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한옥순 김은자 윤태원 천양희 신현봉
한밤중에 / 이상국
몸을 나간 잠이 들어오지 않아
아들 방을 들여다보았더니
정강이가 침대 밖에 나와 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생각나
조용하게 문을 닫았다
갈데없이 거실에서 '사랑과 전쟁'을 보았다
그래도 우는 건 대부분 여자였다
남자들은 왜 다 그 모양인지
사실 이 집만 해도 그렇다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길을 잃고 눌러앉은 게 여기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내도 모른 체한다
냉장고가 가끔 잠꼬대를 할 뿐
날이 새려면 멀었고
공연히 잠든 화분에 물을 주었더니
나에게 왜 이러느냐고 한다
2022 여름호
다시올文學‘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의 정경이 모노드라마처럼 펼쳐진다.
공연히 열어보는 아들 방,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밖으로 나온 발은 잘라야 한다. 한 밤중에 이 무슨 엉뚱한 생각인가?
‘사랑과 전쟁’은 인기 드라마다. 나는 티비를 잘 보지 않기 때문에 드라마의 내용은 물론 요즘 인기 있는 배우의 얼굴을 전혀 몰라 가끔 “북한에서 왔느냐?”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사랑’만이 아니고 ‘전쟁’이 따라오는 걸 보면 스토리의 구성이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음을 엿보게 한다.
‘사실 이 집만 해도 그렇다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길을 잃고 눌러앉은 게 여기다‘
길을 잃고 눌러앉았다니..... 웃음이 나지만
사람살이가 어느 집인 들 특별하겠는가?
“잠이 안 오는데 우리 같이 별 구경 나갈까?“ 한다면
십중팔구는 “당신 미쳤어? 오밤중에 웬 별구경?” 할 게 뻔하다.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라면
“아, 별구경 너무 좋아. 자기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하며 손뼉을 치고 기뻐했겠지만....
별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혼자의 시간을 못 이겨 평소에 돌보지도 않던 화분에 찔끔 물을 준다, 단잠을 깬 화초가 역정을 낸다 “나에게 왜 이러느냐” 고. 화초도 잠잘 때는 건드리지 말아야 하나보다.
시인은 왜 잠으로부터 쫓겨나 몽유병환자처럼 혼자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는 하는지?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으니 말이다.
안경이 있던 자리 / 한옥순
떠나온 곳은 아득하니 너무 멀어졌고, 가야 할 곳은 아뜩하니 바로 눈
앞이네
안경이 있던 자리엔 긴 문장의 시 같은 生의 그림자가 동그란 무늬를
만들어 놓았네
렌즈를 닦던 손은 책장을 덮은 지 이미 오래, 후 하고 뿜어내는 담배
연기를 따라가던 시간 시간처럼 눈앞이 뿌옇네
옛날 그 집 마당에 달빛을 얹고 서 있던 자전거는 지금은 어디쯤을 유
랑하고 있을지 궁금하네
다리 굽은 안경만 덩그러니 지키고 있는 온기 사라진 방에선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네
2022 여름호
다시올文學 52
쉽게 쓰인 문장 속에 깃들인 잔잔한 은유가 시를 팽팽하게 끌고 간다.
떠나온 곳은 어디일까? 시인의 모태일까?
그렇다면 가야할 곳은? 왜 아뜩하니 바로 눈앞일까?
너무 캐묻지 말자. 시란 이렇게 알 듯 모를 듯 베일에 숨겨져 있을 때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시켜 잊히지 않는 시편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안경이 있던 자리는 아마도 아버지의 자리일 것이다. 늘 그곳에서 책을 읽고, 안경을 벗어두고, 담배를 피우고, 렌즈를 닦고... 하시던 아버지.
‘긴 문장의 시 같은 生의 그림자를 동그랗게 남기신 아버지,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떠나셨으리라.
부모님을 생각하는 일은 기쁨조차도 눈을 흐리게 한다.
아버지의 자전거는 늘 마당가 같은 자리에 서있었고 아버지가 떠나시고 난 뒤 자전거는 어찌 되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다리 굽은 안경만 덩그러니 지키고 있는 온기 사라진 방--
아, 아버지는 떠나셨지만 아버지의 방은 아직 존재하고 있구나. 아버지의 방이 존재한다는 건 어머니의 생존을 의미할 수 있다. 이 땅에 다리 굽은 아버지의 안경을 지켜줄 사람이 어머니 말고 누가 또 있겠는가?
아버지는 휘파람도 잘 부셨나 보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아버지의 방을 들여다보고 돌아서노라면 지금도 그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검은 눈의 수잔* / 김은자
마을에는 오래전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집 앞에는 노란 꽃이 피었고 꽃마다 검은 눈동자를 물고 있었다
살아온 아이는 집 밖을 서성였지만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옆집 개가 컹컹 -허공을 찢는 밤 아이의 눈동자가 달빛에
열리고 인기척을 느낀 아이의 엄마는 가끔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노란 꽃망울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수잔! 수잔!
술렁이는 아이의 이름 꽃잎에 까만 눈동자 숨어 엄마 나, 여기
있어요 울부짖는 여름밤
*Susan's Eye : 7월에 피는 노란색의 루드베키아 종류의 꽃 이름
2022 여름호
다시올文學 52
검은 눈의 수잔*이란 Black Eyed Susan, 또는 Susan's Eye라 부르는 루드베키아 종류의 꽃이다.
해바라기를 닮은 꽃, 태양의 꽃이라고도 부르는 이 꽃의 원산지는 북아메리카로 영국이 북미대륙을 탐험하던 시절 윌리엄 영국장교와 인디언추장의 딸 수잔과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휘관이었던 영국 장교 윌리엄은 인디언 추장에게 그 지역을 떠나줄 것을 요청 했지만 추장은 말을 듣지 않았고 대신 윌리엄 일행이 낯선 곳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배려해 준다.
그러다 윌리엄은 추장의 딸 수잔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러나 곧 인도로 떠나게 된다.
“전쟁이 끝나면 바로 돌아올게요."
윌리엄은 사랑을 맹세하고 떠났지만 수잔과 윌리엄의 사랑을 질투하며 역시 수잔을 마음에 두었던 영국장군은 윌리엄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날마다 윌리엄을 기다리던 수잔은 지쳐 쓰러지고 수잔이 쓰러진 자리에 피어난 검은 눈동자를 지닌 꽃, Black eyed Susan! 사람들은 그것을 수잔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수잔 수잔! 여름밤 꽃잎 흔들리는 소리는 마치 딸의 이름을 부르는 듯, 수잔의 어머니를
깨운다.
애틋한 사랑은 전설의 꽃이 되었고 전설은 다시 이렇게 한 편의 시로 탄생되었다.
풀씨 / 윤태원
신리마을 뒷산은
야(野)하다
벌거벗은 나뭇가지는
서로 엉켜 바닥에 나뒹굴고
제멋에 사는 들풀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오가는 이 발목을 잡는다
걸음걸음 발 사례를 치면
산 돌멩이가 거든다
밉지 않게 길을 내준다
이름 모를 들꽃이
보송보송 솜털로 유혹하면
손끝에 올려 훅 불어
바람에 실어 보낸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
잘 간줄 알았는데
집에 와보니,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와 있다
2022 여름호
다시올文學 52
뒷산이 야(野)하다는 시인의 표현이 산뜻하다.
‘벌거벗은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나뒹‘군다거나
‘들풀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발목을 잡는다‘는 문장들이 은근히 野한 정황을 만들어낸다.
발사례는 아마도 발사래의 오기가 아닐지. 왜 발사래를 쳤을까? 밉지 않게 길을 내준다는 말에도 그럴듯한 의미를 숨기고 있다.
‘보송보송 솜털로 유혹하’는 꽃들을 ‘손끝에 올려 훅 불어’ 날려 보냈는데
집에 와 보니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다는 마지막 연도 재치가 넘친다.
산길을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마치 어느 홍등가를 걸어 나온 남자의 이야기를 술회하듯 적고 있다.
자연현상을 인간세계의 모습으로 환치시키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신인작가의 앞날이 밝아 보인다.
그는 낯선 곳에서 온다 / 천양희
그가 낯선 곳에서 오는 것은
낯선 풍경이 함께 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산이 웃는다고 쓰고
가지가 찢어지도록 달이 밝다고 쓸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비를 끈이라 쓰고
빗방울 속에 신이 있다고 쓸 수 있었을까
그가 낯선 곳에서 오는 것은
낯선 사람이 함께 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고통은 때로 축복이 된다고 쓰고
가난은 때로 운치가 있다고 쓸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우는 꽃이란 없다고 쓰고
휩쓸리는 낙엽을 쫓기는 여진족 같다고 쓸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개미의 행렬을 보고 인생은 덧없다고 쓰고
객기로도 그리워지는 밤이 있다고 쓸 수 있었을까
그가 낯선 곳에서 오는 것은
낯선 삶이 함께 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삶을 그물이라 쓰고
어떤 죽음은 후련한 삶이라고 쓸 수 있었을까
어느 땐
낯선 바람이 함께 와서
무릎을 땅에 대고
제 속이 검게 썩어가면서도 열매를 맺는
먹감나무를 오래 생각하였다
천양희 시집 <지독히 다행한>창비
2022 여름호
다시올文學
그는 누구? 아니, 무엇일까?
그는 왜 낯선 곳에서 올까? 어떻게 풍경이 함께 올까?
그리고 그가 쓴다니....
산이 웃는다고 쓰고
가지가 찢어지도록 달이 밝다고 쓰고
비를 끈이라 쓰고 물방울 속에 신이 있다고 쓰고
고통은 때로 축복이라 쓰고 가난은 때로 운치 있다고 쓴다.
우는 꽃이란 없다고 쓰고 휩쓸리는 낙엽을 쫓기는 여진족이라 쓴다.
....................
....................
삶은 그물이며 어떤 죽음은 후련한 삶이라고 쓴다.
누구일까, 아니, 무엇일까?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은
하나님도 철학자도 이렇게는 쓰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엉뚱한 대구(對句)로 낯선 풍경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은 오조지 시, 시인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을 위대하다고 하는 것이리라.
낯선 풍경과 함께 오는 시를 위해서
시어를 더 갈고 가다듬어야할 의무를 느낀다.
어느 교수님이 말했다.
‘단어 하나를 쓸 때마다 1만원의 돈을 지불한다고 생각하고 쓰라’고.
언어를 남발하지 않으면서 상식을 넘어서는 기발한 표현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시인의 소임이 아닐까 한다.
그 낯선 풍경- 어머님을 보내며 / 신현봉
말문이 막힌다 .
2022년 1월 25일
당신께서 돌아가신 날은
까마귀도 울지 않는 으스스한 날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는 요양병원에서
코로나에 감염.
전문 치료병원으로 옮긴지 8일 만에 별세.
그러는 동안 면회 한 번 하지 못했다.
병원 주차장 컨테이너에
설치된 CCTV 모니터를 통해 입관을 지켜보았다.
덮고 있던 이불로 시신을 둘둘 말아 관에 넣고
그 위에 수의를 올려놓는 것으로 끝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종잇장처럼
흩날리며 떠돌던 날들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나는 부서지는 파도처럼 울었다.
시詩 99
2022. 4
문화발전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는 코로나에 감염되었고, 전문치료 병원으로 옮기셨지만 8일 만에 세상을 뜨셨다.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를 면회 한 번을 하지 못한 채
어머니의 장례는
‘병원 주차장 컨테이너에
설치된 CCTV 모니터를 통해 입관을 지켜보‘는 것으로 끝났다.
‘덮고 있던 이불로 시신을 둘둘 말아 관에 넣고
그 위에 수의를 올려놓는 것으로 끝이었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고 기막힌 일인가?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나는 부서지는 파도처럼 울었다.‘고 한다.
전 세계를 휩쓴 펜데믹의 여파는 우리가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장례절차마저 무시하게 되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난국을 우리는 어쩌면 ‘설마, 나는 괜찮겠지’ 하는 요행수에 기대어 곡예 하듯 넘기고 있는 것이리라.
시적인 묘사도 특별한 비유도 없이 사실적인 기록이지만 문장 속에서 시인의 통곡이 들려온다.
시가 무엇인가? 현란한 수사와 세련된 문체로 이루어져야만 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날것(生)처럼 투박한 언어일지라도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면 충분히 좋은 시라고 정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