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3·1운동 이후 만주 왕칭현[汪淸縣]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 단체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하여 군사를 양성하였고,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일본군을 피하여 러시아 영토로 이동하였으나 소련 정부의 해체명령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거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일본의 탄압으로 더 이상 성과를 얻지 못하자, 민족운동은 지하운동이나 해외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중국에서 성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이는 모든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로서 독립운동의 계획, 지원, 동원, 외교 등을 수행하였다. 그 밖에 중국 여러 곳에서 무장독립운동 단체가 구성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이다.
1919년 만주에 있던 대종교인 중심의 ‘중광단’이란 단체는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 일명 軍政會)를 조직하였다. 서일(徐一), 현천묵(玄天默), 계화(桂和), 이장녕(李章寧) 등이 중심이 되어 김좌진(金佐鎭) 장군을 초빙하여 독립군을 훈련토록 하여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1919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시로 조직명을 ‘북로군정서’로 개칭하고 군대조직으로 편성하였다.
서일을 총재로 하여, 총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여단장에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 길림분서고문 윤복영(尹復榮), 군기감독 양현(梁玄)과 같이 군대조직으로 편성하고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군정서는 만주 왕청현[汪淸縣]의 숲속에 근거지를 두고 8동의 군 막사를 짓고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였다. 교관은 신흥무관학교에 요청하여 이범석과 신흥무관학교 출신 장교인 박영희(朴寧熙), 백종렬(白鍾烈), 강화린(姜華麟) 등을 지원받고, 학생들은 주변의 주민 출신과 국내에서 들어오는 청년들을 뽑아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속성과를 주로 하여 정신교육, 군사학, 부대 지휘법 등을 가르쳤다.
군사훈련 외에도 다른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계하여 만주나 노령(러시아 영토)에 산재한 독립운동가들이나 조직의 연락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독립군 편제는 1개 소대를 50명씩으로 하고, 2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하고, 또 2개 중대를 1대대로 편성하였다. 병력규모는 초기에는 500여 명이던 것이 1920년 8월에는 1,600명이 넘었다. 부대 운영이나 무기 구입에 사용되는 자금은 관내 주민들이나 국내로부터 조달되는 모금액으로 충당하였다.
1920년 10월부터 일제가 만주에 있는 한국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정보를 중국군 연길 부대장인 맹부덕으로부터 접수하고 많은 독립군 조직들이 미리 산간 안전지대로 이동하여, 일본군이 출병했을 때는 무사하였다. 북로군정서군도 10월에 백두산 숲속으로 이동하던 중 청산리 어귀인 허룽[和龍]의 삼도구(三道溝)에 이르러 일본군 동지대 1만여명과 조우하여 접전하게 되었다. 10월 20일 ~ 23일 사이에 10여차례 교전을 하였다. 김좌진·이범석 장군의 탁월한 지휘하에 일본군을 대파하였고, 일본군의 후속 공격을 피하여 소·만 국경지대인 밀산으로 이동하여 피했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 대첩이다(1920. 10).
그 뒤 (북로)군정서 부대는 일본군을 피해온 대한독립군, 대한신민회,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등 10여개 무장독립군 조직과 연계하여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소련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여(1922) 더 이상 무장독립운동을 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