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장항리사지 석탑
▲ 왼쪽은 <매일신보> 1932년 12월 10일자에 보도된 '경주 장항리사지 석탑' 재건 장면이다.
여기에는 '경주의 오중탑(五重塔) 8년만에 재건'이라는 제목 아래 "10월 중순 이래 경주고적보존회 본년도의 사업으로 동대공학부조교수(東大工學部助敎授) 등도관치랑(藤島寬治郞, 藤島亥治郞의 잘못)씨 지도로 공사중이던 경주 양북면 장항리의 탑정리오중석탑(塔亭里五重石塔)은 신라시대 석탑중에도 나원리오중탑 35척에 다음가는 고탑(高塔)으로 초층(初層)에는 양각(陽刻)한 금강역사(金剛力士)의 상(像)이 있는 바 지난 대정 14년(즉 1925년) 춘(春) 석탑중의 보물을 도적(盜賊)코저 파괴한 것을 개수(改收)한 것이다"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 <건축잡지> 1933년 12월호에 수록된 후지시마 가이지로의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변형삼층석탑, 오층석탑 및 특수형 석탑"에 수록된 '장항리사지의 석탑파손상태'이다. 설명문안에 보건대 대부분 1931년 9월에 촬영한 것인 듯하다. 원래 이 논문은 후지시마의 박사학위논문인 <조선건축사론 : 특히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불교건축에 대해>를 구성하는 것으로, 그 당시 <건축잡지>에 여러 차례 분할하여 연재한 내용이다.
▲ <건축잡지> 1933년 12월호에 수록된 '장항리사지 서탑 복원도'이다.
이 석탑의 수리를 감독했던 후지시마의 회고록으로는 다음의 책이 있는데, 여기에도 장항리사지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가라의 건축문화: 나의 연구 오십년(韓の 建築文化: わ硏究五十年)> (芸草堂, 1976) pp.200~205
그리고 이 책의 국내번역본은 이광로, <한의 건축문화 : 나의 연구 육십년> (기문당, 1986)이 있는데, 원저작물이 '나의 연구 50년'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나, 10년 이후에 번역본이 나왔고 또한 후지시마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존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했음인지 부제가 '나의 연구 60년'으로 살짝 변경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은 번역본의 것을 그대로 옮겼음을 밝혀둔다.)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
이 사지(寺址)는 특히 추억 깊은 곳이다. 불국사에서 남으로 산을 내려가다가 동쪽으로 돌아서 토함산과 이어진 산맥을 동산령(東山領, 511)에서 넘어, 산간을 좀 내려간 다음 좁은 산길을 남쪽으로 좀 내려간다. 불국사에서 약 6km 힘드는 산길이다. 이윽고 솔밭을 빠져나가 갑자기 내려가면, 동서로 길고 좁은 대지가 있고, 그 남쪽은 갑자기 뚝 떨어져 멀리 밑으로 계류가 흐른다. 그 저쪽은 또 가파른 산허리를 보여 주는 큰 산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침식 골짜기에 생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은 대지. 거기의 중앙에 당적(堂跡)이 있고, 동서로 5층석탑의 유적이 있다. 서탑(西塔)은 이전에는 완전히 잔존했는데, 1925년에 탑속의 사리납보(舍利納寶)를 훔치려고 폭파되어, 그 유재(遺材)는 동쪽으로 우르르 밭 가운데로 겹쳐 쓰러져 있었다. 또 동탑(東塔)은 벼랑의 붕괴로 인하여, 하층 기단의 일부를 남기고, 유재는 여기서 골짜기를 내려다 보면, 계곡에 비참하게 산란해 있다. 이것이 장항리사지이다.
1932년의 일이었다.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서탑을 재건하는 일이 결정되었을 때, 경주박물관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씨로부터, 내가 경주를 연구하러 자주 온 기념으로 재건공사 감독을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어서, 용약 현지로 간 것이 그해 10월이었다. 그로부터 11월까지 이 탑의 재건공사를 지도 감독하여 마침내 완성하였다.
공사는 잔존유물 조사부터 시작하여, 얼마 안 가서 탑의 중심을 확인하고서 기초공사에 착수했다. 우선 탑의 부지를 발굴했더니, 천석(川石)의 층과 점토의 층이 서로 겹쳐 견고하게 다져져 있었다. 이것을 어느 정도 제거하고, 그곳에 바로 기초 콘크리트를 쳐서 더욱 견고한 기초를 만들고, 이어서 2개소에 3개의 통나무를 짜서 체인블록을 장치하고, 기단에서부터 순차로 쌓아 올려간다. 기단은 하층 기단에서는 폭 15.71척, 높이 2.665척, 기단에서도 폭 10.62척, 높이 5척으로 단상으로 쌓고 있으므로,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지만 첫층 탑신의 경우는 폭 5.89척, 높이 4.91척의 입방체의 돌 하나이며, 무게는 약 1톤이나 될 것이다. 이것을, 사방의 조각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들어 올려서 고정시키는 데는 일동이 긴장했었다. 그 위의 지붕돌도 폭 9.25척이나 되는 큰 것이었다. 2층 이상은 점차로 돌도 작은 것이었으며, 5층의 지붕들도 역시 폭은 5.89척이나 되었다. 그 위에 노반(露盤)을 얹어 작업을 끝내었다. 전체 높이는 31.8척이다. 전체 높이는 36.93척의 나원리사지(羅原里寺址)의 5층석탑보다 좀 낮은, 경주군 내에서 둘째로 높은 5층탑은 다시 하늘 높이 솟게 된 것이었다.
상륜(相輪)의 부재는 탑의 주변을 발굴한 결과 상당한 수량을 얻었다. 그런 것들은 먼저 중심 쇠기둘을 세우고, 그 위에서 차례로 맞춰 넣은 것이다. 출토된 것은 복발, 꽃모양의 장식, 구륜칠종, 보주, 찰이지만, 수연(水煙, 탑의 오륜 상부에 있는 불꽃 모양의 장식)은 그 일부인 것으로 생각되는, 당초무늬를 새긴 파편 외는 찾아내기 어렵고, 또 사리 용기 안에 수장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옥석(玉石) 하나 외에, 귀와(鬼瓦, 용마루 끝을 이는 귀신 모양의 혀가 알린 큰 기와)의 파편도 계제에 출토되었다. 구륜(九輪)에는 모두 연꽃이 새겨 있고, 복발(覆鉢)에는 둥근 무늬로 이어진 띠가 있었다. 이것들은 구륜 한 종류 외는 모두 파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상륜의 복원은 보류하였다.
...... (중략) ...... 공사 기간중, 나는 공사 감독을 하는 한편 여러가지 조사를 했다. 금당지의 발굴조사는 뜻하지도 않게 성과를 얻어 기쁘게 생각한다.
...... (중략) ......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매우 기뻐한 것은 이 대좌 근처에서 석조의 광배 달린 본존상을 발굴한 것이다. 그것은 보기에도 무참히 파손하여 고의로 파묻은 것처럼 보였다. 발견한 것은 7개이며, 이것으로는 완전히 복원할 수는 없다. 그것은 4.85m 높이의 입상이다. 무참히 둘로 쪼개진 얼굴은 둘을 합하면 거의 완전하게 된다.
...... (중략) ...... 석굴암의 본존과 유사한, 시대도 같은 우수작이다. 지금 경주박물관의 앞뜰에 복원하여 놓고 있다.
이밖에 아름다운 석등의 지대석을 발굴했다. 외겹으로 된 여덟 닢의 꽃잎마다 당초무늬 모양의 조각이 있다. 금당의 전방을 비추었을 것이다.
다음에, 당(堂)과 쌍탑과의 관계를 보니, 당에서 각각의 탑까지 동서 85척, 남북 17척. 요컨대 세 건물은 거의 나란히 있다. 그 까닭은 토지의 남북이 좁아서 전방에 탑을 세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며, 자연히 일본으로 말하면, 상륙(常陸, 히따찌)의 신치(新治, 니이하리) 사지와 같은 관계가 되었다. 방위는 북쪽보다 서쪽으로 49.7도 틀어져 있다. 요컨대 절은 동남을 향하고 있다.
공사기간 중, 우리들의 숙사는 사지의 대지를 내려가서, 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간 곳에 있는 조그만 부락 가운데의 한 민가였다. 연일 맵고, 변화 없는 한국 식사를 하고서, 종일 가을 햇볕을 쬐며, 인부들의 애조띤 맞춤소리를 듣는다. 때로는 스케치를 하거나 하여 기분을 달래지만, 산중의 고독한 속의 단조로운 생활은 견딜 수가 없다. 절실히 고향 생각이 나서, 산을 내려가 감포(甘浦)의 일본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때도 있었다.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단 한 가지, 재미 있는 일이 있었다. 노루를 잡았다고 하기에 가 보았더니, 길가의 돌담 위에 뻗어 있었다. 커다란 씩씩한 노루이다. 뿔이 보기 좋게 나 있다. 한 남자가 와서, 목을 잘랏다. 검붉은 피가 콸콸 솟아 나온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그 피를 사발에 받아서 마시고 있다. 기분이 언짢았다. 그날 저녁 그 노루고기가 나왔지만, 질긴 데다가, 낮에 본 무참한 모습이 눈에 선하여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 <건축잡지> 1930년 4월호에도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연재한 "조선건축사론(기3)"이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실측도를 포함한 '장항리사지'에 관한 조사자료가 등장한다.
▲ <건축잡지> 1930년 4월호에 수록된 '장항리사지'에 관한 글 가운데 나머지 부분이다. 여기에 수록된 사진자료에는 '1928년 9월'이라는 표시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그가 나중에 이곳의 석탑복구공사을 떠맡기 이전에 여러 차례 이곳을 탐방한 사실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말하면, 현재 장항리절터는 사적 제45호 "경주장항리사지(慶州獐項里寺址)"로 지정되어 있고, 이곳에 복구된 서석탑은 국보 제236호 "월성장항리사지서오층석탑(月城獐項里寺址西五層石塔)"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파손 정도가 심한 '장항리사지동오층석탑'은 그냥 사적에만 포함되어 있을 뿐 별도로 문화재지정은 되어 있지 못한 상태이다. 불완전한 형태였을 지라도 애당초 쌍탑의 형태로 보아, 동서(東西) 두 석탑을 한꺼번에 국보로 일괄지정했어야 옳았던 건 아니었을까?
(정리 : 2005.10.12,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