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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계 3장 14-22절
설교제목 : 가면 뒤의 실체
옛 방식 벗기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봄의 정점인 춘분을 앞두고 있습니다. 산수유가 공원에 피어 본격적으로 생장하는 시간임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서로를 흠집 내며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구태의연한 정치적 행태에서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이런 닳아빠진 낡은 방식이 나의 그림자일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난 주 저의 꿈에서, 어떤 교실에서 썩 좋아하지 않는 스위스에 있는 나이든 교수가 뒷문으로 들어와 저에게 무언가를 질문했고 대답을 했더니, 그는 고맙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의 손에는 그가 활용했던 OHP필름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다소 젊게 보이는 외국 남성교수가 수업을 하기 전에 저녁 시간표에 표기된 영어약자가 어떤 것이냐고 질문했더니 그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후에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오래된 낡은 방식으로 수업교보재를 활용하는 나이든 교수는 저에게 있는 낡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행하려는 측면이고, 약자로 표기된 것은 쉽고 간단한 쉽지만 그것으로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고, 적당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꿈이었습니다. 여전히 낡은 방식으로 배워가고 가르치려는 측면과 무언가 쉽고 짧게 표명하여 전달하려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결별해야 함을 일러주는 꿈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낡은 것들과 결별하지 않고서는 우리를 결코 새로운 것을 덧입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환상 중에 보자기가 내려왔고 거기에 부정한 동물들을 먹으라고 할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전히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지만 그의 유대적 문법, 율법을 통하여 선함과 악함, 정결함과 부정함의 도식으로 사람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환상을 깨닫고 자신의 옛 율법의 도식을 깨고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우리 안에 낡고 구태의연한 방식을 깨뜨리고 부활을 기다리는 이 봄의 시간에 다시금 새로워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창조의 근원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합니다. 먼저 발신자인 주님을 가리켜 말합니다.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14).”
그리스도를 가리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요, 창조의 처음이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고, 우리 인생에 참된 증인이 되십니다. 증인이란 어떤 사건을 목격하고 그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여 보고하는 법정 용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증인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무도 내 인생을 변호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은 증인이 되십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주님은 그것에 대해 증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을 당당하게 세워야 합니다. 이런 당당함은 주님과의 진정한 단단한 유대에서만 궁극적으로 이런 삶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인정하지 않아도, 누가 바라봐주지 않아도 억울할 필요없습니다. 주님이 나의 참된 증인이심을 굳게 붙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처음이란 말은 그리스어로, 아르케(αρχη)로 최고의 근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창조의 근원이며 근본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는 주님의 선재성, 모든 창조 전에 존재하셨던 분이심을 일러줍니다. 우리의 존재를 가능케 한 분은 일차적으로 부모이지만 가장 심원한 정신적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에게 우리의 정신이 탄생하였고, 그분이 우리의 인생을 창조해가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창조의 근원이시고,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가실 주님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시시하고 무가치한 자가 아니라 주님의 우주의 드라마 속에서 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지근함의 위험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한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15-16).”
이런 뜨거움과 차가움의 중간인 미지근함이란 표현은 라오디아 교회의 정신적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지리적인 특성과도 연관됩니다. 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로부터 끌어온 온천수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통해 가져온 찬물을 공급받는 과정에서 물이 미지근해졌고, 이 미지근한 물은 식수로는 부적합했습니다. 이 미지근한 물을 먹는 자들은 토했습니다. 이런 것처럼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그들의 영정 상태는 주님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뜨거움은 심장에서 뿜어나오는 열정과 따뜻함, 에로스의 측면과 연결되는 듯 보입니다. 반대로 차가움은 머리에서 나오는 지성적인 분별력을 표현하는 듯 보입니다. 이 두 측면이 건강하게 조화롭게 연합하게 되면 생명의 원리가 되지만, 이 측면이 부정적으로 연결되면 온갖 파괴적인 특성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뜨거움과 차가움의 편에 서서 그것을 온전하게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모든 것이 혼합되기 시작하면 나 자신의 정체를 상실하고 부정적인 영향, 더 심할 때는 해체까지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혼합으로 발생한 이 미지근함은 무력함과 무익함만을 생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흐지부지한 인생에는 어떤 아름다운 결실이 일어날 수 없는 법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면 다시 가슴을 뜨겁게 하거나 머리의 분별력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면 뒤의 실체
라오디게아의 또다른 책망은 그들의 가면 뒤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함에 있었습니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주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게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17).”
라오디게아는 모든 것이 풍족하며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가난한 인생이고 눈이 먼 인생이고 벌거벗은 인생임을 일러줍니다. 겉의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누추함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가면 뒤에 부끄러운 실체를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과장된 외양 뒤에는 어둡고 열등한 요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의식이 구획지어 놓은 제한된 나일뿐입니다. 자신을 피알하기 위해 많은 외적 스펙과 자신의 일상을 소소한 것들을 SNS에 공유하지만, 그 이면에 감추어진 자기 배고픔과 부실함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성형수술 뒤에 자신의 누추함과 열등감이 있고, 쌓여가는 자산 뒤에 자신의 불안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권력의 쟁취 뒤에 자신의 두려움과 연약함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절을 드나들고, 점집에 가서 사주를 보고 미래를 점친다 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의식성에 기인된 것은 잠시 잠깐의 위안이나 싸구려 보상일 뿐, 영원할 수 없는 법니다. 그래서 자기 인식이 중요합니다. 꿈을 보면 이런 내 모습이 진정으로 드러납니다. 선한 페르조나를 가진 사람 뒤에 악한 특성의 인격이 등장합니다. 꿈에서 무언가를 먹고, 옷과 신발을 찾아다디고, 무언가 어둠 속에서 헤매이게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꿈은 우리 안의 진정한 진실과 내 진면모를 인식하도록 도와줍니다.
주님은 가면 뒤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권합니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18).”
진정한 부유함은 불의 고통을 통하여 단련한 불멸과 영원한 물질인 금에서 주어집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쌓아놓은 부동산과 돈과 나라가 기울어지만 종이조각에 불과해짐을 알아야 합니다. 비트코인 1억원도 그 가치가 하락하면 만원으로도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에게서 불에서 정련한 영원함과 불멸함을 사야 합니다. 반드시 나의 정신에너지를 투입할 때만이 불에서 정련한 금을 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금을 소유한 자는 조금 부족해도 부요함을 가진 자입니다.
흰옷을 사라는 것은 순수한 마음의 태도, 모든 것을 향해 개방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정화, 씻음의 전형적인 주제와 연결됩니다. 순수한 마음의 태도는 나의 벌거벗은 누추함과 부끄러움을 가려 변환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입니다. 순수한 정신적 태도를 갖지 않은 자는 벌거벗음 속에서 허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온갖 부정적인 사고와 편견, 마음의 혼란스러움으로 가중되는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지 않으면 결코 흰옷을 살 수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마지막 논문을 쓸 때 꾸었던 꿈을 잊지 못합니다. 아기를 거실 같은 곳에서 씻기고 있을 때 지적장애를 가진 여자 청년이 사간 쟁반에 물을 가져와서 씻는 작업을 도왔습니다. 지적장애를 가진 여성적 인격은 순수하고 단순한 나의 영혼이며, 아니마입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영혼이 나의 미래를 씻어내고 길러내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외적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흰옷을 사십시오. 흰옷을 사기 위해 더럽혀진 생각과 마음을 씻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이 밝아지려면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합니다. 내 눈의 어둠을 제거할 약이 필요함을 일러줍니다. 아무리 눈을 뜨고 살아아도 무의식성에 있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실체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맹목의 상태에 있으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주위에는 무엇있는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나 자신을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안다고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나의 의식의 눈은 나의 인식 그 이상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다고 주장하는 자는 실상은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눈을 밝게 뜨기 위해 약을 바르며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기는 자 : 보좌
이런 삶으로 무의식성을 극복한 자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게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21). 보좌에 앉게 되는 것은 서머나 교회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면류관, 왕관과 유사한 속성을 지닙니다. 태양화, 즉 왕권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진짜 세상의 권력을 부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왕국의 진정한 통치자로서 자격을 부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정신적 왕국의 통치 개념은 융이 사막에서 악마에게 유혹받은 이야기를 다룬 부분에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혹 이야기는 예수가 만났던 심리적 힘의 본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예수를 광야의 음침한 유혹으로 인도한 것으로 그 당시를 지배하던 권력에 취한 카르사르(황제)의 심리학이라는 악마였다. 그 악마는 로마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객체 정신이었고, 그것이 마치 예수를 황제로 만들어줄 것처럼, 그에게 지상의 모든 나라를 주겠다고 약속했던 이유이다. 예수는 자신의 소명에서 오는 내면의 소리에 복종하여 정복자나 피정복자 모두를 가득 채운 제국주의적 광증의 공격에 자신을 노출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세계 전체를 비참한 상태에 빠뜨리고 그래서 이교도의 시에서조차 표현되고 있듯이, 구원의 갈망을 일으키는 객체 정신의 본성을 인식했다. 이 정신의 공격을 억압하거나 그것에 의해 억압되지 않으면서, 그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경험했고 동화해 냈다. 이렇게 해서 세계를 지배하는 황제주의는 영적 왕권으로 변환되었고, 로마제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로 변환되었다.” [C.G.Jung, The Development of the Personality, C.W.17, para.309.]
오늘 이 세계를 사로잡는 권력과 자본의 광증을 정신적 왕권으로 변환시켜야할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황제의 광증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의식을 극복하여 정신적 왕국의 통치로 변환되는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