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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답사 계획
일시 : 2014년 5월 16일(금)
장소 : 합천 일원
반월당(08:00출발) - (88.0km.2시간) - 영암사지(10:00 도착. 관람 50분.10:50 출발) - (11.3km.22분) - 합천댐물문화관(11:12 도착. 관람 50분. 12:02 출발) -(2.7km.6분) - 점심(합천호회양관광단지12:08 도착. 점심 1시간. 1:08 출발) - (3.3km. 8분) - 합천임란창의기념관(1:16 도착. 관람 50분. 2:06 출발) - (5.1km. 8분) - 합천영상테마파크(2:14 도착. 관람 1시간.3:14 출발) -(11.0km.12분) - 신라충신죽죽비.함벽루. 연호사(3:26도착. 관람 1시간. 4:26출발) - (14.7km.26분) - 전두환대통령생가(4:52 도착. 관람 20분. 5:12분 출발) - (9.8km. 18분) - 합천박물관(5:30 도착. 관람 40분. 6:10 출발) - (55.3km. 1시간) - 반월당(7:10 도착)
합천 영암사지(陜川 靈岩寺址.사적 제131호. 경남 합천군)
황매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이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선사가 이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도 ‘영암사’라는 절의 이름이 보이는데, 홍각선사비가 886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영암사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발굴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 불상을 모셨던 금당· 서금당· 회랑터· 기타 건물터가 확인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고, 금당은 3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삼층석탑·귀부·당시의 건물 받침돌·각종 기와조각 들이 남아있다. 특히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경의 것으로, 절의 창건연대를 살피는데 중요하다. 영암사의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금당지 연석에 얼굴모양이 조각되었고 후면을 제외한 3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한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절터 내에 흩어져있는 석조물은 이색적인 느낌마저 준다. 조형의 특이함과 입지 조건, 서남쪽 건물의 구획 안에서 많은 재가 나오는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 성행한 밀교의 수법으로 세워진 절로 보인다.(출처:문화재청)
바른층쌓기에 쐐기형 돌을 못처럼 박아넣어 석축을 단단히 고정하는 기법은 경주 감은사지(681), 불국사(751~774), 월정교·일정교(760)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뤄진 기법이다.
무지개형 계단(계단을 직접 올라가 보면 계단의 깊이는 발 3분의 1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아찔하다)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 (陜川 靈岩寺址 雙獅子 石燈.보물 제353호.경남 합천군)
영암사터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다. 이 석등은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모양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었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었다. 사천왕은 불교의 법을 지키는 신으로 당시 호국사상의 목적아래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조각이 솟아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과 견줄 수 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출처:문화재청)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 (陜川 靈岩寺址 三層石塔.보물 제480호.경남 합천군)
영암사터는 황매산(黃梅山)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절의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014년에 적연선사(寂然禪師)가 이 곳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절터에는 석탑을 비롯하여 쌍사자석등, 귀부 등 각종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이 탑은 탑신부가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 금당 앞에 새로 세운 두 채의 건물사이에 서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석탑으로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편이며 2·3층은 크게 줄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씩이고, 처마 밑이 수평이며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탑의 머리장식부분은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지붕돌의 윗면에 쇠막대를 끼우던 구멍이 있다.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전체의 균형을 잃지 않았으며 각 부재의 짜임새 또한 간결하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고 있으나, 기둥 표현이 섬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출처:문화재청)
합천 영암사지 귀부(陜川 靈岩寺址 龜趺. 보물 제489호.경남 합천군)
이 귀부(龜趺) 2기는 영암사터 내의 법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남아 있다. 영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어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절터 안에는 법당터를 비롯한 여러 건물의 기단(基壇)이 남아 있어 당시의 거대했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귀부는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의 받침돌로, 원래는 그 위로 비몸돌과 비머릿돌이 얹혀져 있었을 것이나, 양쪽 모두 지금은 귀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동쪽 귀부는 거북의 등무늬가 6각형이고, 비몸돌을 괴는 네모난 비좌(碑座)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서쪽 귀부도 6각형의 등무늬를 배열하였고,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는 4면에 안상(眼象)을, 가장자리에는 연꽃잎을 새겼다. 서귀부는 동귀부보다 얇고 약간 작지만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특히 동쪽의 귀부에서는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다.
이 귀부 2기는 각 부 양식이나 주위의 석조유물 등과 관련지어 볼 때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출처: 문화재청)
합천댐(물 문회관)
창의사(彰義祠.합천군 대병면 합천호수로 258-1)
창의사는 임진왜란 때의 합천 지역 의병사를 재조명하고,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을 격퇴했던 의병장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을 비롯한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곳으로서 합천군이 사업비 61억 원을 투여해 건립, 2001년 5월 10일 개관하였다.
부지면적은 34,048㎡로,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합천호(陜川湖) 옆의 산비탈을 4단의 층으로 정지하여 터를 마련했다. 사당(창의사)·유물관·강당(경의당)·기념탑·외삼문·내삼문·사주문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입구에서부터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한 사당까지 둘러보려면 모두 4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첫 번째 계단을 오르면 전면에 ‘陜川壬亂倡義記念(합천임란창의기념탑)’이라고 적혀 있는 기념탑이 우뚝 서 있고, 기념탑 하단 세 모서리에는 죽창·괭이·삽·쇠스랑 등을 든 농민의병 조각상이 조성되어 있다. 기념탑 뒤의 두 번째 계단을 올라 숭인문(崇仁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외삼문을 통과하면 왼편으로 사적비 1기와 사주문(천례문)이, 오른편으로 연못과 또 하나의 사주문(양지문)이 있다. 세 번째 계단을 오르면 유물관과 교육공간으로 쓰이는 강당 건물인 경의당이 나온다. 유물관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투쟁사와 합천의병사에 관련된 갖가지 해설판이 설치되어 있고, 임란 당시의 유물 30여 점도 전시되어 있다. 네 번째 계단을 올라 충의문(忠義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내삼문을 통과하면 의병장 정인홍과 의병 113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 창의사(彰義祠)가 있다. 창의사 앞으로는 악견산(嶽堅山, 높이 491m)과 합천호의 풍경이 펼쳐진다.(출처:합천군청)
陜川壬亂倡義記念(합천임란창의기념탑)
의병장 정인홍과 의병 113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 창의사(彰義祠)
창의사 앞으로는 악견산(嶽堅山, 높이 491m)과 합천호의 풍경이 펼쳐진다.
합천영상테마파크
2004년도에 건립한 합천영상테마파크는 1920년대에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국내 최고의 특화된 시대물 오픈세트장으로 드라마 <각시탈>, <빛과 그림자>, <서울1945>, <에덴의 동쪽>, <경성스캔들>, 영화<써니>, <태극기휘날리며>, 뮤직비디오 등 67편의 영화, 드라마가 촬영된 전국 최고의 촬영세트장입니다
함벽루(涵碧樓.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경남 합천군 합천읍 죽죽길 80)
합천 8경중 제5경인 함벽루는 고려 충숙왕 8년(서기 1321년)에 합주 지군 김모(金某)가 창건하였으며, 수차에 걸쳐 중건하였다. 대야성 기슭에 위치하여 황강 정양호를 바라볼 수 있게 지어져 오래 전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장소로,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우암 송시열 등의 글이 누각 내부 현판으로 걸려 있고, 뒤 암벽에 각자한 "함벽루"는 송시열의 글씨이다. 함벽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 5량구조, 팔작지붕 목조와 가로 누각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는 배치로 더욱 유명하다(출처:합천군청)
오래 전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장소로,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우암 송시열 등의 글이 누각 내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암벽에 각자한 "함벽루"는 송시열의 글씨이다
喪非南郭子(상비남곽자)
남곽자 처럼 무아지경에 이르진 못해도
江水渺無知(강수묘무지)
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 없구나
欲學浮雲事(욕학부운사)
뜬구름의 일을 배우고자 하나
高風猶破之(고풍유파지)
오히려 높다란 바람이 흩어 버리네
합천 남쪽 황강가에 있는 함벽루에서 읊은 시인데 마음을 비우는 공부에 대해서 읊고 있다.
* 남곽자 : 노자에 나오는 세상의 이치를 체득한 사람
함벽루 걸린 남명 조식선생의 시
합천군수이증영유허비(陜川郡守李增榮遺墟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67호)
이 비는 합천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 이증영(?∼1563)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은 조선 명종 14년(1559)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을 지은 이는 남명 조식(1501∼1572)이고, 글씨는 고산 황기로(1521∼1567)가 썼다. 가로 87cm, 세로 202cm, 폭 17cm 의 형식을 지녔으며 비문은 전체 13행, 각 행 평균 25자로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1554년에서 1558년까지 합천군수를 지냈던 이증영이 1554년의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구휼하고, 청렴하게 관직생활을 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의 주인공 이증영은 황기로와 함께 조선 중종 29년(153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명종이 대군으로 있을 당시 그의 사부였으며, 명종이 즉위한 뒤 벼슬길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친 뒤 합천군수를 지내게 되었다. 그 뒤 1563년 청주목사 재직 중에 죽었다.
고산 황기로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이라 불렸다. 그의 글씨 가운데 초서는 여러 점 있지만, 해서의 경우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 완성된 작품으로는 이 비석이 유일하다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글을 지은 남명 조식은 경의사상(敬義思想)에 입각해 살았던 사람이므로, 비문의 내용 또한 신빙할 만하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높다.(출처:문화재청)
합천 대야성(陜川大耶城.시도기념물 제133호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산2)
경상남도 합천군 해발 90m의 매봉산 정상울 둘러 쌓은 대야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이 곳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 서부지방의 접경지대로, 신라 진흥왕 25년(565)에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진덕여왕 11년(642) 백제 윤충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신라 대야성 도독 김품석과 부인(김춘추의 딸)이 죽자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 결심을 한 곳이다. 또한, 경명왕 4년(920)에는 후백제 견훤에게 함락되기도 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300m 정도인데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건물터와 적을 막기 위해 세운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있다. (출처:문화재청)
신라 충신 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209)
신라 선덕여왕 때에 활동했던 충신 죽죽(?∼642)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죽죽은 대야주(지금의 합천) 사람으로, 선덕여왕 11년(642) 대야성이 백제군에 함락될 때 대나무와 같은 절개로 끝까지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다 전사 하였다. 그 후 선덕여왕은 그의 용맹성과 나라를 위한 충절을 기리고자 급찬으로 벼슬을 높여 주었다.
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단순한 형태로 ‘신라충신 죽죽지비(新羅忠臣 竹竹之碑)’라는 현판이 걸린 비각 안에 서 있다.
조선 중종 20년(1525) 군수 조희인이 죽죽의 충절을 기리고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비를 세웠으며, 한사 강대수가 비문을 지었다(출처:문화재청)
신라 충신 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 옆의 삼일운동기념비
합천 대야성(陜川大耶城)
사진 출처: 문화재청
합천 대야성(陜川大耶城.시도기념물 제133호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산2)
경상남도 합천군 해발 90m의 매봉산 정상울 둘러 쌓은 대야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이 곳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 서부지방의 접경지대로, 신라 진흥왕 25년(565)에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진덕여왕 11년(642) 백제 윤충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신라 대야성 도독 김품석과 부인(김춘추의 딸)이 죽자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 결심을 한 곳이다. 또한, 경명왕 4년(920)에는 후백제 견훤에게 함락되기도 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300m 정도인데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건물터와 적을 막기 위해 세운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있다. (출처: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전두환 대통령 생가(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263번지)
대문채
안채
부엌
장독대
안채에서 본 풍경
전두환 대통령 생가 앞 골목
합천박물관은 합천의 전통문화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2차 가야문화권 정비 계획에 따라 1998년 건립 계획을 수립하여 2004년 10월 완공하고, 같은 해 12월 9일 개관하였다. 전시 유물의 내용은 가야시대 다라국의 지배자 묘역으로 알려진 옥전고분군의 유물을 상시 전시하고 있으며 신석기, 청동기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합천의 유구한 역사를 알리는 자료를 기획 전시한다.
다라국의 성립
서기 400년 전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이 불러 일으킨 부산, 김해지역의 격심한 정치, 사회적인 충격의 여파로 이 지역 주민의 일부가 합천 옥전으로 옮겨왔다. 고분의 규모뿐만 아니라 갑옷과 투구를 비롯한 무기, 말갖춤, 장신구 등 부장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이 시기가 "다라국"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장과 발전
후기가야를 대표하는 대가야연맹체의 일원이었던 다라국은 <일본서기>에 전하는 바와 같이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임나부흥회의에 참석하는 등 당당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가야제국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것은 옥전고분군에서 나온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각종 철제품과 옥.유리제품들에서 증명되고 있다.
대외교류
다라국은 옥전고분군 출토 유물이 다양한 지역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웃한 가야제국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또 바다 건너 중국 남조, 왜와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그들이 제작한 철제품이나 각종 옥제품으로 타지역과 교역하여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합천박물관)
전시된 사진들
원통모양의 그릇받침과 항아리
고분의 내부 모형
굽다리두귀달린항아리
옥전고분군에서는 고리자루큰칼 등 각종 무기, 갑옷과 투구를 비롯하여 말갖춤과 다양한 철제품들이 발견되었었을 뿐만 아니라 망치와 집게 등의 단야구(鍛冶具)가 출토되어 이러한 철기를 직접 이곳에서 생산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구슬과 옥
투구
청동그릇
투구
너무나 화려하고 이국적인 아라비아 계통의 로만글래스
삼국시대에 유리는 팔찌와 목걸이용의 장신구, 그리고 의식기(儀式器)나 사리장치로도 사용되었다. 유리잔은 주로 신라의 대형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경주 금관총에서는 2점의 유리잔이, 금령총에서는 2점의 유리주발이, 서봉총에서는 암청색의 반투명 기포유리로 된 유리주발과 유리제 팔찌가 발견되었다. 또한 천마총에서도 유리잔과 유리그릇이, 황남대총에서는 무려 10점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리는 지중해 유역에서 제작된 로만글라스로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천 옥전 M1호분에서 출토된 유리잔은 경주의 신라고분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것으로 신라와 옥전고분군 축조집단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옥전고분군(사적 326호)
옥전고분군은 황강변 야산의 정상부에 위치하여 고총고분 27기를 포함하여 고분의 총수는 약 1,000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 유적은 1985년 겨울부터 1992년 봄까지 5차에 걸쳐 경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고분은 모두 146기인데, 유물은 토기를 비롯하여 철제의 갑옷과 투구, 각종 무기, 말갖춤, 귀걸이 등 무려 2,5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 옥전고분군의 주인공은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전하는 다라국의 지배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고분 연구를 통해 다라국 또는 가야사 전반에 대한 재구성이 어느 정도 가능하며, 출토 자료의 대부분이 일본의 중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과 유사하여 향후 한일고분문화의 비교 연구와 이를 토대로 한 한일고대사의 재정립에 결정적인 역활을 할 것이다.(합천박물관)
'양직공도(梁職貢圖) : 양나라의 무제가 백제 사신의 내왕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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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 참엔 '경남 합천 일원으로 잡았네요.. 합천에도 이렇게 좋은 유적지가 산재 되어 있었다니 저 도 Scarape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