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문화 봄호>
운주사 가는 길/ 신덕룡
앞서가던 구름이 산마루에 턱, 걸렸다 비 쏟아진다 지고 가던 등짐을 벗어
던진 듯 급해진 마음에 발을 걸듯 눈앞을 휘젓는 빗줄기다 고개를 들지 못하
게 짓누르는 장대비의 완력도 완력이지만, 이 길은 애초부터 뻣뻣하게 허리
펴고 걷기 힘든 길이다 걸음을 뗄 때마다 눈 맞추고 가만히 손잡아 주는 것
들 많아
가슴 안쪽에 맺힌 옹이들
부질없거나 하찮은 투정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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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신현인
빌딩을 바라보는 눈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입은
한 몸입니다
족발과 닭발과 우족은
신, 발 없는 고행으로
한세상 걸어간 길입니다
오체투지로 길을 쓸고 가는 낙엽도
맨살로 자갈길을 건너는 뱀도
내일을 위해 오늘이 벗어내는 허물입니다
어둠이 선명하고 빛이 흐릿한 날도
견딜 수 없이 몸서리치는 날도
질문을 주워 먹는 나를 보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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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윤삼현
아빠는 매일매일
나랑 함께 하려고 머리를 짜내신다
그렇게 아빠는
나의 그림자가 되었다
친구들이랑 공을 찰 때
놀랍게 키를 줄였다
내 키높이로 내달리며 외쳤다
- 돌부리 조심! 넘어질라!
횡단보도 건널 때
소리없이 다가와 속삭였다
- 신호등 잘 보고! 차 조심!
해가 반 뼘 남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번에는 키를 길다랗게 늘여
든든하게 나랑 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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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의 식사/ 염창권
안부 없는 날들이 공원에서 어룽졌다
왜 우는지,
말 못 하는 불운의 형식으로
전에 본 얼굴이었으나 낯설도록 희미해져
지나쳐 온 시간이 말갛게 고여 드는
길은 길과 연대하여 상한 내력 지우려고
질겨진 혀의 길 찾아 이 골목을 떠돌았다
투명한 날씨 탓인지 목덜미가 퍽 가늘다
허기라는 개에게 먹혔는지, 견뎠는지
밥 먹고 땀을 씻을 땐 침묵만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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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온에 와 너를 만난다 2/ 박현덕
와온에 와 갯가 보면
너와 나
사이 사이
잘려나간 마음들이
노을로 꽉 채워서
고요히
바람결 타고 온
슬픔에도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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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강성남
부엌창 앞으로 눈이 내린다
쓴다와 쓰다 사이
눈이 내린다
지난밤은 썼고, 오늘 아침은 쓰다
보고도 믿지 않는, 믿지 못하는 남자
보지 않고도 믿는 여자는 행복했고
행복한 줄 몰랐다
봄을 봄으로,
가을을 가을로 읽지 못한
여자의 콩깍지가 눈송이로 내린다
살아있는 한 문장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여주고 죽어준다
기꺼이 살려주고 살아낸다
한 번도 울어본 적 없는 분홍의 눈발이다
눈 오는 아침은
무슨 일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 강성남: 200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등단.
* 옮기면서 이 시인의 약력을 특별하게 적는 까닭은, 동명이인과 구별하기 위해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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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학 여름호>
시조 숲/ 서연정
뿌리에서 뿌리로 숨소리가 흐른다
허리 굽은 나무들 숲정이를 지킨다
메아리 쌓이고 쌓여 천년을 맺고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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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너덜경/ 차상영
구르다 돌아앉은 두루뭉술 바위 조각
서로가 뭉쳐야만 공생하지 않겠는가
증심사
삼존불상 내려 보며
무량수불 떠올린다
촘촘한 바위틈에 때 묻지 않은 백악기 흔적
알몸 된 산등성이 부대끼며 포옹한다
우리도
가진 것 버리고
맑게 우러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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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신발 신은 비둘기/ 오순택
분홍 신발 신고
공원에 놀러 온 비둘기
종종걸음으로
아이들 따라다니며
과자 부스러기 받아먹고
고개 끄덕끄덕 인사한다
햇볕도 콕콕 쪼아 보고
쪼그만 부리로
깃털을 다듬기도 한다
벚꽃이 떨어지면
꽃잎 밟을까 봐
푸르륵 날아가는
분홍 신발 신은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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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춘후 여름호>
봄, 피다· 42/ 신병은
바람도
채송화 작은 씨앗도
서로를 품어주는
봄날 오후
서로가 서로의 봄이 되는
낯익고도 따뜻한
저 한순간이 참 좋아
한 세상 너머
또 한 세상
빈 곳마다 햇살을 내어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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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슬픔/ 최형만
집안의 꽃은 앓은 흔적도 없다
꽃숭어리로 잘 살고 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죽어갔다
냄비에서 꽃게탕이 끓을 때였다
송이마다 뭉친 행간을 고르며 서시를 낭송하던
앵무새도, 이제는 조용하다
새장에서 부른 후렴 한 소절이
마지막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고등어가 프라이팬에서 익을 때였다
부젓가락이 긁어낸 숯불이 재가 되어도
아무 걱정도 없는 밤
그을린 별자리를 떠올릴 때마다
환하게 돋는 식탁에도
나는 갯메꽃이 필 거라고 믿었다
꺼지지 않는 조명 아래서
붉어진 입술이 몇 마디 말을 고르는 동안
그늘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절반의 어둠을 갖는 집어등처럼
안으로만 흘러드는 치어들
접힌 불빛만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계절을 모르는 나는 이제
앓은 흔적도 없다
밖으로 실금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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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구충회
미친 듯
요동치는
파도 소리 사나운 밤
울부짖는 파도 저편
아스라한 촛불 하나
아들아,
무사해다오
애가 타는 붉은 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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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셈 문제(둘)/ 문삼석
첫째 글자는 '수'와 '가'의 한가운데.
둘째 글자는 '밖'의 반대, 따뜻한 곳.
셋째 글자는 아침마다 뜨는 것. 동산 위로.
세 글자를 모두 합하면?
*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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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정신 가을겨울호>
옛 시인의 시/ 김영재
후득후득 빗방울 청댓잎을 때린다
옛 시인의 시 한 줄 정수리에 꽂힌다
그 사람 빈한했지만 바람에 시를 적었다
비 그치면 들에 나가 나락논 김을 매고
어둑녘 돌아와 등 밝혀 서책 읽었다
시 한 수 짓는 노고로 세상과 맞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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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방 앞에 1/ 노창수
저녁 거리 야채가게로 반 발짝 들일 때
메뚜기발 작은 손가락이 쇼윈도에 붙었다
인형 봐, 가리키는 눈 가만히 떼 놓는 어미
나중에 사 줘, 엄마 회색빛 훔치던 그 눈
지금은 말고 나중나중, 쉽게 바꾸며 한 방울
응 그래, 비밀인 듯이 닦아주며 미룬 나날
즈믄 강을 다섯 돌아와 궁금한 집 올라왔다
끈이라도 풀까 봐 현수막 건 재개발
나중에 나중을 잊은, 방 하나 찾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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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사판승/ 이택회
집을 나서 산에 들면 이판이든 사판이든
너나없이 절집에 제 할 일이 있으니,
마지를 훔쳐 먹고서 악업 짓지 말아야.
등단해 문인이란 고루거각에 오르거든
노벨은 언감생심 약수 건너 있을지라도
빗자루 손에 쥐고서 마당이라도 쓸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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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섬에서/ 이승은
내가면 늦가을을 내가 늦게 지나간다
내가약국, 내가우체국, 내걸린 저 이름들
저토록 내가, 나라고 해본 적이 언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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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격이 달라/ 윤정란
태양이 날 위해 빛나는 줄 알았다가
하얀 손 덥석 잡다 욕바가지 덮어쓰네
사는 게 부끄러워도 침 뱉으며 서는 거지
사랑도 격이 달라 예수는 못 되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뼈까지 우려먹다
쪼개진 햇싸라기에 혓바닥을 벤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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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팔십을 넘어서/ 지성찬
오랜만에 만난 선배 자네 많이 늙었다 하네
우연히 발견된 젊은 날 사진을 보니
그 때는 나도 이뻤었네 눈물이 핑 돌았네
봄꽃이 곱게 피는 날, 친구가 찾아왔네
싱그런 태양 아래 꽃웃음이 너무 고왔네
친구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꽃은 지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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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청(石淸)/ 김삼환
함석지붕 두드리는 빗소리 잦아들 때
작은 글자 메모 한 장 돋보기로 살펴본다
절벽을 타고 내려간 숨소리가 들리는 듯
누군가의 정성으로 내 삶이 더 빛날 때
단전에서 올라오는 긴 호흡을 멈추고
허공에 흐르는 기를 몸 안에다 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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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예/ 서연정
청태 입은 비석처럼 시인들 즐비하다
그 속에 복숭앗빛 숨은 듯 아니 보여
행여나 못 알아볼까 마음눈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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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찜한 난간/ 김종빈
옥상을 빙 둘러 난간을 만들어야 한다
역삼각 반달모양 비석 건너 마름모꼴
목적에 멋까지 살린 한 채의 예술이다
처음 보는 모형들의 자릴 찾아 맞추다
신경만 곤두선 채 혼란스러운 머릿속
손해가 많을 것 같은 찜찜한 작업이다
반나절째 못 맞추고 땀만 뻘뻘 흘린다
살면서 모든 일이 흑자라면 좋겠지만
적자도 지나고 보면 한 조각 퍼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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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시간*/ 정경화
해 하나, 나무 하나, 의자 위 노구(老軀) 하나
모래를 흩고 나온 황톳빛 칼바람에
저 멀리 도요새 한 쌍, 수평선을 넘는다
*변시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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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가시 여자/ 한분옥
사흘이 멀다 하고 뺨이라도 맞은 날은
바람을 고발하다 청가시를 품었더라
해마다 청가시 사이 탱자 꽃은 피었더라
한사코 하늘 이고 땅거미는 이미 지고
봄밤은 또 하루가 또 그렇게 무너지고
그래도 가시지 않은, 환장할 봄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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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꽃무릇/ 류미야
나는 살아도 보고 죽어도 보았어요
붉어진 눈시울쯤 잠시 감았다 뜨면
몸 없이 마음으로도 꽃피는 걸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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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창/ 김경아
시공을 초월하는 신대륙 스마트폰
손안에 부린 요술 유리창 저 너머로
발품을 팔지 않아도 새 세상을 휘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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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 봄/ 박환규
꽃비가 날린다.
봄꽃의 손짓이다
봄 맞을 준비도 없이
어쩌라고 봄이 불쑥
겨울이 길고 깊었으니
꽃향기는 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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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이라도 출 텐데/ 엄현정
하루는 소중하고 또 하루는 행복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잠이 들던 시간들을
또 다른 하루하루를 바람이 휙 쓸고 가네
겨울이 다가오면 구름에 가릴 뿐
보이지 않는 시간 맨발로 달려가서
그제야 네 이름 불러 춤이라도 출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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