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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23-30) 신자의 죄 중에도 역사하는 예수님
누가복음 강해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눅 4:23-30)
타당한 반응
예수님은 유대 지역에서 일 년 정도 사역을 하다가 세례 요한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여러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며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는데 그 소문이 인근에 널리 퍼졌습니다. 고향 나사렛에도 들러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여, 이사야서의 메시아 예언을 찾아서 낭독하고 설교하자 회중은 은혜롭게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는 선언으로 설교를 마무리했는데, 당신이 바로 메시아로서 그 시간 그 장소에 구원의 은혜를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랍게 여기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멸시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장 과정을 쭉 지켜봐 온 이웃 청년이 메시아일 리 없는 데다, 너무나도 불경스럽게 인간이 하나님을 사칭했다고 간주한 것입니다. 사람이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엄청난 의미의 설교를 생전 처음 접한 고향 사람들로선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곧바로 그들을 꾸짖는 말씀을 했는데, 언뜻 주님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습니다. 회중은 이제 크게 화를 내면서 주님을 처형하려 들었는데, 결과적으로 주님이 그런 사태를 자초한 꼴입니다. 혹시 얼마 동안 떠났던 사탄이 배후에서 사람들을 조종한 것은 아닌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꾸중한 첫 마디는 회중이 품은 생각을 정확히 지적해 낸 것이었습니다. 이는 주님이 그냥 눈치로 때려잡은 말씀이 아닙니다. 네 복음서에 비슷한 경우가 여러 번 기록되었듯이, 그들이 말하기도 전에 미리 꿰뚫어 아시고서 그 잘못된 생각을 야단친 것입니다.
그 후반에 “너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라고 말한 것은 당시의 정황상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주님이 갈릴리로 돌아오자, 유대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일들에 대한 소문이 이미 사방에 퍼져 있었습니다. (14절) 나사렛 사람들도 가까운 가버나움에서 주님이 베푼 이적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큰 이적을 일으켜서 정말로 메시아인지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의사가 행할 일
그런데 주님은 그에 앞서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그런 요구를 할 것이라고 정곡을 찔렀습니다. 수많은 속담이 있는데 특정한 속담을 들었고, 거기다 ‘반드시’라고 확정적으로 단언했습니다. 이는 인간 랍비가 눈치로 추측할 수 있는 사항이 절대 아닙니다. 깊은 속내가 들켰으면 곧바로 겸손해져야 하나 회중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속담의 뜻은 “자기 문제도 해결 못 하는 사람은 어떤 권위도 주장할 수 없다”라는 것이라, 주님더러 “말만 하지 말고 능력을 보이라”는 요구였습니다. 특별히 의사가 그래야 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국가가 인증하는 의사 면허 제도가 없어서 민간요법을 스스로 터득하거나 다른 이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경험이 많은 의사만 신뢰할 수밖에 없었고, 만약 병이 들었거나 치료 실적이 없으면 의사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속담처럼 고향 사람들은 요셉의 아들이 당시의 유대교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의 힐렐이나 샴마이 학파 어느 쪽 교육 과정도 거지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스스로 랍비라고 칭하며 남을 가르치고 사역하다 못해, 이젠 메시아까지 사칭한다고 속으로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말하자면 네가 목수 일은 잘할지 몰라도 사람들의 질병을 고쳤다는 소문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는 증거를 많이 보여야만, 바꿔 말해서 현실적인 형통과 안락을 우리가 원하는 만큼 보장해 주어야만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눈이 먼 것과 모든 눌림에서 구원해 준다는 천국 복음에 관한 주님의 설교에는 감동받았어도, 그에 합당하게 자신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헌신할 의사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채워서 자신을 세상 앞에 자랑하려는 원죄에 철저히 묶여 있는 모습입니다.
의사라면 자기 병부터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정말로 메시아라면 가장 먼저 고향에서 그런 이적을 보였어야 하지 않느냐는 뜻도 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므로 고향 사람에게 더 큰 이적을 베풀면 조금 생각을 고쳐먹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사회적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서, 예컨대 민족 가문 혈연 지역 등을 구분하여 복을 차별적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24절)라고 당시에 통용되던 또 다른 속담을 들어서 그들의 잘못을 꾸짖었습니다. 이는 큰 업적을 이룬 자가 자기 고향에선 오히려 냉대를 받는다는 뜻인데, 주님은 선지자에게 적용했습니다. 고향 사람은 그 사람의 평범했거나 잘못한 과거를 잘 알기에 쉽게 영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탈린은 공산 혁명으로 권좌에 앉자마자 자기 과거를 아는 사람 약 오천 명을 몰살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같이 큰 업적을 달성하면 고향 사람들이 환영 경축한다는 현수막을 동네 입구에 크게 써 붙입니다. 금의환향하는 날에는 동네잔치를 벌리고 모두가 자기 일인 양 기뻐해 주니까, 이 속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섣불리 생각해선 안 됩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 동네에 이런저런 특혜가 생기리라 기대한 것이며, 최대한 양보해도 그런 위대한 영웅과 친한 이웃 사람이라고 동네방네 뻐기겠다는 뜻입니다. 한국에는 오히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는데, 고향 사람보다 더 가까운 친척인데도 잘 되면 크게 시기하고서 내심으로 미워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주님이 인용한 이 속담의 더 깊은 뜻은 사람은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 질투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속담을 선지자에게 적용한 뜻은 너희 선조들이 구약 시대 내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박해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당신도 자기 민족에게 배척당한 그런 선지자에 속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공사역 중에 당신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감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감당하리라”(눅11:50,51)라고 대놓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최고로 참혹하게 핍박받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태생적으로 자기만 높이려는 원죄에 묶인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남이 잘되는 꼴을 축하하기는커녕 깎아내리지 못해서 안달합니다.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를 이스라엘이 다 죽인 것도 자기들의 도덕적 자존심과 영적 우월감이 손상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우상을 숭배하며 즐기고 있는 온갖 추악한 쾌락에서 발을 빼기는 너무 싫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향에서 가장 먼저 이적을 일으켜야 했다고 주님을 다그치는 까닭도 바로 그런 삐뚤어진 자존심에 기인한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의 설교를 은혜롭게 듣고도 전혀 회개하지 않는 것도 현실 삶의 풍요와 안락만 추구하겠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신 주님은 그들의 썩어빠진 영혼의 상태를 너무나 정확히 아셨기에 그에 딱 들어맞는 두 속담을 인용한 것입니다.
두 선지자의 예화
주님은 이어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두 선지자의 예를 들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심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우쳐 주려는 뜻이었으나, 그들은 그 예화를 듣자마자 도리어 크게 분노하고서 주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주님은 먼저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 큰 흉년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는 멀리 떨어진 시돈 땅의 사렙다 과부에게 그를 보내어서 기근에서 구해준 사건을 들었습니다. (왕상17:8-24) 하나님이 그 과부만 따로 편애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갈릴리 지역인 북 왕국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를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두가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의 폭정과 우상 숭배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인 엘리야를 멀리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엘리사 선지자가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의 나병만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왕하 5장)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기 직전에 선지자 직을 이어받았기에 이스라엘 사회 전체의 영적인 분위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아만을 편애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부가 하나님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출신 여종이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추천해 주었는데, 그 여종도 고향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먼 이방까지 종으로 팔려 갔을 것입니다.
이 두 예화의 주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과부와 나병 환자는 유대 사회에선 부정한 죄인 취급을 받았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종, 민족, 국가, 종교 등으로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을 구약 역사 속에 생생하게 실현한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고향에서 먼저 큰 이적을 베풀어야 한다는 나사렛 사람들의 고집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만약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면,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이방인에게 가서 은혜를 베풀 것이라고 말한 셈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방인을 편애하거나 이스라엘을 차별하기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내신 당신을 못 알아본 필연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주님은 두 예화를 통해 나사렛 사람의 완전히 닫혀버린 영적 안목을 다시 열어주려 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당시 유대인들은 매우 편협하고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사렛 사람은 예수가 율법도 모르는 부정하고 죄 많은 이방 족속을 우대한다면, 더더욱 메시아일 리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무엇보다 두 예화는 너희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영적으로 더 열등하고 하나님께 저주받을 자라는 매우 모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회중은 재판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예수가 민족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를 지었다고 판결내렸습니다.
이스라엘에선 민족을 배반한 자에겐 벼랑에서 떨어트려 죽이는 벌을 적용했습니다. (대하25:12) 하나님을 모욕하는 때도 첫째 증인이 먼저 돌로 쳐 죽이도록 했으나, 미쉬나라는 2-3세기의 랍비 문헌에는 돌로 쳐 죽이는 올바른 방법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트리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처럼 첫째 증인이 따로 없고 많은 이들 앞에서 신성 모독의 죄를 지었을 경우에 해당할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에서 사형은 로마 정부의 관리만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로마는 식민지의 종교 자유를 허용했기에, 스데반의 순교 사건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모욕한 자를 산헤드린이나 유대 랍비의 주도로 돌로 처형해도 묵인해 주었습니다. 자기가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당하면 증오심이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웃 청년 예수가 민족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판단되니까 더 크게 분노했고, 나름대로 공평하게 처형하려고 동네의 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트리려 한 것입니다.
데자뷰 같은 두 사건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는 주님의 말씀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갈릴리 지역 사람은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그 외적 조건 때문에 멸시를 받았습니다. 주님이 제자로 택한 나다니엘조차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무시했을 정도입니다. (요1:46) 그렇다면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을 외적 기준으로 판단 멸시해선 안 될 것입니다. 거지가 거지를 거지라고 욕하는 것은 말도 안 되며 코미디 소재감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된 시어머니 밑에 더 된 시어머니가 나온다’라고 하듯이, 멸시받은 자가 남을 더 멸시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기대 생각 판단하는 것 이상으로 더 악하고 치사한 존재입니다. 모두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듯이, 자신의 실체를 정말로 엄격하게 바라보면 아무도 자기를 의롭다고 떳떳이 자랑할 수 없습니다. 아니 자신이 얼마나 죄 많고 추한 존재인지 잘 알기에 스스로 자신이 싫어질 때가 많습니다. 모든 이가 자신의 진짜 실체가 탄로나기 싫어서 세상이 알아주는 요소들로 치장해서 의로운 척할 뿐입니다. 속은 까마귀인데 겉으로만 백로 시늉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안에서 천대 받고 있는 나사렛 사람이 같은 동네 사람인 예수를 단지 목수의 아들이라고 천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곧바로 두 예화를 통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멸시 천대 상종도 하지 않는 이방인 과부와 나병 환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지 않느냐라고 상기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멸시하는 자들도, 아니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당신만의 사랑으로 너희와 똑같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제발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이 당신께서 창조하신 당신의 자녀이므로 절대로 당신 쪽에선 차별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현실의 외적 상태가 아니라 도덕적 영적 실상인데, 그런 기준으로 따지면 나사렛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가 철저한 죄인이라서 오직 긍휼로 사람을 바라보시는 데 반해, 인간은 스스로 높아져서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자랑하며 남을 자기 발 아래에 두고서 차별 멸시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나중에 이 두 예화와 동일한 모습의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먼저 가나안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었습니다. (막7:24-30, 마15:21-28) 이방인인 데다 딸이 귀신 들렸으니 부정한 자의 대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는 여인에게 짐짓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라고 일단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개들도 아이들이 먹다 남은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면서 주님의 긍휼에 대고 간절히 호소했고, 주님은 즉시로 그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고 선포하며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겸손한 믿음을 보시고 십자가 복음이 이방에도 반드시 전파되어야 한다고 예표해주신 것입니다. 이는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를 기근에서 구해준 사건의 복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병에 걸린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멀리서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었는데,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쳐준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마8:5–13 눅7:1–10)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옴을 감당할 수 없으니,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도 부하에게 말로만 명령해도 그 말에 권위가 따르는데, 메시아인 주님의 말씀에는 더더욱 큰 권능이 역사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대면하지 않고서 그 말씀대로만 따랐더니 치유 받았던 이적과 데쟈뷰인 셈입니다.
놀랍게도 주님이 공사역 중에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고 구원해 주었어도 믿음이 크다고 직접 칭찬한 경우는 이 두 사람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봤을 때는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부정한 죄인들의 대표였으나, 사람을 외적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고 그 깊은 심중을 꿰뚫어 아시는 주님이신지라 정반대로 평가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이 두 이방인처럼 하나님보다 더 높아진 자신을 완전히 낮추어서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고백하며 그분의 처분에만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주님이 그들을 택하여 성령으로 간섭하여서 당신께 자기 전부를 의탁하는 순전한 믿음을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모여 성경을 배우며 예배드린 너희의 믿음이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에 비해서 훨씬 잘못되었다고 견책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종교적 믿음이 부족하거나 약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여호와를 위하는 열심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철두철미 죄인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여호와 그분이 아니라 그분이 주는 외적 축복만 사랑했던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 그들이 거꾸로 주님을 하나님 모욕죄로 처형하려 들었으니 이 얼마나 웃지 못할 희극, 아니 크게 통곡할 비극입니까?
이적을 베푼 주님
정작 이 사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은, 주님이 고향 사람들을 야단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이적을 여기서도 해 보이라고 요구했는데, 그들로선 미처 몰랐겠지만, 주님은 사실상 두 번의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우선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의 깊은 생각을, 그것도 어떤 속담으로 당신을 시험할지 정확하게 알아내서 깨우쳐 주었습니다. 모든 정황상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을 눈치로 짐작한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틀림없이 주님의 지적을 받자 모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들의 믿음이 이방의 과부나 나병 환자보다 못하다고 하니까 분노가 치밀어오르며 자기들이 크게 놀랐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둘째는 동네 사람들이 주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 했으나 그들 가운데를 유유히 빠져나온 것입니다. 성경은 구체적인 과정은 기록하지 않았으나, 주님 혼자선 모든 동네 사람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도 주님은 공사역 중에 이와 비슷한 경우를 몇 번 겪었으나 모두 아무 문제 없이 빠져나왔습니다. (요7:30, 8:59, 10:39)
어떤 주석가는 목수라는 말이 돌을 쪼개는 석공의 뜻도 있으므로 주님의 힘이 아주 세었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목수도 힘이 세긴 마찬가지이며, 석공이 아무리 힘이 세도 두세 명은 몰라도 군중을 상대로 그것도 여러 번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온화하고 겸손하게 수난받는 종으로 오셨기에 단 한 번도 무력으로 사람들을 제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까닭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아무런 행동과 말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기 때문입니다. 돌처럼 완전히 굳어졌다기보다는 자기들 의사와 달리 행동이 전혀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적 권능에 그들의 몸과 마음이 완전히 압도당한 것인데, 자기들도 왜 주님을 떨어뜨리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을 것입니다.
이 두 이적이 얼떨결에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났고, 가시적으로 비상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선 이적인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개중에는 주님이 자기가 알던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뭔가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지닌 메시아일 수 있겠다고 짐작하는 자도 있었을 것이나, 거의 모두가 꼼짝 못 하고 당했다고 더 분이 나서 씩씩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십자가에 달린 주님에게 사람들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눅25:35)라고 조롱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일부도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 처형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약 2년 전에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할” 것이라고 꾸중했던 주님의 말씀이 실현된 것을 깨닫고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두 예화까지 포함해 당신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나중에 다 정확하게 이뤄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계시해 놓은 ‘당신의 말씀에 반드시 증험이 따르는 모세 같은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신18:15-22)
나아가 자기들은 나사렛 예수를 죽이려 했으나 주님이 실은 두 이적을 베풀어주었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그 큰 권능을 새삼 기억하고서, 십자가 처형을 주관한 로마 백부장처럼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하는 자도 나왔을 것입니다.
주님이 낭떠러지에서 유유히 걸어 나온 것은 당신의 생명은 오직 당신께서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겠지만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번 예고했기에 그 죽음을 당신께서 스스로 이끈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자기 생명을 자기가 주관하지 못하며 생명을 주시고 앗아가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당신이 바로 모든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여서 주관하는 하나님이라고 온 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이런 권능의 이적들과 사람들의 생각까지 꿰뚫어 아는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사역 중에 주님의 치유 이적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온갖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새벽부터 찾아와서 제발 자기를 고쳐 달라고 간구했고, 주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즉석에서 고쳐주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태도는 이와 전혀 달랐습니다. 네가 최근에 그렇게 유명해졌다지만, 대체 목수 요셉의 아들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어라며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팔짱을 끼고 지켜본 것입니다. 주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도 환자를 데리고 와서 겸손히 고쳐 달라고 간청했다면 주님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고쳐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나 치사하고 완악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가족 가운데 원수가 나온다고 경고했듯이 더 살갑게 대해주어야 할 가까운 고향 사람이 주님을 더 냉대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말씀드린 대로 이적까지 보여주며 당신께서 행하실 바를 묵묵히 다 행하셨습니다. 당장은 모르겠지만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에는 이 회당에서 있었던 일을 다 기억나게 하시고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끝까지 완악하게 당신을 거역하겠지만, 그중에 당신께서 택하신 남은 자들은 끝까지 사랑하여서 기어이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 내용은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완악하게 거역 대적했다는 것과, 그럼에도 하나님은 묵묵히 당신의 구원 은혜를 당신께서 택한 남은 자들에게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은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당신을 거역 대적 배반한 이후부터 골고다 언덕을 거쳐서 지금껏 한시도 그치지 않았고 재림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나사렛 회당에 분명히 사탄이 숨어 들어와서 주님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다가, 사람들이 주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자 잔뜩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주님이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자 곧바로 이때다 하고서, 유대인 특유의 종교적 도덕적 우월 의식을 살짝 부추겼을 것입니다. 사탄은 절대로 대놓고 사악한 모습으로는 활동하지 않고 항상 광명한 천사로 위장합니다. 각자에게 가장 잘 넘어가는 약점을 파고드는데, 이 회당에선 유대인 특유의 비뚤어진 선민의식을 건드린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이웃집의 장남을 미워하며 죽이겠다고 덤벼들었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 줄을 놓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를 영적으로 살인한 사탄이 그들의 영혼을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실마저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사탄과는 상대하지 않고 고향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또 이적까지 일으켜 주었습니다. 때가 되면, 즉 앞으로 이 년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사탄의 머리를 완전히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구하는가?
혹시 안식일마다 구약성경을 낭독하고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하는 이스라엘 사람의 이런 모습이 너무 완악하게 여겨집니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살인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까? 죄송하지만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도 그들과 똑같습니다. 우선 새벽 예배 때마다 기도하는 제목을 엄밀히 따져본다면, 거의 모두 자신을 높이려는 내용뿐일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죄는 짓지 않는다고 쉽게 자부해선 안 됩니다. 주님은 말로서 형제를 바보라고 욕하면 인격적 살인이라고 정죄했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서 배가 너무 아프기에 새벽마다 제발 내가 사촌보다 더 형통케 되어서 더 이상 배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눈물 흘리며 매달리면 엄격히 따져서 그 사촌을 말로 살인하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그 사촌이나 형제가 교회 안에 성도일 때도 많습니다. 믿음이 훨씬 약해서 새벽기도회에도 잘 나오지 않는데 현실적으로 더 크게 형통하니까 시기 질투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잘못하고 있다는 원망마저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유일하게 저주했던 종교적 우월감에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새벽마다 하나님에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환경을 고쳐주고 먹고 마실 것이 넘치도록 채워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합니다. 그분의 크신 능력만 바라보고서 기적 같은 은혜로 채워주기만 원합니다. 하나님이 당장 그럴 수 있으면서도 왜 그러지 않느냐고 닦달합니다. 그동안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 모임에 빠지지 않았고 때로는 구제와 전도도 열심히 했다고 내세우며, 얼마든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데도 그렇게 해주지 않으니까, 심지어 하나님 자격이 없다고 대들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도 수시로 발동하는 이런 완악함은 벌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연약함을 깨닫는 순간 오히려 큰 소망으로 바뀌는 기회가 됩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 우리는 그 추악함을 훨씬 뛰어넘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죄의 본성에 여전히 묶인 우리의 가련한 모습부터 겸손히 인정하게 해줍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새벽기도회가 본문의 나사렛 회당 같은 모습일지라도, 반드시 하나는 기억하게 됩니다. 사탄이 우리의 탐욕과 자존심을 계속 흔들어도 예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말없이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빌 바를 모르는 우리를 위해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해 주시고, 예수님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위해서 당신만의 거룩한 역사를 묵묵히 행하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의 잘못을 정확히 깨닫게 해서 성경의 진리에 주목하게 이끄십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계시해 준 천국 복음을 성취한 당신의 십자가 긍휼만 소망하게 만듭니다. 사탄에 유혹받는 세상 삶은 물론 원죄의 잔재로 흐려진 영적 안목을 하나님 쪽으로 되돌리게 해주십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한마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현실적 고난과 신앙적 갈등의 해결책은,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이 곤고한 죽을 몸에서 건져주실 분은 예수님뿐이다”라는 것입니다.
(4/26/2026)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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