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참변
푸트의 수기
내가 (1920년) 11월 4일 누루바우촌(간장암동)에 갔더니 촌인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 "10월 30일에 왜병이 내습하여 31명이 살고 있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을 가하였다." 나도 가옥 9칸과 교회당, 학교가 잿더미로 변한 것을 보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또 11월 1일에는 왜군 17명, 왜경 2인 및 한인경찰 1명이 이 촌에 와서 암자들을 모조리 끌어내다 죽인 후 죽은 사람의 처를 불러내어 죽은 자의 경력을 말하라고 고문하였고, 그 다음에 촌락의 모든 주민을 모아서 일장연설을 한 후 외국선교사가 이 곳에 온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또 벌써 죽여버린 시체를 촌인을 시켜 한 곳에 모아놓고 그 시체에 연료를 덮어 불을 질러 재로 만들어 버렸다.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특히 10월 30일 아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에서 불령선인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살해하고 민가 12호 및 학교, 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저들 선교사는 다음 31일 그 곳에 가서 사진기로 피해상황을 촬영하고(시체에 밤 껍질을 덮어 태웠으나 반만 타서 숯이 되어 있는 것을 촬영하였다고 한다) 조위금 2백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차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 것은 사실이다. 본건을 혹은 학살사건으로 선전의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지 모르므로 크게 경계를 요하며 군대측에 특별한 주의를 주고 있다.
장암동부근의 토벌상황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3에 수록
미국인 선교사 마틴의 수기
10월 30일 우리들(선교사들)은 이 부락(토문자)에 가서 목격자의 말을 들었다. 29일 일본군 보병부대가 이 예수교 촌을 포위하였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밀짚 위에 불을 질러 남자라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집밖으로 끌어내어 사살하고 채 죽지 않은 사람은 불 속에 집어넣었다. 집 안에서 이 참경을 보고 통곡하는 가족들이 있는 집까지 불을 질러 전 부락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줄임) 우리들은 잿더미를 헤치고 한 노인의 시체를 보았다. 몸에는 총 맞은 곳이 두어 군데 있고 살은 벌써 다 타버리고 목만 붙어 있었다. 우리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다른 데로 갔다. 방화한 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시체 타는 냄새가 났다. 각기 어린애를 업고 자기 가족의 무덤 앞에 앉아 우는 소리가 너무나 처량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돌아다니며 이 참경을 사진 찍다가 살아남은 한 할아버지와 며느리가 통곡하면서 잿더미 속에서 불에 그슬린 살덩이와 부서진 뼈, 아직 타지 않은 것을 줍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을 청하여 기도 드리고 위로하였다. 이 때에 내 마음이 어찌나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는지 사진기를 고정시킬 수 없어 몇 차례나 고쳐 찍었다. 내가 알고 있는 36개 촌락에서만 1백 40명이 학살되었다.
이강훈, 무장독립운동사에서 재인용
1920년 10월 하순 우리는 안도현으로 향하였다. 불령선인이 조직한 광복단이 봉천성 안도현 유두산에 있었다. 40여 호의 한인과 3호의 중국인으로 된 부락으로 일본인은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는 항일 부락이었다. 이 부락은 전부가 광복단원으로서 여러 가지 계획이 모두 여기서 모의되었다. 먼저 우리 부대는 그 부락을 습격하여 40여 호의 가옥을 불지르고 광복단 연병 교관 및 제2대장, 외교부장, 외교부원 3명, 아울러 구장, 부구장, 광복단 병졸(총기 휴대 중) 등 10여명을 독가스를 사용해 살육하였다. 우리 부대는 직동을 공격하였다. 직동(24도구라고도 함)에 있는 조선인 부락은 12호 중에 중국인은 1호도 없이 모두 불령선인 뿐이다. 총독부가 손을 댈 수가 없는 곳으로 자못 중대시하는 곳이다. 여기서 우리 부대는 일본 관헌의 간청에 따라 곧 습격하여 이곳을 불살라버리고 불령선인을 살육하였다. 17세 이상의 남자는 전부 죽이고 그밖에 늙은이, 애들은 압록강 안 조선 땅으로 보냈다. 그리고 21도구(장백현) 강안의 불령선인 부락에는 정몽학교가 있다. 그 학교는 항상 반일 사상을 고취하므로 이것을 때려부술 필요가 있다고 일본 관헌이 나에게 상담해 왔으므로 동월 하순 이를 습격하여 민가와 학교를 모두 불살라버리고 불령선인 27명은 독가스를 써서 살육하였다. <천락각서>
* 천락각서는 장백현 일대에서 학살에 참여하였던 나가노(中野天樂)의 글이다.
이강훈, 무장독립운동사에서 인용
해설 ; 1920년 10월 11월 간도에서 일어난 경신 참변 피해는
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의 보고에 따르면, 인명피해로 3,664명 피살, 체포 155명이며, 재산피해로 민가 3,520동, 학교 59개교, 교회당 19개소, 곡물 59,970섬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 토벌 자료(간도출병사)에 따르더라도 피살 494명, 체포 707명, 민가 531ehde, 학교 25개소를 소각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