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사 여행4 - 초기 수도 부르사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창시자와 역사를 회상하다!
터키 이스탄불 건너편에 아시아의 부르사 Burasa 는 오스만 투르크의 초기 수도
인데 1326년 투르크의 군주 오스만 이 부르사를 공격 하던 중에 마치
명나라의 산해관을 공격하다가 전사한 후금의 태종 누루하치 처럼 급사하지만....
그 아들인 2대 군주 오르한 베이 가 꿈을 이어 받아 1326년 도시 부르사 를 차지해서는
투르크의 수도 로 삼으니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으로 성장합니다.
300년전 셀주크 투르크족 은 이슬람으로 개종한뒤 투그룰 베이의 영도하에 아나톨리아
로 침입하는데....... 후손인 알프 아르슬란 은 비잔틴 제국 을 공격해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Manzikert) 에서 대승한 후에 셀주크 투르크는 대 제국 을 이룹니다.
아나톨리아에서 셀주크 일파가 이즈닉(니케아)을 수도로 룸 술탄국 을 세워 비잔티움제국
을 압박해 십자군 원정 까지 불러오는데 1234년 쾨세다으에서 몽골군에 패한후 속국
으로 전락하자... 지방의 셀주크족 에미르 들인 에레트나, 카라만 및 오스만 등이 자립합니다.
이 무렵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의 투르크족 부족장 에르투울 은 비잔틴 과
싸우는 동족인 셀주크 투르크족인 룸 술탄국 을 돕기 위해
기병 400명을 이끌고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로 들어오는데 1296년에 죽게됩니다.
그러자 아들인 오스만 은 카이 부족의 지도자가 되어 3년후인 1299년 부르사 동쪽 빌레직
Bilecik 을 수도로 정하고 쇠약해진 셀주크 투르크 룸 술탄국으로 부터 독립 을
선언하는데 종주국 룸 술탄국 은 국세가 이미 기운지라 9년 후인 1308년에 멸망합니다.
오스만 은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가 몽골군에 점령된 1258년에 태어났는데 투르크계 공국
카라만과 아나톨리아를 놓고 충돌하는 한편 1326년 부르사를 공략하다 죽으니 아들
오르한 은 오스만 왕국 을 선포 하고 부르사를 비잔틴으로 부터 빼앗아 새 수도로 삼습니다.
이 도시 부르사 에서 오스만투르크 2대 술탄 오르한 Orhan 은 상비군 을 창설하는데
유럽에서 최초로 상비군 을 가진 왕은 백여년 후에 백년전쟁에서 승리하는
프랑스 왕 샤를 7세 로 15개 기사 군단 6천여 명의 상비군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부르사 를 정복한 후에 오르한 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군대를 보내 마르마라 해안의
비잔틴령 도시를 공격하자 비잔틴 황제 안드로니쿠스 3세는 용병을 모아
이즈미트로 진군시키니 용병 비잔틴군은 직업군인 오스만 투르크에게 대패 를 당합니다.
오르한 은 2년후인 1331년에 니케아를 점령해 이즈닉 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며 오늘날
이즈미트라 불리는 니코메디아도 1337년에 손에 넣고는 아나톨리아로 눈을돌려
투르크계 카레지 공국 군주가 죽은후 두 아들 사이 내분을 이용해 개입해 차지합니다.
카레지 공국령 도시중에 차나칼레 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면한 곳에 자리잡아 고대부터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 손꼽히던 곳이었으니 이제 유럽으로 건너갈 교두보 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 무렵 동방 무역로를 두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가 1352년에 세번째로 전쟁을
하니 무대는 콘스탄티노플 인데도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 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니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으로 진격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1354년에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지진으로 파괴되어 버려진 유럽쪽 마을인 갈리폴리 를
복구하고 투르크인들을 이주 시키자 비잔틴 제국은 위협을 느끼는데 그가 죽은후
3대 술탄 무라드 는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의 거점인 아드리아노폴리스 를 공격합니다.
공격 1년만에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시킨후 무라드 는 도시의 이름을
에디르네 로 바꾸고는 수도 를 여기 부르사에서 유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에디르네로 옮기니..... 콘스탄티노플은 완전히 포위된 셈 입니다.
3년후 1365년 술탄 무라드는 불가리아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후 비잔틴 황제 요한네스 5세 를
봉신으로 만들고는 공물을 받았으며 세르비아등 발칸 반도의 나라들을 공격하는데
1385년에 소피아 그리고 1386년엔 니시 를 함락시키는등 발칸 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슬람 제국에서 '왕' 이나 '황제' 를 뜻하는 술탄 은 최고 권위인 칼리프 가 내리는지라
오스만 투르크는 '태수' 나 '공작' 의 의미를 가진 “베이”를 군주의 명칭으로
사용했는데 드디어 1383년 아바스 왕조 칼리프로 부터 무라드는 술탄 으로 인정 받습니다.
아나톨리아에서는 결혼이나 영토 매입 또는 무력을 동원하여 투르크계 공국들을 합병하니
카라만 후국 은 몇몇 투르크계 공국들과 연합군을 형성해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해오니 1386년의 코니아 전투 인데...... 승리를 거둔 쪽은 오스만 투르크 였습니다.
1389년 세르비아 왕 라자르가 이끄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왈라키아, 알바니아, 보스니아
연합군과 무라드가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군 이 격돌하니 코소보 전투 인데 무라드가
승리를 거두니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신하국 이 되어 1817년 까지 지배를 받습니다.
4대 술탄 바예지드 는 에디르네에서 태어나 부르사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퀴타햐의 태수를
거친 자로 술탄이 된후 스테판 라자레비치를 세르비아왕으로 임명 했으니 매년
연공 을 바치는 외에 오스만 투르크군이 전쟁을 할때 군사를 내어야한다는 조건 을 답니다.
코소보 전투 이듬해인 1390년에는 바예지드 는 손녀뻘인 라자르의 딸인
올리베라와 결혼해 세르비아와의 유대를 맺은후 왈라키아 공국 을
공격했으며 1395년에는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이어 헝가리 를 공격합니다.
1393년 바예지드 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에 아나돌루 히사리 라는 요새를 세우고
1395년부터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는데 황제 마누엘 2세는
3백여년 전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처럼 서유럽에 원군을 청하니 '십자군' 이 편성됩니다.
훗날 신성 로마제국 황제 가 되는 헝가리왕 지기스문트가 십자군 을 이끄는데 프랑스,
헝가리, 베네치아,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왈라키아, 폴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스위스, 튜튼 기사단, 제노바, 성 요한 기사단 등 12나라 가 참가합니다.
12개국 십자군 은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 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에게 무릎을 꿇으니....
바예지드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부르사에 울루 모스크 를 지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와중에도 아나톨리아에 세차례나 군대를 보내 여러 투르크계 공국들을 합병합니다.
이에 투르크계 공국들은 중앙아시아의 티무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1402년 7월 20일
앙카라 전투 가 벌어지는데 전투 도중 티무르군은 양국 군대가 모두 식수원으로
사용하던 쿠북강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버리자 오스만 투르크군은 갈증에 시달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투르크에게 합병당해 오스만군에 편제됐던 아나톨리아 투르크계 공국
출신 병사들이 전투 도중에 티무르군에게 돌아서니 오스만군은 패하고 바예지드는
포로가 되는데 함께 붙잡힌 "황후가 알몸으로 티무르의 술시중" 을 드는 모욕을 당합니다.
이 광경을 생각하노라니 문득 떠오르는게 징기스칸 이 했다는 말이니, 무릇 사내로 태어나
여러 나라들과 전투에서 승리해서는 그 아비와 남편이 보는 앞에서 딸과 부인 을
품에 안고는 수치심에 부들부들 뜨는 패전한 사내들 모습을 보는게 가장 큰 기쁨 이라던가요?
이 사건 이후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두 번 다시 이런 치욕 을 당하지 않기 위해
술탄은 후궁(첩) 을 여럿 맞이할지언정...... "황후는 절대로 두지 않는다" 는
불문율 을 만들게 되는데, 술탄을 제외한 모든 후궁과 신하들은 노비가 되는 것입니다.
아나톨리아의 투르크계 공국들은 독립을 되찾았고 세르비아 등 오스만 투르크의
신하국이 되어 연공을 바치고 전쟁 때마다 군사를 보내야 했던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도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자주 독립 을 선언 합니다.
술탄 바예지드와 황후는 티무르군에게 포로가 됐지만 다행스럽게도 바예지드의 아들 3명은
탈출에 성공했으니 참혹한 내란을 치러 무라드 1세가 술탄에 올랐는데 몽고족의 후예
티무르가 몽고족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를 치러 가다가 병사 하는 바람에 한숨 돌립니다.
티무르의 죽음 으로 기사회생한 오스만투르크 는 무라드 1세의 아들로 6대 술탄인
무라드 2세 는 1422년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략하였으나 실패합니다만....
그 후계자들은 굴하지 않았으니 1453년 손자인 메메드 2세 는 통나무를 깔은후 배를 얹어
산을 넘어 금각만으로 진입하는 기상천외한 전술 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해 천년제국 비잔틴을 멸망 시키고 아시아-유럽-아프리카의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1529년 술레이만 대제 는 12만 대군으로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와 헝가리를 지나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 하는데 성이 견고한데다가 겨울 추위로 철수합니다.
1683년 카라 무스트파가 예니체리와 사파히 기병을 동원해 베오그라드를 함락 한후 헝가리왕
지기스문트의 6천까지 휘하에 거느리고 다시 15만 대군으로 진격해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하자 성벽이 튼튼한데다가 폴란드 3만과 독일 4만 연합군이 후방을 기습하니 물러납니다
유럽은 두차례의 전투에서 간신히 빈을 지켜냈는데 소득이 있다면 오스만 투르크군이
버리고간 커피콩 자루를 획득해 유럽에 커피 가 들어온 것이라.... 만약
오스만투르크군이 이겼으면 오늘날 유럽인들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 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