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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감사
제목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
성경 : 시 50:22~23
찬송 : 593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30702 낙양교회 맥추감사주일 낮 예배
시 50: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은혜와 평강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하여 감사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시편에서는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느 중년의 부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에게 말해줄 중요한 소식 두 가지가 있소.”
“뭔데요?”
“하나는 좋은 소식이고 하나는 나쁜 소식인데, 무엇부터 말해줄까?”
“좋은 소식부터 말해 봐요.”
“그래, 오늘 우리는 부자가 됐소. 우리에게 1억 원이 생겼어.”
“아, 그래요? 야, 기분 좋네. 그럼 나쁜 소식은 뭐예요?”
“아, 그 1억 원이 퇴직금이라는 소식이요. 오늘 직장을 그만뒀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는 좋은 소식도 있지만 나쁜 소식도 있습니다.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날 수도 없고, 늘 나쁜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서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모두 허락하셔서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고 말씀합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행복과 불행, 밝은 날과 어두운 날들이 언제나 같이 있습니다. 항상 좋기만 하고 항상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섞여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밝은 쪽을 생각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인생은 더 밝게 전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나쁜 일에도 감사하는 겁니다. “범사(모든 일)에 감사하라”라고 하셨을 때, 모든 일로 ‘인하여’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일 ‘가운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나쁜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감정이 감사하게 느끼겠습니까? 그런데 나쁜 일 가운데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인생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는 제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생각한 것은 양적으로 많은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줄로 오해하였습니다.
시 50: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주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면서 “내가 말하리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지금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시 50: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제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좋은 제물을 넘치게 하나님께 바쳤고 성전에는 제물이 떨어질 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정신을 차리시지 못할 정도로 많은 제사를 드렸는지도 모릅니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는데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그저 제물을 많이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통회하는 상한 심령입니다. 제사는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소나 숫염소를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수소나 숫염소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소나 숫염소를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시 50: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시 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시 50: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만일 하나님께서 소나 염소가 필요하셨다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소나 염소를 잡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산이나 들에 널려 있는 소나 염소가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잡으시면 되지 굳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산으로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내놓으라고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소나 숫염소가 전혀 필요치 않으신 분이십니다.
시 50: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정말 피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염소의 피를 흘리면 그 피를 꿀꺽꿀꺽 마신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고기를 태우면 하나님께서 고기를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육식을 아주 좋아하시며 피를 아주 끔찍이도 좋아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때문에 죽는 짐승들 하나하나가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으셨습니다. “산의 새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11절) 하나님은 짐승들이 죽는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안타까워하시고 아까워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개가 병들어 죽으면 큰 충격을 받습니다. 또 어른들도 자기가 키우는 새나 애완짐승이 물려 죽거나 하면 매우 가슴 아파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그 모든 짐승들은 하나님께서 다 아끼시는 것이고 다 아는 짐승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네 집 점박이가 죽는구나. 이번에는 검둥이가 죽고 누렁이가 죽는구나!”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 짐승들이 죽는 것을 기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왜 짐승들을 죽게 하십니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직접 제물을 죽여 바쳐야 합니다. 그 제물이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을 보면서 “내 죄 때문에 이 아까운 소가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구나. 소야. 정말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내가 죄를 짓지 않을게. 그래서 억울하게 죽는 소가 없도록 할게.”라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는 소를 하나님께 바치는 뇌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소 한 마리를 바쳤으니까 하나님께서 열 마리의 복을 주시겠지.” 우리식으로 생각한다면 “소 한 마리에 700만원 짜리를 바쳤으니까 그 열배인 7000만원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하고 제물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우리의 예배가 어떤 자세로 드려지는지 곰곰 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는 심정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이런 제사, 이런 감사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제사
시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본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을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복 중의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을 받으시게 합니다.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불평하기를 즐기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평생을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식위해 헌신하고 돌보아 주었는데 감사는커녕 불평불만을 하는 자녀가 있다면 어떤 부모님이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부모님이 해 준 것도 별로 없는데 항상 웃는 얼굴에 감사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자식을 볼 때 얼마나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겠습니까? 부모님에게 늘 감사하면 그것이 부모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 둔 보람을 느끼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 천의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보다 순종과 감사로 드리는 제사를 더 기뻐하십니다. 감사시인 시편 100:3-4절에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인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거의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특별한 의식을 갖추고 양을 잡고 소를 잡아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만이 감사가 아닙니다. 아주 평범하면서 일상적으로 감사의 생활을 실천해 보십시오. 그러한 생활을 더 좋아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무엇이든 먼저 감사하고, 지금은 어렵고 힘들어도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고 감사하고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할 때 그는 이미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은 사람이고 가장 풍요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말할 때마다 감사하고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으면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하며 찬송하고 감사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며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매사에 근심걱정만 하고 불평불만만 하고 원망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고 쓰임 받지를 못합니다.
감사는 마치 향기로운 제물과 같아서 하나님이 맡으시고 흐뭇해하시며 하늘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과 원망하며 탄식하는 것은 마치 매운 연기를 피우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께서 문을 닫아 버리십니다.
김병삼 목사님은 “성숙한 사람의 감사”는 미래를 감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더 성숙한 감사의 차원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이야기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즉 감사와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는 바로 이러한 독특성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미리 일어날 일에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가만히 보십시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이미 받을 것을 감사하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14장에 나와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때 주님은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축사하시고"(마14:19)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축복하시고 감사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미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도 보면, 41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축복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감사와 믿음은 축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감사하며 나아가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겠습니까? 얼마나 여유가 있으며 관용이 풍부하겠습니까?
감사의 성품은 기적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간단하게 마태복음 14장의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을 통해 축복의 원리를 살펴볼까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게 된 이유가 마태복음 14장 15-16절에 있습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지금 처한 현실을 보십시오. 막막합니다. 빈들에서 날이 저물었고, 먹을 것을 구할 곳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최선의 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구할 돈도 돈이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을 어떻게 가져오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진 가능성을 보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문제에 봉착하면 그 도움의 손길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것, 기적을 창조할 무엇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기적의 사건을 보세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거지를 보았을 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그들에게 은과 금은 없어도 가진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믿었습니다.
감사의 기적!
여러분이 아무것도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지금 가진 것을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축복과 감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졌던 하찮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 감사가 기적을 창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 손에 있는 것, 여러분 가슴에 품은 것, 그것으로 감사하십시오. 미래를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기적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원종수박사 간증 영상을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