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방경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김흔, 김순(金恂), 김영돈(金永旽), 김영후(金永煦), 김사형(金士衡), 박구(朴球)의 기사 첨부〕 김방경의 자는 본연(本然)이고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은 성품이 엄격하고 굳센 사람으로서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를 잘 썼으며 과거에 합격하여 그 후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처음에 김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구름과 안개를 들여마시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그가 일찍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구름과 같은 기(氣)가 항상 내 입과 코에 서리어 있으니 이번 아이는 반드시 신선들 가운데서 내려와 잉태된 것이리라”고 하였었다.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김민성(敏成)의 집에서 자랐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 드러누워서 울었으나 오가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그 후에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 판관(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침공해 왔으므로 여러 성(城-고을)들에서 위도(葦島)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게 되었다. 이 섬에는 평탄한 땅으로서 경작할 만한 곳이 10여 리 가량 있었으나 조수물이 밀려 들어오곤 하였기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방파제(防波堤)를 쌓고 파종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었으므로 그 덕택에 살아 나갈 수가 있었다. 또 섬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어서 항상 육지에 나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때때로 물 길러 나간 사람들이 붙잡혀 갔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비가 오면 그 물을 저축하게 하여 못을 만들었으므로 그러한 근심이 드디어 없어졌다.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 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앓는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지를 아니 하였다. 또 숙직하는 처소가 비좁아서 수비병들이 모두 밖에서 자고 있었으며 그의 동료로 박(朴)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가 한번은 기생 하나를 데려 오려고 하였으므로 김방경이 굳이 이것을 말리었더니 박도 무안해하면서 사과한 일이 있었다. 어사 중승의 벼슬을 하게 되자 법률을 고수하였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으며 그의 기풍과 절개가 항상 늠연(凜然)하였다. 원종 4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되었다. 이 시기에 좌승선(左承宣)으로 있던 유천우(兪千遇)는 오랫동안 정권(관리 임명권)을 잡고 있었다. 양반 관료들이 모두 그에게 아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번은 김방경이 길 가는 도중에서 유천우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례(揖禮-두 손을 약간 올리고 고개를 숙이는 인사)를 하였더니 유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조삼 봉명이므로 3품 이하의 인원들은 모두 피마(避馬-말을 딴 방향으로 돌리어 경의를 표시하는 예식)를 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런가?”라고 따지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같이 3품관이요 또 조삼 봉명이므로 나는 예식대로 인사하려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한참이나 따지고 책망하던 중에 김방경은 “시간이 많이 갔구만!”하고 드디어 결판도 내지 않고 먼저 가버렸다. 유천우는 마음속으로 이 일을 아주 언짢게 생각하고 무릇 김방경의 일가 친척으로서 벼슬살이를 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구실을 붙여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김방경은 그런 것쯤은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였다. 그 후에 진도(珍島)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김방경은 전라도에서 군대를 초모하게 되었는데 유천우의 전장(田莊-농장, 소유지)이 장서현(長沙縣-모장(茂長)에 있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그에게 피해되지 않도록 하라고 훈계하였다.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되자 어떤 일이 있어서 중방(重房)의 장교 한 명을 곤장으로 치게 하였더니 이때에 반주(班主)로 있었던 전분이 김방경의 처사를 미워하여 권신에게 고소하여 김방경을 강직시켜 남경(南京-지금의 서울) 유수로 보내게 하였다. 김방경이 일찍이 서북면(西北面) 병마사로 있었을 때 그 지방 사람들에게 좋은 정치를 하여 인심을 얻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북면의 여러 고을들에서 왕에게 글을 올려 김방경으로 하여금 다시 와서 진무(鎭撫)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방경이 남경으로 부임한 지 겨우 사흘만에 왕은 그에게 다시 서북면을 진무하는 일을 맡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후 중앙 정부에 들어와서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로 되었다. 10년(원종)에 임연(林衍)이 왕을 폐립하였는데 이때 마침 세자(世子)는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던 길에 의주(義州)에 이르렀다가 국가에 정변이 생긴 것을 듣고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황제에게 이 사연을 보고하였더니 세조(世祖)는 알탈아불화(斡脫兒不花) 등을 파견하여 국내에 있던 여러 신하들을 훈유하게 하였다. 알탈아불화가 귀국하게 될 때 김방경은 황제께 올리는 글(표문-表文)을 가지고 그와 함께 원나라로 갔다. 세자가 황제에게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므로 몽가독(蒙哥篤)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장차 떠나려고 하였는데 중서성에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지금 몽가독이 만약 서경에 오래 주둔해 있으면서 대군(大軍)이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된다면 임연은 이미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 자라 필연코 주둔 군대의 양식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니 어쩌면 좋겠는가? 그러니 세자는 응당 임연과 한 당여(黨與)가 아닌 자로 하여금 함께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세자가 그러한 인물을 선택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시중 이장용(李藏用) 등이 말하기를 “김방경은 두 번이나 북계(北界-즉 서북면)를 다스려서 그 지방 민심을 얻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니 세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에도 맞는다”고 하였다. 곧 김방경에게 명령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군(원나라 군대)이 서경에 도착하여 만일 대동강을 넘는다면 왕정(개성)에서는 스스로 소란해져서 장차 무슨 변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니 대동강을 넘어 서지 않도록 지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것이 좋다”고 하여 드디어 황제에게 이 뜻을 아뢰었더니 황제가 허락하고 조서를 내리어 원군으로서 대동강을 건너는 자가 있으면 죄를 줄 것이라고 명령하였다. 김방경 일행이 동경(東京)에 이르러 왕(원종)이 이미 왕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고 또 원나라에 입조(入朝-예방)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 최탄(崔坦), 한신(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을 죽였으나 오직 박주(博州)의 장관인 강분과 연주(延州)의 장관인 권천(權闡) 두 사람만은 예의에 맞게 대우하면서 “김공(김방경)의 덕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강분, 권천 두 사람이 김방경의 매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에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으로 오니 서경 지방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와서 김방경을 대접하고 울면서 말하기를“공(방경)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어찌 최탄, 한신과 같은 자의 반란 사건이 일어났겠습니까?”고 하였다. 최탄 등도 역시 조석으로 와서 김방경을 만나 뵈곤 하였다. 최탄 등이 몽고 군대를 이용하여 고려의 허한 틈을 타서 변란을 일으키려고 은밀히 꾀하면서 몽가독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 그를 꾀이었다. 그러나 김방경은 그때마다 계책을 써서 그 음모를 저지시키었다. 이보다 앞서 임연은 왕이 황제에게 보고하여 몽고 군대를 청해 올 것을 염려하여 그것을 막으려고 지유(指諭) 지보대(智甫大)로 하여금 야별초를 인솔하여 황주에 주둔시키고 또 신의군(神義軍)은 초도(椒島)에 주둔시켜 방어하게 하였다. 최탄 등이 그 계책을 알고 가만히 배들을 준비하고 정예한 군사들을 모으고 몽가독에게 말하기를 “임연 등이 장차 관인(官人)과 원나라의 군대들을 죽이고 제주도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니 청컨대 관인께서는 사냥하러 간다고 널리 선전하고 경군(임연 지휘하의 군대)의 왕래 정형을 정찰하여 서로 통보하도록 하면 우리들은 군사들을 배에 태워 보음도(甫音島)와 말도(末島)에로 진공해 가겠으니 그때 관인이 착량(窄梁-인천 부근의 좁은 해협지대)으로 군대를 영솔하여 나가 있으면 그들이 진격하지도 퇴각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실정을 잘 알게 된 후에 그것을 황제께 구체적으로 아뢰게 된다면 왕경(개경)을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곳의 젊은 남녀들과 재물들은 다 당신의 것으로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몽가독이 좋아하면서 그렇게 할 것을 승낙하였다. 이때 영원(寧遠) 별장(別將) 오계부(吳繼夫)의 아들 오득공(吳得公)이 최탄의 내상(內廂)으로 있었는데 이 일을 알고 가만히 김방경에게 일러 주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하니 오득공이 “만약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은밀히 정탐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김방경이 몽가독의 숙소인 객관의 문 앞에 가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와 있었고 최탄과 한신 등은 좋은 기분을 띠고 있었다. 몽가독이 김방경더러 이르기를 “오랫동안 손님 노릇을 하고 있노라니 대단히 심심하다. 생선잡이라도 해서 즐겨 볼까 한즉 공(김방경)은 나를 따로 오시겠소?”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사냥은 어디서 하시려오?”하니 “대동강을 건너서 황주, 봉주(鳳州)에 가서 초도로 들어갈까 하오”라고 대답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관인도 역시 황제의 명령을 들었는데 어찌 하여 강을 건너가려 하오?”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들은 활쏘기, 사냥질을 일상적인 일로 삼는데 이것은 황제께서도 아는 바라 공이 왜 이것을 막으려고 하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나는 사냥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강을 건너가는 것을 막으려고 할 뿐이오. 만일 사냥하고자 한다면 하필 그쪽으로 건너 가서야만 즐길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몽가독은 “만약 대동강을 건너가는 것이 죄가 된다면 내 혼자서 당하리다”라고 하니 김방경이 “내가 여기 있는 한, 관인이 어떻게 강을 건너갈 수 있겠소! 만약 기어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황제께 말하여 승낙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가만히 지보대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들을 데리고 물러가라고 하였더니 몽가독이 김방경의 충직성은 하늘에서 받은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김방경을 크게 존경하고 존중히 여겼으며 사실대로 일러 주면서 말하기를
“왕경(고려를 의미함)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가 어찌 다만 최탄 등 뿐이겠소. 또 다른 사람도 있답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이 누구인가고 물었더니 아무개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비밀에 붙였으므로 전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참소하는 말들이 원나라에 들어가지 않았고 나라는 그 때문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해 여름에 삼별초(三別抄-좌우 별초와 신의군의 통칭)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人民)들을 강제로 몰아서 바다로 나가 남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왕이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파견하여 추토사(追討使)로 삼았고 또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군사 60여 명을 인솔하고 몽고의 송(宋) 만호 등의 군대 천여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해중(海中)에 이르렀더니 반적들의 배가 영흥도(靈興島)에 정박하고 있는 것이 바라보였다. 김방경은 이것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송만호가 겁을 내어 말리었으므로 반적들이 달아나 버렸다. 반적들 가운데서 도망쳐 온 남녀 노소 천여 명이 있었는데 송만호는 그들은 역적의 무리들이라 하여 모두 포로로 하여 데리고 돌아갔다. 그 후에 행성(行省)에다 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돌아오지 못한 자가 상당히 많았다. 반적이 진도에 들어가 여기를 거점으로 하고 여러 고을들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으나 신사전은 토벌에 뜻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이미 재상이 되었으니 반적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 이상 또 무슨 벼슬을 얻어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사전은 나주에 이르러 반적들이 육지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달아나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전주 부사(副使) 이빈(李彬)도 역시 전주성을 포기하고 도망해 버렸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모두 도망간 죄로 면직당하였다. 김방경이 신사전 대신에 추토사로 임명되었고 몽고 원수 아해(阿海)와 더불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반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반적들은 나주성을 포위하고 또 군사 일부를 보내 전주를 공격케 하였다.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더불어 항복할 것을 상의하였는데 전주 사람들은 결정적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김방경이 전주로 가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혼자 말을 타고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남으로 달려 내려가면서 먼저 전주에 공문을 보내기를 “아무 날에는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입성할 것이니 빨리 군량을 준비하여 기다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전주 사람들이 이 편지를 나주 사람에게 보이니 반적들이 이 말을 듣고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가버렸다. 이로부터는 다시 제멋대로 노략질을 못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토적사(討賊使) 상장군 변윤(邊胤), 장군 조자일(趙子一), 공유(孔愉) 등이 반적들이 금성(錦城-나주)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도 구원하지 않았던 사실을 탄핵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고 섬에다 귀양 보내자고 요청했으나 왕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만 철직만 시키었다. 공유는 환관들과 교제하고 결탁하였으므로 죄를 면하였던 것이다. 김방경이 아해와 더불어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고 진도를 건너다 보면서 진을 치게 되었는데, 반적들은 약탈해 간 선박들과 군함들에다 모두 괴상한 모양을 한 동물들을 그리었으며 그 배들이 강을 덮을 듯이 많고 그 그림자들은 물 위에 비치어 얼른거렸고 게다가 움직이고 돌아가는 것이 날아다니는 듯 빨라서 힘으로는 당해 내기 어려웠다. 매양 싸울 때마다 반적들의 군사들이 먼저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면서 돌진해 오곤 하여 호상간에 승부가 거듭되고 여러 날 서로 대치해 있게 되었다. 때마침 반남(潘南) 사람 홍찬(洪贊), 홍기(洪機)가 아해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과 공유 등은 비밀리에 반적과 서로 내통하고 있답니다.”라고 하였다. 아해는 그들을 붙잡아다 가두고 달로화적에게 공문을 띄웠더니 달로화적이 김방경에게 돌아오라고 하여 홍찬 등과 대질을 시켰고 참지정사 채정(蔡楨)을 김방경의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아해는 김방경을 철쇠로 얽어 매게 하고 졸병 50명으로 하여금 서울(개경)에로 압송해 가게 하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원통하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슬퍼서 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달로화적이 왕에게 말하기를 “홍찬 등이 말한 바는 허망한 일이니 이자들을 응당 감옥에 가두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김방경을 석방하여 주었다. 왕이 즉시로 달로화적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으로 하여금 반적들을 토벌하게 하고 그에게 상장군의 벼슬을 주면서 위로하여 보내었다.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반적들이 모두 배를 타고 기치들을 수없이 펼쳐 꽂았으며, 징소리와 북소리가 바다를 끓어 번지듯 요란하였다. 또 성 위에서는 북을 울리고 아우성을 치며 큰 소리를 내어 기세를 돋우고 있었다. 아해는 겁을 내어 배에서 내려서 나주에로 퇴각하여 주둔하려고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수가 만일 후퇴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약점을 보여 주는 셈이다. 적들이 승승장구하여 들여 닥치면 누구가 그 창 끝을 당해 낼 것인가? 또 황제가 이 사실을 듣고 책임을 묻는 날이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라고 하니 아해가 감히 퇴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김방경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 들어가니, 반적들은 전함으로 역습을 해왔는데 원군(몽고군)은 모두 퇴각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결승은 오늘 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적진에 돌입하니 적들이 그가 탄 배를 포위하여 사방에서 압박하면서 자기 진영 측으로 몰아 갔다. 김방경과 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도 돌도 다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 모두가 화살에 맞아 일어나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탄 배가 진도의 기슭에 닿게 되니 적의 한 군졸이 칼날을 번득이면서 배 안에 뛰어들었다.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 그를 찔러 넘겼다. 김방경이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반적들의 손에 죽겠느냐?”라고 하면서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병이었던 허송연(許松延), 허만지(許萬之) 등이 그것을 말리었다. 이때 부상당한 군사들이 김방경이 위급한 것을 보고 소리를 내지르면서 일어나 급히 싸웠으며 김방경은 호상(胡床)에 앉아 군사들을 지휘하였는데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때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몽충(蒙衝-전함)을 타고 돌격해서 싸움이 조금 풀리게 되어 포위를 뚫고 나오게 되었다. 김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 공유(孔愉) 등이 구원하러 오지 않았던 죄를 들어서 그들을 베려고 하였으나 아해가 말리었다.이듬해에 왕이 안세정과 공유의 관직을 박탈하고 또 아해가 위축되어 비겁하게도 싸우지 아니 하였던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아해를 파직시키고 흔도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으며 홍찬 등을 참형에 처할 것을 조서로 명령하였다. 김방경이 흔도와 더불어 전략을 토의하고 진도를 공격하게 되었다. 김방경과 흔도는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으로부터 쳐들어가고, 영녕공(永寧公)의 아들 왕희(熙)와 왕옹(雍) 및 홍다구(洪茶丘)는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장항(獐項)으로부터 들어갔으며 대장군 고을마(高乙쬱)는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으로부터 쳐들어가니 군사들의 탄 배가 모두 백여 척이나 되었다. 적(賊)군은 벽파정에 모여서 중군의 진공을 막으려고 하였다. 홍다구가 먼저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협공(挾攻)하니 적군은 놀라서 붕괴하게 되어 우군이 있는 데로 물러갔는데 우군은 또 그것을 두려워하여 중군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때에 적군은 토벌군의 배 2척을 노획하여 탄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보다 앞서 관군은 적군과 자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반적들이 관군을 경시하고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관군이 용감히 공격하게 되자 반적들은 모두 처자들을 버린 채 도망갔다. 그리하여 적들이 포로하였던 강도(江都-강화도)의 선비들과 여인들, 그리고 각종의 보물들 및 진도의 주민들이 몽고 군대의 포로로 된 자가 많았다. 김방경은 적군이 붕괴되는 것을 보고 그를 추격하여 남, 여 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을 획득하였는데 남은 적들은 탐라로 달아났다. 김방경이 진도에 들어가서 쌀 4천 석과 재물, 보배, 기구, 병기 등을 얻어 모두 왕경에로 운반해 가게 하였고, 역적들에게 강요당하여 항복하였거나 추종하였던 양민(良民)들은 모두 자기 생업에 다시 종사하게끔 하고 개선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게 하고 그의 공적을 평가하여 수태위 중서 시랑 평장사의 벼슬을 더하여 주었다. 반적들이 탐라에 들어가서 내성과 외성을 쌓고 그 험준함을 믿고 더욱 더 날뛰게 되었으며 때때로 나와서는 노략질을 하였으며 안남(安南)의 수령 공유(孔愉)를 붙잡아 가지고 갔다. 이리하여 바닷가 지방은 소란하게 되었으며 반적들의 침입 범위는 경기(京畿)에까지 확대되었고 도로가 제대로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은 이것을 심히 우려하여 14년에 김방경을 행영 중군 병마 원수(行瑩中軍兵馬元帥)로 삼아서 보내었다. 김방경이 다시 군사들을 훈련하여 수군과 함께 만여 명을 거느리고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반남현(潘南縣)에 주둔하고 장차 탐라로 떠나려 하였는데 각 도(道)들에서 온 전선들은 모두 바람에 까불리므로 전라도에서 온 1백60척 만을 가지고 떠났다. 함대가 추자도(楸子島)에 들러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줄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밤중에 돌연히 거센 바람이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모르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 보니 벌써 탐라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런데 바람과 파도가 세차서 전진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고 후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김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나라의 안녕함과 위태로움이 이번 토벌 사업 하나에 달려 있는데 오늘 일의 성패는 나에게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풍랑이 멎었으므로 중군(中軍)은 함덕포(咸德浦)로부터 진공해 들어갔다. 반적들은 바윗돌 사이에 복병을 배치하고 있다가 뛰쳐 나오며 고함을 치면서 중군의 진격을 막았다. 김방경이 소리를 높여 꾸짖으면서 여러 배들이 동시에 진격하도록 독촉하니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먼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적진에 돌입해 들어갔고 여러 군사들이 그 기세를 따라 서로 늦을세라 돌진하였으며 장군 나유(羅裕)는 정예한 군사들을 이끌고 곧 뒤따라 이르러서 적을 살상. 포로한 것이 심히 많았다. 한편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揚島)로부터 반적들의 보루를 직충해서 쳐들어가니 반적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처럼 몰려 자성(子城)에 밀리어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을 넘어서 들어가 화시(火矢) 4발(發)을 놓으니 그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찼으며 반적의 무리들이 크게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중 반적의 편에서 넘어와 투항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반적들이 이미 형세가 궁박해져서 달아날 것을 꾀하고 있으니 빨리 쳐서 점령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반적들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은 그 일당인 70여명을 인솔하여 산중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적장(賊將)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曹時適) 등은 옷을 벗고 자기가 저지른 죄를 달게 받겠다는 뜻을 표시하면서 항복해 왔다. 김방경이 여러 장군들을 지휘하여 자성에 들어가니 선비들과 여인들이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다만 큰 괴수들만 죽이려 할 뿐이니 너희들은 겁내지 말라!”고 하고 그 우두머리인 김윤서(金允敍) 등 6명을 붙잡아다가 네거리에서 참형에 처하였고 그들과 친당(親黨) 35명을 사로잡아 항복한 반군 1천3백여 명과 함께 배에다 나누어 싣고 귀환하였다. 그리고 탐라의 주민들은 모두 평안히 이전처럼 안심하고 살게 하였다. 이에 흔도는 몽고 군사 5백 명을 남겨 두고, 김방경 역시 장군 송보연(宋甫演)과 중랑장 강사신(康社臣), 윤형(尹衡)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8백 명과 외별초(外別抄) 2백 명을 영솔하고 탐라에 남아서 평온한 질서를 유지하게 하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나주 땅에 와서 사로잡아 왔던 친당(親黨)들을 베어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 어떠한 죄과도 추궁하지 않았다. 또 크게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의 아들 김수(綬) 및 지후(祗候) 김감(金憾),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승리를 보고케 하였다. 왕은 김수를 대장군으로,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유보를 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 고세화가 맨먼저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하여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고 그 밖의 인원들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김방경이 개선하여 돌아올 때에 왕은 광평공 왕혜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서 위로하려 하여 승선 박항(朴恒)을 보내 그 다음날에 서울에 들어오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방경은 즉시 길을 재촉하여 그 날로 들어가 왕을 뵈었다. 왕이 아주 후하게 위로해 주고 특별히 홍정(붉은 띠)을 그에게 주었고, 장사(將士)들에게 대규모의 연회를 차려 주었으며,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성대(省臺)에게 지시하기를 “제주도의 반적들은 실로 제압하기가 어려웠기로 심지어 몽고에까지 응원 부대를 청하여 이것을 토벌하게 되었다. 만약 군사 기간이 오래 되었더라면 그 군기, 군량의 수송비가 한없었을 것이며 큰 바다를 건너가는 데에서 의외의 변고가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므로 종묘와 사직(국가)의 안전함과 위태로움이 실로 이번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중군 원수 김방경은 진도 전역 때부터 탐라 토벌에 이르기까지 전심 전력하여 온갖 간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제기되는 일들을 옳게 하였다. 전함, 병기, 군량이 잘 준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대군을 독려, 인솔하여 흉악한 무리의 괴수를 쳐 없애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니 그 공적이야말로 영원토록 잊지 못할 바이다. 또 병마사(兵馬使) 변윤(邊胤)은 먼저 남방으로 가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처리하였고 김방경과 함께 마음과 꾀를 합치어 싸웠으니 그 공훈이 특이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주어야 할 상전(賞典)에 대하여 빨리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기타 군대와 전함을 인솔, 관리하였던 장령, 군사들 및 장교, 전군(典軍)들, 그리고 외별초(外別抄-지방에 있던 별초 군대)에게 줄 상전(賞典) 조건들에 대하여도 다 함께 시행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그 해 가을에 김방경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주었다. 15년(원종)에 황제는 일본을 정벌코자 글을 보내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전함을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 전함 건조를 중국 남방에서 하는 방식대로 진행한다면 비용이 많이 들 뿐더러 장차 제 기한 내에 완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되어 먼저 전라도에 가서 사람을 파견하여 중서성(원나라의)의 공문을 받아다가 우리 나라에서 만드는 방식대로 전선들을 건조하게 독려하였다. 이 해에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김방경은 홍다구와 더불어 단신으로 와서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합포로 돌아왔다. 거기서 도원수 홀돈(忽敦) 및 부원수 홍다구,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전함을 검열하였다. 김방경은 중군을 통솔하고 (즉 중군사로 되고) 박지량(朴之亮), 김흔은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개(任愷)는 부사(副使)로 되었으며 추밀원 부사 김선(金侁)은 좌군사(左軍使)로, 위득유(韋得儒)는 지병마사로, 손세정(孫世貞)은 부사로 되었으며, 상장군 김문비(金文庇)는 우군사로, 나우(羅佑), 박보(朴保)는 지병마사로, 반부(潘阜)는 부사로 되었는데 이를 3익군(三翼軍)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김흔은 곧 김수(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 및 한군(漢軍-한족 출신 군대) 2만 5천 명, 우리 나라의 군대 8천 명, 초공(梢工-키잡이), 인해(引海-해상 안내자), 수수(水手-뱃군)를 합하여 6천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을 거느리고 합포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진군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여진군이 제 기한에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곧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 싸워서 쳐 죽인 수효가 대단히 많았다. 일기도에 이르니 왜군이 해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박지량과 김방경의 사위인 조변이 그들을 쫓으니 왜인들이 항복하기를 요청하다가 나중에는 와서 싸웠다. 홍다구와 박지량, 조변이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그리고 삼랑포(三郞浦)에 배를 남겨 두고 길을 갈라서 진격하여 적군을 죽인 것이 아주 많았다. 왜군이 돌격해 와서 중군을 치게 되자 장검(長劒)이 바로 좌우에서 번득였으나 김방경은 심어 놓은 나무마냥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도리어 효시(嚆矢-전투 신호 용 화살)를 하나 뽑아 쏘고 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니 왜군들이 놀라 기가 죽어서 그만 달아났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 등이 힘써 싸우니 왜군이 대패하고 엎드러진 시체가 삼을 베어 눕힌 듯이 많았다. 홀돈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들이 비록 전투에 익숙하다 하지마는 어찌 이보다 더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군들이 왜군과 싸워서 날이 저물어서야 전투를 중지하였다. 김방경이 홀돈, 홍다구더러 말하기를 “병법에 군대가 천 리나 되는 먼 곳에까지 나아가서 싸우게 되면 격하는 기세가 꺾을 수 없으리만큼 강하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군사들이 수적으로는 적지마는 벌써 적의 지경에 들어섰으니 사람들이 제가끔 힘써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사르고 회음(淮陰-한신)에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격이다. 그러니 다시 싸우도록 하자!”라고 하니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에 ‘적은 수효의 군사들이 강하게 덤비다가는 결국 많은 수효의 군사들에게 붙잡히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피로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군대들을 몰아서 날로 많아지는 적군과 싸우게 한다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라고 할 수 없으니 군대를 돌이켜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던 중에 유복형이 유시(流矢-날아 오는 화살)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올라가게 되어 드디어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게 되었다. 때마침 밤에 세찬 비바람을 만나서 전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많이 파손, 침몰되었으며 김선은 물에 빠져 죽었다. 합포에 도착하여 포로들과 노획한 군기, 병장들을 황제와 왕에게 바쳤다. 왕은 추밀 부사 장일(張鎰)을 보내 그들을 위로하고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먼저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였으며 그에게 상주국(上柱國)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의 관직을 주었다. 원년(충렬왕)에 관제를 고치게 되자 그를 첨의 중찬 상장군 판전리 감찰사사(判典理監察司事)로 임명하였다. 2년에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편지를 보내기를 “나의 신하 김방경은 귀국의 명령을 받들어 진도와 탐라를 공격하여 반적들을 격파하였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전함들을 수리, 건조하며 군사 위력을 떨침에 있어서도 참으로 그 공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호두 금패(虎頭金牌)를 주어서 일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격려가 되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폐백을 올리는 예식을 끝내고 궁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망송유주(亡宋幼主)가 김방경의 뒤에 왔는데 두 사람이 유주의 소매를 붙잡고 인도하였다. 황제가 유주를 황태자의 아랫자리에 앉게 하였다. 예식을 맡은 관리가 김방경과 송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좌석 차례를 결정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의리를 아는 나라요, 송나라는 반항하다가 힘이 모자라게 되어서야 항복한 나라이니 어찌 똑같이 취급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송나라의 복왕(福王)은 유주의 조부 항렬이며 또 나이도 늙었으니 김재상(방경)의 윗자리에 앉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김방경의 아랫자리에 앉히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김재상은 군공이 있으니 호두 금패를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동쪽 나라(고려) 사람으로서 금부(金符)를 차게 된 것은 김방경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김방경이 귀국하게 되니 왕은 서울(개성) 성 밖에 나가서 그를 출영하였다. 흔도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몽고 군을 관할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고려 군을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그대는 매양 일이 있을 때마다 국왕에게 미루고 국왕은 또 그대에게 밀어 버리니 과연 누가 고려 군의 관할을 맡아야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출정시에는 장군이 관할하는 것이고 평화시에는 국왕의 관할을 받는 것이니 본래 법이 그렇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 새 새끼가 그들이 앉은 집 뜨락에 와서 있었는데 흔도는 사람을 시켜서 그것을 잡으라고 하여 얼마 동안 가지고 희롱하다가 죽여 버렸다. 그리고 김방경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소?”라고 물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농부들이 힘써 농사를 지어 두면 이것들이 와락 달려들어 곡물을 다 쪼아 먹어 버리니 당신이 그것을 죽인 것은 역시 백성들을 가긍히 여기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흔도가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한족들과 유사한데 매양 우리들을 멸시하면서 ‘몽고 사람들은 그저 살육하는 것을 일삼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미워할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하는 데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고 사람들에게 굴복하게 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공주가 원나라에 공장(工匠)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건축 공사를 대규모로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목장 제령(木匠提領) 노인수(盧仁秀)가 큰 나무 한 개를 골라 내어 가지고 암시하는 방법으로 충고하려고 김방경, 유경(柳璥)과 인후(印候), 장순용(張舜龍)더러 각각 톱을 가지고 나무의 두 끝을 자르게 하고는 “신하로 된 자들은 응당 이와 같이 임금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라고 말하였다. 김방경이 일찍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여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용한 은그릇들은 모두 새로 주조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연회가 끝난 다음에 그것들을 내탕(內帑-국왕의 창고)에다 바치었으며,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소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달로화적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투서를 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제안공 왕숙(齊安公淑)과 김방경 등 43명이 반역을 음모하고 다시 강화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말 천구가 왕숙과 김방경 등을 가두어 놓고 재상들을 시켜 연합 심문하게 하였는데 유경이 그들의 무죄를 역설하여 구원해 주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유경(柳璥)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 정벌의 전역 당시 김선(金侁)이 물에 빠져 죽었을 때 김방경이 위득유(韋得儒)가 자기의 상관 김선을 구원하지 않았다 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위득유의 관직을 파면시킨 일이 있었으며 또 낭장 노진의(盧進義)도 김방경을 따라 진도를 공격하였을 때 힘써 싸우지는 않고 남의 재산만 약탈하였기 때문에 김방경이 그의 재산들을 국가의 것으로 몰수해 버린 일이 있었으며 김복대(金福大)란 자도 역시 당시의 전역에 김방경을 따라 갔던 자였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모두 김방경에게 악감을 품고 있었다. 3년에 김방경이 석주(碩州)에 가서 흔도를 만나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장령들과 군사들이 모두 벽란도(碧瀾渡)에서 그를 마중하였다. 이때 노진의는 큰 술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김방경에게 올렸는데 김방경의 부하들은 자기들이 먼저 잔 바치는 것을 미워하여 말리었더니 노진의가 말하기를 “직할 부하나 다른 부하나 모두 다 사람인 것은 마찬가진데 무슨 앞뒤를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희유(韓希愈)가 옆에 있다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이 자는 의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자이니 청컨대 마시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방경이 갑자기 일어나서 딴 데로 가버렸는데 노진의 등이 이 일에 대하여도 원한을 품었다. 위득유가 한희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왜 나를 동정해 주지 않는가? 나는 관직에서 쫓겨 나고 그대는 상을 받았는데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욕질을 퍼붓다가 마침내 머리로 한희유의 가슴을 두 번이나 치받았으므로 한희유가 위득유를 때려서 물리치었다. 이로부터 위득유는 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그 사실을 재추와 감찰사(司)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취중에 실수했다”라고 하였으니 누가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하겠는가? 그리하여 그 문제는 드디어 제기되지 않았다. 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들 김흔, 사위 조변,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또 일본 정벌 이후 군사 기자재들은 모두 응당 관가에 납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방경과 그의 친속들은 모두 자기 집들에 무기를 감추어 두었으며 또 전함을 건조하여 반남(潘南), 곤미(昆湄), 진도(珍島) 3현에다 두고 무리를 모아 반역을 음모하고 있으며 자기 집이 달로화적의 숙소와 가깝기 때문에 고류동(孤柳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국가에서는 때마침 여러 섬들의 인민들에게 육지 깊이 들어와서 살 것을 명령하였는데 김방경의 부자(父子)는 그에 복종하지 않고 인민들을 해변에 살게 하였으며 동정 당시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초공(梢工-키잡이) 수수(水手-뱃군)로 되게 하여 전투에서 불리한 결과를 초래케 하였으며 아들 김흔을 진주(晋州)의 수령으로 삼고 막객(幕客) 전유(田儒)를 경산부(京山府)의 수령으로 삼고 의남(義男) 안적재(安迪材)를 합포(合浦)의 수비장(守備將)으로 삼고, 한희유에게는 병선(兵船)을 장악하는 일을 맡게 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곧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게끔 준비하였다”라는 등의 여덟 개의 조항을 들었다. 이에 흔도는 3백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와서 석말 천구와 더불어 국왕에게 고하니, 왕과 공주는 비록 그 사실이 무고이며 허망한 일인 것을 알고 있었지마는 하는 수없이 유경, 원부(元傅), 이분희(李汾禧), 한강(韓康), 이습(李褶)에게 명령하여 흔도, 천구와 더불어 함께 심문하게 하였다. 위득유와 함께 연명 고발한 궁득시(宮得時) 등 4명이 고하기를 “우리는 글자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위득유가 우리들을 속여 말하기를 ‘여기에 참여하면 너도 다 같이 공로가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우리와 함께 여기에 연명하여 관작과 상품을 받도록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기에 우리가 이름을 연서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글에 고발한 것은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득유가 또 흔도에게 고하기를 “을해년에 김방경이 저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관군(몽고군)을 모조리 격멸하고 해도에 들어가 그곳을 거점으로 하겠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만일 저의 말을 신임하지 않는다면 그와 대질을 시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성품이 침묵을 잘 지키는 데다가 분하고 성이 난지라 마치도 대꾸를 하지 못하는 것같이 보였다. 유경이 말하기를 “위득유가 이미 여덟 가지 일을 들어 김방경이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하였는데 지금 말한 바를 들으니 이는 더욱 엄중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고발장에다 먼저 기록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여러 죄수들은 무서워 떨고, 위득유와 노진의 두 사람도 감히 눈을 똑바로 보지를 못하였다. 김천록이 그들을 돌아다 보며 꾸짖기를 “너희들은 개나 돼지 같은 놈들이다. 진도를 공격할 때 너희들 둘이 군율을 범하였기에 중찬(中贊-김방경)이 너희들이 훔친 물건들을 몰수하여 국가에다 드린 일이 있었는데 너희들이 이에 대한 악감을 품고 있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있지도 않은 말들을 꾸며 내어 대신을 모함하고자 하니 하늘이 만일 너희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하늘도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라고 하였다. 김복대 등 14명이 또 고하기를 “위득유가 자꾸 꾀이기에 서명하였을 뿐, 우리의 본의는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더욱 더 고발이 무근거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갑옷을 감추어 둔 한희유 등 12명의 죄만을 다스려 그들에게 곤장을 치게 하고 석방하였다. 홍다구(茶丘)는 자기의 조국인 고려에 대하여 오랜 악감을 품은 자였으므로 무슨 짬이라도 있는가 하고 엿보고 있다가 화를 전가시킬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김방경의 사건을 듣고는 중서 성에다 자기를 고려에 보내 문초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 흔도 역시 이보다 앞서 그의 아들 길대를 보내 위득유의 말을 황제에게 보고하도록 한 바 있었으므로 황제는 글을 보내 국왕과 공주가 함께 문초에 참가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왕이 흔도, 홍다구와 함께 다시 김방경과 김흔을 문초하게 되었다. 홍다구는 쇠줄로 김방경의 목을 둘러 죄고 못이라도 박을 듯이 하였으며 또 형장 가진 자를 꾸짖어 그의 머리를 치게 하였으며 종일토록 알몸뚱이로 세워 놓았다. 날씨는 극히 추워서 그의 피부는 얼어서 먹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 왕이 홍다구에게 말하기를 “먼저 번에 내가 흔도와 함께 이미 문초를 다 끝내었는데 하필 다시 문초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홍다구는 듣지 아니 하였다. 때마침 낭가대가 전라도에서 돌아왔다. 왕이 그들과 함께 문초하자고 하였더니 낭가대가 말하기를 “내가 곧 조정에로 돌아가겠는데 황제께서 만일 고려 일에 관하여 물으면 응당 내가 보고 들은 대로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홍다구도 상당히 휘어 들었었다. 그 후에 다시 문초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귀국을 받들기를 하늘을 받들 듯이 하고 귀국을 사랑하기를 친어버이를 사랑하듯이 하는데 어찌 하늘과 어버이를 배반하고 거슬러 스스로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는 일을 하겠는가? 나는 차라리 원통하게 죽을지언정 감히 무근거한 고발을 승인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홍다구는 반드시 그를 자복시키려고 모진 고문을 가하였기 때문에 몸뚱이가 온전한 데라곤 없었으며 죽어 넘어졌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였다. 홍다구는 왕의 측근자들을 가만히 달래기를 “지금 한창 아주 춥고 비, 눈이 그치지 않는 때여서 왕도 역시 심문에 피로하였다. 만일 김방경으로 하여금 죄를 인정하게 한다면 그 한 사람에게만 벌을 줄 것이며 법에 따라 다만 귀양을 보내게만 될 것이니 고려를 위해서도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홍다구의 말을 믿기도 하고 또 고문받는 정상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황제가 어질고 거룩하신 분이니 장차 그대의 실정을 밝혀주고 죽이지는 아니 할 것인데 어째서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느냐?”라고 한즉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왕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저는 병사의 몸으로 출세하여 직위가 재상에까지 이르렀으니 저의 간과 골이 땅바닥에 구르게 된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겠거늘 어찌 일신을 아끼어 근거 없는 죄명을 둘러쓰고 국가를 배반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홍다구를 돌아다보며 “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나는 부당한 일을 가지고 굴복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갑옷을 감추어 두었다는 죄를 논하여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白翎島)에 귀양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귀양 가게 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가 가는 길을 막고 울면서 그를 보내었다. 홍다구는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무고하기를 “김방경은 양곡을 저축하고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많은 병기, 갑옷을 감추어 두고 불칙한 짓을 하려고 꾀하였으니 왕경(개경) 이남의 지리 상 중요한 지대를 골라서 방수군을 두며 또 여러 주와 군에도 모두 달로화적을 두며 김방경과 그 아들, 사위 기타 일가 권속들은 모조리 수도(북경)에 압송하여 노예로 만들고 그 소유지는 몰수하여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군량에다 충당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인후(印候)가 김방경을 귀양 보내는 것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원나라로 갔을 때 황제가 묻기를 “김방경이 갑옷을 얼마나 감추어 두었던가?”라고 하므로 인후는 “46부(副-벌)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니 황제는 “김방경이 그래 이것을 믿고 반역하려고 음모했단 말인가? 고려에서는 주, 현의 조세를 모두 왕경으로 운반하고 있는데 배들을 만들고 양곡을 저축했다는 말을 무엇 때문에 의심하는 것인가? 또 김방경은 자기 집을 왕경에다 지었다 하니 만일 그가 반역을 음모했다면 하필 집은 왜 지었겠는가? 빨리 홍다구를 돌려 보내고 국왕은 풀이 자라나는 때를 기다려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위득유와 노진의가 또 홍다구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담선 법회(談禪法會)를 개설하는 것은 귀국을 저주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홍다구는 그 말을 천구에게다 전하였고 천구는 사람을 보내 중서성에다 보고케 하였다. 왕도 역시 장군 노영(盧英)을 원나라에 보내 대변케 하였다. 평장 합백(哈伯)이 말하기를 “이런 것은 황제께 아뢸 만한 일이 못된다. 그대도 귀국해서 국왕 자신이 직접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이 드디어 원나라로 떠나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황제의 지시로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유, 노진의 등도 왕을 따라서 오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장순용을 보내 김방경을 소환하였다. 김방경과 김흔이 귀양 갔던 섬에서 되돌아 오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만지면서 “오늘 또다시 시중(즉 중찬)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하였다”고 말들 하였다. 노진의는 요가채(姚家寨)에 이르러 혓바닥이 헐어서 갑자기 죽었는데 임종시에 말하기를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라고 하였다. 위득유가 이 말을 듣더니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고 항상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왕이 도당(都堂)에 글을 보내 김방경이 무고하게 죄를 당했다는 것을 해명하였는바 그 글에 이르기를 “위득유, 노진의 등이 흔도에게 김방경이 공주, 국왕,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장차 강화도에 들어가려 한다고 고발하였는바 만일 정말 그러하였다면 위득유는 응당 나에게 먼저 고발했어야 할 것인데 왜 바로 수부(帥府-몽고의 원수부)에다 고발하였겠는가? 흔도가 김방경을 고문하였는데 김방경은 일찍이 어떤 병기도 갑옷도 집에 감추어 둔 것이 없었고 다만 나유 등 41명이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유 등도 한결같이 ‘김방경이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위득유 등이 김방경에 대해서 원망을 품고 그를 해치려 하여 그러나 봅니다’라고 말하였다. 위득유 등도 한번도 직접 김방경의 반역 음모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 그 누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일도 없다고 하였다. 다만 정동(일본 정벌)시에 김방경의 부하들이 군기를 관가에다 납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반역 음모가 있는가 하고 의심하였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말을 바꾸어서 김방경이 반역 음모를 두 번이나 이야기하였다고 하였으니 앞뒤의 말이 서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또 위득유 등은 지원 12년(충렬왕 1년) 12월 어느 날에 김방경의 집에 갔더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흔도가 나의 방원(房院)을 헐어뜨리고 갔다’고 하면서 반역할 데 대한 말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수부(원수부)의 진무(鎭撫) 야속달(也速達)이 보낸 글을 보건대 흔도는 지원 12년 12월 28일에야 왕경에 도착했고 이듬해 정월 초 3일에 염주로 돌아갔은즉 위득유는 어디서 12월에 갔다는 말을 끌어 내게 되었겠는가? 또 노진의는 지원 12년 4월에 김방경의 집에 갔더니 김방경은 문 앞에 서서 반역 음모를 말하였다 라고 하였었는데 그 후에는 김방경이 정방(政房)의 동랑(東廊) 밑에서 그런 말을 하였다고 했으니 그 말한 바가 전후가 다르다. 이로써 볼지라도 그들의 말이 모두 허망하게 꾸며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흔도가 달로화적과 함께 문초를 하였는데 결국 갑옷을 감추어 두었던 자들만 곤장을 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으며 다만 김방경만은 남겨 두어서 황제로부터 명확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던 것이다. 홍다구는 또 균지(鈞旨)를 받아 한희유, 안적재(安迪材), 김흔 등을 문초하였는데 그들로 말하면 실제는 나 자신이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마치도 김방경이 제멋대로 파견하여 오목강(吳木江)에서 양곡을 적재하도록 한 것처럼 심문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죽주(竹州) 등 군, 현에서 공, 사의 곡물을 운반하여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김방경이 저축해 둔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반남(潘南) 등지에 있다는 선박들도 모두 다 종전군인(種田軍人-둔전‘屯田’ 군인)들이 갖추어 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김방경의 선박들이라고 하여 억지로 문건을 꾸며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거듭하여 반드시 자백하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지금 형세로 보면 사태가 저절로 명백해지기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김방경의 목숨이라도 살려 두어 우선 섬에 귀양이라도 보내었다가 황제의 명령 내리기를 기다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 하였더니 황제는 저간의 사정을 다 알고 김방경으로 하여금 수도에 올라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번에 황제께 올린 글과 달로화적이 보낸 글을 자상히 살펴보고 하나도 빠짐 없이 잘 아뢰어 줄 것을 바라는 바이다. 위득유와 노진의는 또 ‘담선 법회는 장차 귀국에 대하여 불리한 일을 일으키게 하려고 개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위득유를 불러다가 이것을 물어 본즉 ‘대정(隊正) 김현(金玄)의 말에 의하면 장차 담선 법회를 개설하려다가 그만 중지되고 말았다고 했으며 또 군인(軍) 성일(成一)도 역시 어떤 중이 공주에게 담선을 하는 것은 귀국에 불리하다고 말하였으므로 공주가 성일의 누이 우긴(于緊)에게 옷을 기워 오도록 명령하고 그것을 그 중에게 상으로 주었다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김현에게 물어 보니 그는 ‘위득유가 나를 불러서 담선 법회가 무슨 까닭에 중지되었는가를 묻기에 나는 모른다고 하였고 그 밖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성일에게 물어 보니 그는 ‘나는 노진의네 집에서 기숙하고 있는데 노진의가 나를 데리고 위득유의 집에 가서 그를 만났더니 위득유가 무슨 다른 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못들었나 라고 묻기에 못들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공주가 중에게 상을 주었다는 것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을 어찌 위득유에게 했겠습니까? 또 나에게 만약 누이가 있다면 누이의 집에서 기숙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노진의네 집에서 기숙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현과 성일의 말이 모두 이러하다. 게다가 선법(禪法)이란 것은 천하에 모두 행해지는 것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3백60여 년간이나 대개 3년에 한 번씩 봄철이 되는 첫달에 법회를 개설하여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해에는 위득유, 노진의의 무고로 말미암아 나라 안이 소란스럽기 때문에 4월달에 개설할까 하고 어물어물 시간을 늦추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위득유는 내가 직접 황제를 보고 말하게 되면 자기 죄가 더해질까 두려워하여 내가 귀국으로 가는 것을 방해할 셈으로 또다시 허망한 소리를 달로화적에게 하였고 달로화적은 잘 구명해 보지도 않고 갑작스레 보고하였던 것이니 실로 황공한 일이다. 황제에게 잘 아뢰어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중서성의 관원들이 위득유의 말을 듣고는 모두 크게 웃었다. 10여 일 더 있다가 위득유 역시 혓바닥이 헐어서 죽어 버렸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하늘이 그들의 소행을 미워해서 죽여 버린 것이라고들 하였다. 황제는 왕에게 말하기를 “김방경을 고발한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 이미 상대해서 송사를 진행할 만한 대상이 없을 뿐더러 나도 이미 김방경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김방경을 용서해 주고 왕을 따라 귀국하라고 하였다. 귀국 후 다시 김방경을 중찬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은 10근을 주었다. 6년 가을에 왕에게 글을 올리어 정계에서 은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승지 정가신(鄭可臣)을 보내 잘 타일러 다시 정사를 보게 하였다. 겨울에 또다시 연로 퇴직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나이가 늙었지마는 세운바 훈공과 업적은 보통 사람에 비할 바 아니니 어찌 경솔하게 벼슬살이를 그만두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또 지금 황제가 일본 정벌의 명령을 내리었으니 우리 나라에서도 응당 황제에게 말하여 원수를 두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훈공도 업적도 없는 자를 황제에게 요청할 수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허락하지를 아니하였다. 그후 또다시 글을 올려 퇴관하려 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고 우승지 조인규(趙仁規)를 보내 중서성에다 글을 보내 이르기를 “나의 신하인 김방경은 마음을 다하여 자기 직무를 충실히 집행하였고 귀국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근면하게 일하여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또 진도, 탐라,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관군을 따라서 토벌에 참가하여 여러 번 승리하여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제가 직접 호두 금패를 주어서 그 공적을 장려하고 위로하여 주었다. 지금 다시 정군(正軍) 만 명, 수수(水手-뱃군) 1만5천 명을 관할, 인솔하고 일본 정벌에로 떠나는데 만약 그가 군사 지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호령이 잘 되지 못하며, 또 혹시 실수를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김방경이 나이는 비록 많으나 장한 마음만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시금 힘을 다하여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까 하고 있으니 황제께 잘 아뢰어 원수부의 성원으로 참가케 하여 사업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글을 보내 김방경에게 중선 대부, 관령 고려국 도원수(中善大夫管領高麗國都元帥)의 관직을 주었다. 이때 김방경은 신년 축하 차로 원나라에 가 있었는데 황제는 대명전(大明殿)에 나와 앉아서 축하를 받았다. 4품 이상 인원들은 전상(殿上)에 올라가 연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김방경도 역시 이에 참여하였다. 황제는 따뜻한 말로 그를 위로하고 좌석을 승상(丞相)의 다음에 잡게 하였으며 진수 성찬을 그에게 주고 또 흰밥과 생선국을 주면서 “고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사흘 동안 계속 황제의 연회에 참가하였고 귀국하게 되자 활, 화살, 검, 백우갑(白羽甲)을 주었으며, 또 활 천 개, 갑옷 백 벌, 반오(솜옷) 2백 벌을 주어 동정에 나가는 장령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고 이내 동정 조령(東征條令)을 보여 주었다. 승상 안중(安重)은 본래 우리 나라에 유익되는 일을 해 준 일이 있는 자인데 때마침 삭방(朔方-원나라 북방 지방)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따로 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김방경이 은우(銀盂-은제 술잔의 일종)와 모시 베를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더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재상이 보내 준 것이 아닌가? 승상이 북쪽으로 가고 난 뒤에는 국가적 선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공(김방경)이 아니면 누가 이런 부녀자를 생각해 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나라에 선물을 가져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국가적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가 혹 나머지가 있게 되면 사신으로 간 자가 대개 자기의 사사용으로 써버리곤 하였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진봉사가 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나머지들을 모두 다 도로 국가에 갖다 바치었다. 7년 3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일본 정벌을 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먼저 의안군(義安軍)에 도착하여 군사 기자재들을 검열하였고 왕은 합포에 도착하여 대규모로 각 군의 사열을 거행하였다. 김방경이 흔도, 홍다구,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과 더불어 출발하여 일본의 세계촌 대명포(世界村 大明浦)에 이르러 통사(通事-통역) 김저(金貯)로 하여금 격(檄-관문서)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타이르게 하였다. 김주정이 먼저 왜군과 전투를 시작하니 제군(諸軍-좌, 우, 중군 등)이 모두 배에서 내리어 왜군과 싸웠는데 낭장 강언(康彦), 강사자(康師子) 등이 전사하였다. 6월에 김방경, 김주정, 박구, 박지량(朴之亮), 형 만호(荊萬戶) 등이 일본군과 접전해서 3백여 명의 목을 베었는데 일본 군사들이 돌격해 왔으므로 관군(몽고군)이 무너지고 홍다구는 말을 내버리고 달아났다. 왕(王) 만호가 다시 측면 공격을 들여 대어 일본군 50여 명의 목을 베니 일본군이 이로 인하여 물러갔으며 홍다구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튿날에 또다시 싸웠으나 패전하였고 군사들이 많이 유행병에 걸리어 죽은 자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흔도, 홍다구 등은 여러 번 싸워서 승리하지 못했고 도 범문호(范文虎)가 약속한 기한이 넘도록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군하자고 의논하기를 “황제의 명령은 강남군(江南軍-범문호의 군대)과 동략군(東略軍)이 반드시 이 달 보름까지에는 일기도(一岐島)에서 합세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강남군은 도착하지도 않았고 우리 군사들만이 먼저 도착하여 몇 번 싸웠으나 배는 썩고 양식은 다 되어 가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한 열흘쯤 지난 다음에 다시 먼저 번처럼 논의가 되었는데 김방경이 말하기를 “황제의 명령을 받고 우리는 석 달 동안의 식량을 가지고 떠났는데 지금 아직 한 달 분의 식량이 남아 있으니 남군(강남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반드시 일본을 격멸하여야 한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감히 또다시 무어라고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범문호가 만군(蠻軍) 10여만 명을 인솔하고 도착하였는데 선박의 총수는 9천 척이나 되었다. 8월에 폭풍을 만나서 만군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그 시체들이 썰물과 밀물을 따라 포구에 밀려들어 포구가 시체로 가득 찼으므로 시체를 밟고도 걸어갈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회군하였다. 9년에 또다시 글을 올리어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추청 정난 정원(推忠靖難定遠)공신, 삼중 대광 첨의 중찬, 판전 이사사, 세자 사의 관직을 띠고 치사(致任)하게 하였다. 이어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 하루는 왕에게 요청하여 고향 땅에 성묘하러 가게 되었는데 왕은 그의 아들 김순(恂)을 태백산 제고사(祭古使)로 임명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친구들의 만류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아들더러 이르기를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 들일 때가 되였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26년에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89세였다. 김방경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들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옛예식을 많이 알았으므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차착이 없었다.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고 절약하는 기풍을 견지하였으며 대낮에는 드러눕는 일이 없었고 늙었으되 머리칼이 검은 채로 남아 있어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능히 견디어 내었고 병환이라곤 없었다. 또 옛친구들을 잊어 버리지 않고 누가 죽었다 하면 곧 조상하러 갔으며 일평생 임금의 잘못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현직에서 물러가 한가롭게 된 이후에도 나라일을 집안일 근심하듯 우려하였고 무슨 중대한 문제를 의논할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김방경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가 나라의 정사에 참여한 지 오래되고 또 금부를 받아서 도원수가 되자 권력이 온 나라에 미쳤다. 그가 지휘한 전장이 전국의 주와 군에 분포되어 있게 되었으므로 부하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내상(內廂)이라고 일컬으면서 날마다 그의 문전에서 경비를 섰으며 권세에 아부하고 남의 위력을 빌어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전국을 쏘다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들을 말리지 아니 하였다. 또 그가 일본을 정벌하려 갔을 때에 군공에 대한 관작과 상품의 수여에서 불공평하게 된 것이 상당히 많아서 사람들의 신망을 잃은 일이 있었으며 또 외손자 조문간(趙文簡)으로 하여금 차신(車信-제국 공주에게 총애를 받은 자)의 딸과 결혼하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가 총애를 받으려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안동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던 자들이 이것을 싫어하여 예식대로 장사 지내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왕이 이것은 잘못이었다고 후회하였다. 충선왕 때에 그를 선충 협모 정난 정국(宣忠協謀定難靖國) 공신 벽상 삼한 삼중 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으며 명령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김방경의 아들들로 김선, 김흔, 김순(金恂)이 있다. 김선은 관직이 부지밀직 사사에 이르렀고 김선의 아들들로 김승용(金承用), 김승택(金承澤)이다. 김승용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밀직사(密直使)에까지 이르렀는데 청렴하다고 칭하였다. 김승용의 아들 김후(金厚)는 공민왕 때에 여러 관직들을 지나 검교첨의 평리로 되었다가 원나라의 박 새인불화(朴賽因不花)에 아부하여 합포 만호로 되었다. 김후는 성품이 탐욕스럽고 그의 처도 마음이 사납고 인색하여 참혹한 짓을 잘 하였다. 일찍이 능직 피륙을 잃은 일이 있었는데 그 아들 김칠우(七祐)가 훔쳐다가 첩에게 준 것이라고 짐작하고 김칠우를 결박해 놓고 종일토록 고문한 결과 드디어 김칠우가 죽게 되었다. 그는 종을 시켜 목을 매어 달아 두게 하고 “사람들이 묻거든 제가 목을 매어 죽었다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능직이 아들보다 더 소중하다고들 하였다. 김승택은 중서 평장사로 치사하고 죽었다. 양간(良簡)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김묘(昴)는 상락군(上洛君)이었고 김묘의 아들은 김구용(金九容)과 김제안(金齊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