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은행이 이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선 외국인 선수들은 물론 김연주, 김단비의 역할도 중요하다. 두 선수들은 신한은행이 6연패를 차지했을 때 선수로 뛰었기 때문에 정상에서 내려온 이후의 회한을 공유할 수 있었다. 다시 정상을 향해 노력을 거듭하는 두 선후배의 이야기.(사진=이영미)>
김연주(31)와 김단비(27)는 ‘레알’ 신한은행의 전성기와 하락세를 공유한 선수들이다. 2007년 겨울리그를 시작으로 2011-2012 시즌까지 6회 연속 통합우승이란 대기록을 작성했을 당시 그들은 전주원, 정선민, 하은주, 최윤아 등과 함께 신한은행의 왕조를 구축했다. 그러나 신한은행을 이끌었던 위성우 감독과 전주원 코치가 우리은행 위비를 맡게 되면서 신한은행은 더 이상 정상에 오르지 못했고, 2015-2016, 2016-2017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마저 실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김연주와 김단비는 팀의 흥망성쇠를 선수로 뛰면서 함께 했다. 따라서 올시즌을 앞두고 누구보다 팀의 재건을 위해 땀을 흘렸고 팀이 올곧이 설 수 있도록 노력을 거듭했다. 인천 도원체육관에서 김연주, 김단비를 만났다.
김연주와 김단비는 신한은행의 소문난 단짝이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친분을 언급하자 후배 김단비가 “우린 농구장에서만 친하다. 밖에서 만나면 아는 척도 안 한다”고 예상 밖의 반응을 나타냈다. 김단비의 얘기에 김연주는 큰 웃음을 터트리며 “정말 그렇다. 밖에선 만나도 그냥 지나친다”고 한 술 더 떴다. 기자의 정보가 틀린 게 아니었다. 이런 농담을 주고 받을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친밀했다.
2005년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먼저 신한은행 유니폼을 입은 김연주는 2년 후 팀 후배로 만난 김단비를 살뜰히 챙겼다. 선배들이 많은 팀에서 잘 적응할 수 있게끔 김단비의 해결사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힘들었던 시기에 공유한 시간들은 두 사람에게 두터운 우정과 신뢰를 쌓게 만들었다. 원정 경기 동안 룸메이트로 지낸 부분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다들 나이 많은 제가 ‘방장’이고 단비가 ‘방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정반대였어요. 너무 친하다보니 단비가 간식 챙기는 것도 저한테 시킬 때가 있었거든요. 동기들이 없어서 단비를 친구처럼 생각하며 지냈는데 간식 심부름까지 시킬 줄이야(웃음). 대신 단비가 다른 심부름은 다 도맡아 했어요.”
김단비는 선배들이 줄줄이 은퇴하는 바람에 서른 살도 안 된 나이에 팀 서열이 4번째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마디.
“선배가 되니까 몸은 편한데 마음은 편치 않더라고요. 이전 선배들이 어떤 마음으로 후배들을 보살폈을지 절감하고 있어요. 정말 부담이 커요.”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김단비를 바라보는 김연주는 안타까움을 담아냈다.
“단비가 어린 나이에 주전으로 뛰면서 자신도 모르게 부담을 안고 농구했던 것 같아요. 전 베스트 멤버도 아니었고 주로 식스맨으로 뛰다가 갑자기 고참이 되니까 지난 시즌 굉장히 혼란스럽더라고요. 그런 점에선 단비가 대단해 보였어요. 그 부담과 싸워가면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으니까요.”
<3점슛에 강점을 보이는 김연주. 오랜 시간 동안 식스맨에 머물렀고, 선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사진=신한은행)>
선수로서 상대가 갖고 있는 장점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주문하자 김연주는 김단비에 대해 “얼굴은 예쁜데 신체 능력은 남자 같다”라고 답했다. 김단비가 “그거 진짜 칭찬 맞아요?”라고 묻자 김연주는 “칭찬이지. 스피드나 점프는 단비를 따라갈 만한 선수가 없으니까”하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단비가 웨이트트레이닝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아세요?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몸을 만들어요. 그 덕분에 어렸을 때보다 훨씬 강한 파워를 갖게 됐고 겉과 내면이 모두 강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죠. 단비가 신인 때는 몸이 많이 약했거든요.”
김단비는 “언니는 열흘 중에서 9일은 긍정적인 면을 보여줘요. 포기하는 것도 모르고 강도 높은 연습에도 힘든 내색 없이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내죠. 다른 선수보다 1분이라도 더 뛰려고 하고, 1분이라도 덜 쉬려고 해요. 굉장히 솔선수범하는 스타일입니다. 언니를 보면서 배울 점이 정말 많아요. 저도 나중에 언니처럼 책임감 강한 선배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로요”라고 말했다.
신한은행은 우리은행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후 삼성생명과 KB스타즈를 맞아 아쉬운 패배를 곱씹어야 했다. 김단비는 지난 시즌을 떠올렸다.
“지난해 정규리그 시상식에서 5관왕에 올랐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더라고요. 개인 성적은 물론 팀 성적이 좋았더라면 수상의 기쁨을 만끽했을 텐데 둘 다 좋을 수 없다면 팀 성적이 좋았어야 했거든요. 제가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등에서 1위를 했지만 턴오버가 굉장히 많았어요. 팀 스포츠에서 개인 성적이 높다는 게 아이러니하더라고요. 요즘은 코트에서 좀 편해진 것 같아요. 카일라 쏜튼과 르샨다 그레이란 두 외국인선수의 활약 덕분에 제가 좀 여유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수식어가 필요 없는 신한은행의 에이스 김단비. 올시즌에는 외국인선수들의 활약에 자신이 안고 있던 부담을 조금은 덜 수 있게 됐다.(사진=신한은행)>
김연주도 올시즌 신한은행 유니폼을 입고 뛰는 외국인선수들에 대한 고마움을 덧붙였다. 지난 시즌 외국인선수가 교체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숀튼과 그레이의 활약은 선수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고 있다.
“두 선수를 보면 그냥 든든해요. 성격도 굉장히 긍정적이고 낙천적이거든요. 에너지가 넘치는 선수들이라 배우는 점이 많아요. 올시즌에는 외국인선수들 걱정 없이 모두가 열정적으로 팀워크를 다진 것 같아요.”
인터뷰에 앞서 신한은행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다 한 가지 눈에 띄는 부분을 발견했다. 김연주는 쏜튼이 강도 높은 훈련으로 힘들어 할 때마다 달려가선 등을 두들기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김연주가 다가갈 때마다 쏜튼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김연주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스페인 명문 프로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에 착안해 ‘레알 신한’이라 불렸던 신한은행 에스버드. 팀의 성공과 몰락을 올곧이 지켜본 김연주와 김단비의 소회가 궁금했다. 김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한은행이 계속 우승을 차지했어도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게 매우 힘든 일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분명 내리막길을 타야 할 시기가 올 것이고,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우린 다시 올라갈 수 있는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우승을 독식했던 팀이 플레이오프 탈락도 경험하고, 하위권을 맴도는 현실에 미련과 안타까움을 갖기 보단 더 연습하고 더 노력해서 그 과정을 극복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우승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올시즌 이를 악물고 연습했어요. 다시 힘들었던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요.”
<지난 시즌 5관왕에 올랐던 김단비이지만 좋지 않은 팀 성적으로 인해 수상의 감흥이 없었다고 한다.(사진=이영미)>
김단비는 우리은행의 5연패를 지켜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처음엔 우승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화가 났어요. 그러다 우리은행 선수들이 어떤 환경에서 운동했을지 잘 알겠더라고요. 저도, 또 연주 언니도 위성우 감독님 밑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은행 선수들이 감당했을 훈련 강도가 고스란히 전해지더라고요. 그만큼 고생한 선수들이라면 우승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올시즌은 우리은행 뿐만 아니라 모든 팀이 경쟁 상대가 됐어요. 결국엔 강한 팀이 살아남기 마련인데 우리가 그런 팀이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되겠죠. 레알 신한의 명성을 되찾고 싶어요.”
김단비는 위성우 감독이 처음 우리은행을 맡았을 때 맞대결이 벌어지면 종종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우리은행에도 동명이인인 김단비가 존재하는데 위 감독이 “단비야!”라고 부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했다는 것.
“감독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터라 위 감독님이 단비란 이름을 부르면 절로 고개가 돌아갔어요. 마치 우리 팀 감독님 같았거든요(웃음).”
오랜 시간 식스맨으로 뛰었던 김연주는 늘 쟁쟁한 선배들의 그늘에 머물렀었다. 20대 후반이 돼서야 빛을 보기 시작했던 그는 안타깝게도 2015년 12월 아킬레스건 파열로 은퇴 위기를 맞이했다. 실제 그는 당시 은퇴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병원에 갔더니 수술과 재활을 포함해서 최소 6개월에서 1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은퇴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강하게 반대하더라고요. 이렇게 은퇴하면 농구인생에 아쉬움만 갖게 된다면서요. 그래서 다시 죽기살기로 재활 훈련에 들어갔어요. 지난 시즌 복귀에 성공하긴 했는데 시즌 마치고 나서 다시 고민이 되더라고요. 내가 여기서 1,2년 더 뛰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올시즌을 앞두고 다시 농구공을 잡았지만 은퇴 시기는 항상 숙제처럼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김단비는 은퇴 시기를 고민 중이라는 김연주의 얘기에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 보였다.
“신인 때는 매일 은퇴를 떠올렸던 것 같아요. 당시엔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숙소에서 단체 생활하는 부분도 익숙지 않았고요. 엄마한테 전화할 때마다 그만두고 싶다며 울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철부지 같은 생각을 떨쳐 냈지만 사람들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면 제 자신한테 실망하게 돼요. 젊음을, 청춘을 농구에 쏟고 있음에도 경기 결과에 따른 팬들의 희비가 전달될 때는 기쁘기도 하고 매우 아프기도 하거든요.”
<여린 외모이지만 책임감 강한 선배의 모습을 보이는 김연주. 후배들을 살뜰히 챙긴다.(사진=이영미)>
만약 은퇴를 한다면 두 사람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 김연주는 “지도자는 아니에요. 제가 부족한 점이 많아서 선수를 가르칠 만한 실력이 안 돼요. 은퇴 후에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요. 농구를 정말 사랑하지만 선수로서만 사랑하려고요”라고 말했다. 김단비는 재미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은퇴하자마자 휴대폰 알람을 꺼놓을 거예요. 아침 기상 시간은 물론 휴식일에도 숙소 들어가는 시간을 지키려고 알람을 맞춰놓고 지냈거든요. 알람을 끄면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여유를 만끽하고 싶어요.”
최근 신한은행의 최윤아가 은퇴식을 가졌다. 이미 코치로 선수단과 함께 움직였지만 ‘언니’였던 최 코치의 은퇴를 바라보는 후배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난 시즌 마치고 윤아 언니, (윤)미지랑 함께 유럽 여행을 갔었어요. 여행 중에도 언니는 은퇴 얘기를 꺼내지 않았거든요. 나중에서야 언니의 은퇴 사실을 알고 많이 울었죠.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까 많이 허전하더라고요. 언니는 굉장히 독하게 운동했었어요. 누구보다 책임감도 강했고요. 언니를 코치로 다시 만나게 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다시 기댈 곳이 생겼으니까요.”(김연주)
“윤아 언니, 아니 최 코치님이랑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기 때문에 저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에요. 신한은행이 6연패를 이뤘을 때 함께 했던 선수가 최 코치님과 연주 언니만 남았는데 그중 최 코치님이 은퇴하니까 서운한 마음이 앞서더라고요. 선수는 아니지만 코치님으로 옆에 계셔서 든든해요. 힘도 나고요.”(김단비)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바라는 점이 있는지 물었다. 김연주는 김단비에게 “농구를 좀 더 즐기면서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단비가 여자농구에선 탑 플레이어잖아요. 그러다보니 아픈 것도 참고 뛰고, 쉬는 시간조차 불안해해요. 조금만 더 편해졌으면 좋겠어요. 단비가 편해지려면 제가 더 잘해야 하는데….”
<그레이가 넘어지자 가서 손을 잡아주는 김연주.(사진=신한은행)>
김연주의 말에 김단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가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내가 생각한대로 말할 수가 없잖아요”라고 운을 띄운 다음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언니 별명이 ‘오 여사’예요. 오지랖 여사라고. 수비하다가도 다른 선수가 힘들어 하면 거기 가서 도와주고, 충분히 욕심낼 수 있는 슛 찬스에도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등 배려의 아이콘이거든요. 언니가 좀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이젠 언니만 챙겨도 돼요. 그동안 많이 베풀었으니까요. 참 좋은 언니이자 선배입니다.”
여전히 애인이 없다는 김연주, 남자친구가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김단비(이 나이에 굳이 남친의 존재를 숨길 필요가 있느냐면서). 신한은행에서 쌓은 이들의 우정+애정은 서로에게 좋은 자극과 동기부여가 되고 있었다.
<올시즌 마지막에도 이렇게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기를.(사진=이영미)>
<이영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