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올람토라 온라인 성도방에 초대합니다. 카카오 오픈채팅방에 "레올람토라"를 검색하시거나, 아래의 링크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픈채팅방 링크 주소 https://open.kakao.com/o/gvbFarQf
1 구원을 위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 올바른 지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지식이 필요하길래 구원에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불복종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의와 자신이 생각하는 의가 다르고 이에 따른 행동은 계명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순종인데 그 순종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계명에 따라 사는 것이다. (롬10:1-3) 모세는 여호와께서 모든 명령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항상 복을 누리고(행복하고) 또한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를 위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악의 기준과 다르기 때문이다. (신6:24,25) 예를 한가지만 들어보자면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의는 거룩한 안식일(샤밧)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라면 자기의는 거룩함을 얻기 위해 날이 중요하지 않으므로 일요일을 지켜도 된다고 여김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반박할 수 있다. 꼭 샤밧을 지켜야 거룩해지느냐?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샤밧을 어기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샤밧을 지키지 않아야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출31:14)
2 당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불순종하는 자들이었다 이사야가 이미 초림 예슈아때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를 예언했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외식하는 자가 되어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은 멀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고 예슈아께서 책망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기 때문에 지키지않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슈아를 메시아로 시인한다해도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시 외식하던 바리새인과 다를 것이 없다. 예슈아의 계명은 사랑의 계명으로 여호와의 계명과 동일하다.(막7:6-9)
3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이 목적이 되다 앞에서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가 있다고 하였는데,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예슈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말한다. 율법의 마침은 무슨 뜻일까? 이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의를 이룰 수 있는가? 예슈아께서 이제는 불법으로 의를 세울 수 있게 하셨는가? 다음 구절을 보면 신명기를 인용하고 있다. 모세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했다. 율법과 믿음은 반대말인가? 분명 바울은 믿음으로 율법을 더욱 굳게 세운다고 말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누가 하늘까지 올라가서 토라를 배워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겠는가? 누가 지옥까지 내려가서 토라를 배워 우리에게 가르쳐 주겠는가? 어떻게 하늘의 법도를 인간이 깨닭을 수 있으며 지킬 수 있겠느냐"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슈아께서 하늘에서 오셨고 지옥에서 다녀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행함이 없고 입으로만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이 너무 가까워 마음에 있고 입에 있기 때문에 행할 수 있다고 믿고 행하는 의로움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율법을 더욱 굳게 세운다는 말이 여기서도 성립된다. 그래서 믿음이 율법을 폐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말은 '율법을 끝냈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 목표, 우리가 추구하는 상태의 결국이 되셨다'라고 이해하는게 적절하다.(롬10:4-10)
4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우리에게는 메시아께서 가르치신 복음이 있고 다른 복음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끊임없이 복음을 변질시키려고 선동하고 물을 흐리게 한다고 바울은 책망하고있다. 그렇다면 2000년이 지난 오늘날 분명 다른 복음이 있을 것이다. 똑같이 예슈아를 말하고 여호와를 말하지만 다른 복음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지식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은 어떤 복음일까? 앞에서 말한 의를 이루는 방법 즉 구원을 얻는 방법의 문제가 아닐까? 분명 예슈아께서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복종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어떤 이들이 선동하여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고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바꾸지 않았을까? 이것은 복음을 변하게 하고 썩게 하는 것이다. (갈1:6-8)
5 하나님의 사람들을 박해한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의 전통을 지키던 바리새인 바울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심히 박해하고 죽였던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이것도 하나님의 의를 지키느냐 사람의 의를 지키느냐의 문제였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명령이고 가르침이라면 사람의 의는 사람의 명령이고 가르침이다.
6 유대교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의 문제이다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은 갈라디아서 p50 참조)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인 이유는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번역은 마치 유대교가 문제인 거 처럼 들린다. 이 구절은 여러 성경 번역본들과 다르게 번역된 문장이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지나치게 전통에 열심이었던 것이 원인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개역 성경은 전통이 아니라 유대교가 원인인 것처럼 번역함으로써 바울의 말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킹 제임스 흠정역을 보자. ‘내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 심히 열심을 내어, 내 민족 가운데서 나와 동등한 많은 사람들보다 유대인들의 종교에서 더욱 득을 보았느니라’ 이처럼 개역 성경은 원인을 유대교라고 번역한 반면, 킹 제임스 성경은 전통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 성경도 ‘왜냐하면’이라는 단어(משום,미슘)를 조건절로 시작하여 ‘전통에 지나치게 열심이었기 때문’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7 유대교는 무엇일까?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은 갈라디아서 p50-51 참조) 모세의 율법을 기초로 기원전 4세기경부터 발달한 유대인의 민족 종교를 말한다. 또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종교의 시작이라면 아브라함뿐 아니라 노아로, 아담과 하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유대교가 문제라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사람의 전통이지 여호와의 율법이 아니다. 언제나 문제는 사람에게 있지 하나님에게 있지 않다. 물론 유대교에 많은 전통들이 있다. 만약 전통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다면 유대교를 거절할 것이 아니라, 전통을 폐하고 여호와의 계명을 세우면 된다.
8 전통은 무엇일까?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은 갈라디아서 p51 참조) Darby’s English Translation은 ‘전통’을 doctrine ‘교리’라고 번역했으며, Young’s Literal Translation은 ‘진술, 의견’이라고 번역했다. 즉, 전통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의 해석이고 주석이다. 사람의 해석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고 문화가 된다. 말씀은 해석하기 보다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이처럼 사람의 ‘가르침과 교리’는(전통) 복음을 왜곡시켜 사도 바울이 예슈아를 메시아로 보지 못하게 했고 성도들을 핍박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물처럼 버려야 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의 잘못된 가르침과 교리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의 말을 오해하여 율법과 계명을 거절하고 그 위에 다른 교리들을 세워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르침 위에 사람의 가르침을 두는 우상 숭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키는 전통이 계명을 지키게 하는 선한 전통인지 계명에 불순종하게 하는 악한 전통인지 분별하여, 악한 전통이라면 오물처럼 버려야 할 것이다.
9 태초부터 각자의 사명을 정하셨다.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은 갈라디아서 p51-52 참조) ‘택정하다’는 헬라어 ἀφορίσας(아포리조)로 ‘지명하다’, ‘구별하다’의 뜻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거룩하다, 구별하다’의 뜻을 가진 קדש(카도쉬)를 사용했다. 이 말씀은 문맥상 구원받기로 정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서 구별하셨다는 사명의 부르심과 관련된 단어이다. (갈1:15,16)
10 바울이 제일 처음 만난 사도는 야고보이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슈아를 만나고 곧장 아라비아로 내려갔다. 다시 다메식으로 갔다가 삼년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지만 오직 야고보 사도밖에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에 멸하려던 믿음을 이제는 전파한다고 말한다. 전에 멸하려던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으나 잘못된 지식으로 사람의 가르침과 교리(전통)에 지나치게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계명은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멸하려던 것을 말한다. (갈1:1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