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시의 1연과 2연 사이의 거리가 멀어 시를 이해하기 어렵다고요. 읽다 손을 놓았다며, 시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동자, 희끗한 머리를 기울이며 질문하는 모습이 진지해 보였습니다. '문제의 그 시는 이렇습니다.
당신이 꽃을 주시는데
테이블에 던져놓고 잊어버린 밤
사라진 것은 밤이 아니라 빛의 다른
이름이다*
1연에 등장하는 '그 밤'이 어떤 밤인지 모르겠다고, 게다가 사라진 건 무엇이며 빛의 다른 이름은 또 뭐고, 이것들을 통해 알아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당신은 궁금해했습니다. 자, 저도 질문을 좀 해볼게요. 당신은 이 시를 통해 뭔가를 '알고' 싶으신가요? 안다면, 당신은 알아낸 것으로 무엇을 하려 하나요?
시를 대하는 태도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시는 '이해받고 싶어 하는 장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시를 앞에 두고 이해하고 싶어 하거나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다르게 접근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시'라는 집의 입구를 다른 쪽에서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테이블에 놓인 음식 앞에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앞에서, 벽에 걸린 그림 앞에서 당신은 어떤 태도를 보이나요? 당신은 그것들을 '이해'하나요? 신선한 샐러드 한 접시 엔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에는 요?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의미란 작위적인 것이므로, 만드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습니다. 의미는 복잡하거나 단순해질 수 있고,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질 수 있어요.
태극기엔 의미가 있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기일엔 의미가 있어요. 산문이나 표어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웃음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웃음이죠. 저녁때 들리는 산비둘기 소리엔 의미가 없어요. 동물의 구부정한 등, 그 그림엔 의미가 없습니다. 음악에는 의미가 없어요. 너무 많아서 없는 거죠. 예술에는 답이 없습니다. 리듬, 소리, 운율, 색, 춤, 맛, 그리고 시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이해할 게 아니라, '감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물을 보고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자갈에 부딪혀 청량하게 소리 내는
시냇물처럼 웃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유일한 숨은 의미는
그것들에 아무런 숨은 의미도 없다는
것이니까.
그 어떤 이상함 들 보다
그러니까 모든 시인들의 꿈들과
모든 철학자들의 생각보다 이상한 것은,
사물들이 정말로 보이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해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래, 이것들이 내 감각들이 혼자서 배운
것들이다.
사물들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존재를 지닌다.
사물들의 유일한 숨은 의미는 사물들이다. *
시도 그렇게 대해주세요. 맛을 보세요. 언어로 이루어진 거라 해서 의미를 찾으려 들면 시는 당신을 자주 배반할 겁니다. 시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를 벗어나, 의미 너머로 가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VOU」라는 시를 볼까요?
VOU라는 음향은 오전 열한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고, 저녁 다섯시의 바다가 되기도
한다.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즐거운 한때가
되기도 하고, 마음 우울한 사람에게는
자색紫色의 아네모네가 되기도 한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
이 시에서 'VOU'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고 싶으신가요? 이런 시 앞에선 이해나 의미가 무색해진답니다. 그보다 시가 시로서 내는 소리, 뉘앙스,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맛보세요. 소리 내어 읽어보세요.
잘 만들어진 시조차 '태어나는 것'이기에, 의미를 찾으려 할수록 아리송해질 뿐입니다. 부디 시를 빵처럼 씹고, 커피처럼 마셔보세요. 맛이 없으면 뱉으면 됩니다. 당신의 입맛에 맞는 시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낯선 시를 접할 때마다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접한다고 생각해 주세요. 시인들의 언어는 저마다 다른 언어라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시인들도 낯선 시를 읽을 땐, 어려워 낑낑대며 읽기도 합니다.) 낯선 장르의 음악도 몇 번 들으면 익숙해지듯, 시의 언어도 들여다볼수록 눈과 귀가 뜨일 거예 요. ‘다르게 말하기’를 시도하는 게 시인들이기에 조금은 다르게 들여다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시의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니까요. 그보다 언어로 공중에 머물기, 말 뒤에 숨기, 말을 이용해 다른 몸으로 가기. 이런 쓸데없지만 아름다운 시도를 하는 게 시라는 장르이고, 시인 들입니다.
그러니 읽을 때 이해에 초점을 두지 마세요. 시는 언제나 소리가 되고 싶어 하는 장르이므로 소리 내 읽어보고 '아, 소리가 좋다. 읽다 보니 왠지 마음이 아프네. 잘 모르겠는데, 알 것도 같아.' 이런 마음이 든다면 아주 좋습니다.
시의 독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과 같아요. 연주하듯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음악에서 연주자의 위치, 그게 시독자의 위치입니다. 당신의 의지, 당신의 목소리를 통해야만 시는 얼굴을 보여줍니다. 언어를 연주해 주세요
P60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아직 건너지 못했어요.
가장 아름다운 아이는
아직 자라지 않았어요.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말은
아직 말하지 못했어요. *
P64
시의 경우는 어떨까요? 제 스승은 김사인 시인입니다. 제가 시를 습작하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학생들을 향해 시를 쓰는 '방법'을 가르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보다 시를 쓰는 자의 태도, 시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셨지요. 한 번은 전공 수업 때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사람한테만 시인이고 싶지 않아. 나무나 풀, 바위, 먼지 앞에서도 시인이고 싶어."
이런 말은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같아서 잡을 수 없는 사람은 영영 잡을 수 없고,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은 세례처럼 흠뻑, 시적 기운을 받게 되지요. 저는 후자였어요. 그 말이 제 몸을 정면으로 통과해 저는 점점 더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었지요. 제 생각에 예술 분야의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가르침은 이런 일 같아요. 배우는 자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일, 에너지를 점점 더 채울 수 있게 몰고 가는 일, 창작할 때 자유롭고 힘이 세지도록 돕는 일이요.
가장 좋은 스승은 제자에게 길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시를 쓰는 방법 중 한 가지
1. 생각하면 좋은 것의 목록을 작성해 보세요.
2. 생각하면 좋은 것의 목록 중, 나를 슬프게 하는 것 세 가지를 고르세요.
3. '좋음과 슬픔'이 같이 머무는 방을 상상하여, 글을 한 편 써보세요.
4. 글에서 '미치게 좋은 문장' 세 줄을 뽑아 밑줄 치세요.
5. 그 세 줄이 들어가는 시를 써보세요.
6. 쓴 시를 '미치게 좋을 때까지 계속 고치세요.
P91
점심을 먹고 문학잡지를 읽었습니다. 안미옥 시인이 쓴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지요.
예전에 자주 하던 훈련이 있었는데 시 쓰기 전에 하나의 대상을 정해서 오래 바라보는 것이다. 그냥 무턱대고 오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대상을 열고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잠깐 보는 것이 아니라 5분이면 5분, 10분이면 10분, 혹은 30분, 한 시간을 정해놓고 견디며 하나의 대상/풍경을 본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을 문장으로 적는 훈련. 그때 발견하고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잘 잊히지 않는다. 물이 담긴 500밀리리터짜리 플라스틱 물통을 오래 바라보다가 이런 문장을 시로 쓴 적도 있다.
'절반쯤 남은 물통엔 새의 날개가 녹아 있었다.' *
P91
박연준 시인이 이렇게 풀어썼지만, 이것이 바로 몰입하는 방법입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텔레비전을 몇 시간 동안 내리 보고, 자극적인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누가 보여주는 (저절로 상영되는) 남의 삶을 들여다보고, 짜고 현란하고 시끄러운 감각을 몸속에 내리 넣은 날에는 영혼의 결이 달라져있다. 두껍고 탁하고 냄새나고 건조하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나 순한 마음, 먼 곳을 생각하는 느린 마음 같은 건 가지기 어렵다.
이런 상태의 몸에는 시(물리적인 '시'뿐 아니라 우리가 '시'라고 믿는 일 일체)가 오지 않는다. 시가 고결하고 깨끗한 거라서가 아니라 시는 '경화硬化'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굳어 있는 것. 변할 수 없는 것. 기성과 비슷해진 영혼을 시는 견딜 수 없어 한다.
바꿔야 한다. 완전히 탁해지기 전에. 종이의 색을 파랑에서 초록으로 바꿔야 하는 사람처럼 마법을 부려야 한다. 오래 걸릴 수도 있다. 움직이는 장면의 합으로 이루어진 영상을 오래 보면 책을 읽기 어렵다. 책은 움직이지 않는 장면(무대)에서 느리게 걸어 다니는 언어를 좇아, 독자가 움직여야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움직이느냐, 네가 움직이 느냐. 이 차이가 크다. 시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몸처럼 영혼도 자주 씻어야 한다. 스트레칭과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자존감이란 자기 영혼의 형태에 스스로 만족할 때 생기는 걸지도 모른다.
P127-128
대학 시절 나는 글쓰기에 빠져, 경험하는 모든 걸 글로 묘사하려 했다. 내겐 규칙이 있었다. 문장으로 생각하기! 나는 모든 생각을 문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 병원에 누워있는 걸 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친구와 싸울 때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문장으로 바꿔 기록했다. 얼마나 비장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정도다. 생각은 공책 속에 문장으로 쌓였다. 스케이트 연습처럼 지난했던 시간들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믿어야 할 건 오직 몸이다. 마음도 인생도 오늘이나 내일도, 몸이 가지고 있다. 부디 날마다 책상에서 몸으로 연습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몇 권의 책을 내든, 종이 위에서 뛰고 종이 위에서 넘어지고 종이 위에서 자라는 사람이면 좋겠다.
P136-13
누구도 내게 '최선의 것'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는데, '최선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던 어느 날, 나는 구원을 받았다. 볼테르의 이 문장을 읽은 거다.
"최선은 선의 적이다 The best is enemy of the good."
얼마나 날카로운 인식인가! 최선 best은 모든 선 good을 속박한다. 그대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데, 최고로 좋은 상태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거나 시작도 못하는 일, 바보 같은 일 이 아닐 수 없다. 자의식 과잉 상태다. 완벽을 추구하는 장인 정신도 좋지만, 사실 그런 마음은 창작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창작의 막바지라면 얘기가 다르다). 물론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도자기를 구워야 한다면야 뭐, 괜찮은 정신이다. 그렇지만 딱 한 점의 완전무결한 도자기를 구워서는 굶어죽기 십상인 21세기에 사는 우리들! 딱 한 편의 명작을 쓰고 절필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완벽주의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기로 한 뒤에야 마음이 편해졌다. 완벽이란 게 가능할 것 같지 않을뿐더러 글쓰기의 즐거움은 치밀어 오르는 이야기를 사심 없이(사심 없이!) 꺼내놓는 데서 시작한다고 믿는 까닭이다. 가능하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훨훨 쓴 다음, 시간을 들여 마음에 들 때까지 공들여 수정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안목을 믿고, 찬찬히 퇴고해 밖으로 내놓기. 이 과정 역시 즐겨야 한다. 물론 고단할 테지만, 창작의 고통 속에서도 충만함이 느껴진다면 잘하고 있는 것일 테다.
P144-145
박연준 산문 <쓰는 기분>에서 발췌
첫댓글 글을 읽으며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