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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25일 화요일
[(백)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셨다는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성모님의 태중에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의 날짜는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거슬러 가 셈한 것이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나자렛의 마리아는 하느님의 총애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을 천사에게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종 마리아를 본받아,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희생 제사를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제2독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다(복음).
제1독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할 것입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7,10-14; 8,10ㄷ
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8,10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4-10
형제 여러분,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마리아와 나눈 대화에서 다음 세 가지를 말합니다. ‘기뻐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성령께서 내려오실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든 인간의 내면 깊은 곳까지 닿아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세 가지를 받아들여 믿음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라 부르며,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몹시 놀랐지만, 먼저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곧이어 천사는 마리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천사의 말을 들어 보니 그 일이 주는 무게감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하였고,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매일미사』의 묵상 글을 써 달라는 전화를 받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능력도 없는 나를 왜 섭외하려고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로 성서 전공자들이 필진을 맡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두려움이 몰려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차피 하느님께서 하실 겁니다. 그러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대답이 나왔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는 지금까지도 묵상 글을 준비하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끊임없이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인간은 하느님께 기쁘게 순명할 때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군가로부터 총애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냥 사랑이 아니라 ‘총애’(寵愛)! 총애받는다는 것은 적당히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각별히 사랑받는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총애로 인해 삶이 바뀝니다. 총애받게 되면 우울한 색조였던 나날이 순식간에 화사한 색조로 변화됩니다. 총애는 한 존재를 고무시키고 참 사랑에 눈뜨게 만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은혜롭게도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총애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녀의 소박함과 순수함, 그녀의 작음과 겸손함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런 덕행을 바탕으로 한 즉각적인 응답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마리아는 순명의 모델입니다. 그녀는 하느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는 가운데 자신의 미래를 그분 손에 온전히 내맡깁니다. 천사 가브리엘과 주고받던 대화의 결론은 ‘예!’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는 언제나 순명을 요구하십니다. 성조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 조차도 번제물로 바칠 정도로 순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순명으로 인한 것이었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 역시 순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기쁘게 순명할 때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하고 겸손 가득한 마리아의 순명에 대한 하느님의 상급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거처하시는 새로운 도읍 예루살렘 성전이 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끊임없이 살아계시는 계약의 궤로 재탄생합니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로운 초대,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하느님의 초대였지만, 기꺼이 응답한 마리아로 인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 32-33)
가브리엘 천사의 말은 지극히 간단한 선언같지만,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지닌 포스가 엄청납니다. 마치 작열하는 태양이나 산더미처럼 높은 파도같이 장엄합니다.
마리아의 적극적인 동의와 협조로 인해 이제부터는 또 다른 형태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왕국이 건설될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어, 그 시간을 끝없이 연장시키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건설될 왕국은 종래의 지상 왕국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영원한 왕국, 불멸의 왕국이며, 그 왕국의 장엄한 광채 앞에 지상의 왕권은 빛을 바랠 것입니다. 새롭게 왕좌에 좌정하실 왕은 만왕의 왕이 되실 것이며,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지니실 통치권은 한계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위대하고 장엄한 인류 구원 사업의 첫 출발점은 바로 마리아의 ‘Fiat’이었습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은 어떤 연령대일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성모 영보 대축일입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나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님을 신성시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신부님의 어머니도 신자들이 공경합니다. 하물며 하느님을 낳으신 분을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어떤 인물을 낳은 어머니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공경하게 될까요? 자녀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유치원 교사가 해 준 이야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학급에 친구들 신발까지 정리해주며, 선생님 마음 아프니까 떠들지 말자고 친구들을 다독이는 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담해 본 결과 그 아이 어머니는 아기가 태중에 있을 때 신구약 성경을 두 번 통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날 때부터 부모님을 생각하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믿을 수 없었던 하나의 장면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본 것인데, 한 어머니가 아이들 몇 명과 함께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는 모습입니다. 아이가 대여섯 명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누나가 막내 아기를 안고 있었고 엄마는 거의 만삭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울지도 않고 어린아이들이 엄마처럼 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 태중에 아기가 있을 때부터 저렇게 성체조배를 하니 아이들에게도 그 영향이 가는구나!’였습니다. 저도 만약 결혼했다면, 아기 엄마에게 억지로라도 ‘하.사.시.’를 읽게 하고 매일 ‘성체조배’를 태교로 시켰을 것 같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산만한 아기들이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것이 부모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는 부모의 모든 것을 받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셨을까요?
하느님은 요셉 성인에게 천사를 보내시어 마리아와 혼인하고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거나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힘이 없으십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주저했다면, 헤로데에게 아기를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자연의 법칙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인간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어가는 과정을 ‘모범’으로 보여주셔야 하는 분이셨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하느님이셨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 성인이 성모 마리아를 신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끔찍한 일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처음부터 튼튼했거나 지혜가 충만한 것이 아니라 강해지고 충만해진 것입니다. 여기서 튼튼해진다거나, 충만해진다는 동사는 ‘미완료형’입니다. 미완료형은 지금도 반복해서 진행중인 상태라 완성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완성된 상태로 잉태되거나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과정’을 겪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이고 특별히 성모 마리아의 역할은 더 절대적입니다. 만약 성모 마리아가 죄에 조금이라도 물들었다면, 예수님도 죄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는 자녀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에서 죄에 물들지 않아야만 하는 성모님의 모델은 ‘파라오의 딸’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전형입니다. 당시 파라오라는 사탄과 같은 존재에 의해 모두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의 딸이지만, 파라오의 영향을 받지 않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은 파라오의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일강에 떠내려온 모세를 키웁니다. 그 공주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은 파라오의 영향 아래 있었기에 모세를 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도 그러한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이런 면에서 당신 자신도 죄에 물들면 안 되는 분이셨고,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미리 마련하셨듯이 성모님도 미리 마련되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1베드 1,20)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육체를 지니셔야 했다면,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그 육체를 주셔야 하는 성모 마리아도 미리 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마련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첫 피조물인 ‘지혜’를 성모 마리아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받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때 성령은 누구에게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아기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어떻게 오실까요? 성모 마리아의 인사를 통해 오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아기’처럼 우리가 하는 것에 따라 은총을 주시며 순종하십니다. 다만 우리 안에 죄가 있다면 그 죄 때문에 쉽게 돌아가실 수도 있는 약한 상태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계실지 궁금해합니다. 저는 분명 성모님께 그러하셨듯이 ‘아기 예수님’으로 계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성모님은 구원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른으로 우리 안에 사실 수는 없습니다. 어른은 나에게 영향을 받지 않지만, 예수님은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안에 사실 수 없습니다.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다만 살아계신다면 신적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이것을 깨닫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성모님을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세례명이 ‘가브리엘’입니다. 제가 정하지 않았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태어난 생일에 맞추어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9월에 태어난 큰 형은 미카엘, 12월에 태어난 작은 형은 사도 요한, 10월에 태어난 동생은 프란체스카로 정했습니다. 저는 5월에 태어났으니 마티아로 정했을 법 한데, 가브리엘로 정하였습니다. 부모님께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저는 ‘가브리엘’ 세례명이 좋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나자렛에 사는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전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시작되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으니, 저는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의 수호천사인 가브리엘 천사가 늘 함께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위대한 마리아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바다의 별, 우리의 어머니, 천상의 모후, 정의의 어머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의 바다.’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 시메온으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가야 했습니다. 어린 아들을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보았고,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기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 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위대한 마리아’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고통 중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는 겸손을 알게 하고, 겸손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합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오늘의 성인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Lucy Filippini)
신분 : 동정녀 설립자
활동연도 : 1672-1732년
같은이름 :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신심 깊은 교사회'(Instituti Magistrarum Piarum)의 설립자인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Lucia Filippini)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Toscana)의 타르퀴니아(Tarquinia) 태생으로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러나 놀라운 신심과 뛰어난 은혜를 많이 받고 성장하였으므로 그 교구의 주교이신 마르칸토니오(Marc'Antonio) 추기경의 주목을 받고 몬테피아스코네(Montefiascone)로 초청받았다.
이곳은 수도자의 지도하에 훈련 교사들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성녀 루치아는 열과 성의를 다하여 일하던 중에 비테르보(Viterbo)에서 이와 비슷한 기관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던 성녀 로사 베네리니(Rosa Venerini, 5월 7일)를 만났다.
성녀 루치아는 애덕, 단정함, 영적인 일에 대한 확신, 용기 그리고 풍부한 상식 등이 크게 돋보였고 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업은 크게 번창해졌다.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새로운 교육 센터를 세워야 할 입장이어서 그녀는 로마(Roma)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거룩한 교사’로 알려졌고, 성녀 로사 베네리니처럼 놀라운 설교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여 병을 앓다가 운명하였다.
그녀는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 (Margaret Clitherow)
신분 : 부인 순교자
활동지역 : 영국(UK)
활동연도 : 1556-1586년
같은이름 : 마르가리타,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마가렛
부유한 양초 제조업자 토마스 미들턴의 딸인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의 요크(York)에서 출생하여 도살업자인 존 클리테로우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결혼 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녀는 프로테스탄트 예배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2년 동안이나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 그녀는 그전보다 더욱 용감하게 되었는데,어린이들을 위한 가톨릭 학교를 세웠고 자기 집이나 혹은 빌린 집에서 미사를 거행하였다.
그녀의 집은 잉글랜드 내에 숨어있는 사제들의 은밀한 피난처 중의 하나였다.
1584년 그녀가 일년 반 동안 자신의 집에 감금당할 때에는 맏아들을 프랑스 두에(Douai)로 보내어 교육받게 하였다.
그녀는 1586년에 다시 체포되었는데, 집안에 보관중이던 미사 도구 등이 발각되면서 가톨릭 사제들의 은신처로 사용되었음이 드러나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눌러 으스러뜨리는 모진 고문을 받고 3월 25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하였다.
그녀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성 디스마 (Dismas)
신분 : 우도
활동연도 : +1세기
같은이름 : 라뜨로, 디스마스
성 디스마는 갈바리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착한 도둑이었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유일한 자료이다.
또 다른 도둑은 게스타스(Gestas)였다고 알려져 있다(루카 23,39-43).
믿기 힘든 전설이긴 하지만 아라비아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아기 기사 속에서 성가족을 이집트까지 모셔드린 사람들이 바로 이 두 도둑이었다고 한다.
이때 아기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리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는 말씀을 들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는 라트로(Latro)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성서의 인물] 예수와 함께 처형된 강도들(루가 23, 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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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병사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십자가 위에 뉘어 대못을 박았다. 잠시 후 대못이 예수의 손목과 발등 위로 박혀졌다. 순간 예수의 얼굴은 일그러지면서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 후 병사들은 여럿이 달려들어 예수가 달린 십자가를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사형수인 죄수 두 사람도 십자가에 못박아 예수 좌우 편에 한 사람씩 세워놓았다.
예수는 죽음을 앞둔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에 달려 조롱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기도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못박은 병사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유다교 지도자들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쳐다보고 조롱을 했다.
"어이, 거기에 달려있는 예수,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살렸으니 정말 그리스도라면 어디 당신 자신도 한번 살려보시지 그래."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함께 예수를 놀리며 모욕을 했다.
병사들도 신 포도주를 적셔서 예수에게 주며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한번 살려보시지..." 하며 빈정거렸다. 그리고는 나무 팻말에다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써서 십자가 위에 붙여 놓았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가 숨을 몰아 쉬며 예수를 모욕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네가 그렇게 죽은 사람도 살리고 병도 고치고 여러 가지 일들을 했으면 지금 그런 기적을 베풀어서 너도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우리도 죽지 않게 해 봐라.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 왜 대답이 없소?"
그러나 예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강도는 예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마치 그 강도는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이 마치 예수 때문인 것처럼 자신의 울분을 쏟아내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 있는 강도가 듣다못해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보게, 하느님이 무섭지도 않나? 우리는 이렇게 나쁜 강도 짓을 하고 죄를 졌기 때문에 사형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내 옆에 계신 이분은 무고한 사람이네. 왜 자네는 저분에게 욕을 하고 그러나?"
그리고는 예수를 향해 공손한 태도로 말을 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때 예수께서 그 강도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오늘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오."
"감사합니다. 정말 저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옆에서 듣고있던 다른 강도는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웃기고들 자빠졌네. 무슨 낙원은 낙원이야? 지금 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는 주제들이…."
예수님의 곁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그 강도는 죽기 바로 전에 구원을 받아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구원받은 강도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무엇보다 자기가 죄인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기의 죄를 깨달을 때 회개할 수 있다. 회개한 강도는 같이 달려 있는 예수를 보며 마음이 변화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향하여 욕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채찍질하던 그 사람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셨다.
이 강도는 그러한 예수의 모습을 보며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다. 또한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이 강도는 간단한 고백을 주님께 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자기를 의탁한 이 믿음이 바로 그를 구원한 것이다. 구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새는 죽을 때에 그 울음소리가 구슬퍼지고 사람은 죽음의 자리에 이르러 그 입의 말이 착해진다고 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력화시킨다. 인간의 한계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 또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인간의 순수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단순해진다. 이것은 결코 체념이 아니다. 어쩌면 참으로 위대한 자기 발견이다. 세상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보다 더 귀한 깨달음이 또 있을까?
<평화신문>
첫댓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성모 영보 대축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