주의 이후의 전위적 비평으로 모든 종전의 틀을 해체하고 와해하는 문학형식을 말한다.
모더니즘의 문학사조는 감성보다는 주지주의적인 성향과 음악성보다는 회화성을 강조했으며 이미지즘의 시적 성향을 강조했다. 또한 표준적 시어의 흐름을 조각난 시어로 대치했고 전통적 시 구조의 통일성을 버리고 부분들의 순서를 도치시키는 방식으로 전환했으며 서로 연관성이 없는 나열된 구성요소들을 독자들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거나 재조립하도록 했다.
8)미래파란 호칭은 2005년 평론가이자 시인인 권혁웅 씨가 문예중앙 봄호에 그 해석 불가능한 코드의 시류을 엮어 “미래파”로 명명한 뒤 그에 대한 찬반논란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환상, 요설, 엽기, 외설 등을 시의 형식으로 감싸 안는 미래파 시인들은 “소통 불가능하고 유희적이고 철없는 언어를 구사하는 자폐아들, 은유와 운율과 서정이 없이 눈속임을 목적으로 하는 진지하지 않은 시인들”이라는 폄하 또한 받아왔다.
특히 엘리엇은 시 창작에 있어 몰개성(impersonality)론을 주창했는데 시인을 화학물질과 촉매재의 관계에 비유하여 시인은 시 창작에 있어 자신의 감정을 개성 있게 표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문학적 역사적 전통에 의거해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러한 엘리엇의 주지주의적인 경향은 많은 후진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예사조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 전쟁 종말이 몰고 온 후유증이 유발시킨 사조라 볼 수 있다. 나치의 전체주의와 대량학살의 체험, 원폭과 환경의 황폐, 인구 폭증과 기아문제 등과 모더니즘에 의해 관습화 되고 제도화 된 형식들로부터 차별화 하기위해서 존재의 무의미성, 혼돈, 공허, 무無를 드러내기 위해서 기존의 공인된 사고영역과 경험양식의 기조를 무너뜨리는 문예사조라 볼 수 있다. 그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으론 언어학과 문학이론에서 언어자체의 기조를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포스트모던이즘이 2차대전 후 1960년대부터 문학에 편입되어 하나의 문예사조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규철 시인은 이어서 서술하기를 “이런 모더니즘의 결함을 지적하고 일어난 시운동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서 정해진 틀을 깨고 자유스러운 특징의 시법을 구사했다. 모더니즘처럼 사물의 상위계열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위계열까지도 모두를 받아드리고 소화시키는 기능을 가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 내지는 문학 예술분야에서 그 이론의 창시자인 자크 데리다의 해체논리에 따라서 모든 것을 해체함으로써 전통적 가치관과 절대적인 진리관을 배제하고 창조적인 가치관과 상대적인 진리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문제의 정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존재의 가치를 폭넓게 받아드려 시인의 시야를 넓히고 존재의 의미를 심화시키는 데 많은 공로가 있기는 했으나,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속성이 너무도 많은 것을 해체시킨 나머지 탈중심, 탈규범, 탈신성, 털권위, 탈구조, 탈언어(언어 이탈), 거기다 다원주의, 로칼리즘 등의 편향된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역시 이분법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고 논술하고 있다. 우리 현대시가 출발한 1908년 이후 1920년대에는 김소월을 필두로 서정성이 강조된 시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었고 1930년대를 전후해서 김기림과 정지용시인을 중심으로 모던이즘의 시풍이 이 땅을 풍미했었다.
9)김정식(1902 , 8,6(음)~ 1934.12.24) 시인 호는 소월素月 평북 곽산 출생. 남산 보통학교. 오산중학교 졸 일본 도꾜 상대 중퇴. 오산학교 은사인 안서 김억으로 부터 문학수업함. 1925년 <진달래꽃> 시집 상제했음. 한국 서정시의 대부 격인 시인임. 한국인의 애송시 1위인 <진달래꽃> 씀 (리동수 지음 김재남 해제,((북한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 연구)), 살림터, 1992년 240면, 북한자료에 의거)
10)김기림(1908.5.11~?) 시인. 평론가. 호는 편석촌片石村. 함북 학성 출생. 보성고보 일본 니혼대학 문예예술과 졸업. 도후쿠제대 영문과 졸업. 교편과 신문사 기자 역임. <고대苦待> <날개만 돋히면> 등의 시를 신동아에 발표했으며 희곡 <어머니를 울리는 자는 누구냐>동광에 발표하기도 했음. 김기림은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의 이론을 한국문학사에 정착시킨 모던이즘 시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음. 또한 푸로문학에 비판을 가하기도 했음. 11)정지용 (鄭芝溶 1903~50 ) 시인. 충북 옥천 출생. 1925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유학시절〈카페 프란스>〈슬픈 인상화〉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창작을 시작하였고, 1929~45년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시문학>동인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의 시풍는 1930년대 모던이즘이 관통하고 있으며 감각성, 공간성, 이미지의 형상화가 두드러지며 향토적 언어감각이 뛰어난 시를 썼음, 주로 이미지즘· 모더니즘 계열의 사물시(事物詩)를 썼으며 6.25 당시 사망으로 추측됨.
12) 서정주(徐廷柱 1915.5.18 -2000.12. 24)시인은 전북 고창군 부안면 태생이고 호는 미당. 서울중앙고보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의 시위 주도로 퇴학당함.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전신)에서 불교와 문학공부를 병행. 1947년 7월 11일 <국화 옆에서>가 발표.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4-5회 추천된바 있음. 생명시 동인이며 중앙일보에서 2001부터 미당문학상을 제정 시상하고 있음.
또한 미당을 중심으로 하는 생명시와 목월을 중심으로 하는 청록파 시가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평과 호감을 이끌어 내었다. 서구의 문예사조의 흐름이 그러했듯 한국의 시도 오늘의 시에 이르기까지 그런 서구의 문예사조의 흐름을 직접 간접적으로 흡수하고 수용하며 발전해 왔다.
13)생명시는 생명의 깊은 충동과 고뇌, 삶의 절박한 갈망을 시화하려고 하였다. '시인부락<1936>' 동인(생명파)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서정주의 관능과 열기와 숨결을 담은 '화사집<1941>'의 시로 대변된다. '생명'시의 동인 유치환 역시 그러한 생명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생명파의 시이다.
14) ‘청록파’ 시는 자연을 소재로 자연 예찬의 서정시로 향토적 서정을 노래한 박목월의 시, 민족정서와 전통에의 향수를 담은 조지훈의 시, 시대적인 수난과 절망을 불멸의 생명욕으로 초극하려는 강인한 의지가 자연과 융합하는 데에서 그 표현을 얻은 박두진의 시, 이들의 3인시는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가운데 공통된 시풍을 보여주었고 이들을 청록파라 불렀다.
그동안 우리 시단은 지성시와 감성시의 문제와 관념시와 사물시의 대립적 입장과 모던이즘의 시인가 포스트모던이즘의 시인가 아니면 소위 미래파라 호칭되는 유파인가 아닌가 하는 대립개념 속에서 끝없이 방황하고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고 그 외에도 전쟁시 반항시 난해시 등등 그 역사적 배경이나 시대적 조류에 의해 참으로 많은 유파와 아류가 형성되어 왔다고 분석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치하의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2차 대전의 전쟁수행을 위해 힘든 부역에 임해야 했고 연이어 해방과 한국동란과 군사정권의 대두에 의한 긴장과 비극적인 고통 그리고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이하는 긴박한 과정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심각한 변화와 인생고를 겪어야 했다. 그런 격동의 변화 속을 살아야 했던 시인들 역시 시적 토양은 물론 급속한 변화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고 시의 독자들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2차대전의 발발과 패망과 연이은 해방과 한국동란은 생명시의 토양이 된 셈이고 참혹한 전쟁심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일군의 시인들은 순수자연을 노래하고 찬미하는 청록파 시인으로 변신하게 되었거나 또 다른 유파는 전쟁시를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포악한 군사정권은 반항시인들을 만들었으며 급격한 산업사회로의 변화는 문명비판적인 시나 사회비평적인 시를 쓰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의 시는 어디로 가야하고 어떠한 시를 지향하고 써야 할 것인가? 앞으로 한국시를 책임져야 할 젊은 시인들은 무슨 시를 어떻게 써서 한국시의 명맥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이며 위기에 처한 시를 구하고 독자들로부터 호감을 얻어내는 빛나는 성과를 거둘 것인가 등이 자못 궁금한 화두이자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당면문제임이 틀림없다. 또한 미래파라 불리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은 어떤 유파적인 시의 특징이 있으며 호명되고 있는 미래파란 호칭은 온당한 것인가에 대해 점검을 해야 하고 나가서 미래파라 호칭되는 시인들이 쓰는 시는 문제점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평가를 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라 필자는 생각이 된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수많은 시인들을 문예사조적인 흐름이나 시대배경의 범주 속에 뭉뚱그려 넣고 몇 개의 유파나 부류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대충 정리하고 넘어가자면 1920년대를 기점으로 김소월을 중심으로 낭만적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었고 30년대를 전후해서 김기림을 주축으로 정지용 등에 의해 모던이즘이 주류를 형성했으며 만해 한용운과 김현승 구상 시인 등은 관념시 내지는 형이상시를 썼고 생명시를 썼던 미당과 청마 등의 일군의 시인들과 목월을 중심으로 하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들이 있었으며 목가적 시를 썼던 신석정 시인 등을 한국의 근대시 내지는 현대시의 주류를 이룬 대표시인들로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격동의 시대배경 속에서 위에서도 거론한 바 있지만 40년대에서 50년대에는 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패망 그리고 해방과 한국동란으로 이어지며 변전하는 시대 속에서 해방을 주제로 하는 격앙된 환희에 대한 해방시와 좌경문학과 동란의 위기 속에서 전쟁이 소재가 되고 주제가 되는 전쟁시들이 나왔고 60년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대해서 항거하는 반항시와 산업사회가 몰고 온 병폐에 대한 문명 비평적 또는 사회 비판적 시들이 등장했다. 모던이즘과 포스트모던이즘의 문예사조적 흐름과 급박한 역사내지는 시대적 배경의 영향 하에서 쓰인 시들이 우리시의 시적 흐름의 본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시의 100년은 1908년 최남선을 기점으로 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한국시가 1970년대 이후 바람직한 시의 형식과 내용을 구축하지 못한 채 표류하거나 방황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적 비전을 탐색하고 있을 뿐 이렇다고 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독자들부터 냉대와 외면을 받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15)최남선은 사학자, 문인, <소년>을 창간, <해에게서 소년에게>란 한국최초의 신체시 발표했다.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후 친일활동을 해서 반역자로 지탄을 받았다.
또한 미래파의 담론 속에서 어떤 형식도 내용도 없는 허상을 놓고 설왕설래 하거나 비난을 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다 허더라도 한국시의 전도를 위해서 또는 한국의 시인들이 지향해야 할 푯대와 목표를 재설정하기위해서 미래파란 내용은 없고 허상만이 존재하는 그 명칭에 대해 확고한 해석이나 규정이 필요한 때에 와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래파 담론에 대하여
우리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입버릇처럼 시적이라는 말을 자주 써왔고 흔히 들어왔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시적인 것인가에 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시라고 호칭하는 시작품들이 시라 부르기에 전연 무리가 없는 진정한 시의 자격요건을 합당히 갖추고 있을까. 나는 그 부분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시는 시적 원형적原型的 요건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에 합당할 때 진정한 시라고 호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잡문을 써놓고 이것은 시다, 라고 강변을 하거나 우격다짐을 할 때 우리는 그 강변에 동조하거나 합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가 갖추어야 할 원형적 요건을 알고 거기 부합할 때 시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의 구성요건構成要件에 부합할 때 그리고 그 테두리(카데고리)를 지나치게 벗어나지 않았을 때 그 시를 시라고 호명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시의 원형적 요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검토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시에는 첫째로 시어詩語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시행詩行이나 시연(stanza)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는 운율韻律(rythm, meter)이나 운문성韻文性이 존재해야 되고 넷째는 이미저리(imagery)나 상징(symbol)이나 비유언어(figrative language) 즉 직유(simile)나 은유(metaphor) 등등의 시적인 구성요건과 또한 정형시인가 자유시인가 산문시인가 서정시인가 서사시인가 등등의 표현기법表現技法도 무시할 수 없는 점이고 이런 제반 요건에 부응할 때 비로소 시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편의 시속에 이 모든 요건을 갖추지는 못하더라도 가능하다면 고루 갖추었을 때 비로소 시다운 시라 명명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우리들은 불행이도 미래파라 통칭되는 시들에서 위에 열거한 시 성립의 요건들이 전혀 무시되거나 그 흔적을 찾기가 힘이 드는데서 오늘의 시가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보아진다. 어떤 문예사조나 시적 유형에도 위에 열거한 시적 요건을 무시한 바는 없었고 오늘까지 존속되어 왔다고 볼 때 이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는 얘기다. 위에서도 서술한 바 있지만 단지 1960년경에 대두한 포스트모던이즘(postmodernism)이 모던이즘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거나 연속선상의 문예운동으로 대두되면서 시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차별적 특징인 결구력을 해체시키고 이야기 시 풀어쓰기 시 독백 시의 형태를 취하는 변화를 고집했다. 모던이즘과 포스트모던이즘의 대립항목은 형식 대 반형식, 목적 대 유희, 의도 대 우연, 위계질서 대 무질서, 우세나 로고스 대 피폐 침묵, 예술 목적 대 그 과정, 현존 대 부재, 구심 대 분산, 장르 대 텍스트, 기의 대 기표, 독자중심 대 작가중심, 확정성 대 불확정성 등의 상이점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자 반대되는 개념이라 볼 수 있고 탈 중심사고 탈 이념적 사고를 의미한다고 흔히 얘기해왔다. 필자가 장황하게 모던이즘과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해 대조나 비교 검토하려고 하는 의도는 오늘의 한국의 미래파라 통칭되는 일군의 시인들의 시가 위에 열거한 포스트모던이즘이 주창해온 시적 내용과 형식면에서 일치점과 상사점을 이루고 있다는 얘길 하고자 함이고 결국 오늘날 한국시단에서 담론의 대상이 된 미래파란 명칭은 전혀 새로운 개념의 시운동이 아니며 포스트모던이즘을 지향하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을 지칭하여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이즘이나 미래파가 지향하는 시는 바람직하고 건전한가 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음을 우리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경희대 교수였던 도정일 평론가의 표현에 의하면 “포스트모던이즘은 서구의 자살”이라했듯 포스트모던이즘이 서구에서도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실정이고 또한 원로 여류시인 김남조 시인도 "무릇 좋은 시란 영혼성이 깃들어 있는 시, 예언적인 시라고 생각해요. 시의 하늘은 종국에는 그런 데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시인은 최근 젊은 시를 호명하는 용어로 굳어진 '미래파' 시에 대해서는 사뭇 마뜩 잔은 표정이다. "‘형의 두개골을 파먹고…’이런 식으로 나아가는 게 이른바 미래파라는 건데, 요즘 시가 점점 기괴한 쪽으로 흘러가는 듯해 안타깝습니다.
16)도정일 문학평론가이자 경희대 명예교수. ‘책 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 ‘기적의 도서관 지어 주기’ 운동 상임이사임.
17)김남조(1927.9.25)시인. 수필가. 대구출생. 일본규수에서 여학교 나옴. 서울대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1951). 성숙星宿, 잔상殘像(1950) 연합신문에 시발표 후 문단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는 <모숨> <나 아드의 향유> 외 다수의 시집이 있으며 그녀의 시는 기독교사상의 기조 위에서 쓰여졌음. 숙명여대교수을 역임했으며 수상경력은 자유문학상. 오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등이 있음.
"불온한 서정의 섬뜩한 시가 아닌 순연한 정조(情調)의 따뜻한 시를 지켜 나가자는 것이다.”라 했고 또 한분의 원로인 김지하시인도 “한국시, 새 스타일 창조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미래파'로 불리는 젊은 시인들의 실험적인 작품에 대해 "시 같지 않다"고 비판했다. 김 시인은 교보문고 광화문 점에서 열린 '김지하 시인 초청 낭독회'에서 "요즘 한국시는 시 같지 않다"면서 "현재 한국시는 혼돈, 추함, 엽기, 괴기 등의 요소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스타일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양상"이라고 말했다.
18)김지하(1941.)시인. 1966년 서울대문리대 미학과 졸업. 1969. <시인>지에 비. 황톳길. 가벼움. 녹두꽃. 들녘 등의 시를 발표. 1964년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에 참여했으며 6.3 사태이후 시 오적五賊을 발표 등으로 70년대부터 도피 체포 투옥생활을 하며 민주화투쟁의 대표적 시인이다. 1981년 국제시인회의 본부로부터 <위대한 시인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젊은 미래파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내용이 부족할 뿐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 운문성, 율격, 리듬, 행갈이, 연갈이, 시어와 시어 사이의 절제미 등을 전부 버렸다"면서 "이런 작품을 보면 도대체 시인지 산문이지 알 수가 없고, 내용도 너무 복잡해 이해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김 시인은 "미래파의 시가 전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며, 미래파가 젊은이들 사이에 등장해 확산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면서 "유럽의 예술사, 문학사를 살펴보면 미래파의 등장은 시의 전환기, 과도기에 늘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같은 혼돈적 양상은 전환기를 지나면 새로운 스타일로 바뀌지만 그 스타일은 제멋대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방황, 모색, 시행착오 등을 거쳐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면서 "새로운 한국시의 스타일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정신주의적 시, 생태환경주의적인 시, 미래파가 서로 얽혀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하자면 시가 지녀야 할 시적 원형적 요건들 내지는 시의 구성요건에 부합할 때 우리가 시라고 명명할 수 있다는 얘기이고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오늘날 미래파라 지칭되는 많은 시인들의 시작품들이 시의 원형적 요건이나 시의 구성요건에 미치지 못하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시인자신이나 그 아류들이 아무리 자신들의 시가 좋은 시라고 주장을 한들 독자들이나 또는 평자들이 부정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면 그 시에 대해 철저한 자기반성과 함께 새로운 시를 향한 의지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필자는 미래파 시인들의 많은 시편들 속에서 시적인 것을 찾을 수 없음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들의 시는 시라기보다는 성공하지 못한 엽편葉片소설이거나 장편掌篇소설이라 지칭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 성향으로 봐서 거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시를 신춘문예에서 당선작으로 뽑는 오늘의 시류나 한국의 문단에서 선도적 중요한 자리를 점하는 문예지의 출판사들도 미래파 시인들의 시답지 않은 시들을 과다하게 지속적으로 편집 게재함으로 참으로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며 한국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지극히 위험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힐난하지 않을 수 없다. 신춘 당선시를 모델로 수많은 아마추어 작가들이 그런 시를 쓰고자 노력하고 그런 류의 시풍을 추종하거나 지향하며 열정을 다해 습작에 임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임이 분명하다. 필자는 그들의 앞길이 위험스럽고 불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엽편(葉篇)소설. 나뭇잎 하나 정도의 넓이에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뜻에서 짧은 소설을 부르는 이름이다. 장편(掌篇)소설 : 콩트(con'te)라고도 하며 ‘엽편(葉篇) 소설’이라고도 한다.
.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시
문학세계사에서 발행된 현대시 여름호(1984)(편집인;韓啓傳 吳世榮 金載鴻교수 諸氏)에서 <삶다운 삶, 시다운 시를 위하여>란 제하의 글 속에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고 추구해야 할 이상적 유형의 시에 대한 서술 중에서 본인이 특별히 호감을 느껴 발췌한 몇 가지 주목할만한 개요를 여기 옮겨보면 ‘첫째 삶의 존재원리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인 시가 되어야 하고 둘째 아름다운 언어와 살아 있는 말로 이끌어 올리는 예술시가 되어야 하고 셋째 과거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현재를 정당하게 비판하며 미래를 투시하는 역사의식의 시가 되어야 하고 넷째 문학의 본질인 창조정신을 올바로 구현할 수 있는 창조적인 시어야 하며 다섯 번째로는 우리의 현실적 삶에 위안과 감동 때로는 힘을 주는 시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필자도 그 지론에 전적으로 찬성하며 공감을 한다. 오늘의 시들이 위에 열거한 바와 같이 시가 마땅히 품어야 할 본질적인 문제들을 소홀히 함으로 독자들은 외면하고 떠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에서는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철학성이 결여된 사물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서정시의 본질을 이룬 감성의 문제나 서정성은 극도로 메말라 있으며 아울러 아름다운 언어를 통한 예술의 시와 거리가 멀다. 또한 역사성이나 시대 비평적 안목이 결려되어 있고 예술성과 시적 진정한 창조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의 제시는 물론 감동과 위로를 주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시들은 독자들과의 공감이 차단된 언어적 표현들로 시인과 독자간에 괴리감을 주고 있으며 또한 진지성이 결여된 무미건조한 언어의 나열이나 몽유병적 언어유희의 시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미래파의 시들에서 시적 감흥이나 매력을 느낄 수가 없고 지나치게 산문적이고 서술문적인 면 때문에 시적 중요한 요건인 시행이나 시연의 구분도 없고 운율성도 운문성도 찾아 볼 수 없는 사실들이 시적 매력을 격감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시를 지향하는 시인들의 논리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처럼 소통과 공유를 강조하는 매스미디어의 시대에서 초기의 주술사들이 썼던 소통불능의 접신적接神的인 언어나 선승들끼리 통용되는 선문선답禪問禪答이 되거나 소수자만이 해득할 수 있는 비밀스런 암호적인 의미의 시가 되어서는 참다운 시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미래파의 시들에서 시적 감흥이나 매력을 느낄 수가 없고 지나치게 산문적이고 서술문적인 면 때문에 시적 중요한 요건인 시행이나 시연의 구분도 없고 운율성도 운문성도 찾아 볼 수 없는 사실들이 시적 매력을 격감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생명은 시적의미의 응축과 내포적 표현에 있다고 보기에 시에서 이미저리가 필요하고 메타포어나 상징적 표현이 필요하다고 보며 시행의 말미를 명사로 끝내는 형식을 취하는 것은 운율이나 절제미 등의 제반 시적요건을 갖추기 위함이고 그런 표현을 통해서 시어나 시연의 응축과 통합적인 압축을 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파라 통칭되는 시인들의 시를 보면 하나 같이 시행의 결구를 <이다> <아니다> <했다> <안 했다>하는 천편일률적인 산문적 또는 서술적 말미로 처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 형식과 문체 때문에 시라기 보다는 산문이나 서술문에 가깝고 시가 지니는 운률성 이미저리 회화성은 물론 간결미와 선명한 이미지의 응축성이 상실되었으며 그런 점들이 시의 맛을 탕감시키고 마는 것이다. 위에서도 얘기 했듯이 엽편葉片 소설적 요소나 장편掌篇 소설이라 지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시적 원형은 어떻게 탐색하고 창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는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만 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심각한 처지에 있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T.S엘리엇은 "시에 있어서 과거에 전혀 힘입지 않은 완전한 독창성이란 없다. 위대한 시인은 누구나 미래의 시가 만들어지는 복잡한 토대에 무엇인가 반드시 덧보태지게 한다."고 했듯이 또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과거의 전통 위에서만이 새로운 시세계가 구축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1950년 경 6.25한국동란을 경험한 전후前後세대들은 급박한 현실상황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실기하고 오직 생존을 위해서 전력투구했다. 오늘의 중견세대들을 먹이고 가르치기에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처지였기에 지적수준이 미진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해서 오늘날 구세대와 신세대 간에는 지식의 역류현상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런 현실적 문제는 구세대들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심을 보내기보다는 구세대들을 폄하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두드려지고 있는 것은 문학에서도 동일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문학적 전통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실험적 시에만 몰두하는 오늘의 젊은 문학도들이나 미래파시인이라 통칭되는 젊은 실험 작가들은 T.S 엘리엇의 얘기처럼 온고지신적인 문학자세도 중요함을 깨달았으면 한다. 위에서도 소개했던 삶의 존재원리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인 시, 아름다운 언어와 살아 있는 말로 이끌어 올리는 예술시, 과거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현재를 정당하게 비판하며 미래를 예측 투시하는 역사의식의 시, 문학의 본질인 창조정신을 올바로 구현할 수 있는 창조적인 시가 되어야 하고 현실적 삶에 위안과 감동과 힘을 주는 시어야 한다는 시의 원론적 존재이유나 성립이유의 논리가 살아 숨쉬는 시를 지향해야 하고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 거름 더 나가 김지하 시인의 주장대로 물질문명과 배금주의적인 시대정신의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정신주의적인 시, 지구오염으로 인한 생존의 위기에서 인류가 탈출하기 위해서는 생태환경주의적인 시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시의 테마(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시가 추구해왔던 모던이즘은 최규철 시인의 지론대로 “1931년경에 김기림에 의해서 당시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지양하고 새롭게 탄생된 모더니즘 시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주지주의와 이미지즘 경향의 시를 뜻하는 것이었다. 모더니즘의 시는 개성보다는 몰개성으로, 의미보다는 이미지, 통일성보다는 단편적 경향으로, 그리고 철저한 언어를 통한 회화성의 추구와, 이미지의 조형성, 이성을 주로 한 합리주의적인 성향이 짙고 자신의 지역성을 초월한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적 관심을 갖는다. 또 모더니즘은 2분법적 개념인 광명과 흑암,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신과 인간,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 등의 양극적인 대립개념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그 중 상위계열上位系列에 속한 것만 취하고 하위계열에 속한 것을 버린다.” 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모던이즘의 병폐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또한 포스트모던이즘이 지닌 단점들과 문제의식을 제거하고 보완하면서 새 밀레니엄(millennium)의 연표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미래의 시는 어떤 유형의 시여야 할까하는 의문과 질문에 맞닥트리게 되는데 필자는 그 대답이자 대안으로 <형이상시>를 제안하고 싶다.
형이상 시의 특징은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란 어떤 시인가. 시인이고 평론가이며 현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이신 신규호 교수는 <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인가> 란 글에서 형이상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20)신규호(1939.9.15~ ) 시인 평론가. 서울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 . 단국대 대학원 수료(문학박사) 현대문학지에 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성결대 국문학과 교수 , 성결대 부총장 역임. 동 대학원 명예교수임.<한국현대시연구>, <이상문학연구> <한국현대시와 종교> <한국기독교시가연구>. 시집으론 <입추이후> <어둠의 눈> <사랑아 사람아> <맨발의 사람> 보랏빛 마음> 등이 있고 현재 한국현대시인 협화 이사장임
“16세기 후반 영국의 엘리자벳 시대의 천편일률적으로 형식화된 소넷에 대한 염증과, 스콜라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조잡한 복고적 경향에 대한 안티테제, 그리고 17세기 초엽의 과학에 대한 각성 등이 형이상시의 발생 배경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그리어슨이 <메타피지컬 시집>을 편집하면서 ‘존 단 학파’, 또는 ‘형이상학파’라 칭했는데, 20세기에 와서 엘리엇, 리쳐즈, 엠프슨, 테이트, 랜슴, 브룩스 등 영미 비평가들이 이들의 시를 재평가하면서 그것이 이상적인 시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다. 형이상시에 대한 17세기 초엽의 경멸적 비평과 대조적으로, 이에 대한 엘리엇 등의 현대적 재평가는 일차적으로 19세기 낭만주의 전통에 대한 반발이었고, 엘리엇 자신의 시가 지니는 현대적 특성, 즉 객관적 상관물, 사상의 정서화, 전통의 계승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존슨 박사 등이 강조하는 형이상적 컨시트는 외면적으로 전혀 관계없는 체험의 영역간에 놀랍고도 교묘한 유추에 의해 형성된다. 가장 이질적인 생각들이 ‘폭력적 결합’에 의해 동일화됨으로써 고정관념에 갇힌 언어를 또 다른 새로운 세계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형이상시의 의도라 할 수 있다. 아이러니, 컨시트, 풍자 등이야말로 불완전한 언어의 한계를 언어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시적 장치라고 하겠다.” 했고 박진환 교수는 <당신도 시인이 될 수 있다>란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흔히 현대시를 메타언어라고 규정하는데, 메타란 두 의미론적 해석을 요구한다. 하나는 언어의 초월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뒤에 감추어진 비의秘意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21)박진환(朴鎭煥.1936.6.15∼) 시인ㆍ평론가. 교수 .전남 해남 출생. 목포사범을 거쳐 1961년 동국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국문과 수학, 1982년 국민대학교 대학원 졸업. 1990년 문학박사(중앙대). 1960년 대학 재학 중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가을 시(詩)>가 입선, 이듬해에도 역시 [동아일보]에 시 <해바라기 찬가>가 입선, 1963년 [자유문학] 신인문학상현상모집에 낭만파시(浪漫派詩)를 다룬 평론 <수난기(受難期)의 유산(遺産)>이 당선되었다. 대한일보ㆍ일요신문ㆍ중앙일보ㆍ한국일보 등의 기자를 역임.[시법(詩法)] 동인. 현대시의 지향점을 논한 <현대시의 이미지><어떤 광장(廣場)의 파노라마> 등 다수의 평론과 바람고(考)><귀로(歸路)> 등의 시편을 발표했다. 시문학상, 한국비평문학상, 고산문학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
언어의 초월적 기능은 의미의 확장이자 의미의 고정화를 거부하는 일종의 암시나 상징적 기능에 의탁된다. 그리고 비의는 드러나지 않는 것을 포착해 내는 일종의 새로운 의미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적 속성을 우리는 병치적 메타라고 하고 후자적 속성을 치환적 메타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이질성 속의 동질성을 찾아 결합한다든지, 동질성 속의 이질성으로 이동한다든지 하는 일종의 변증법적 결합이다. 이러한 결합은 의미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대신 의미의 초월이나 의미의 암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의미의 물화나 의미의 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메타피지컬 포위트리는 시적 변증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관념이나 사상을 중시하면서도 표현은 메타화에 의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이상시는 리얼리즘의 현상학적 권태로움을 초월성이나 신비로 대체하고 여기에서 고도화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동시에 상상력은 기발한 착상의 기상(奇想;conceit)을 창출해 낼 수 있게 한다.” 고 했다. 또한 현재 한국형이상시회 회장인 최규철 시인은 그의 글에서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나타난 형식의 틀과 이미지와 이미지의 조형으로 인한 응축된 형태를 해체시킴으로써 풀어쓰기 시, 대화 시, 이야기 시, 소설시 등과 같은 산문시로 전향되었다. 이에 대해서 박진환 교수는 그의 저서「현대시학과 시법」에서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면서 써서 발표한 시편들을 보면 형식은 훌륭한 산문을 성립시키고 있으나 그 산문 속에 시를 성립시키는 요소는 발견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형상의 해체가 시의 존재양식까지 해체시켜버렸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데 이러한 생각이 과연 필자만의 것인지 의구심을 금할 길이 없다.’고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점은 살리되 그 결함들은 보완하고 시적 양극화된 현상을 폭력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시의 기능이 오직 형이상시의 통합적 감수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고 논술하고 있음을 볼 때 우리 현대시가 추구하고 지향할 시는 필자도 그 대안으로는 ‘형이상시’ 밖에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최규철 시인은 형이상시에 대해 이어서 서술하기를 “형이상시는 17세기 드라이든이 너무 철학적이라는 비판으로 존 던(1572∼1631)의 시를 평한 데서부터 명명된 말이다. 이렇게 형이상시운동이 처음부터 많은 조소와 비난을 받으며 출항했고 17세기 형이상시가 가장 찬란한 꽃을 피웠다가 18세기에 들어와서 극도로 관념적이고 지적이었던 신고전주의와 개인의 감정과 열정을 중시했던 19세기의 낭만주의 사조로 인해서 잠시 매몰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그리어슨이 형이상시들을 재수집하고 편집하면서 비로소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엘리엇, 리처드, 랜슴 보우건 등이 뒤를 이어 경쟁적으로 형이상시를 재평가함으로써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형이상시가 큰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 서술하고 있다.
22)존 던(John Donne,1572~1631,3,31) 영국 시인 겸 성직자. <노래와 소네트>의 연애시는 사랑의 온갖 심리를 대담하고 정교하 치밀한 이미지와 정열과 냉철한 논리와 해박한 지식의 통일을 이룩한 작품이다. 형이상시의 신기원을 이루었으며 20~21세기 현대시인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T.S Eliot이 쓴 <형이상파 시인들;The Meta-physical Poets>란 에세이에서 보면 그는 형이상학파의 시풍은 어떠한 체험도 소화하고 삼킬 수 있는 감수성의 메카니즘(mechanism)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감성과 지성이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그 둘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능력으로 보고 형이상학 시풍을 통일된 감수성이라고 보고 있다. 17세기 전반에 걸쳐 최고조를 이루었던 영문학상의 가장 중요하고 폭넓은 문학의 하나인 형이상학파시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재조명되고 부활하여 21세기에는 더욱 그 찬란한 문학성을 인정받게 된 것은 그만큼 형이상시가 완벽한 시의 기법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형이상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형이상시의 차별화된 특징을 열거해보자면 컨시트나 패러독스나 통징痛懲의 기법을 활용해서 쓰는 시를 형이상시라 명명했고 컨시트 또는 기지의 콘시트(witty conceit)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해보자면 conceit(奇想)는 외견상 상이하고 이질적인 관념이나 물상物像 또는 상황 사이에서 내밀하고 정교한 유사관계를 추출하여 무리한 폭력적 방법으로 통합시켜 상관성과 관련성을 도출해내 새로운 시적 감동과 흥미를 유발시키는 비유적 표현을 컨시트라고 한다. 컨시트에는 페트라르카적인 컨시트(petrarchan conceit)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적 컨시트(metaphysical conceit)가 있다. 페트라르카적인 컨시트는 모순어법(oxymoron)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와이어트의 /I find no peace; and all my war is done;/ I fear and hope; I burn freeze in ice. / (전쟁은 끝났는데, 나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네; 두려워하면서도 희망에 부풀고, 불타면서도 얼어붙어 있다네,)를 들 수 있다. 형이상학적 컨시트는 존슨의 <카울리의 생애>나 존 던의 <성자명부>나 또 크레쇼의 <성 막달라 마리아>등등의 17세기 형이상학 시인들의 시에 활용되었고 1920년대 형이상시의 대대적인 부흥으로 많은 시인들이 형이상학적인 컨시트를 사용했다. 그 예로 T.S 엘리엇은 <프르프륵의 연가>에서 ‘저녁’을 ‘테이블 위에 마취되어 누어있는 환자’로 비유했고 그 외에도 토마스나 포터 등등 많은 시인들이 형이상학적 컨시트를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컨시트를 요약하자면 상이하고 부조화하며 이질적인 관념이나 사물들에서 그 내면에 존재하는 상사점과 유사성을 추출하여 억지로 또는 폭력적으로 결합시켜 조화를 이끌어내는 시의 비유적 표현법이라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새롭고 기지에 찬 시적효과를 나타내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형이상학 시는 기지(witty)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음은 통징痛懲에 대해 얘기해보면 통징이란 넓은 의미에서 컨시트나 패러독스(paradox), 아이러니(irony), 알레고리(allegory)와 같이 시에 있어서 비유의 언어(figrative language)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고 통징은 알레고리(풍유)와 유사성을 띄고 있다. 은유의 일종인 풍유(諷諭)와 통징의 특징은 리처즈(I.A Richards)가 도입한 용어인 원관념(tenor)과 보조관념(vehicle)이 통징 속에 공유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탕자의 비유’(눅;15장, 11절~32절)와 ‘나사로와 부자의 얘기’(눅;16장, 19절~31절)의 비유처럼 원관념인 천국의 얘길 하기위해서 그와 대비되는 지옥의 얘길 도입하고 회개와 구원에 대한 원관념을 드러내기 위해서 보조관념인 탕자의 얘기를 끌어들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풍유와 통징은 유사한 비유인 것은 사실이며 알레고리는 풍자적 경고에 목적이 있고 통징은 아픔을 통해서 악으로부터 선에 이르게 하거나 구원에 이르게 하고 부조리로부터 개선을 유도하는 데에 그 의미나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통징은 어떤 의미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적인 유사성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종교적 의미가 다분함을 알 수 있다. 최규철 시인은 형이상학파 시운동은 존던(John Donne), 앤드류 마블(Andrew Marvell), 핸리 본(Henry Vaughan)등과 같이 주로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위에서 모더니즘은 이분법적 개념인 광명과 흑암,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신과 인간,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 등의 양극적인 대립개념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그 중에서 상위계열에 속한 것만 취하고 하위계열에 속한 것을 버린다고 얘기했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나타난 형식의 틀과 이미지와 이미지의 조형으로 인한 응축된 형태를 해체시킴으로써 풀어쓰기 시, 대화 시, 이야기 시, 소설시 등과 같은 산문시로 전향되었다고 했었다. 실제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미래파 시인들이 써서 발표한 시편들을 보면 형식은 그럴듯한 산문을 성립시키고 있으나 그 산문 속에 시를 성립시키는 요소는 발견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시의 해체가 존재양식까지 해체시켜버렸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얘길 위에서도 했는데 이런 모던이즘이나 포스트모던이즘의 단점이나 폐단을 제거하거나 개선한 시의 이상적 형태가 형이상시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환언하면 모던이즘이 대립개념 중의 상위개념만을 활용했던 병폐와 포스트모던이즘의 시적 해체에 의한 산문화의 폐단을 제거하고 보완하여 시적 완벽성을 추구하거나 이상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시형이 ‘형이상시’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의 한국시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고 나가서 오늘이란 시대적 요건에 부합하는 시가 형이상시이다, 라고 주장하고 싶다. 형이상시에 대해 다시 한번 서술하자면 기존의 시가 지닌 미비점과 결점을 보완하여 시적 완결성을 추구하고 이상적인 시에 접근할 수 있는 시의 모델이 콘시트나 패러독스나 통징痛懲의 기법을 활용해 쓰는 형이상시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시대사전>에 등제된 필자의 시에 대한 해설에서 ‘시는 삶과 무관치 않다는 소신으로 시작詩作에 임했고 삶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천착穿鑿으로 詩作에 임했다. 크리스천으로서 창조자의 창조의지와 구원의 명제를 두고 자기성찰 내지는 자기완성을 위한 참회와 간구의 언어작업이라 자위해 왔다. 詩作에 임할 때 언어적 유희나 지나친 형식주의를 경계해 왔으며 주지주의적인 시 추상과 관념과 철학적인 소재를 즐겨 선택하되 농밀한 상징성과 이미지를 부여 중심 테마를 살리고자 노력했다.’고 했듯이 이는 형이상시가 추구하는 속성과 많은 일치점을 이루고 있다. 또한 필자가 형이상시에 매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든 필자는 ‘형이상시’에 남다른 호감을 가졌고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추상적 또는 관념적 철학의 소재를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물상物像들을 통해서 시적으로 변용變容시키려 하고 있으며 우리가 추구할 미래지향적인 시형은 형이상시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한국의 근현대시에서도 본인은 만해 한용운 시인과 다형 김현승 목과木瓜 구상시인 등의 시를 접하며 형이상시의 매력에 깊이 매료되었다.
23)한용운(1879.8.29~1944.5.9)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호는 만해. 충남 홍성 출생. 설악산 오세암과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공부 승려가 됨.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시집 <님의 침묵>을 1925에 상재. 그 외에도 다수 있음.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풍을 많이 닮았음. 심오한 철학성이 강한 형이상시를 썼음.
최규철 시인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형이상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기 시작한 것은 우리 문단에 가장 비중 있는 시인이며 평론가인 문덕수 교수를 비롯해서 성찬경 박진환 신규호 김지향 홍문표 교수 등 중량급에 속한 시인들이 앞으로의 한국시의 진로가 형이상시에 있음을 앞 다투어 피력하고 이 분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4)김현승(1913.4.4~1975.4.11)시인 호는 다형茶兄 목사의 아들로 광주에서 출생. 평양숭실전문대 졸. 시<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이란 시를 교지에 발표했는데 양주동 시인이 동아일보 문에란에 추천해 문단에 등단했음. 숭실대 문리대 학장 역임. 크리스찬 문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서울시문화상 수상했음. 그의 시는 고독이 주제였으며 절망을 전제한 고독이 아닌 키엘케고르처럼 신에게 구원을 요청한 고독을 노래했다. 박봉우, 박성룡, 윤삼하, 이성룡 등 30여명의 후진을 양성했음.
25)구상(1919.9.28~ 사망 )시인 평론가 희곡도 썼음. 본명은 상준 서울 출생 함남 원산에서 성장. 니혼대학 종교과 졸업. 반동작가로 몰려 월남했음. 연합신문 문화부장 등 역임, 이 때 발표한 시<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를 발표 문단에 등단했음. 청구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강사와 많은 대학에 출강. 시집으론 <까마귀><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외 다수 있음. 그의 시는 그가 말한 ‘나는 시의 주제가 전인적인 생명과 인격 속에서 발생될 것을 바란다....‘ 라 말했으며 카도릭교인으로 관념과 철학성이 있는 형이상시를 썼음. 26)문덕수 (1928.12.8~ )시인. 문학평론가. 경남 함안 출생. 홍익대 졸.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 박사 이수(문학박사). 침묵, 화석,바람 속에서의 시로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시인 등단. 홍대 사범대학장, 교육대학원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장, 한국현대시인협회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시상경력으로는 현대문학상, 현대시인상, 펜 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서울시문화상, 춘강상, 등. 시풍은 모던니즘 계열에 속하나서구으ㅣ 편향적 회화성을 통한 이미지와 조형성에 선과 공간 같은 내면성에 기하학적 의도까지를 이미지화함으로 모더니즘이 지향하던 사물시의 한계를 극복하고 형이상시의 영역까지 확대했다. 예술원 회원이기도 함.
27)성찬경(1930. 3.21)시인 영문학자. 충남 예산 출생. 서울문리대 영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성균관 대 영문학과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미열, 궁宮, 프리즘의 시로 문학에술에 등단. 영국의 현대 낭만주의 시인 <D. M> 토마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언어의 비약적인 연결과 특이한 이미지로 크게 주목을 받았음.
28)김지향(1938.9.17) 시인. 경남 양산 출생. 홍익대학교 및 단국대학교 대학원 졸. 서울 여자대학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1956년 시집 <병실> 상재하여 등단. 국제 펜 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 협회 이사. 한양여자전문대학 교수 등등. 수상으론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시집오론 <병실> <막간풍경> ,<사육제> 외 다수가 있음. 시의 작풍은 시각적 이미지의 환상적 결합에 의한 언어의 명징서이며, 시적 에스프리가 독특한 지적구조를 통하여 심도 있는 내면세계를 형상화했음.
29)홍문표(70세) 시인, 평론가. 1977년 시문학지로 등단. 시집은 <나비야 청산 가자>외 3권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 <상생의 문학과 구원의 문학> 외 2권이 있음. 오산대학 총장임. 제 3회 심연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무닝협회 부이사장 역임.
”라고 지적했듯이 앞으로 우리 한국시의 힘찬 부활을 통해 다시 독자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형이상시를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고 형이상시를 통해서 우리 시가 부활의 홰를 크게 치도록 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싶다. 오늘날처럼 물질문명과 신자유주의 사회의 수많은 병폐와 시행착오 속에 함몰된 채 허우대는 현대인들에게는 철학적 관념적 또는 종교적 깊은 고찰과 사색 이 절실히 필요하고 그런 추상의 관념세계와 우리들이 당면한 현실세계가 시 정신 속에서 융화되고 조화를 이루어 현재는 물론 미래의 좌표설정에 도움이 되어질 수 있기를 고대한다. 오늘날 물질일변도에 의해 잘 못 된 시류의 폐단과 편향성을 시정하거나 제거하고 정신과 물질이 균형을 유지하게 해주는 제격의 시가 형이상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은 ‘형이상시학과 현대시’라는 주제로 문학 강연회 특강에서 “형이상시는 관념 쪽에선 19세기 시를, 사물 쪽에선 20세기 시를 극복하고 두 시의 자양적인 요소를 결합시켜 담아낸 제3 유형의 시”라고 했으며 “형이상시는 21세기 시의 새 지평으로 제시할 만하다”고 말했다. 우리 시인 모두가 시의 침체와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오늘의 시세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새 활로를 엶은 물론 발전적인 시의 세계로 이끌어 가기위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다가올 미래를 온전히 준비하고 대비하기위해서는 형이상시가 그 막중한 임무와 역할을 해주었으면 마음이 간절하다. 다시 말하지만 형이상시가 오늘의 시대정신에 잘 부합됨은 물론 격변하는 시대적 추이에 부응하는 안성맞춤의 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서 형이상시 한편을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다형茶兄 김현승 시인의 <눈물>이란 시이다.
눈물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시인에 대해 위 주석에서도 밝힌 바 있는데 다형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미션 학교인 평양숭실전문대를 나왔고 그의 시의 주제는 고독이었다. 고독의 개념자체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듯이 위 <눈물>이란 시어도 현상적인 사물이면서도 그 의미 해석에서는 다분히 추상성과 관념성이 강한 어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형은 고독을 노래하되 절망을 전제한 고독이 아닌 절대자를 향한 강한 천착에서 울어 나온 고독이라 볼 수 있다. 일연의 시는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눈물을 현상적으로 볼 때는 눈에서 흘러나온 물기에 불과하지만 다형은 관념과 추상성을 가미하여 작은 생명이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독자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자연스런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는 위에서 누누이 강조한 Conceit(기상)에 의해 현상적 눈물과 관념적 생명이란 두 의미를 무리 없이 통합시키고 일치성을 이루는데 성공했으며 의미의 확대에 이른 시연인 것이다. 2연의 /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우리가 눈물을 화학적으로 분석하면 수분과 염분과 소량의 무기물질로 이루어진 수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관념과 추상성을 투입해 이미지화하여 시인이 지닌 것 중에서 최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 눈물이라 시화했으며 눈물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몰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3연은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이연의 특이한 점은 현상적 눈물과 절대자라는 이질적이고 상이한 두 대상을 컨시트에 의해 무리하게 통합시켰음에도 시인의 절대자에 대한 최대의 외경심과 봉헌의 의지를 잘 표출했고 또한 독자들에게도 무리 없이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4연은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사연의 시도 꽃과 열매를 대비시켜 꽃이 피는 것은 즐거움이고 환희이며 꽃이 지는 것은 분명 슬픔이고 애탄이지만 그 자리에 다시 열매를 맺게 하는 점을 시화함으로 절대자에 대한 외경과 전능성에 대해 극점까지 끌어올린 시연이며 현상과 추상의 세계를 잘 통합하고 상징화한 훌륭한 시연이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의 연인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이 눈물이란 시는 다형이 어린 아이와 사별하면서 시작詩作했다고 풍문에 들은 바가 있어 사실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웃음을 주신 후에 눈물도 주었다는 시구는 그의 절대자에 대한 신뢰를 순전純全하게 표현해주는 연이기도 하고 이 <눈물>이란 시는 죽음마저도 초월한 절대자에 대한 커다란 신뢰와 그의 절대고독의 세계를 엿보게 한다. 필자가 다형의 이 <눈물>이란 시를 형이상시의 예시로 도입한 배경은 이 시에서 보다시피 직관적이고 현상적인 세계와 소멸과 영원성의 세계를 형이상시의 컨시트와 알레고리(풍유) 등의 기법을 도입해 사물과 관념이란 이원화의 세계를 잘 통합 조화시켜 관념의 육화肉化에 성공해 시의 맛과 깊이를 더한 시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김남조 원로 여류시인의 말처럼 무릇 좋은 시란 영혼성이 깃들어 있는 시, 예언적인 시라고 했고 시의 하늘은 종국에는 그런 데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듯이 미래파 시인들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저들을 향해 공격성의 발언이나 힐난만을 퍼붓지 말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 바람직한 동행의 묘를 살려야 할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 시인들 모두가 불안한 오늘의 사회를 위해 견인차적인 역할을 그 얼마라도 당연히 담당해야 하고 시대를 앞선 생존전략과 실존적 철학을 시작품을 통해서 모색하고 탐색探索해내는 임무를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또한 한국시의 부활을 탐색하는 한 방법으로 독자와 밀접한 상호교감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되기에 그 방법 중의 하나에 대해 마지막으로 필자의 소견을 소개해 보겠다.
독자와 교감의 통로
오늘날 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시와 독자 사이에 교감交感과 친화親和의 통로나 채널이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물질 만능주의와 권력이나 명예욕에 대한 강한 집착과 현대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그 외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소홀하거나 관심을 멀리하는 삶의 태도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이유야 어떻든 문학이나 특히 시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소원해 있음이 사실이다. 일년 내내 한권의 채도 읽지 않은 국민들이 많다는 얘기가 자주 오르내리는 실정이고 보면 시에 대한 얘기는 더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감성이나 정서 또는 예술 지향성에 관한한 일반적 세태의 흐름은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냉담할 뿐이다. 나가서 문학 전반이나 시에 관한 친화적 교감에는 너무 소홀한 경향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시인이나 시도 세상과 유리된 고답적이고 유아독존적인 사고나 인식을 탈피하는 것만이 독자들로부터 멀어진 채 소외되고 침체일로에 빠진 시를 부활시키고 회생시키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시가 처한 현실적 당면 과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시인들의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급박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적극적인 자기 P.R이 요구되고 우리의 시도 이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다. 이러한 힘겨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시인들은 독자와 거리를 좁히고 교감하며 친화력을 돈독히 쌓기 위해서는 독자 속으로 접근해가고 밀착해가는 방법만이 시의 위기에서 다시 활기를 찾고 융성의 길로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들이 시화전이나 시 낭송회나 문학 세미나를 자주 개최하되 문인들만의 잔치가 아닌 많은 독자층을 의도적으로 참여케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뿐만이 아니고 프랑스의 지하철 역사에는 많은 시들이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급변하는 시대의 추이는 오프라인뿐만이 아니고 인터넷의 온라인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동안 본인의 시들을 권위 있는 문학 웹 싸이트와 인터넷의 카페나 블로그 등의 발표 란에 시를 게재해 왔는데 그 결과 좋은 호응이 있었다. 그런 호응을 이끌어 낸 데는 많은 열의와 내 나름의 냉정한 평가를 통해 시다운 시를 게재하려 노력했고 ‘시작노트’를 통해서 독자와의 소통의 통로를 마련했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시와 밀접한 이미지나 화면을 삽입하여 시각적 효과와 흥미를 유도했으며 시와 연계되는 수상隨想이나 촌평寸評의 글을 포함시킴으로 독자들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야기해온 시의 난해성을 상당부분 해소하고 제거함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촉발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독자들로 하여금 부담 없이 시에 접근하고 감상하며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황석영 소설가와 문학평론가인 도정일 두 문인들이 출판사와 연계해 문화 웹진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 포털사이트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소설 ‘개밥바라기별’을 연재했던 황작가는 연합뉴스를 통해 “종이신문이나 잡지에서 인터넷으로 매체가 옮겨가는 것을 보면서 인터넷을 통한 연대, 일종의 온라인 문화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왔다”며 “문단의 대응이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나서서 책과 인터넷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는 필자도 원하는 바이고 뒤늦은 감이 있지만 앞으로 한국시의 부흥도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긴밀한 협조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할 때라고 굳게 믿는다. 경제 불황의 여파 때문이기도 하지만 출판된 시집의 판매부수가 만권 내외에 머무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인터넷에 게재한 필자의 시를 찾는 시인이나 문인이나 독자들이 하루에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을 경우 천 명에 육박한다는 것은 본인의 차별화된 의도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멀어지는 독자들만을 탓할 것이 아니고 시의 발전이나 융성을 위해서는 시인자신들이 독자를 아끼고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시와 독자와의 친밀한 교감의 장을 열기 위해서는 시인들이 고답적이고 유아독존적인 사고나 의식을 전환하여 부담 없이 독자들이 가까이 다가올 수 있도록 접근의 통로를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는 얘길 한번 더 강조하고 싶다.
졸고를 마무리 하면서
시는 인간정신의 소산이자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운동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시의 위기는 곧 정신의 위기라 볼 수 있다. ‘T.S. 엘리엇은 1914-1919년 일차 대전직후 1920년에 낸 첫 평론집 <성스러운 숲; The Sacred Book>에서 시의 본체론적인 자족론과 유기체론을 주장하고 시는 시 자체로서 생명을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하고 시는 다른 것의 도구나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개체이다.’ 고 했다. 현대인들은 인간 스스로가 쌓아올린 과학, 기술, 지식, 정보와 물질만능의 자본주의가 파생시킨 허다한 병폐의 아찔한 탑 위에서 바벨탑처럼 문어지고 말지 않을까 하는 의구와 공포심에 떨고 있는 처지이다. 우리가 꿈꾸는 에덴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위기의식은 시의 위기이기도 하다. 시는 인간들의 의식에서 나오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거론한 바와 같이 시는 오늘의 고달픈 생존과 영혼의 위기에 위로와 안락을 제공하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동시에 제공해야 하는 중차대한 소임을 마땅히 감당하고 풀어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이상시를 통해서 추상과 관념적인 철학의 문제들과 현상적 사물들의 상이하고 이질적인 문제들을 아이러니, 컨시트, 패러덕스, 풍자 등을 폭력적으로 통합하고 일체화할 수 있는 형이상시를 통해 해결 했으면 한다. 또한 형이상시의 창작 방법론이 시적 예술성을 구축하는 데 바람직한 모델이고 고정관념에 갇힌 언어를 다른 새로운 세계로 확장해 나갈 수 있으며 감성과 지성이 분리된 상태가 아닌 그 둘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통일된 감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시가 형이상시라 말할 수 있다. 형이상시에는 종전의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풀지 못하고 뛰어넘지 못한 시의 난제들을 해결할 힘과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래파를 지향하는 시인들은 물론 오늘의 많은 시인들에게 당면한 난제들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이 논고를 끝맺음하면서 형이상시가 현재는 물론 우리시의 미래를 향한 이상적 시의 원형이 되고 살아 움직이는 운동력과 생명이 있는 시로 지위를 확보해가며 우리시의 부활의 좌표를 설정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길 기대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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