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소설원고: 32매)
묘골 이야기
- 여종의 지혜가 박팽년의 혈손을 지키다.
김정순
닭밭골의 하늘에는 분홍빛 뭉게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달성현감의 집 별당연못에는 무지개가 뜨고 후원의 감나무에서는 까치들이 울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운이 집안을 감쌌지만, 안방마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아기를 낳기 위해 친정집 별당에 머물고 있는 아씨에게 산기가 보였다.
안방마님은 집안의 종들에게 점심까지 챙겨 들로 보내고, 여종 안골네 모녀는 대구에 있는 큰 시장을 다녀오게 했다.
- 으음 으으음 아이고.
별당에서 이를 악물고 산고를 견디는 아씨의 신음소리가 장지문을 뚫고 흘러나왔다.
행랑채에서도 여종 영분이가 아이 낳는 고통을 참느라 방구석을 이리저리 기어 다니고 있었다. 영분의 이마위로 땀방울이 돋았다. 영분은 너무 고통스러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아씨와 함께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영분은 아씨가 친구처럼 자매처럼 대해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열병을 앓아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도 마님께 울며 애원했었다.
“어머니! 영분이가 죽을 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마님은 의원을 불러 진맥하고 탕약까지 다려주며 목숨을 살려주었다.
영분은 아씨의 시아버지가 역적모의를 했다는 이야기를 집안 종들의 숙덕거림으로 들었다. 그래서 아씨는 관비가 되었다고들 했다. 관비의 신분이 된 아씨가 딱하고 가슴 아팠다. 어떻게 아씨를 도울 수 있을까를 궁리했지만, 임금을 모반한 사건이 얽혀있어서 한갓 여종의 신분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출산의 순간, 번쩍하는 생각이 영분의 머리를 스쳤다.
마님과 아씨를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아씨가 아들을 낳고 자신이 딸을 낳는다면 아무도 몰래 아기를 바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설사 둘 다 아들을 낳아도 바꾸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했다. 아씨의 아기씨를 죽게 할 수는 없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조차 희미한 것 같은 아찔한 순간을 견디며 힘을 주었다.
- 으앵 으애앵.
영분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엎드려 있는 아기를 뒤집어 아래를 살폈다. 딸이었다.
휴! 다행이다 싶었다. 아들을 낳았다면 자신의 아기가 죽임을 당해서 가슴 아프겠지만, 딸이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영분은 아기의 탯줄을 가위로 잘랐다. 태와 연결된 탯줄을 지긋이 당기며 힘을 주었다. 태반이 몸 밖으로 나왔다. 영분은 아기를 씻기지도 않고 싸개에 쌌다. 문을 열고 밖의 동정을 살핀 뒤 아기를 안고 나갔다. 담벼락 밑을 살금살금 걸어 쪽문을 열고 별당 안으로 숨어들었다.
- 으앙 으앙 응앙.
별당에서도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나왔다.
“마님.”
영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마님을 불렀다.
“누군 게야!”
영분은 대답도 않고 방으로 급히 들어갔다.
“마님, 제가 딸을 낳았습니다. 혹여 아씨가 아들을 낳았다면 아기를 바꾸어 기를까 해서요.”
마님과 아씨는 눈이 등잔만큼 커지며 영분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사내아이를 낳아 얼굴들이 하얗게 질려있던 중이었다.
“뭐라고? 아기를 바꾼다고…!”
잠시 생각에 잠긴 마님과 아씨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영분의 충성심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혜로움에 더 놀랐다.
“아씨, 빨리 서두릅시다. 장에 간 안골네 모녀가 돌아올 때가 되어갑니다. 속히 아기씨를 제방에 데려가야 합니다.”
마님과 아씨도 영분이의 말에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이면서 따랐다.
영분은 아기씨를 안고 행랑채로 돌아왔다.
미처 숨도 돌리기 전 안골네 모녀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다녀왔습니다.”
“속히 미역국을 끓여라.”
마님은 안골네에게 일렀다.
“별당아씨는 딸을 낳았고 영분이는 아들을 낳았다. 영분이도 아씨와 차이를 두지 말고 정성으로 산후바라지를 해 주어라.”
마님은 일하러갔던 종들이 돌아오자 영분의 신랑 덕배를 불러오게 했다.
“덕배는 관아로 달려가서 아씨가 딸을 낳았다고 고해라.”
“네, 마님.”
마님과 아씨와 영분이만이 아는 임금을 속인 엄청난 비밀이었다. 만약, 비밀이 발각 나는 날에는 마님도 아씨도 영분도 무사하지 못할 일이었다. 가문에 미칠 화를 생각하며 마님은 몸을 떨었다. 그래도 현감에게는 얘기해야했다.
“영감,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마님은 퇴청한 현감에게 조용조용 이야기하며 도움을 청했다.
“아는 사람이 누구누구요?”
“딸과 나 영분이 뿐입니다.”
현감은 깊은 고민 끝에 운둔할 곳을 찾았다. 그곳이 묘골이었다. 현감은 믿을 만한 솔거노비만 거느리고 묘골로 숨어들었다.
영분의 아들로 바뀐 아기씨는 박비라는 천한이름으로 자랐다. 비는 여종의 자식이지만 농사일은 시키지 않고 사랑마님의 시중을 들게 했다.
“종의 신분인 것이 아깝다. 총명하구나!”
사랑마님은 영특한 아이로 자라는 비를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마님도.”
비는 얼굴을 붉혔다.
“내게도 대를 이을 자손이 있다면…음.”
사랑마님은 대를 이을 후손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비를 더욱 귀여워했다. 사랑마님은 비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사서삼경을 가르쳐 주었다.
“나리마님, 종놈이 글은 읽어서 뭣하겠습니까?”
“비야, 좋은 세월을 만나면 쓸데가 있을 게야. 사람은 글을 읽어야 세상의 이치를 깨칠 수 있어.”
“나리마님, 천한 저를 이렇게 살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녀석, 걱정 말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거라.”
사랑마님은 자라나는 비를 보며, 딸과 사위의 모습이 뚜렷이 보여 깜짝깜짝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조부모와 어머니, 영분의 가슴조린 세월 속에서 박비는 17살의 청년으로 자랐다.
경상도 관찰사(이극균)로 내려온 현감의 사위가 처갓집을 들렀다. 비는 주안상을 들고 사랑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럴 수가…?’
관찰사는 주안상을 놓고 뒷걸음쳐 나가는 비를 다시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비천한 종의 몰골은 아니었다. 넓은 이마에 총기가 반짝이는 눈매, 얼굴 중앙에 든든하게 자리 잡은 코, 꽉 다문 입 등 어디를 보아도 귀골이었다. 갑자기 동서 박순朴珣의 모습이 겹쳐왔다.
“빙장어른 어찌된 일입니까? 그 아이의 얼굴에….”
“자네 눈에 그렇게 보이는가? 내가 사위 순珣을 너무 안타까워해서 그런가 생각했네.”
관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아로 돌아갔다.
며칠 뒤, 관찰사가 다시 왔다. 바깥마당에는 관찰사가 타고 온 말과 포졸들이 늘어서 있었다.
비는 관찰사가 있는 사랑으로 불려갔다. 비는 관찰사 앞에 절하고 고개 숙여 끓어 앉았다. 자신이 왜 불려왔는지 이유도 모르고 분부만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종놈이 글을 배운다고 누가 발고를 한 게 아닐까?’
박비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비야, 고개를 들고 지금부터 내가하는 말을 잘 들어라.”
“…?”
“사실, 너는 여종 영분의 자식이 아니다.”
“예? 무슨 말씀이세요? 나리마님!”
비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어리둥절해 하며 자신도 모르게 관찰사를 올려다보았다. 눈은 커다래졌고 몸은 얼어붙은 듯 굳어있었다.
관찰사는 비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어머니는 사육신 박팽년의 가문으로 출가한 성주이씨 집안의 딸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 박순朴珣과 동서지간이다. 너의 할아버지는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세조에게 발각되어 옥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을 모반한 죄인은 삼족을 멸한다는 국법에 따라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5형제, 아버지 3형제도 죽임을 당하셨다. 집안의 아녀자들은 관비가 되었다.”
“예? 예! 그 그 그러면 어떻게 제가…?”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너의 생모가 임신 중이었고 그것을 안 세조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를 만들라’ 명하셨다.”
비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눈앞이 아찔해 왔다.
“너의 어머니는 관비의 신분이 되어, 대구 관아로 내려와 친정에서 너를 낳았다. 우연하게도 너의 생모와 여종이 같은 날 아기를 낳았다. 여종은 총명하고 충성스러웠다. 서로의 아기를 바꾸는 지혜를 발휘하여 너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나리, 저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나는 너의 이모부다. 나를 믿어라.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임금님은 어질고 너그러운 분이시다. 사육신의 죄도 사해주시고 복권해 주셨다. 너의 신분을 숨기지 말고 임금님께 자수하고 용서를 빌자.”
“네, 나리님 명에 따르겠습니다.”
박비는 모기소리 만하게 대답하였다. 자신과 외가의 운명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천길 벼랑 끝에 서있는 아이 같았다. 또한,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뱀의 이빨에 걸려든 개구리처럼 절망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박비는 관찰사와 함께 한양으로 올라갔다. 관찰사를 따라 궁궐을 들어서는 박비는 눈이 둥그레졌다. 난생처음 보는 궁궐의 건물들이 박비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다. 관찰사의 뒤를 따라 커다란 전각으로 들어갔다. 용상에 임금이 계시고 관찰사가 하시는 대로 납작 엎드렸다.
관찰사는 전후사정을 이야기하며 용서를 빌었다.
임금님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박팽년은 할아버지 세조에게는 역적이지만, 단종에게는 죽음으로 충성을 다한 하늘이 내린 충신이었노라.”
임금님은 용서를 내리고 박비는 천하다며, 박일산朴一珊 이라는 이름을 하사해 주셨다.
일산은 임금의 용서를 받고 이름까지 얻었다. 종의 신분에서 벗어난 일산은 묘골로 내려왔다.
“어머니, 어머니! 고맙습니다.”
영분은 아들의 등을 쓸어주며 감격했다.
“고맙습니다. 잘 자라 주어서요. 이렇게 좋은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일산은 여종 영분에게 절하고 방에서 나왔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께도 큰절을 올렸다. 일산은 외할아버지께 부탁하여 영분이 가족의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평민으로 풀어줄 것을 간청했다. 멀지 않은 곳에 집을 마련하고 땅도 나누어주어 편히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사 부탁도 했다.
현감은 일산의 청을 들어주었다. 돌쇠와 영분이 편히 살 수 있도록 땅과 집을 마련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했다.
일산은 자주 영분의 집을 찾아가 문안드리고 자식으로서 도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난 일산은 더욱 깊은 학문을 닦아 ‘사복시정’이라는 정3품 벼슬까지 지내게 되었다. 일산은 손이 없는 외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외가마을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99칸 집을 짓고 순천박씨 박팽년의 혈손으로 뿌리를 내렸다.
사육신의 혈손으로 대가 끊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집안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유일하다. 후손들은 박일산의 외할아버지 이철근과 외할머니 제사도 모시고 사육신의 제사도 지내고 있다. 여종의 지혜로움이 없었다면 박팽년의 대도 끊어져 지금의 묘골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