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6.27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인 7월 18일 정계복귀와 신당창당을 선언했다.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2년 8개월만의 일이다. 김대중은 7월 13일 내외문제연구소에서 정계복귀의 의지가 담긴 발언을 했다.
지난 92년 12월 19일 정계은퇴를 선언할 때만 해도 내가 다시 정치를 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치의 재개는 어찌됐든 국민과의 약속을 못 지키는 것이고 이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겠다. 그러나 현재 여야는 자기 몫을 하지 못하고 있고 민족의 운명은 중대 기로에 섰다. 이같은 상황에 조그만 보탬이라도 되겠다는 생각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비록 지역감정과 용공음해로 당선됐지만 솔직히 잘해주기를 바랐다.
이기택 총재도 내가 영국에 가서까지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고 이 모든 것이 내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현재 국정현실은 큰 혼란에 빠져있고 개혁의 마무리도 실패했다. 권력은 보복 차원에서 악용되고 있고 현재 안기부는 100명 내외의 요원들로 나를 파괴하려는 공작을 진행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민주당은 당권만 생각하고 당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나눠먹기식 정당으로 전락했다. 국민에게 많은 실망을 줬고 희망을 못주는 정당이 됐다. 이런 정당의 총재를 과거에 본적이 없다. 지도부도 이를 묵인한데 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 당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관리의 책임이 있고 전체 유권자의 57%를 차지하는 20, 30대 유권자들을 지지세력으로 정착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안정 희구 보수세력과 중산층도 김영삼 정권의 실정으로 우리 당을 반사적으로 지지했다. 차제에 중산층을 끌어안는 모습으로 당을 개혁해야 한다. 많은 여성유권자들에 대한 정책개발을 서둘러야 한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당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김영삼 정권은 국내문제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통일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려 하고 있다. 21세기를 대처하는 정당으로 개혁이 필요하다.
내가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건을 버리고 일시적으로 비판을 받더라도 국정의 혼란과 마비된 제1야당의 정당기능을 바라볼 수만은 없다. 정기국회부터 일대 개혁된 모습으로 잘해나가고 심기일전해 국민에게 봉사하는 정당이 돼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내년 총선에서 서울 경기 호남을 축으로 제1당이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6개항의 개혁안 수용, 나눠먹기식 당체제 지양 등이 보장되고 당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이총재가 물러선다면 당내 개혁으로 갈 수 있다. (주석 1)
김대중은 정계복귀의 결단을 내리기까지 심적으로 수많은 번민을 해야 했다.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가치로 삼아 살아온 자신의 철학에도 배치되는 일이었다. 정부여당과 정치권의 비난은 감수하더라도 언론과 국민의 식언에 대한 비판은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의 복귀설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나는 반대했다. 그의 아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나도 아쉬웠지만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반대할 줄 알았어요. 나도 생각을 많이 했어요. 허나 지금 북한핵 문제로 민족의 앞날이 중요한 때인데 정부는 물론 야당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어요. 변명은 하지 않겠소.”
그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의 예를 들었던 것 같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해외에서 싸웠던 드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과도기 정부에서 제1당으로 총리 등을 역임했으나 1953년 정계를 은퇴했다. 그러다가 1958년 정계로 복귀하여 1959년 대통령이 된 후 알제리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프랑스에 번영을 가져왔다. 닉슨은 1960년 대선,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하자 은퇴하고 변호사로 돌아갔다가 복귀하여 1968년 대통령이 되었다. (주석 2)
주석
1) 김삼웅 보유, .
2) 이희호, 앞의 책, 309~3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