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월산 기림사(含月山 祇林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의 말사
기림사가 잘 알려진 것은 기림사에는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의 영당이 있고 승병의 요람이였다.
천축국(인도) 승려 광유가 창건, 임정사(林井寺)라고 하다가 643년(선덕여왕 12) 원효대사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 1863년(철종 14) 본사와 요사 113칸이 불타 없어졌다.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것이 현 건물이다. 다행히 경상도영주제명기,동도역세제자기,부호장선생안 등의 중요한 문적과 근세조선 역대 왕의 어필 등이 병화를 입지 않고 보관되어 있다.이 밖에 목탑지, 3층석탑, 오백나한상 등이 있고, 보물로 대적광전(보물 833), 건칠보살좌상(보물 415), 삼신불(보물 958)이 있다
매월당 영당 梅月堂 影堂 이 영당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선생(1435-1493)의 소재지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영정을 모신 곳이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선생의 뜻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 고종 15년 은거하였던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1878)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유림이 경주부윤 민창식에게 청원하여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으나 그 후 퇴락되어 1998년 경주시에서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 중정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선생은 세종17년 1435) 서울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단종 3년(1455)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세조 10년(1465)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 하였다.
기림사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 을 모시는 법당이다. 1997년 해체공사 때 발견한 묵서로 이 법당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즉 이 법당은 임진왜란 후 인조 7년 1629에 크게 고쳐지었고, 영조 31년1755 정조 9년1785에 대대적으로 수리를 했다고 한다. 이때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958 모시면서 대웅전을 대적광전 으로 고쳐 부른 듯하다.
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지만 정면의 칸 사이가 넓어 좌우가 긴 건물이다. 정면의 문은 꽃무늬를 새긴 꽃살창인데 가운데 3 칸에는 4짝씩, 양쪽 끝에는 3짝씩의 문이 있다. 측면에는 중앙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두 기둥을 높게 세우고 그 위로 맞배지붕을 얹었다.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올린 다포 양식이다.
건물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꽃살창이나 내부 천장 아래의 공포를 작은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습이 독특하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치면서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함월산 기림사는 천축국(인도)에서 온 광유성인이 창건하여 임정사 불렀다. 그 후 신라 선덕여왕 12년(648)에 원효대사가 사찰을 라고 크게 확장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 때에 이미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삼신여래를 봉안하였으며, 동쪽에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쪽에는 석조 오백나한상石造五百을 모신응진전을, 동쪽에는 삼층목탑과 정광여래 사리각定光如來利園을, 남쪽에는 무량수전과 진남루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초석만 남아 있다.
진남루는 기림사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의 남쪽에 있는 누각이다. 진남루라는 말은 '남쪽의 왜적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기림사가 승병과 의병의 중요한 활동 근거지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 누각은 앞면 7칸, 옆면 2칸의 긴 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앞면에는 각 칸마다 나무 널빤지로 만든 판장문을 달았고, 옆면에는 나무 널빤지로 벽을 만들었다. 조선 영조 16년에 쓴 기림사의 사적기에 이 누각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진남루는 18세기 중반 이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