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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또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불국사는 부처님의 화엄장엄세계인 불국토를 현세의 사바세계에 화현시킨 열정적인 신앙의 완성체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비롯한 수많은 국보문화재와 보물문화재가 있고 매년 수백만의 내외국인 방문객들이 한국의 뛰어난 불교예술작품들이 자리한 불국사를 방문하고 있다. 과거의 뛰어난 불교문화재 뿐만 아니라 현재의 불국사는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계시고 한국불교의 지혜의 맥을 이어가는 중심적인 수행처이기도 하다. 또한 불국사는 한국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의 전시관으로서 세계에 한국불교와 한국의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1600년 한국불교 수행정진과 지혜의 도량으로서 오늘도 끊이지 않는 용맹정진의 푸르른 서기가 흐르고 있는 곳이 바로 불국사이다. 경주 토함산(吐含山) 서남록(西南麓)에 자리잡은 불국사(佛國寺)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1)에 당시 재상(宰相)이었던 김대성(金大城)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惠恭王)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極樂殿), 자하문(紫霞門), 범영루(泛影樓)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紫霞門)으로 오르는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극락전(極樂殿)으로 오르는 연화교(蓮華橋)·칠보교(七寶橋)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毘盧殿)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像)과 극락전(極樂殿)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불국사 창건> 5천년 장구한 세월동안 발전해온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로 천년세월 너머 현대의 무지한 중생들에게 불국토의 장엄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불국사.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중건>
① 중수와 보수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금창기(불국사 창건에 관한 최고의 기록)는 문헌적인 근거가 약해 불국사가 일정 기간에 창건되기 보다는 긴 세월동안 여러세력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의 일반적 견해이다. 이러한 불국사의 거대가람으로서의 위용은 1593년 5월 의병과 승군의 활동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왜군의 방화와 파괴등으로 큰 피해를 입어 2,000여 칸의 대가람이 전소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이후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서 불국사도 국가의 지원 및 스님과 신도들의 노력에 의해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중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②근세 복원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와중에 유물의 완벽한 복원과 보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제의 문화정책의 전시물로서 수난을 겪었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주춧돌과 빈터만 남아 있던 무설전 · 관음전 · 비로전 · 경루(經樓) ·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 극락전 · 범영루(泛影樓) ·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성보문화재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국보 제27호)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 부처님은 국보 제27호로 지정된 금동불이다. 높이 180cm, 머리 높이 48cm이며, 무릎 너비는 125cm로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에 비해 3cm 가량 크다. 수인은 아미타 부처님께서 취하는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인과 반대방향으로 취하는 수인이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 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뚝하다. 신체 표현은 장중하여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 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다. 아미타불의 형상에는 단독상과 삼존상이 있고, 좌우 협시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가장 보편적이며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 또는 팔대보살을 봉안하여 군상(群像)을 이루는 예도 많다. 한편 아미타불상의 형식적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수인(手印)으로 보통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과 9품인(九品印)을 짓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아미타불상으로는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강화 백련사 철아미타불좌상, 용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무위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다. 한편 관세음보살의 경우는 관음전이 그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일 때에는 관음전이라 하지 않고 원통전(圓通殿)이라고 한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즉 중앙의 아미타불과 좌우의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모신다. 관음전 안에는 관음상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양류(楊柳)관음·십일면(十一面)관음·해수(海水)관음·백의(白衣)관음 등을 모신 곳도 있다. 그리고 후불탱화(後佛幀畵)로는 주로 아미타불화로 모신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象(국보 제26호)
비로전의 비로자나부처님은 국보 제26호로 지정되었는데, 극락전의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백률사 금동약사여래 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의 하나로 꼽힌다. 높이 1.77m,머리 높이는 55cm,폭은 1.36m이다. 본래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극락전의 아미타부처님과 함께 극락전으로 옮겨졌고, 그 뒤 현재의 비로전 주존불로 안치되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여 삼신불三身佛사상의 본존으로 여겨진다. 현재 대좌나 광배는 결실되고 불신만 봉안되어 있다.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탄력 넘치는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불국사 비로전(毘盧殿)에 주존불(主尊佛)로 봉안되어 있는 불상이다. 높이 177㎝, 이 상(像)은 불국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백률사 약사여래입상(국보 제 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의 하나이다. 대좌(臺座)나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지만, 육계(肉계)나 나발(螺髮)의 머리카락은 기교있게 만들었다. 상호(相好 : 부처님의 얼굴)는 반달눈썹에 눈은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 반개(半開)하였고, 인중을 뚜렷이 두드러지게 새겨 전체적으로 장중한 인상을 풍긴다. 대의(大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얇게 밀착되어 몸의 굴곡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보이는 당당한 체구의 결가부좌상(結跏趺坐像)이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이 아래, 왼손이 위로 올라간 지권인(智拳印)으로서 일반적인 지권인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예는 증심사 비로사나불좌상(보물 제131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불상은 8세기 중엽경의 작품인 석굴암본존불(국보 제24호)의 특징과는 다른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국보 제23호)
청운교. 백운교는 국보 제23호인 석조물이다.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길이 6.3m에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길이 5.4m에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 (국보 제22호)
국보 22호 불국사 앞 연화교와 칠보교는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양식은 청운교. 백운교와 같으나 규모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데, 연화교는 높이 230㎝, 폭 148㎝이고, 칠보교는 높이 406㎝, 폭 116㎝이다. 계단에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 부분을 연화교라 하고, 칠보교는 금 · 은 · 유리 · 수정 · 산호 · 마노 · 호박의 일곱 가지 보석의 다리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이들 계단은 안양문으로 연결되고, 문을 들어서면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인 극락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국보 제21호 석가탑
석가탑은 국보 제21호로 지정된 삼국시대의 석탑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의 다른 석탑인 다보탑과는 달리 당시의 전통적인 석탑양식을 취하고 있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또한 석가탑은 이전에 세워진 감은사지삼층석탑의 형태를 이어받은 우리나라 3층 석탑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탑의 주위에 배치되어 있는 여덟 개의 연꽃과 회랑은 이 곳이 성역임을 나타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석가모니 부처님과 부처님의 교화를 상징하는 탑으로 높이는 8m 20㎝이고 751년에 세워졌다.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탑 안에서 발견된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 70 여점의 문화재는 일괄해서 국제 제 126호로 지정되어 있다.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다보탑多寶塔 (국보 제20호 다보탑)
경북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탑. 국보 제20호. 높이 10.4 m, 기단 폭 4.4 m.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기단부에는 사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고, 보계에는 난간을 가설하였던 석주가 남아 있다. 그 위에는 네 모퉁이와 중앙에 사각 석주(石柱)를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고 있다. 또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퉁이에 돌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 갑석 위에는 사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竹節形) 석주를 돌려 8각 연화석(蓮花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 위에는 8개의 주두(柱頭) 모양의 받침으로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8각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다. 한국의 석탑 중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형태를 가진 예로,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걸작은 그 유례가 없다. 건립연대는 서쪽의 석가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金大城)이 중창한 당시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다보여래의 사리(舍利)를 모셔 세운 탑. 《법화경(法華經)》에 의하면 “부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이 경을 설파할 때 다보여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둔 탑이 땅 밑에서 솟아나오고, 그 탑 속에서 소리를 내어 부처의 설법을 찬탄하고 증명하였다” 한다. 이를 근원으로 세위진 탑이 다보탑이다. 이 탑의 구조는 대개 옥개(屋蓋) 아래 상층(裳層)을 붙인 조형을 이루고 있다. 중국에서는 732년에 무현의 남동쪽에 처음 세웠으며, 한국에서는 756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에 세웠다.
대웅전
'대웅'이란 부처의 덕호(德號)이다. 항상 사찰의 중심을 이룬다.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고 그위에 불상을 모시는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봉안한다. 그러나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할 때는 석가모니불 좌우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며, 각 여래상 좌우에 협시보살을 봉안하기도 한다. 또 삼세불(三世佛:석가모니불·미륵보살·갈라보살)과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기도 하는데, 삼신불은 대개 법신인 비로자나불, 보신(報身)인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대웅전에는 선종의 삼신설을 따라 비로자나불·노자나불·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대웅전 중심에 불상을 안치하고 있는 불단을 수미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 꼭대기에 부처님이 앉아 자비와 지혜의 빛을 발하고 있다는 불교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내부는 다른 어떤 건물보다 화려하고 장엄하게 만드는데, 특히 목조보개 및 불단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여 목조공예의 진수를 보여준다. 꽃무늬와 천의를 날리는 비천으로 불단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주불 위에는 닫집인 천개를 만들어 화엄의 여의주를 입에 문 용과 극락조 등으로 장식한다. 천장에는 보상화무늬[寶相華紋]와 연꽃무늬 등을 조각하여 불전(佛典)에 나오는 천우보화(天雨寶花)의 의미를 상징한다. 대웅전에는 많은 탱화(幀畵)들을 봉안하는데, 석가모니불의 후불탱화로는 주로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제자들을 모아 설법하는 광경을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봉안한다. 그러나 주존불로 삼신불 또는 삼세불이 봉안될 경우에는 삼여래(三如來) 탱화를 모신다. 또한 신중(神衆)을 모신 신중단에는 신중탱화를, 영가(靈駕)를 모신 영단에는 감로(甘露) 탱화를 봉안한다. 불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 등을 고루 갖춘 것으로 4면의 중앙에 계단 1개씩을 두고 다듬은 주춧돌을 놓았습니다.내부는 안두리기둥과 바깥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안두리기둥은 모두 고주로 하고 뒷면 고주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였으며, 이 앞에 불단을 마련하고 불상을 모셔놓았습니다. 또 첨차의 쇠서 위는 연꽃봉오리와 봉황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한 장식으로 꾸미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불전건축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특징입니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으며, 금모루단청을 칠하였습니다. 한편, 이 건물은 1765년(영조 41)에 중창된 것인데, 중문인 자하문과 함께 당시 불국사의 건축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의 앞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좌우로 놓여 있고, 둘레에는 1973년에 복원된 회랑이 둘러져 있어서 부처를 모신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해 놓고 있습니다.
대웅전의 용
기린(麒麟)·봉황(鳳凰)·거북〔龜〕과 더불어 사령(四靈)이라 불려온 상상적 동물. 용은 고대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 이른바 문명의 발상지 어디에서나 이미 오래 전부터 상상되어온 동물로서 신화나 전설의 중요한 제재로 등장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의 대상으로서도 큰 몫을 차지해왔다.용은 어디까지나 상상적 동물이기 때문에 민족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기능이 조금씩 달리 파악되어왔고, 따라서 그 조각이나 묘사의 표현 역시 차이를 보여왔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생각해온 용은 대개 일찍이 중국인들이 상상하였던 용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문헌인 ≪광아 廣雅≫ 익조(翼條)에 용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놓았다. “용은 인충(鱗蟲) 중의 우두머리〔長〕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즉, 머리〔頭〕는 낙타〔駝〕와 비슷하고, 뿔〔角〕은 사슴〔鹿〕, 눈〔眼〕은 토끼〔兎〕, 귀〔耳〕는 소〔牛〕, 목덜미〔項〕는 뱀〔蛇〕, 배〔腹〕는 큰 조개〔蜃〕, 비늘〔鱗〕은 잉어〔鯉〕, 발톱〔爪〕은 매〔鷹〕, 주먹〔掌〕은 호랑이〔虎〕와 비슷하다. 아홉 가지 모습 중에는 9·9 양수(陽數)인 81개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銅盤〕을 울리는 소리와 같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턱 밑에는 명주(明珠)가 있고,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逆鱗)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 : 공작꼬리무늬같이 생긴 용이 지닌 보물)이 있다.” 이처럼 각 동물이 가지는 최고의 무기를 모두 갖춘 것으로 상상된 용은 그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한 것으로 믿어져왔으며, 특히 물과 깊은 관계를 지닌 수신(水神)으로 신앙되어왔다. 그래서 “용은 물에서 낳으며, 그 색깔은 오색(五色)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조화능력이 있는 신이다. 작아지고자 하면 번데기처럼 작아질 수도 있고, 커지고자 하면 천하를 덮을 만큼 커질 수도 있다. 용은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 위로 치솟을 수 있고, 아래로 들어가고자 하면 깊은 샘 속으로 잠길 수도 있는 변화무일(變化無日)하고 상하무시(上下無時)한 신이다.”(管子 水地篇)라 설명되기도 하였다. 중국민족이 상상해온 이와 같은 용의 모습이나 능력은 그것이 거의 그대로 우리 민족에게 수용되었다. 그래서 각종 용의 조각품이나 그림에서 위와 같은 용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용 가는 데 구름 간다.’라든가, ‘용이 물 밖에 나면 개미가 침노한다.’, ‘용이 물을 잃은 듯’이라는 등등의 격언에서 용의 기능을 살필 수 있다.이러한 용은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긴다고도 하며, 용신이 사는 곳은 용궁이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대웅전 후불 벽화 2점 발견
문화재청은 (사)성보문화재연구원(원장 범하스님)을 통해 추진 중인 사찰건축물 벽화 조사 사업 중 경주 불국사 대웅전 후불벽에서,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2구의 관음보살 벽화를 발견 했다고 8월 19일 보도자료를 통해 발표 했다. 이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들 벽화는 후대에 덧칠해진 호분(호분)에 가려져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올해 초 성보문화재연구원의 예비 조사 중 존재가 확인된 후,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과학적 조사,분석(적외선 촬영)을 통해 보다 분명하개 도상을 판독하게 됐다. 현재까지 확인된 도상을 보면 우측은 백의관음보살도(백의관음보살도)이며, 좌측은 어람관음보살도(어람관음보살도)이다. 이들은 18세기의 도상적 특징을 갖춘 18세기 불화로 편년되는데, 이중 물고기 담은 바구니를 들고 있는 형상의 어림관음보살도는 현존하는 벽화 중 양산 신흥사의 예(17세기)를 제외하면 18세기의 벽화로는 유일하다. 벽화는 머리를 둥글게 말아올려 이마 위쪽에서 장식핀으로 고정하고 백색 장삼 안에 소삼을 입은 일반 여인의 형상이다. 오른손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도상의 사례에서 물고기가 든 바구니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미뤄 일반 여인의 형상에 보살 이미지를 투영시킨 어람관음보살도로 추정된다. 크기는 2구 각각 세로 4.3m, 가로 1.8m 안팎으로 도상에 나타난 특징으로 볼 때 18세기에 그린 불화로 보여진다. 불국사 대웅전은 1765년에 중창됐고, 벽화는 2년 뒤인 1767년 4~6월에 그려졌다. 당시 도화원으로 하윤(夏閏)을 비롯한 화승 53인이 참여한 대대적인 불사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시기에 후불벽의 벽화까지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아들 벽화에 대한 정밍조사는 최근 완료 되었으며, 조사결과는 올해 말 발간할 한국의 사찰벽화(경북 남부편), 보고서에 수록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는 그간 일반적으로 진행했던 벽화에 대한 사진촬영,상태기록 외에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과학적 분석조사(적외선 촬영,안료분석)가 더 해져 보다 진일보한 조사성과를 도출 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계기로 사찰벽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조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해 향후 사찰벽화의 보존을 위한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토록 할 계획이다. '한국의 사찰벽화 조사 사업'은 탈색,박락등으로 훼손이 가증되고 있는 전국의 사찰벽화 보존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및 중요 벽화의 지정을 목적으로 2006년 부터 추진하고 있는 사업으로, 2010년에는 경북 남부 지방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백의관음:33관음중 하나로 아이의 출산과 생명을 보살피며, 흰 옷을 입고 있음. 어람관음: 33 관음중 하나로 나찰,독룡,아귀의 해를 제거해 주는 관음. 모습은 물고기를 타고 있거나 물고기가 가득찬 어람(소쿠리)를 들고 있음.
무설전無說展
무설전은 대웅전의 바로 뒤에 있는데 불국사 고금창기의 기록을 빌면 불국사의 여러 건물 중 제일 먼저 만들어진 건물이다. 신라 문무왕10년에 왕명으로 세우고 법화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한 751년보다 약 백년이나 앞서 만들어 졌다고 할 수가 있다. 신라 당시 화엄경을 강의하던 강당이며 지금의 학교와 같은 건물이다. 건물명칭의 무설이란 법을 설하는 도량이지만 곧 설해지는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는 역설적인 절대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곧, 진리의 전달과 진리에로 도달하는 방법은 말과 글이란 매개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오해되지만 말과 글은 진리의 그림자이며 진리로 다가서는 길을 가르쳐 주는 지도일 뿐 진리 그 자체일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무설전은 강당(講堂)으로 불교의 기초교육학을 배우는 곳이다. 출가수행자로서 갖추어야 할 예절과 계율을 익히고 불타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45년 설법 중에서 가려 뽑은 경전을 일정기간에 걸쳐 배우는 곳이다. 때로는 일반 신도들도 이 곳에서 설법을 듣는다. 신라시대에는 표훈(表訓)이나 신림(神琳)같은 스님들이 설법을 하였으며 많은 선남선녀들이 여기서 오욕을 씻고 불국을 돌아보고 귀가하였던 것이다. 15개의 돌기둥을 새긴 기단 정면 네 군데 계단이 가설되어 있는 큰 규모이다. 이 기단 위에 아홉 개씩 다섯 줄로 주춧돌이 놓여 있는 큰 건축 터에 지금은 우리 나라 최대의 맛배지붕으로 건물이 재현되어 서있다. 이 건물도 임진왜란 후에 다시 세웠으나 1920년 경에 허물어진 것을 1971년 공사 때 또 다시 세운 것이다.
비로전毘盧殿
비로전은 무설전 뒤쪽 높은 곳에 있으며 관음전 왼쪽 아래에 있다. 건물은 1973년 대복원공사 때 고려 시대 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비로전 안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비로자나부처님의 형상인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는 뜻으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화엄 불국의 주인이 되는 부처님이다. 비로전 앞뜰에는 석등과 비슷한 양식의 화려한 고려 초기의 부도가 전각 안에 보호되어 있다.
-비로자나 부처님에 대한 설명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 ·노자나불 · 자나불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로 ‘태양’ 이라는 뜻인데,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華嚴宗)의 본존불(本尊佛)이다.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비춘다고 한다. 법상종(法相宗)에서는 노사나불(盧舍那佛)·석가불(釋迦佛)·수용신(受用身)·변화신(變化身)으로 쓰고, 비로자나 부처님은 자성신(自性身)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다. 또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비로자나 부처님 · 노사나 부처님 · 석가모니 부처님을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에 배치하여 설명하고 있고, 밀교(密敎)에서는 《대일경(大日經)》의 설을 계승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와 동체라고 한다.
사리탑舍利塔 비로전 앞 서쪽 전각 내부에 안치된 부도로, 전체 형태는 석등형으로 되어 있다. 이 부도는 1905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되어 현 위치에 안치된 것이다. 부도의 구조는 하대석·중대석·상대석 위에 탑신과 옥개석을 얹은 형태이다. 하대석은 안상이 새겨진 팔각대석 위에 연화판을 배치하였고, 장구형에 가까운 중대석은 구름 형상으로 모각 되어있다. 배가 부른 원통형의 탑신석에는 얕은 감실을 모각하고 그 안에 여래좌상 2위와 보살입상 2위를 양각으로 조각하였다. 반파된 옥개석은 기와지붕형으로 제작되었으며, 상부에는 낮은 6각형의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이 사리탑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나 부도의 주인공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전체 높이는 206㎝이며. 현재 보물 제 6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서방정토의 부처님이신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성전으로서 극락보전 · 무량수전 · 무량전 · 보광명전(普光明殿)· 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부터 극락정토신앙이 강하여 내부 구조는 대웅전만큼이나 화려하다. 기둥과 천장에는 단청을 하고 삼존불 뒤쪽에는 극락의 법회 장면을 그린 극락회상도나 극락구품탱화 등을 건다. 이밖에 후불탱화로는 아미타불화 · 아미타불내영도 · 관음도 등을 건다. 본존인 아미타부처님은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無量光), 수명 또한 한량없어 백천억 겁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無量壽). 그래서 이 부처를 모신 전각을 무량수전이라 하고 보광명전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전은 이 부처님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아미타부처님의 좌우 협시로는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둔다. 여기서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자비를 상징하는 지혜로써 중생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지혜를 상징하는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널리 비추어 삼도의 고(三道苦)를 없애고 끝없는 힘을 얻게 한다.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으로 인도하는데, 한국에서는 고려 및 조선시대에 극락왕생 신앙이 성행하면서 아미타불의 협시로 등장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즉 《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을 근거로 하여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세운다. 한국 불교에서는 대웅전·대적광전과 함께 3대 불전으로 꼽힐 만큼 중요하며, 대표적인 건물로는 영주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 국보 18)을 들 수 있다. 전각은 남향이고 아미타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므로 불상 앞에서 기원하는 사람은 극락이 있는 서쪽을 향하게 된다. 부여의 무량사극락전(無量寺極樂殿:보물 356)이나 강진의 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樂殿:국보 13) 등도 같은 경우이다. 김천 직지사처럼 극락전을 아예 서쪽에 동향으로 세운 곳도 있다.
관음전觀音展 관음전은 비로전 동쪽 언덕위에 있다.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을 모신 전당이다. 관세음보살님은 남쪽바다 가운데 솟아있는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 중에서 한 쪽에 초록버들이 늘어져 넘실거리고 한쪽에는 푸른 대(竹)가 뻗어 올라 휘청거리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계시면서 사람들이 도와달라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도와 달라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곧 구원의 손길을 뻗치니 천 개의 손이 있고 천 개의 눈이 있다한다. 그래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이란 말이 있다. 비로전보다 높은 곳에 관음전이 있는 것은 보타락가산을 나타낸 것이다. 옛날에는 산모습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계단식으로 되어 산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어있다.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낙가교라 부르고 있다. 낙가교(洛伽橋)란 보타락가산으로 오르는 계단이라는 뜻이다. 관음전으로 들어서는 문을 해안문(海岸門)이라하여 남해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이다. 기록에 의하면 해안문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양편에 푸른 대를 상징한 취죽루(翠竹樓)와 능수버들을 상징하는 록양각(綠楊閣)이라는 누각이 높이 솟아 해안문과 사이에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복원되지 못했다. 관음전 앞에 있는 장명대(長明臺)는 관세음보살님의 지혜의 등불을 밝히던 곳이다. 산스크리트로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飽vara)이며, 중국에서 뜻으로 옮겨 광세음(光世音)·관세음(觀世音)·관자재(觀自在)·관세자재(觀世自在)·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썼는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은 구역이며 관자재는 신역인데, 산스크리트 '아바로키테슈바라', 곧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본다면 관자재가 그 뜻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관세음보살로 신앙되어 왔으며 관음보살이라 약칭하였다. 그래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관음보문품(觀音普門品) 또는 관음경(觀音經)이라 일컫는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관자재(觀自在)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觀照)하여 보살핀다는 뜻이다. 결국 뜻으로 보면 관세음이나 관자재는 같으며 물론 그 원래의 이름 자체가 하나이다. 보살(bodhisattva)은 세간과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성자(聖者)이므로 이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제하는 보살[救世菩薩], 세상을 구제하는 청정한 성자[救世淨者], 중생에게 두려움 없는 마음을 베푸는 이[施無畏者], 크게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으로 이익되게 하는 보살[大悲聖者]이라고도 한다.
나한전羅漢殿 나한이란 부처님의 제자들중 소승의 계위인 아라한과에 오르신 성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나한전은 아라한을 모신 곳을 말하며 이 곳은 최근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불국사 나한전에는 부처님 당시의 16분의 수행을 잘하셨던 제자분들을 모셨다. 가운데 모신 불상은 석가모니부처님, 오른쪽은 제화갈라보살,, 왼쪽은 미륵보살이다.
석굴암 -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刱)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이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이며, 석굴암의 입구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신장을 두고 있으며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 석주를 세웠고 이곳을 지나면 평면원형의 주실로 본존은 중심에서 약간 뒤로 안치되어 있으며 입구 좌우로부터 천부상 이구, 보살상 이구, 나한상 십구로 주벽을 채우고 본존 정후면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 조각에 있어서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내의 보살들의 유연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있는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 것이다. 특히, 주실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그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에 이름이 높다.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공간에도 본존불을 중심으로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은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졌다.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궁륭(Dome)천정으로 짜여진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주실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대불이 있고,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범천상(梵天像)과 제석천상(帝釋天像), 보현(普賢)·문수(文殊)보살상, 그리고 십대제자상(十大弟子像)이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돼 있다. 일찍이 당나라의 현장(A.D602~664)이 17년간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풍물지리지 성격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썼는데,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바로 그 자리에 대각사(大覺寺)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정각을 이룬 모습의 불상이 발을 괴어 오른발 위에 얹고, 왼손은 샅 위에 뉘었으며 오른손을 늘어뜨리고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대좌의 높이는 당척 4척2촌이고 넓이는 1장2척5촌이며 상의 높이는 1장1척5촌, 양 무릎폭이 8척8촌, 어깨폭이 6척2촌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 크기와 이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데, 현장이 보았던 대각사의 그 불상은 현존하지 않고 있어 석굴암에 역사적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 이르면 한가운데에 높이 350cm의 당당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지닌 석가모니 대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摩觸址印)으로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成道像)이라고 한다. 감실은 주실에서의 위치로 보아 지상계와 천상계의 중간을 뜻한다. 이는 교리적인 면에서 보면 보살이 각자(覺者)인 여래와 무명(無明)중생의 중자적인 존재라는 점과 잘 어울린다. 미륵보살상의 오른쪽 어깨, 손목, 오른쪽 무릎으로 이어지는 직삼각형이 안정감을 주는 반면 세운 무릎, 비스듬히 얹은 팔, 숙인 얼굴이 그리는 곡선은 변화와 운동감을 주고 있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중상은 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가지 모습의 신들이며,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석가모니 대불이 앉아 있는 곳인 둥근 주실 뒷벽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타나는 십일면관음보살상 (十一面觀音普薩像)의 아름다운 자태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불국사의 전설 경주의 모량리에 한 가난한 늙은 아낙이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한 것이 성과 같아 대성(大成)이라 불렀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대성은 복안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여, 그 집에서 밭 몇 이랑을 얻어 농사를 짓고 살았다. 하루는 점개라는 스님이 복안의 집에와서 시주하기를 권했는데, 복안은 베 50필을 선뜻 시주했다. 이때 점개스님의 염불소리를 대성이가 듣게 되었다. "누구든지 보시를 정성껏 하면 천신이 항상 보호하고, 하나를 보시하면 그 만 배의 이익을 얻고 안락장수하게 되리라" 대성이는 그의 어머니에게 뛰어가서, "내가 문에서 스님이 축원하는 염불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생에 닦은 선이 없어 이렇게 가난하게 사니 지금 보시하지 않으면 다음생에 더욱 가난하게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품팔아서 얻은 밭 몇 이랑을 법회에 시주하여 뒷낳의 과보를 얻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린대성은 어머니에게 졸랐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맞는 말이로다." 하고 밭을 점개스님에게 보시했다. 그런데 그 뒤 얼마 안되어 대성은 갑작스레 죽음을 맏는다. 그날 밤 재상 김문량은 하늘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모량리 대성이라는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서 다시 태어나리라" 깜짝 놀란 김문량이 모량리를 조사해보니, 과연 대성이라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말소리가 들리던 그날, 김문량의 아내는 아기를 잉태하였고, 10달 후 아들을 낳는다. 그런데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왼손을 쥐고 펴지않았다. 아이는 7일이 지난후에야 손을 폈는데 '대성'이라고 새긴 금패쪽이 나왔다. 이를 본 김문량은 이 아이가 모량리 대성의 환생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대성이라고 짓고 모량리의 대성의 어머니를 맞아들여 함께 살았다. 장성한 후 대성은 토함산에서 사냥을 하여 곰 한 마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날 밤 피곤한 몸으로 잠든 대성의 꿈에 곰의 혼령이 나타났다. 곰은, "네가 어째서 나를 죽었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으리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성은 곰에게 후회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짓고 기원하여 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는 맹세코 절을 지어주겠다고 말하며 꿈에서 깨어났다. 땀이 온몸과 이불을 흠뻑 적셨다. 그 뒤로 다시는 사냥하지 않았으며, 곰을 잡은 그 자리에 장수사(長壽寺)를 짓고 염원을 하였다. 그리고 전세와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웠다.
비련의 무영탑 울창한 소나무숲에 가리운 불국사 쪽을 바라보는 아낙의 눈엔 어느덧 이슬이 맺혀 여윈 볼을 타고 흘렀다. 멀리 백제 땅에서 지아비를 찾아온 아사녀. 그리움에 지쳐 먼발치서나마 남편의 모습을 보고자 신라 땅을 찾았으나 용이치가 않았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못 속을 들여다봤다. 흐르는 것은 흰 구름뿐 남편 아사달도, 아사달이 조성하고 있는 석가탑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숲속을 바라보는 순간 아낙은 흠칫 놀랐다. 아사달의 얼굴이 환히 웃으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아낙은 불국사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치맛자락을 잡으며 난간에 앉아 있는 스님에게 다가갔다. 『스님, 아무리 연못 속을 들여다봐도 그리운 남편의 모습은 떠오르질 않습니다. 석가탑도 보이지 않구요. 스님, 어찌하면 아사달을 볼 수 있을까요?』 『아사녀, 그대의 애끓는 심정은 참으로 안타깝소. 그러나…』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뜬 스님은 합장한 채 애원하는 아사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님, 이렇게 미칠 듯이 그리워하는 저의 정성이 아직 모자라서인가요?』 아사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아사녀, 아사달을 만나려는 그대의 마음은 한낱 오욕이 빚은 사랑 때문이오. 사랑은 고귀한 것이지만 오욕이 담긴 사랑은 영원할 수 없소. 그대는 자기를 버린 맑은 마음으로 불전의 탑을 조성하는 아사달의 지극한 정성을 따르며 아사달 보기를 기도하오. 그러면 관음소살님의 은혜를 입을 것이오.』 법문을 들려준 스님은 조용히 일어나 경내로 들어갔다. 스님의 뒷모습에서 숭고함을 느낀 아사녀는 합장한 채 한참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둠이 내리면서 숲속을 울리는 맑고 경건한 목탁소리에 그녀는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염불에 열중했다. 삼매에 든 그녀의 염불은 관세음보살이 아사달이 되고 아사달이 관세음보살이 됐다. 아스라해지는 의식 속에 그녀는 아사달을 일심으로 불렀다. 저녁놀이 지고 뒷산 절에서 범종소리가 들려올 때면 아사녀는 동구 밖에 나가 아사달을 기다렸다. 『아사녀,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 왜 예까지 나왔소.』 『집에서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하옵니다. 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지아비 계신 곳으로 뛰어가고 싶은 것을…』 홍조된 아사녀의 얼굴은 행복에 젖어 있었고, 그에 대한 아사달의 사랑은 흐르는 강물 같았다. 『아사녀, 곧 일이 끝나게 되오. 그때는 하루 종일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아사달은 또 떠나야 했다. 불국사 탑을 조성키 위해 천리타향 신라 땅으로 떠나야만 했다. 아사녀는 온 생애가 끝나는 것만 같았다. 「아사달-」 아사녀의 애절한 외침은 어두운 숲속으로 퍼져나갔다가 다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아사녀는 메아리에 이끌리듯 숲속을 헤맸다. 시냇물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다시 냇물을 거슬러 오르자 돌다리에 선 파수병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디를 가시오?』 『지아비 찾아 백제 땅에서 온 아낙입니다. 제발 들어가게 허락해 주세요.』 절을 다 지을 때까지 잡인의 출입을 금하라는 어명이오. 여자는 더더욱 안되오.』 파수병은 그녀를 창대로 밀어냈다. 불국사 담을 끼고 돌며 아사달을 애타게 부르던 아사녀는 담을 넘어 들어갔다. 석공들이 잠든 방을 두루 살피던 그녀는 불이 켜진 방앞에 이르자 그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사달이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사녀! 아사녀, 어떻게 이곳에 미칠 듯 보고 싶었소.』 『아사달!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몰라요.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기쁨과 슬픔이 엉켜 두 사람은 뜨거운 포옹을 했다. 그러나 시간은 결코 그들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범종이 울리고 목탁소리가 잠든 절을 깨우자 아사달은 일말의 불안을 느꼈다. 『이대로 아사녀와 백제로 돌아갈까? 아냐, 공사가 곧 끝날 텐데. 더구나 지엄한 왕명을 어긴 죄는 어떻게 하나.』 아사달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사달, 안색이 좋지 않은데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혹시 제가 떠나야 하나요?』 『아사녀, 잠깐이오. 지금까지도 떨어져 살아왔소. 사람들이 알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 공사가 끝나도록 기다려 주오.』 아사녀는 아사달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흐느꼈다. 『아사녀, 지루하고 견딜 수가 없거든 절 앞 영지를 들여다보시오. 내가 쌓아 올리는 탑이 비치고 내 모습도 비칠 것이오.』 말을 마친 아사달은 방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아사녀는 울며 아사달의 옷깃에 매달렸다. 온 힘을 다해 잡으려 했으나 아사달은 자꾸만 멀어져갔다. 안타까운 아사녀는 있는 힘을 다해 아사달을 불렀다. 꿈이었다. 아사달을 부르는 자신의 소리에 소스라쳐 깬 아사녀의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맑게 가라앉은 연못은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사녀는 못가로 다가갔다. 한 걸음 다가서서 못 속을 들여다보고, 또 한 걸음 다가가서 못 속을 들여다봤다. 어느덧 아사녀의 걸음은 빨라졌다. 아사달의 이름을 뇌이던 그녀는 못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면이 일렁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흩어졌다 모아지고 다시 흩어졌다. 그 얼굴은 아사녀의 얼굴이 되기도 하고 아사달의 얼굴로 보이기도 했다. 아사달의 얼굴이 환히 웃으며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아사녀는 두팔을 들어 아사달을 불렀다. 그러자 아사달이 저만치서 팔을 벌리고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그녀를 휘감았다. 아사녀는 아사달을 부르며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사달을 부르는 애절한 외침이 수면으로 퍼져 올랐다가 사라졌따. 사람들이 뛰어왔을 때 아사녀의 꿈과 사랑과 비원을 삼킨 영지는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했다. 수면엔 흰구름과 숲을 안은 불국사가 비치고 있을 뿐 석가탑은 비치지 않았다. 아사녀의 슬픈 죽음을 전해 들은 아사달도 아사녀를 부르며 못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후 석가탑은 영지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해서 무영탑이라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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