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ㆍ권상연의 탄생지와 거주지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들인 윤지충 바오로(1759~1791)와 권상연 야고버( 1751~1791)의 관련 사적지들의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이 작업이 꾸준히 행해져 왔고, 그러한 과정에서 어느 정도 윤곽 이 드러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순교로부터 200여 년이 지났고, 주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때로는 그 흔적초차 찾을 길이 없기 때문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우나 현존하는 교회, 관변측 자료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연구 성과, 기타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하여 가능한 한 그 사적지들의 실체를 규명한 차기진 박사의 글(교회와 역사, 제207호~제212호, 한국교회사연구소)을 바탕으로 정리하고 답사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탄생지와 거주지, 특히 윤지충의 탄생지에 대하여는 몇가지 다른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차기진 박사는 윤지충의 탄생지는 그의 아우 윤지헌이 진술한 전주부의 양량소 지역으로 보고, 달레가 기록한 진산군의 장구동도 결국 양량소 지역의 장구동을 진산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았다. 윤지충의 탄생지인 "이 장구동은 지금의 충남 논산군 벌곡면 도산리의 장고터[長古峙]"로 추정하고 있다.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도 이와같은 의견이다. 다만 다블뤼 주교가 그 자료를 수집할 당시에 장고터가 전주부 양량소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산과 가까웠기 때문에, 또 일반적으로 이곳을 진산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윤지충이 훗날 아버지 윤경을 따라 이주한 거주지는, 그 조상들의 묘가 있고 윤지충의 외가 인근인 충남 금산군 진산면 막현리 지역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곳은 지금의 하막현리 지역에서 매방골 일대라고 추정하고 있다. 윤지충의 이종 사촌인 권상연의 생장지가 복수면 구례리와 진산면 막현리의 경계에 있는 장고봉[長古峰, 혹은 長古峙]에서 막현리 쪽이었음을 볼 때, 윤지충의 집안은 그 이웃에 자리잡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윤지충ㆍ권상연이 치명한 이후 9일만에 즉 1791년 11월 22일 친척과 친구들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었다는 무덤은, 일단 그들의 무덤이 같은 곳이었다고 추정할 때, 윤리강상죄로 참형된 그들의 시신은 후손들이 있었던 권상연 집안의 묘역보다는 후손들의 반대가 없을 윤지충 집안의 묘역이 더 적당하였을 것이다. 즉 하막현리 일대에서 매방골에 이르는 지역에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권상연의 집안은 공주군에서 살다가 진산 막현리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장고봉으로부터 서쪽, 즉 현재의 막현리 새뜸과 하막현리 쪽이었다고 한다. 윤지충의 부친 윤경이 권기징의 딸(권상연의 고모)과 결혼하여 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종 사촌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막현리 지역은 치명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리적 삶을 영위한 곳이요, 그 순교사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 순교자
◆ 윤지충 바오로 (1759∼1791년) <하느님의 종 124위>
윤지충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은 그의 아우이다. 본래 총명한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고종 사촌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1787년 인척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이종 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자주 왕래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바오로는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즉 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듣고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조정에 보고하여 처형의 윤허를 받았다.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바오로와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권상연 야고보 (1751∼1791년) <하느님의 종 124위>
권상연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 사촌 윤지충 바오로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이후 그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고모(즉 윤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는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체포령이 내려져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각각 피신하였으나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진산 군수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 감영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야고보와 윤지충을 옥에서 끌어내 형장으로 정해진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그는 이때 초죽음이 된 상태였으면서도 이따금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형장에 이르자, 윤지충이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어 야고보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