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사제불이의 도다대학’ 훈도 70주년
“나는 지금도 도다대학의 졸업생으로서 은사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싸우고 있습니다.”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젊은 날에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에게서 만반에 걸친 학문을 배운 개인 수업을 ‘도다대학’이라고 불렀다. 올해는 강의를 시작한 지 70주년이 된다. 세계로 넓혀진 창가의 평화·문화·교육의 대도(大道)도 그 초석은 ‘도다대학’에서 받은 훈도에 있다. 여기서는 그 역사를 소개한다.
△도다대학의 개인교수 모습.(소설 ‘신·인간혁명’제23권 <학광> 삽화)
나는 지금도 도다대학의 졸업생으로서 싸우고 있습니다
<70th ‘혼’을 담은 일대일 개인교수>
‘엄동설한’에 시작
‘배움’은 ‘빛’이다. 그 빛이 미래를 비추고 세계를 잇는다.
스승이 제자에게 모든 학문을 가르친 ‘도다대학’은 학회의 ‘엄동설한’에 시작되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1949년 1월, 도다 선생님이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 1년 전인 1948년부터 다이세이학원(현재 도쿄후지대학교) 정경과 야간부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출판사는 암초에 걸려 이케다 선생님이 편집장을 맡은 ‘소년일본’이 폐간되었다. 도다 선생님은 새롭게 신용조합을 설립해 재기를 노렸다. 스승과 생애를 함께하자고 맹세한 이케다 선생님도 심야까지 거듭 분투했다.
1950년 연초에 도다 선생님은 “자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야학을 단념해 주지 않겠는가?”고 말했다.
이케다 선생님이 스물두 살이 되는 해의 찬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그 해 가을 무렵부터 도다 선생님은 일요일에 이케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대표 몇 명을 집으로 불러 어서강의를 했다.
불경기로 신용조합은 거액의 빚을 지고 8월에 영업정지가 되었다.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도다 선생님은 강의를 하신 것이다.
은사를 홀로 계속 떠받친 이케다 선생님은 사업의 고경을 이겨내면 야학에 복학하려고 생각했다.
새해가 밝자 도다 선생님은 말했다.
“내가 대학 공부를 전부 가르쳐줄 테니 기다리게. 학교는 나에게 맡겨라.”
1951년 2월, 도다 선생님은 어서강의 이외에 동서고금의 명작을 바탕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일요일 강의는 학문 제반에 걸친 이케다 선생님의 개인교수가 되었다. 강의는 때로는 오전과 오후까지 이어졌다.
어떤 강의가 끝났을 때 도다 선생님은 책상 위에 장식된 꽃 한 송이를 이케다 선생님의 가슴에 꽂았다.
“이 강의를 수료한 우등생에게 주는 훈장이다.”
“정말 잘 해주었다. 금시계라도 주고 싶지만 아무것도 없다. 미안하네….”
이케다 선생님은 이 감동을 이렇게 썼다.
“그 꽃이야말로 전 세계의 어떠한 것보다도 더한 최고로 영예로운 훈장이라고 생각했다. 감동했다. 나는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머지않아 도다 선생님의 강의는 일요일만으로는 시간이 부족해 1952년 5월 8일부터 회사 사무실에서 업무 시작 약 1시간 전 이른 아침에 강의를 시작했다. 다른 사원도 몇몇 수강했다.
진검승부의 강의
오전 8시, 이케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모두 함께 도다 선생님을 기다린다.
도다 선생님이 ‘이야-’ 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좋은 아침입니다!”
힘찬 목소리가 돌아온다. 강의 시작이다. 과목은 ‘경제학’ ‘법학’ ‘화학’ ‘천문학’ ‘일본사’ ‘세계사’ ‘한문’ ‘정치학’ 등이다. 교과에 따라 그 분야의 최신 책을 골랐다. ‘자네들의 머리로 전부 암기하라’며 메모는 금지였다.
어떤 강의에서는 화학반응의 ‘화합’이 주제였다. 물은 수소와 산소가 화합해 생성된다. 그때 수소와 산소의 혼합기체가 연소되어야 한다.
도다 선생님은 ‘이것을 신심에 비유하면…’이라고 말을 이었다.
“우리의 신력(信力)과 행력(行力)이 어본존의 불력(佛力), 법력(法力)에 더해져 화합함으로써 공덕이 생긴다. 신력과 행력이 솟아올라 화합해야 한다.”
천문학 강의에서는 ‘지구와 천체’의 다음 문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 망원경의 시야 중에는 혹성계를 가진 항성이 천만 개나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중략) 만약 백 개의 혹성 중 한 개 가이들(주=공기, 물, 온도 등)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생명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 지구가 십만 개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구절에서 도다 선생님은 장래를 내다보며 말했다.
“이 대우주에는 지구와 비슷한 혹성이 몇 개라도 있다. 불법(佛法)에서 설하는 ‘타방(他方)의 국토’는 그런 곳을 말하는 것이다.”
어서를 근간에 두고 진검승부로 모든 학문을 자유자재로 논했다. ‘이 이론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 학자는 일부 원리를 모든 것에 끼워 맞추려 한다’ 등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또 도다 선생님은 가끔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그러면 읽은 책의 줄거리를 말해보자’고 질문한다. 촌각을 다투는 은사의 훈도였다.
이케다 선생님의 일기에는 이런 결의가 씌어 있다.
“선생님, 몸도 돌보지 않으시고 제자를 육성해주시는 은(恩) - 나는 어떻게 갚아야 하는가. 지금이다. 힘, 힘, 힘을 축적할 때는. 모든 힘을 후대의 준비로써 축적하자.”(1953년 12월 22일)
<70th 은사에게 바치는 지성의 보관>
첫 명예학술 칭호 45주년
이케다 선생님의 해외출판 48개 언어 2000점
지성과 대화
‘오사카투쟁’ ‘야마구치개척지도’ 등 광포의 격전 중에도 이케다 선생님의 남모르는 연찬은 계속되었다. 도다 선생님은 미래를 주시했다.
“‘일체의 법은 모두 이는 불법’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어떠한 대학자, 대지도자도 어떠한 문제라도 자유자재로 논할 수 있는 힘을 단련한다.”
은사가 세상을 떠난 지 약 10년 뒤인 1967년 10월, 이케다 선생님은 유럽통합의 아버지 쿠덴호베 칼레르기 백작과 회견했다.
본격적인 첫 ‘서양문명과의 대화’에 임했다.
칼레르기 백작은 스물여덟 살에 자작 ‘범유럽’을 발간하고 유럽통합을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평화건설에 생애를 바친 지성이다.
두 사람은 1970년 10월에도 거듭 회담하고 훗날 대담집 ‘문명 동과 서’ 발간했다. 내용은 국제정세, 유엔론, 국가론, 공해문제, 민주주의, 교육론 등 여러 가지다. 그 중에서도 세계평화를 큰 주제로 다루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주장했다.
“공존의 기운이 아무리 고조되었다고 해도 국가 간의 대립을 지양하지 않으면 제3차 세계대전은 막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온갖 대립을 초월하게 하는 것을 인류의 정신 속에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구민족으로서의 보편적인 정신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사가 제창한 ‘지구민족주의’를 시대정신으로, 대담한 곳곳에 도다대학에서 받은 훈도가 생생하다. 이 책은 이케다 선생님이 해외의 지성과 편찬한 대담집 제1호다.
이후 이케다 선생님은 영국 역사학자 토인비 박사를 비롯해 세계의 지성과 계속 대담했다. 이케다 선생님의 저작은 해외에서 48개 언어로 2000점이 출판되었다.
‘세계 제일’이라는 긍지
소설 ‘신·인간혁명’ 제19권 <양광>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도다대학은 세계 제일의 최고 대학이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그 도다대학의 우등생으로서 그것을 세계에 증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내겠습니다. 그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지금까지 이케다 선생님에게 세계의 대학과 학술기관이 395개의 명예학술 칭호를 수여했다. 제1호인 모스크바대학교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 지 올해로 45주년을 맞는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대학에서 배운 일을 최고의 긍지로 여기고 자신이 받은 현창을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에게 바쳤다.
세계 24개국에서 받은 국가훈장과 수많은 명예시민 칭호와 영예도 또한 ‘도다대학’이 ‘세계 제일’이라는 증거가 되었다.
‘사제불이의 도다대학’ 훈도 70주년.hwp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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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새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