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8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청주] 주님을 기쁘게 해 드려라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필리 3, 3 - 8ㄱ
† 복음 : 루카 15, 1 - 10
★ 바오로 사도에게 가장 귀한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곧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그는 이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제1독서).
★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이 하느님
마음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라틴 말로 ‘자비’(misericordia)라는 말은 두 개의 낱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하나는 ‘슬픔’ 또는 ‘괴로움’을 뜻하며,
다른 하나는 ‘마음’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자비란 이 두
낱말이 합쳐져, 마음이 슬픈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비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없애 주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수학 시험을 보셨다면 어떻게 되셨을까요?
아마 낙제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인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한 마리
양이 아흔아홉 마리 양들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계산 방식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수학은 하늘 나라의 시민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고자 그 어떤
수고나 위험도 감수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으신 뒤에는
너무도 기쁘신 나머지 보잘것없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십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의 슬픔과
괴로움을 어루만져 주시고 덜어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운 마음에 동참하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탄의 질투
2012년 나해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복음 : 루카 15,1-10
< 사탄의 질투 >
영화 「아마데우스」는 1984년에 제작되어 두 사람의 작곡가, 즉
‘볼프강 아마데우스’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삶과 음악’,
‘두 사람간의 갈등’을 그린 영화입니다.
살리에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요제프 2세 황제의 궁정 음악장이고
황제의 개인교습을 도맡아 하는 대단한 음악가입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7세 때’, ‘교향곡’, ‘12살’ 때는, ‘오페라’를
작곡했을 정도로, 천재적이었고, 8세 때는, 황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 할 정도로, 이미 그의 실력은 출중했습니다. 이런 모차르트의
출현으로 살리에리는 자신의 음악적 한계를 절감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은 황제 요제프 2세가 모차르트의 오페라 연주 소식을 듣고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기 위해 그를 궁중으로 초대합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환영하는 행진곡을 작곡해 궁중에서 연주합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의 연주를 한 번 듣고서 악보를 보지 않은 채
즉석해서 재현해내고 수정할 부분까지 지적합니다. 이런 천재적인
재능을 보고 살리에리는 패배감에 사로잡힙니다.
더군다나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의 약혼녀까지 자신의 오페라에 출연하게
하여 자신의 여자가 있음에도 그녀를 범하고, 오만하고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자, 그러한 모차르트에게 천재성을 부여한 신을 저주하고 그를
증오하기 시작합니다. 수십 년이 흐른 뒤에 살리에리가 사제에게
고백한 내용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신을 믿지 않게 되었소. 오만하고 음탕하고 지저분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녀석을 선택하고선 나에겐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밖에 안 줬기 때문이오.”
살리에리는 신이 편파적이고 매정하다고 여기고, 십자가를 불태워
버리면서 모차르트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키워갑니다.
그럴 즈음, 빈곤과 병마로 시달리던 모차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던
아버지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이를 본
살리에리는 이것을 이용해, 모차르트에게 아버지의 환상에 시달리도록
조정하면서, ‘진혼곡’의 작곡을 부탁하자 계속돼가는 심리적 압박감에
결국 지쳐 쓰러져 목숨을 잃게 되고, 살리에리 역시 죄책감에 나름대로의
대가를 받게 됩니다. 살리에리는 그 질투심 때문에 그 이후에도 자신의
음악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자신이 천재 음악가인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살까지 시도하는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오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며 투덜거립니다.
자신들이 보기에는 커다란 죄인들인데 예수님께서 자신들보다 그들과
더 가까이 지내는 것에 대한 불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죄인들이기에 그 회개가 당신과 하늘의
천사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된다고 그들을 설득하십니다. 이는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는 큰 잔치를 벌여주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한 마리
내어주지 않는다고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던 큰 아들을 설득하던
아버지의 모습과 같습니다.
사실 살리에리도 모차르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나라의 첫째가는
음악가였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열심히 더 노력했더라면 많은 좋은
곡들을 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질투심이 모차르트도 죽게
만들고 자신도 죽게 만들었습니다. 질투는 상대도 죽이고 자신도
죽이는 죄입니다. 이는 교만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받은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남에게 더 준 것에 대해 불평만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이 처음에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천사보다도 더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실 것이라는
계획을 알게 됩니다. 천사들은 죄를 짓는 일도 없지만 영원히 종노릇만
하고, 인간들은 많은 죄를 짓지만 하느님의 자녀의 지위까지 올려주셔서
자신들이 인간을 섬기는 종이 되게 만드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 반기를 든 것들이 사탄과 마귀들입니다.
질투는 이렇게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투는 상대의
파멸을 위해 자신의 더 큰 파멸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구전되는 유대인들의 민담입니다. 어느 날 천사가 한 여자에게 나타나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친구 한 사람에게는
너에게 주는 축복보다 갑절로 많은 축복을 주겠다. 어떤 축복을
원하며 어떤 친구를 갑절로 축복해 주기 원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여자의 머릿속에 평소에 질투하던 여자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천사님, 제게 주실 축복을 갑절이나 더 줄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바라는 축복은 한 쪽 눈이 머는 것입니다.”
질투는 내가 받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됩니다. 천사였다가 마귀가
되면서까지 하느님과 인간을 질투했던 사탄의 모습이 되지 말고,
항상 주님을 찬미했던 성모님의 겸손한 모습을 본받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주님을 기쁘게 해 드려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 15,1-10
주님을 기쁘게 해 드려라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 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가23,42)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가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이다.”(요엘2,12-13)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시골 아저씨같은 사제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 루카 15,1-10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시골 아저씨 같은 사제>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약자와 함께 고통을 나누며
물질에 신경을 쓰지 않고 겸손한 사제, 겸손하여 언행에 예의를 갖춘
사제, 성사집전을 경건하게 하고 강론을 경건하게 하는 사제, 편견과
편애를 멀리 하고 후배 양성에 마음을 쓰며 죽기까지 사제직에 충실한
사제..."
위 글은 신학교 산책길 모퉁이에 언제부터인지, 누구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조그마한 나무 푯말에 적힌 글인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평신도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제상입니다
(조정래, 일요한담, 가톨릭 신문 참조).
"먼저 자신이 피안으로 건너가 다른 사람들을 건너게 해주며, 먼저
자신이 해탈하고 나서 다른 사람도 해탈케 해주며, 먼저 자신이
수양하고 나서 다른 사람도 수양케 하며,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밝게
하고 나서 다른 사람의 마음도 밝게 해주며, 먼저 자신의 먼지를
털고 나서 다른 사람의 먼지도 털어 주며, 먼저 자신이 즐거워 한
후에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해준다."
위 글은 최인호씨의 구도소설 "길 없는 길"을 읽다가 발견한
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고 따르는 구도자들은 자기 한 몸
구제하는 데 정신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바세계를 헤매는 숱한
중생들과 일심동체가 되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 모습대로 솔직하게 살되 만나는 이들로 하여금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사제, 많은 일보다는 꼭 해야 할
일을 정성껏 하는 사제, 명령하기보다는 귀가 큰 사제, 너무
유식하고 고상해서 가까이 갈 수 없는 사제가 아니라 때로 실수도
하지만 담담하게 웃을 수 있는 사제, 그래서 누구나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골 아저씨 같은 사제를 원합니다."
위 글은 본당에서 사목하고 계시는 한 수녀님이 그려보는 바람직한
사제상입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어려운 생활이 목자로서의 삶, 사제로서의 삶인
듯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치는 높은 반면, 사제 역시
인간인지라 실제 생활은 그러한 기대에 결코 부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로서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강론대 앞에 서는 것이,
그리고 세상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점점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곁들여
길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착한 목자로서의 삶은 우리가 막연히 상상해보는 낭만적인 삶이
결코 아닙니다. 끝없이 펼쳐진 파란 풀밭 위에서 여유 있게 책을
본다든지 피리를 부는 그런 유유자적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늘 양떼의 머릿수를 세야하고, 뒤쳐지는 양들을 끊임없이 몰고
가야하며, 때로 황량한 들판에서 노숙을 하는 거친 생활입니다.
때로 퍼붓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아야 하며, 수시로 다가오는
위험과 돌변의 사태를 대비해 언제나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착한 목자로서의 삶입니다.
우리의 사제들이 착한 목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숱한 부족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충실한 사제,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제, 갈 곳 없는 사람들,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의지처가 되는 사제들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인천]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때문에
저는 6남매 중의 막내로, 제 위로 형 셋과 누나 둘이 있습니다. 형님과
누님들 모두 학창시절에 공부를 아주 잘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공통적으로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운동이었습니다.
달리기도 못하고 공도 잘 못 차고……. 저는 어렸을 때부터 형 누나들이
운동을 잘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직접 보았기 때문에 우리
집안은 원래 운동을 잘 못하는 집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또 친척들이나
이웃들 역시 ‘너희 형제들이 공부는 잘 하지만 운동은 잘 못하지.’
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저 역시 체육 시간이 제일 싫게 되었습니다. 달리는 것이
자신 없었고, 각종 구기 종목에 있어서도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거든요. 이러한 저를 향해 ‘우리 집안은 원래 운동을 못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체육시간을
피했고, 운동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한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반
이어달리기 대표로 뛰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달리기를 잘해서 뽑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운동회 직전에 우리 반 학생 대부분이 서울로
야구 응원을 가던 중에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지요.
결국 달릴 선수가 없어서 그래도 멀쩡한 제가 인원 채우기 위해
이어달리기 대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결과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각 반에서
제일 빠르다는 아이들이 뛰는 이어달리기입니다. 그런데 꼴찌로 달리고
있던 우리 반이었는데, 제가 두 명을 제치고 전체 이등을 한 것입니다.
운동을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저한테도 운동을 잘 하는
에너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거의 모든 운동을 잘
하는 학생이 되었지요.
저는 운동을 못한다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꼬리표가
철옹성처럼 계속 제 뒤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꼬리표는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충분히 떼어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서도 꼬리표를 달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성당에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 나
같은 죄인을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분…….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쫀쫀한 분이 아니십니다. 나의 기준에 주님을
맞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대범하신 분, 그래서 우리의
작은 회개 하나로도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크게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스스로 꼬리표를 달지 마십시오. 꼬리표는
주님께서 붙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과 인내가 강요와 분노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룬다(라퐁텐).
시카고행 전자항공권. 강의하러 시카고도 가네요. 감사할뿐~~~
가장 값진 것을 나누며 살아라.
미국 의학자로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었던 조너스 솔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1950년대 당시 가장 무서운 질병이라는 소아마비의
백신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요. 그리고 200번 실패했을
때, 어떤 기자가 “박사님 백신 개발에 벌써 200번이나 실패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솔크
박사는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백신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200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았던 박사가 오랜 고생 끝에 백신 개발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백신을 팔면 당연히 엄청난 부를 얻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는 이 백신 제조법을 무료로
공개했다고 합니다. 물론 특허로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백신 개발을 특허로 등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태양을 특허로
신청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나누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요즘,
솔크 박사의 나눔에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돌봄의 자세
병원은 많은 이가 함께하는 곳입니다. 환자와 보호자, 의사와 간호사,
간병인과 자원봉사자 그리고 직원 등 다양한 이들이 함께합니다.
또한 병원은 많은 위기가 있습니다. 경미한 것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원목사제는 병원에서 위기에 처한 환자들과 만남을 통해 그들 안에
담겨 있는 고통과 아픔에 함께합니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사연을
들으며 그 안에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환자와 보호자들이 ‘용서’와 ‘화해’로 나아가도록 돕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통해 돌봄을 실천해야 하는 이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말씀하십니다. 양을 치는 목동과 은전을 찾는 부인의 공통점은
저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 잃어버린 은전을 소중히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목동은 자신이 맡은 양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래서 없어진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부인 또한 그
은전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과 수고를 한 남편을 생각하며 이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한 마리 양을 지키고 돌보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헌신적인
목동의 모습에서, 남편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은전을 찾기
위해 온갖 애를 쓰는 부인의 모습에서, 돌봄을 실천해야 할
목자의 모습이 어떠한지 배웁니다.
우리는 행복한 양들입니다. 우리를 지켜주고 돌봐주는 목자는
바로 위와 같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도 이런
목자의 역할을 해야겠습니다. 우리한테도 지키고 돌보아야 할
양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 김선영 신부(청주 성모병원 원목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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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가다씨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