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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심훈. 1901~1936
[쌍두취행진곡]
(1)
가을 학기가 되자, oo일보사에서 주최하는 학생 계몽운동에 참가하였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오늘 저녁은 각처에서 모여든 대원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그 신문사 누상에서 열린 것이다. 오륙백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에는 전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흩어져서 한여름 동안 땀을 흘려가며 활동한 남녀 대원들로 빈틈없이 들어찼다. ~~~
만호장안의 별처럼 깔린 등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도록 사방의 유리창을 활짝 열어젖혔건만, 건장한 청년들의 코와 몸에서 풍기는 운김이, 우거진 콩밭 속에를 들어간 것만큼이나 후끈후끈 끼친다.~~
남양의 달밤을 상상케 하는 애련하고도 청아한 선율에 회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S군은 기타를 한참 타다가 저 혼자 신이 나서 악기를 들고 일어나 엉덩춤을 춘다. 메기 같이 넓적한 입을 실룩거리며 토인의 노래를 흉내 내는데, 그 목소리는 체수에 어울리지 않게, 염생이가 우는 소리와 흡사하게 떨려 나와서, 여러 사람의 웃음보가 터졌다.
(2)
재청요 - 앙콜 - 앙콜 - ~~~ 지금부터 여러분의 체험담을 듣기로 합시다. ~~~ xx고등농림학교의 박동혁 군! ~~~여깃습니다. 맨 뒷줄에서 굵다란 목소리가 청처짐하게 들렸다. ~~~기골이 장대한 고농 학생이 뭇사람이 쏘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뚜벅뚜벅 걸어 나오자,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강당이 떠나갈 듯이 일어났다.
(3)
삼 년째 이 운동에 참가해서 적으나마 힘을 써온 이 사람으로서 그 경험이나 감상을 다 말씀하려면 매우 장황하겠습니다. 더구나 오늘 저녁은 간단한 경과만 보고하기를 약속한 까닭에 정작 이 가슴속에 첩첩이 쌓인 그 무엇을 여러분 앞에 시원스럽게 부르짖지 못하는 것이 크게 유감으로 생각됩니다. ~~~잠시 말을 멈추더니, 수첩을 꺼내들고 자기의 고향인 남조선의 서해변에 있는 한곡리라는 궁벽한 마을의 형편을, 숫자적으로 대강 보고를 한다. ~~~호수가 구십사 호인데, 농업이 칠 할, 어업이 이 할이요, 토기업이 일 할이라는 것과 인구가 사백 육십여 명에,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이 팔 할 이상이나 점령한 것을 삼 년 동안을 두고 여름과 겨울 방학에, 중년 이하로 여자들과 육칠 세 이상의 아동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깨쳐주고 간단한 셈수를 가르쳐준 것이 이백사십칠 명에 달하는데, 그곳 보통학교 출신들의 조력이 많았다는 것을 말하자, 박수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
첫 해에는 아이들을 잔뜩 모아는 놨어도 가르칠 장소가 없어서 큰 은행나무 밑에다 널판때기에 먹칠을 한 한 걸 칠판이라고 기대어놓고 공석이나 가마니를 깔고는 밤 깊도록 이슬을 맞아가면서 가르치기를 시작했었는데, 마침 장마 때라 비가 자꾸만 와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움을 팠어요. 나흘 동안이나 장정 십여 명이 들러붙어서 한 대여섯 간통이나 파고서 밀집으로 이엉을 엮어서 덮고, 그 속에 들어가서 진땀을 흘리며 가갸거겨를 가르쳤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밤은 밤새도록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까 교실 속에 빗물이 웅덩이처럼 흥건하게 고였는데 송판으로 엉성하게 만든 책상 걸상이 둥실둥실 떠다니는군요. ~~~~그뿐인가요. 제철을 만난 맹꽁이란 놈들이 뛰어들어서 저희 끼리나 글을 읽겠다구 맹자 왈 공자 왈 해가며 복습을 하는데... 그때에 어느 실없는 군이 코를 싸쥐고 맹 - 꽁, 맹 - 꽁. 하고 커다랗게 흉내를 내어서 여러 사람은 천장을 우러러 간간대소를 하였다. ~~~
(4)
현재의 정세로 보아서 어느 시기까지는 계몽운동과 사상운동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아니 됩니다. 계몽운동은 어디까지든지 계몽운동에 그칠 따름이지, 부질없이 다른데다가 혼동해가지고 공연한 데까지 폐해를 끼칠 까닭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하고 단단히 주의를 시킨다. ~~~
이번에는 금년에 처음으로 참가한 여자 대원중에서 제일 좋은 성적을 나타낸 xx여자신학교에 재학 중인 채영신양의 감상담이 있겠습니다. ~~~채영신이라고 불린 여자는, 한참 만에 얼굴이 딸기 빛이 되어가지고 일어나더니 전 아무 말도 하기 싫습니다! 하고 머리를 내저으며, 야무지게 한마디를 하고는 펄썩 앉아버린다.
(5)
간단하게나마 말씀해주시지요. 사회자는 좀 무색한 듯이 채영신이가 앉은 편으로 몇 걸음 다가오며 어서 일어나기를 권한다. ~~~그는 사회자를 쏘아보며, 첫째는 이런 자리까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지는, 남이 다 말을 하고 난 맨 끄트머리에 언권 을 주는 것이 몹시 불쾌합니다. ~~~둘째는 제 속에 있는 말씀을 솔직하게 쏟아놓고는 싶어두요, 사회하시는 분이 또 무어라고 제재를 하실 테니깐, 구차스레 그런 속박을 받아가면서까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 하고 다시 앉아버린다. ~~~
저는 금년에야 참가를 했으니까. 이렇다고 보고를 할 만한 재료가 없고요 고생을 좀 했다고 자랑할 것도 못 될 줄 압니다. 그저 앞으로 이 운동을 꾸준하게 해나갈 결심이 굳을 뿐이니까요. ~~~~박동혁 씨의 의견은 저도 전연 동감입니다! ~~~여러분은 학교를 졸업하면 양복을 갈아붙이고 의자를 타고 앉아서 월급이나 타 먹으려는 공상부터 깨트려야 합니다.
(6)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동혁이 물었다. 학교 기숙사에 가서 잘 텐데, 문 닫을 시간이 지나서 걱정이야요. ~~~두 사람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아현리 편짝으로 나란히 서서 걷는다. ~~~기숙사는 불을 끈 지도 오래인 모양인데, 대문을 잡아 흔들고 초인종을 연거푸 누르고 하여도, 감감 소식이다.
(7)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앞서거나 뒤서거니 언덕길을 더듬으며 감영 네거리로 내려왔다. ~~~인전 백 선생님 집으로나 갈까 봐요. 한다. 백 선생님이라니요? 왜 여자 기독교연합회 총무로 있는, 백현경 씨를 모르세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하고 큰거리로 사라지는 동혁의 기다란 그림자를 서운히 바라보다가 돌쳐섰다. 대문을 흔들면서 백 선생님! 백 선생님!
(8)
그 이튿날 학교로 내려간 뒤에 동혁은 며칠 동안 마음의 안정을 잃고 지냈다.
(9)
영신은 그날 밤 그가 숭배하는 백씨에게 백 퍼센트로 동혁을 소개하였었다. ~~~~아 - 니, 영신이가 대번에 남자한테 홀딱 반한 게 아냐? ~~~영신은 사흘 뒤에 동혁의 답장을 받았다.
(10)
백 선생님하고 인사하시죠. ~~~동혁은 약속한 시간에 거의 일 분도 어김없이 백씨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11)
유성기를 틀어 오케스트라를 반주 삼으며 여러 사람은 영신이가 만든 라이스카레와 오물렛 같은 양식을 먹으면서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13)
두 사람은 큰길로 나왔다. 상기가 되었던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우리 산보나 할까요? ~~~그럼 목도 마른데 악박골로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 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두 사람은 으슥한 언덕 밑 바위 아래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등 뒤 송림 속에서 누군지 청승맞게 단소를 부는 소리가 들린다. ~~~참 영신 씨는 크리스천이시지요? 전 어려서부터 믿어왔어요. 왜 동혁 씨는 요새 유행하는 맑스 주의자세요? 글쎄요.... 그건 차차 두고 보시면 알겠지요. ~~~~자본주의에 아첨을 하는, 그따위 타락한 종교는 믿고 싶지 않아요.
(14)
우리 시골로 내려갑시다! 이번 기회에-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서, 우리의 고향을 지키러 내려갑시다! 한 가정을 붙든다느니 보다도, 다 쓰러져가는 우리의 고향을 붙들기 위한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 용기를 냅시다! 그네들을 위해서 일을 하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선구자로서의 기쁨과 자랑만은 남겠지요.
[일적천금]
(1)
박첨지는 마누라를 흘낏 돌려다보고 중얼중얼 군소리하듯 한다. 너구리굴 보구 피물 돈버텀 내쓴다구, 동혁이 월급 탈 때만 바라구서 조합돈꺼정 써놨으니 참 정말 입맛이 소태 같구려. 영감의 말을 한숨으로 화답하던 마누라는 그래두 동혁이가 어떡허든지 우리 양주 배야 곯게 하겠수? 명색이라두 학교 졸업이나 했으면 모를까, 지금 와서 전들 무슨 뾰죽헌 수가 있나베. 양식이라구 인젠 묵은 보리 여남은 말이 달랑달랑허는데...
(3)
편지는 영신에게서 온 것이었다. ~~~한 사람은 고향인 한곡리로, 한 사람은 기독교청년회 농촌사업부의 특파원 격으로, 경기 땅이나, 모든 문화시설과는 완전히 격리된 청석골이란 두메 구석으로 내려가서 일터를 잡은 뒤에는,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건만, 그동안 과로한 탓인지 몸이 매우 쇠약해졌어요. ~~~~동혁 씨가 계신 한곡리로 가서 얼마 동안 바닷바람이나 쏘이다가 올까 합니다.
(5)
이튿날도 비는 끊임없이 왔다. 동혁은 도랭이를 쓰고 살포를 짚고 나가서 논의 물고를 보고 들어왔다. 점심 뒤에는 신문지를 말끔 몰아가지고 집에서 한 삼 마장이나 되는 바닷가로 나왔다. 해변에서 새우를 잡아 말리고 준치나 숭어를 잡는 철이 되면, 막살이를 나오는 술장사에게, 빌려주는 오막살이의 방 한 칸을 빌렸다. 아들은 젓잡이를 하러 나가고, 늙은 마누라와 며느리만 집을 지키고 있어서, 대낮에도 노 젓는 소리와 간간히 뱃노래 소리밖에는 들리는 것이 없어, 여간 조용하지가 않다. 동혁은 주인마누라에게 풀을 쑤어 달래서, 신문지로 흙방을 바르고 기직을 구해다가 방바닥에 깔고, 불을 떼어 말리고 하느라고, 비에 젖은 하루해를 보냈다. ~~~손님이 묵고 있는 동안 밥까지 지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집에는 거처할 방도 없거니와 거진 하루 한 번씩은 입버릇처럼 장가를 들라고 성화를 하는 부모가 어떻게 할는지도 몰라서 일테면 사처를 잡은 것이다.
~~~~이른 아침 동혁은 찢어진 지우산을 숙여 쓰고 큰덕미(지금은 공단이 조성돼 없어졌지만 한진리 뒤 바다쪽으로 볼록 튀어나온 산이었다.-2004. 서울신문)로 갔다. 쇠대갈산 등성이 위에 올라 머리를 드니 구름과 안개에 싸인 바다가 눈앞에 환하게 터진다. 무엇에 짓눌렸던 가슴이 두 쪽에 쩍 뻐개지는 것 같은 통쾌감과 함께 동혁은 앞으로 안기는 시원한 바람을 폐량껏 들이마셨다가 후- 하고 토해내고는 휘파람을 불며 불며 나루께로 내려갔다. 큰덕미라는 곳은 하루 한 번 똑딱이(석유발동선)가 와 닿는 조그만 포구로 주막 몇 집과 미루나무만 엉성하게 선 나루터다.
(6)
이윽고 파-란 페인트칠을 한 똑딱이가 선체를 들까불며 들어온다. 갑판 위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희 저고리에 검정 치마가 보인다.
(7)
영신은 바라던 대로 바닷가 한가한 집에서 편안히 쉴 수 있었다. ~~~경치두 좋지만, 우리 청석골보덤 인심두 여간 후하지 않군요.
[기상나팔]
(1)
비는 또다시 이틀 동안을 줄기차게 쏟아지다가, 씻은 듯 부신 듯이 개이고, 날이 번쩍 들었다. ~~~~은행나무가 선 언덕 위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배춧 빛 노동복을 입은 청년들이, 여기저기서 납작한 초가집을 뛰어 나오더니, 언덕 위로 치닫는다.
[가슴속의 비밀]
(2)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기만의 등 뒤로 돌아,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논과 밭이 눈앞에 질펀히 깔렸는데, 여기저기서 두레로 물을 푸는 소리와, 소 모는 소리가 들린다. 한 서너 군데서나 못자리를 만드느라고, 흰 옷 입은 농군들이 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저 기만이란 사람의 아버지, 무슨 도산가 허는 이는 뭘 하는 사람이야요?
(3)
기만은 세 사람이 내려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동혁이더러 소개를 해달라서 영신이와 인사를 했다.
(5)
영신은 매우 유쾌한 그날그날을 보냈다. 날마다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은행나무 밑으로 올라가서 조기회에 참례를 하였다.
~~~영신은 회 같은 것을 조직하는 데 훈련을 받아온 터이라, 건배의 아내를 회장 격으로 추천하고 어렵지 않게 한곡리 부인 근로회라는 단체 하나를 조직하였다. 그러고는 앞으로 유지해나갈 방침까지 세워서 건배의 아내에게 소상 분명히 일러준 후 그와 앞으로는 형님 동생을 하자고 해서 의형제까지 맺고 굳은 악수를 하였다.
(6)
기만이는 매우 분개하였다. 제가 얼마나 도도한 계집이길래 내가 여러 번 청하는데 안 온단 말이냐.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7)
일주일 동안이나 동혁이와 건배 내외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숙식이 부드러이 지내서, 영신은 건강이 매우 회복되었다.
[해당화 필 때]
(1)
영신이가 떠나기로 작정한 전날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다. ~~~동혁이만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서창을 물들이는 달빛은, 이런 걱정 저런 근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영신을 문밖으로 꾀어내었다. 그는 바스켓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던 조그만 손풍금을 꺼냈다. 그것은 xx여고부를 우등 첫째로 졸업한 상품으로 미스 빌링스란 서양 여자가 선사한 것이다. 영신이가 이곳에 온 뒤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거닐던 바닷가 백사장에는 하양 모래가 유리가루처럼 반짝이는데, 그 모래를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난다. 옷 속으로 스며드는 밤기운이 조금 산산하기는 하나 바람 한 점 일지를 않는다. ~~~
처음에는 입 속으로만 군소리하듯 읊어보던 것이, 차츰차츰 그 소리가 높아져서, 무섭도록 고요한 깊은 밤, 해변의 적막을 깨트리다가는, 가느다랗게 뽑아 올리고 몰아내리는 피아니시모에, 영신은 내가 성악가나 될 걸 그랬어. 하리만큼 제 목소리가 오늘 저녁만은, 은실같이 곱고, 꾀꼬리 소리만큼이나 청아한 것처럼, 제 귀에 들렸다.
머리를 들면, 황금가루 같은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머리를 숙이면, 그 달빛을 실은 물결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부서지며, 눈과 영혼을 함께 황홀케 한다. 다시금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면, 풀솜 같은 구름 속으로, 숨바꼭질하는 달 속에는 쓸쓸한 방구석에 홀로 누워 외딸을 그리는 어머니의 눈물에 젖은 얼굴이 비치는 것 같고, 기다란 한숨과 함께, 머리를 떨어뜨리면, 닦아 논 거울 같은 마당 위에, 꿈에도 잊히지 못하는 고향 산천이 아련히 떠오른다.
~~~영신의 떨리는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한마디는 하나님, 제가 그이를 사랑해도 좋습니까? 하는 독백이었다. ~~~그때였다, 바로 영신의 등 뒤에 솟은 바위 위에서 시꺼먼 그림자가 괴물과 같이 나타나더니 저..... 그 곡조 한 번 더 타주세요. 하는 굵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2)
아이고 깜짝이야! ~~~영신은 반가움과 원망스러움에 반죽이 된 표정으로 동혁을 살짝 흘겨본다. ~~~~아득한 수평선을 따라 일렬로 쭉 깔린 것은 달빛을 새우는 듯한 새우잡이 종선의 등불이다.
(3)
내일은 그예 떠나신다니, 또 만날 기회가 졸연치 않을 것 같은데, 꼭 해주실 말씀이건 지금 하시지요. ~~~그럼 동혁씨가 하고 싶으신 말씀부터 먼저 해주세요.
(4)
달은 등 뒤의 산마루를 타고 넘으려 하고 바람은 영신의 옷깃을 가벼이 날리는데 어느덧 밀물은 두 사람의 눈앞까지 밀려들어와 날름날름 모랫바닥을 핥는다. ~~~영신에게 약혼한 남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아, 약혼한 사람이 있에요? ~~~어려서부터 한 동리에 자라나서 저도 그이를 잘 알아요. 김영근이라구 시방 황해도 어느 금융조합에 취직을 했는데 사람은 퍽 얌전해요. ~~~그런데 그이는 내가 자기하구 꼭 결혼을 할 줄만 믿고 있거든요.
(6)
동혁은 두 팔로 영신의 어깨와 허리를 버쩍 끌어안으며 해당화는 지금 이 가슴속에서 새빨갛게 되지 않었에요? 하더니, 불시의 포옹에 벅차서 말도 못하고 숨만 가쁘게 쉬느라고 들먹들먹하는 영신의 젖가슴에, 한 아름이나 되는 얼굴을 푹 파묻었다.... ~~~영신은 ~~~잠시 제정신을 잃었다.
[7]
인제 삼개년 계획만 더 세우고 노력하면 피차에 일터가 단단히 잡히겠지요. ~~~~기초가 든든히 선 뒤에 우리는 결혼을 합시다. 그러고는 좀 더 공부를 하면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합시다. ~~~~영신 씨! 그때까지 기다려주실 테지요? 네? 꼭 기다려주실 테지요? ~~~삼 년 아니라, 삼십 년이래두.... 이 목숨이 끊.....
[제삼의 고향]
(2)
그동안 영신의 수입이라고는 경성연합회에서, 백현경의 손을 거쳐 생활비 겸 사업을 보조하는 의미로 다달이 삼십 원씩 보내주는 것밖에 없었다. 원재 어머니라는, 젊어서 홀로 된 교인의 집 건너방에 들어서 밥값 팔원 만 내면 방세는 따로 내지 않았다.
(4)
한편으로 글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거진 날마다 늘었다, 양철 지붕에 송판으로 지은 조그만 예배당은 수리를 못해서 벽이 떨어지고 비만 오면 천장이 새는데 선머슴 아이들이 뛰고 구르고 하여서 마루청까지 서너 군데나 빠졌다. 그것을 볼 때마다 늙은 장로는 흥, 경비는 날 곳이 없는데 너희들이 예배당을 아주 헐어내는구나. 강습이구뭐구 인전 넌덜머리가 난다.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은, 등잔불로 날아드는 나비처럼 청석골로만 모여들 수밖에 없는 형세다. 요새 들어온 아이들까지 합하면, 거의 백삼십여 명이나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때였다. 영신의 신변을 노상 주목하고 다니던 순사가 찾아왔다. 주임이 사이상을 보자는데 내일 아침까지 주재소로 출두를 하시오.
(5)
무슨 일로 호출을 할까? 강습소 기부금은 오백 원까지 모집을 해도 좋다고 허가를 해주지 않았는가? ~~~~어떡하면 나머지 오십 명을 돌려보낼꼬?
(6)
얘들아, 참 정말 안됐지만 인젠 앉을 데가 없어서 받을 수가 없으니 가을부터 오너라.
(8)
청석동 강습소가 폐쇄를 당할뻔하였다는 것과 기부금을 모집하러 다닌다는 소식을 영신의 편지로 안 동혁은,....
[불개미와 같이]
(1)
청석골서 한 십리쯤 되는 흑석리라는 동리에 그 근처서 제일가는 부명을 듣는 그 한난청 집에서는 주인 영감의 환갑잔치가 열렸다. 한난청은 한곡리의 강도사 집보다 몇 곱절이나 큰 부자로 근처 동리를 호령하는 지주다. ~~~~한난청 집 널따란 사랑마당 큰 느티나무 밑에는 차일을 치고 마당 양 귀퉁이에는 작수를 받치고 팔뚝 같은 굵은 참밧줄을 팽팽히 켕겨놓았는데 갓을 삐딱하게 쓴 늙은 풍악잡이들이 북, 장구, 피리, 젓대, 깡깡이 같은 제구를 갖추어 풍악을 잡히기 시작한다. ~~~~
삼현육각이 자진가락으로 영산회상을 아뢰고 광대가 마악 줄을 타고 올라설 때였다. 구경꾼이 백결 치듯 하는데, 거진 오륙십 명이나 됨직한,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여선생의 인솔로 큰 대문으로 들어온다.
(2)
그 여선생은 영신이었다. ~~~~한난청은 체면에 못 이겨서, 또는 취중에 자기 손으로 기부금을 오십원이나 적었었다.
(3)
우리는 불청객이올시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 멀지 않은 동리에 살면서 주인 영감께 축하의 말씀 한 마디도 아니 드릴 수가 없어서 오늘 길에 아이들까지 이렇게 따라왔습니다. 하고 만취가 된 한난청을 똑바로 쳐다본다. 늙은 주인은 정신이 몽롱한 중에도 영신을 알아본 듯 개개풀린 눈자위로 마당 그득히 들어선 아이들을 내려다보더니. 허-, 귀한 손님들이군, 조것들꺼정 내 환갑날을 어떻게 알았던고. 하고 수염을 내려쓰다듬으며 매우 만족한 웃음을 웃고는 큰애 게 있느냐? 하고 위엄 있게 큰아들을 불러 세우더니, 아이들을 먹일 음식상을 차려 내오라고 명령한다.
아니올시다. 우린 음식을 먹으려고 오질 않았습니다. 하고 영신은 손을 내저었다. 젊은 주인은 어쩐지 형세가 불온해서 속으로는 적지 아니 켕기건만, 모처럼 이렇게 오셨는데 도무지 차린 게 변변치 않아서....하고 어름어름하다가 돌아서며 저 숱한 애들을 뭘 다 논아 먹인담.
조금 뒤에는 그 사발 대접을 부시지도 않고, 고명도 없는 밀국수에 w아국 국물을 찔끔찔끔 쳐가지고 나와서는, 그나마 두세 명에 한 그릇씩 안긴다. 그것을 본 영신은 크나큰 모욕을 느껴 금세 눈에서 불이 나는 듯,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여보, 우린 그런 음식 안 먹소!
(4)
영신은 마당 한복판으로 썩 나섰다. 우리들이 댁에 뭘 얻어먹으러 온 줄 아십니까? 그 목소리는 송곳 끝 같다. 그 그럼 머 뭘하러 왔노? 돈을 하두 흔하게 쓰신다길래 여기 손수 적어주신 기부금을 받으러 왔습니다. ~~~영신은 뚱뚱보의 앞을 떡 가로막아 서며, 안 됩니다! 오늘은 만나 뵌 김에 천하 없는 일이 있어도 받아가지고야 갈 텝니다. ~~~그날 저녁부터 일주일 동안이나 영신은 경찰서 유치장 마루방에서 새우잠을 잤다.
(5)
동혁은 청석골이 가보고 싶었다.
(6)
한곡리의 안산인 소대갈산 마루터기에 음력 칠월의 초승달은 명색만 떴다가 구름 속으로 잠겼는데, 동리 한복판인 은행나무가 선 언덕 위에는, 난데없는 화광이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
여러 해 별러오던 농우회의 회관을 지으려고 오늘 저녁에 그 지경을 닦는 것이다. 회원들의 마음은 여간 긴장되지 않았다.
(7)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한곡리 한복판에는 커다란 새 집 한 채가 우뚝하게 솟았다. 커다랗다고 해야 두 칸 겹집으로 폭이 열칸 쯤 되는 창고 비슷히 엉성한 집이지만, 이 집 한 채를 짓기에, 회원들은 칠월 염천에 하루도 쉬지 않고 불개미와 같이 일을 하였다. ~~~~
(8)
왜 무슨 말썽이 생겼수? ~~~아무튼 농우회를 짓게 된 뒤부터 가뜩이나 시기심이 많은 기천이가 두 눈에 쌍심지가 돋아서 그 태도가 부쩍 악화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우리 낙성식도 못해서 피차에 섭섭한데, 그 대신 기념될 일 하나 해볼까. 하고 벌떡 일어선다. 무슨 일요? ~~~~그저 괭이하고 삽하구만 들구서 나만 따라들 오게나. 하고 동혁은 회관으로 올라가, 지붕을 이을 때에 쓰던 사닥다리를 둘러메더니, 산등성이를 넘는다.
(11)
하루는 동혁이가 회관에서 주학을 마치고 나오는데 석돌이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저.... 강도사 댁 작은사랑 나으리가 저녁때 잠깐 만나자고 하시는데요 한다. 왜? 동혁은 불쾌히 대답을 하였다. 석돌이는 눈썰미가 있고 영리한 대신에 얕은 꾀가 많아서 항상 경계를 하는 회원이다. 더구나 강도사 집 전답에 수다식구가 목을 매어단 사람이다. 그 집에 심부름을 다니는 것은 물론, 박쥐구실이나 하지 않는지가 의문이었다. 강도사 집 살림살이의 실권을 쥔 맏아들인 기천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까닭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
기천이는 면협의원이요 금융조합 감사요 또 얼마 전에는 학교비 평의원이 된 관계로 면장이 나와서 한곡리도 진흥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회장이 되도록 운동을 해보라고 권고를 하고 갔었다. ~~~~
난 헐 수 없에요. 우리 농우회 일만 해도 힘에 벅찬대 한 몸으로 두가지 일은 도저히 할 수는 없쇠다. 하고 딱 잡아떼고 일어섰었다.
(12)
저녁 뒤에 그는 말대답할 것을 생각하면서 큰 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대문간에 들어서는데, 작은 사랑 툇마루에서 아 그래 제깟 녀석이 명색이 뭐길래, 내가 부른다는데, 냉큼 오질 못한다더냐? 하고 되바라진 목소리로 머슴애를 꾸짓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동혁은 네! 여기 대령했습니다 하는 듯이 바로 지척에서 으흠, 으흠 하고 기침을 하고 저녁 잡수셨에요? 하며 들어선다. 기천은 도적질이나 하다가 들킨 것처럼 움찔해서, 반사운동으로 발딱 일어서기까지 했다. 아, 자네 오나? 하고 반색을 한다. ~~~
기천은 다리를 도사리고 앉아서, 고무신의 때가 고약처럼 묻은 버선바닥을 쓰다듬던 손으로, 술잔을 들고 쭈욱 들이키고는, 족제비 털 같은 노랑수염을 매비작거려서 꼬아 올리더니 좀 하기 어려운 말일세만.... 하고 반쯤 외면을 한 동혁의 눈치를 곁눈으로 흝어본다.
(13)
말씀하시지요. ~~~~~기천이는 실눈을 뜨고 손톱여물을 썰더니 자네, 그 회관 짓기에 얼마나 들었나? 하고 다가앉는다. 돈이요? 돈이야 얼마 안 들었지요. 기천은 다리를 도사리고 고쳐 앉으며 용기를 내어 인제 진흥회가 생기면 회관이 시급히 소용이 되겠는데 당장 질 수는 없구....게가 동리 한복판이 돼서 자리가 좋아. 그러니 여보게 거 어떻게 재목 값이라든지 품삯 꺼정 넉넉히 따져서 내게루 넘길 수가 없겠나? 자네들은 한 번 지어봐서 수단이 났으니까 딴데다가 다시 지면 고만일 테니.... 자네 의향이 어떤가? ~~~~~
동혁은 어이가 없어서 얼굴 가죽이 간지럽지 않으냐는 듯이 기천을 빤히 쳐다보다가 왜 돈 만원이나 내노실 텝니까? 하고 껄껄껄 웃었다. 기천은 아-니, 이 사람 웃음의 말이 아닐세 하고 금세 정색을 한다.
[그리운 명절]
(1)
한곡리에서는 농우회관을 낙성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영신은 일종의 경쟁심리가 움직였다. 그는 성벽이 나서 청석골은 그보다 곱절이나 큰 도회지에 갖다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학원을 짓고야 말겠다.
(3)
찬송가가 끝나자, 원재 어머니는 회원들을 대표해서 먹글씨로 커다랗게 쓴 백지를 무대 정에다가 붙이고 내려갔다. “일금 삼백원야 청석동부인친목계원 일동” ~~~~영신은 감격에 겨워, 눈을 딱 감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동혁 씨나 핑계 김에 공사 감독으로 불러댈까. 한 번 집을 지어 본 경험이 있으니.... 하다가 아니다. 그건 공상이다. ~~~영신은 생각다 못해서 삼십 리 길을 걸어서, 장터로 목수를 부르러 갔다.
(5)
달밤을 이용해서 영신은 모래를 날랐다. 거치를 만들어가지고 청년들과 마주잡이를 해서 시냇가의 모래와 자갈을 밤늦도록 나르기를 여러 날이나 하였다. ~~~~
그럭저럭 집을 짓기 시작한 지 한 달이나 지나갔다. 젊은 목수는 이런 일은 번개불에 담뱃불 붙이듯이 해치워야지, 오래 끌수록 내 손해다. 하고 다른 봉축군들을 휘몰아서, 일은 여간 빨리 진행이 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벌써 중방까지 꿰고 윗가지를 얽게 되었다.~~~
두 달 열흘 남짓해서 청석학원은 문패까지 걸게 되었다. ~~~낙성식을 하기 닷새 전기해서 영신은 동혁에게 무슨 일이 있든지 그날 꼭 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좋은 일에 마가 든다는 것은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인가. 영신은 그 이튿날 아침 천만뜻밖에 모친 위독 즉래라는 급한 전보를 받았다.
(6)
그날 밤으로 부랴부랴 길을 떠난 영신은, 자동차에 시달린 몸을 기차에 실린 뒤까지도,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 기차는 그믐밤의 어둠을 가르며, 북으로 북으로 숨 가쁘게 달린다.~~~
김정근과의 혼인 일로 청석골까지 오셨을 때, 이틀 밤을 울며 밝히시다가 넌 내 자식이 아니다. 하고 돌아서실 때의 그 쓸쓸하던 뒷모양! ~~~아아, 그 얼굴이 마지막이었구나! ~~~
삼 년 만에 우러러보는 고향의 하늘!
(7)
버스가 미처 정거를 하기도 전에 허둥지둥 뛰어내리는 사나이 - 그는 틀림없이 김정근이었다. 아 웬일이세요? 영신은 창졸간 부르짖었다. ~~~~영신 씨가 오실 줄 알구 ..... 아-니, 내가 올 줄 어떻게 아셨어요?
(8)
영신을 불러 내린 것은 정근의 조화였다. 영신이가 어머니! 하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병들어 눕기는 커녕, 정지간에서 아침 반찬을 할 생선을 다루고 섰지 않은가. 아니고 우리 영신이! ~~~
어미가 숨을 몬다구나 해야 집얼 와보지. 딸의 성미를 잘 아는 어머니는 눈 하나를 찌긋하고, 심상치 않은 영신의 기색을 살피면서 어서 방으로 들어가잤구나 하고 어름어름한다. 자네도 들어오게 그려. ~~~
너무 불쾌하게 생각은 마세요. 전보는 어머니가 치라고 하셔서, 치긴 내가 쳤지만.... 하고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낸다. 알았어요! 영신의 대답은 얼음같이 차다.
[반가운 손님]
(1)
영신의 편지를 받은 동혁은 저의 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기뻤다. 아무렴 가구말구, 오지 말래두 갈 텐데...~~~
(2)
낙성식 전날 영신은 십 리도 넘는 자동차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갔다. ~~~왜 서울서 오는 사람만 찾으세요? 방 한구석에 앉아서 검붉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담고 쳐다보는 것은 틀림없는 동혁이. 아닌가? 천만뜻밖의 동혁이가 아닌가?~~~
어떻게 오다니요? 이 두 바퀴 자동차를 타구 왔지요. 하고 동혁은 제 다리를 탁 쳐 보인다. 영신은 혀끝을 내두르며 아이고 어쩌면! 배도 안 타고 돌아오셨으면 한 삼백리나 될 텐데... 하니까 아따 삼천리는 못 올까요.
(6)
앗! 저게 웬일야? 여러 사람은 동시에 부르짖었다. 그 소리와 함께 동혁의 눈은 휘둥그레지더니, 두 팔로 헤엄을 치듯이 사람의 물결을 헤치며 에그머니 우리 선생님! 절 어째나? 절 어째! ~~~영신을 안아 일으켰다. 입술까지 하얗게 바래가지고 까무러친 것을 보고는 뇌빈혈이군. 하고 사지를 늘어트린 영신의 머리와 다리를 번쩍 들고, 사무실로 쓰게 된 옆방으로 들어갔다. ~~~~원재 어머니가 당황히 나가는데, 지까다비를 신은 사람이 술이 취해서 얼굴이 삶은 게 빛이 되어가지고, 냉수 사발을 들고 찔끔찔끔 엎지르며 마주 들어온다. 도 도무지 대체 우리 채선생이 아-니, 이게 웬일이란 말씀요? 하고 모주 냄새를 풍긴다. 그는 영신의 감화로 오늘날까지 품삯도 못 받고 일을 한 목수였다. ~~~영신은 한 오 분 동안이나 숨을 괴롭게 쉬더니 휘유! 하고 악몽에서나 깬 듯이 정기 없는 눈으로 여기가 어딘가? 하는 듯이 실내를 둘러본다.
(7)
맹장염인 것이 틀림없었다.
(8)
친부모만큼이나 정이 들고 은혜를 입은 선생이 불시에 세상을 떠나서, 영구차나 전송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자동차 차창에 가 메달려 우는 것을 어서들 들어가거라. 내 열 밤만 자구 오마. 응. ~~~회계는 숨이 턱에 닿아서 땀이 나도록 쥐고 온 것을 영신에게 주면서 저? 학부형들이 급히 추렴을 낸 건데요, 우선 급한대루 쓰시라구요. ~~~오십 원이면 급한대루 쓰겠군. ~~~
자동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또 기차를 기다려 타고 날이 어둑어둑할 때에야 S읍에 도착하였다. ~~~~간호부가 나와서 분을 하얗게 바른 얼굴을 내밀던; 선생님 안 계세요. 연회에 가셨어요. 하고는 슬리퍼를 짝짝 끌고 들어가 버린다.
(9)
의사는 한 삼십 분 뒤에야 인력거로 달려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급성맹장염인데 ~~~~내일 아침에 수술을 합시다.
(11)
다행히 수술은 경과가 좋았다.
(12)
영신이가 평소에 동혁에게 대한 다만 한 가지 불평은, 저와 같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동혁은 ~~~근래에 예수교회가 부패한 것과 교역자나 교인들이 더 떨어질 나위 없이 타락한 그 실례를 들어 맹렬히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13)
집으로 가서 어머니 그늘에서 얼마 동안 쉬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싫어요. 나는 그저 어디서든지 몸 성히 있다는 소식이나 전하는 게 효돈데, 이 꼴을 하고 집으로 기어들어보세요. 가뜩이나 나 때문에 지 늙으신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간장을 태우실까. ~~~~동혁 씨는 앞으로 어떡하실 테야요? ~~~내야 한곡리 송장이 될 사람이니까요. 내가 없으면 처리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가 많아서, 그동안 나와서 있는데도 몹시 궁금한데....사실 아직은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에요.
[새로운 출발]
(1)
동혁은 어느날 아침 아래와 같은 아우의 급한 편지를 받고 한곡리로 돌아왔다. ~~~강기천이가 형님 안 계신 동안에 회원들을 농락해가지고 우리 회관을 뺏어들려고 하니, 이 편지 받으시는 대로 즉시 오세요. 건배 씨는 벌써 여러 날 째 종적을 감추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3)
그들의 빛을 갚아주는 것이다. 강가의 집 소작을 아니 해먹고도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
(4)
건배 씨는 기천이 지시로 군청의 서기가 돼서 아주 이사를 간대요. 한 달에 월급이 삼십 원이라나요. ~~~ 건배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데 마당으로 들어서보니 시렁 위에 있던 헌 고리짝을 내려서 빨랫줄로 붂어논 것과 바가지와 귀 떨어진 옹솥을 떼어서 돈대위에다 논 것을 보고 그제야 정말 이사를 가려는 게로구나. ~~~~
아이고 난 누구라구요. 그저께 나가서 그저 안 들어왔어요. 하고 젖을 문 어린애를 안고 나오는 것은 건배의 아내다.
(5)
상한 생선의 눈처럼 뻘겋게 충혈이 된 건배의 눈이 동혁의 실죽해진 눈과 딱 마주치자, 그는 전기를 맞은 것처럼 우뚝 섰다. 한참이ㅐ나 억지로 몸을 꼬느고 섰다가 죽여줍시사. 하는 듯이 머리를 푹 수그리더니 여보게 동혁이! 하고 와락 달려들어 손을 잡는다. 동혁의 표정도 점점 심각해진다. 여보게 동혁이! 난 술 먹었네 술 먹었어. 자네 덕분에 끊었던 술을, 삼 년째나 끊었던 술을 먹었네. 그저께 저녁부터 죽기 작정하고 막 들이켰네. 참 정말 죽겠네, 죽겠어. 이 사람 동혁이, 팔아먹은 양심이 아직도 조금은 남았네그려! 하고 앙가슴을 헤치고 주먹으로 쾅쾅 치더니 동혁의 어깨에 가 턱 실리며 여보게, 내 이 낫짝에 침을 밷어주게! 어서 똥물이래두 끼얹어주게! 난 동지를 배반한 놈일세. 우리 손으로 진, 피땀을 흘려서 진 회관을, 아아 그 집을 그 단체를 이놈의 손으로 깨트린 셈일세! 하고 진흙 바닥에 가 펄썩 앉더니, 흑흑 느끼면서, 내가 형편이 자네만 해도 두 가지 맘은 안 먹었겠네. 내 딴엔 참기도 무척 참았지만, 원수의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어떡하나? 앞 못 보는 늙은 어머니하구 하나 둘도 아닌 어린 새끼들하구 이 입술에도 풀칠을 해야 살지 않겠나? 하고 사뭇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우리 내왼 남몰래 굶기를 밥 먹듯 했네, 못 먹고도 배부를 체하기란 참 정말 힘든 노릇이네. 하지만 어른은 참기나 하지, 조 어린 것들이야 무슨 죄가 있나? 우리 같은 놈한테 태난 죄밖에 이승에 무슨 큰 죄를 졌단 말인가? 그것들이 뻔히 굶네 그려. 고 작은 창자를 채지 못해서 노랑방통이가 돼가지구 울다 울다 지쳐 늘어진 걸 보면 눈에서, 이 아비놈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네그려! 하고 떨리는 입술로 짭짤한 눈물을 빨면서 문지방에다가 머리를 들부비더니 눈물 콧물로 뒤발을 한 얼굴을 번쩍 쳐들며 여보게 동혁이, 자넨 인생 최대의 비극이 뭔 줄 아나? 끼니를 굶고 늘어진 어린 새끼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걸세! 그것들을 죽여 버리지도 못하는 어미 에비의 속을 자네가 알겠나? 하고 부르짖으며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는다.
동혁은 팔짱을 끼고 서서 잠자코 건배의 독백을 들었다. 적 덩어리 같은 그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듯한 것을 억지로 참고 섰으려니 건배만큼이나 마음이 괴로웠다. 비록 술은 취했으나마 그 기다란 몸을 진흙 바닥에다 굴리면서 통곡을 하다시피 하는 것을 볼 때 달려들어 마주 얼싸안고 실컷 울고 싶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서 말대꾸도 못하였다. 아내가 듣다 못해서 마당으로 내려와서 이거 창피스레 왜 이러우? 어서 들어갑시다. 제발 방으로나 들어가요.
여보게 건배! 어서 일어나게. 가을이 돼도 벼 한 섬 못 들여놓고 지낸 자네 사정을 어찌 내가 모르겠나. 이런 경우에 자네를 힘껏 붙잡지를 못하고 몽정이나 할 수밖에 없는 게 무한히 슬플 뿐일세. 이번에 가면 아주 가겠나, 또 다시 모일 날이 있겠지. 더 단단히 악수를 할 날이 있겠지. 난 이 마당에서 다른 말은 하기 싫으이. 기왕 그렇게 된 일이니 자네의 마음이 다시는 변치 말고 있다가, 더 큰 일을 할 때, 만날 것만 믿구 있겠네!
하고 건배는 동혁이가 뜻밖에 조금도 저의 탓을 하거나 몰아대지를 않는 것이 고마워서, 동혁의 손을 힘껏 잡으며 이 손을 어떻게 놓나? 응, 이 손을 어떻게 놔. 이 한곡리를 차마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정을 베는 칼은 없나? 응 정을 베는 칼은 없어? 하고 손을 벌리더니, 연기에 시꺼멓게 걸고, 밑동이 반이나 썩은 마룻기둥을 두 팔로 부둥켜안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한 줌 흙도 움켜쥐고
놓치지 말아라
이 목숨이 끊지도록
복돋우며 나가자! 하고 애향가 끝 구절을 목청껏 부르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며 헉헉 느끼기만 한다. 그의 머리와 등허리에는 찬비가 어느덧 진눈깨비로 변해서 질금질금 쏟아져 내린다.
(6)
건배가 떠나는 날 동혁은 오 리 밖까지 나가서 전송을 하였다. 몇 해 전 교원 노릇을 할 때에 입던 것인지, 무릎이 나가게 된 쓰메야리 양복을 입고 흐느적흐느적 풀이 죽어서 걸어가는 뒷모양을 동혁은 눈물 없이는 바라다볼 수가 없었다. ~~~~
기천이가 건배의 빛을 갚아주고 신분까지 보증을 하여서, 하루 일 원씩 일급을 받는 임시 고원이 되어간다는 것은, 그의 아내의 입을 통해서 알았다.
(8)
기천은 조끼 안주머니에다가 똘똘 뭉쳐서 넣고 자던 돈을 아우에게 감쪽같이 도적을 맞고 눈이 발칵 뒤집혀서 으레 서울로 갔으려니 하고 뒤를 밟아 쫓아 올라갔다. 그러나 서울은 공진회때와 박람회 때에 구경을 했을 뿐이라, 생소해서 무턱대고 찾아다닐 수도 없어 경찰서에 수색원까지 제출했건만 친형제 간에 돈을 훔친 r서은 범죄가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찾게 되면 통지할 테니 내려가 있으라는 주의를 받고 그 아까운 노자만 쓰고 내려왔다. ~~~~동혁은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저녁을 든든히 먹은 뒤에, 큰 마을로 기천이를 찾아갔다. ~~~~
사랑 마당에서 으흠 으흠 기침을 하니까 누구냐 하고 되바라진 소리를 지르며 내다보는 것은 바로 기천이다. 아 그동안 경행을 하셨더라지요? 하고 동혁은 뻣뻣한 허리를 될 수 있는 대로 굽혀 보였다. 아 동혁인가? 그렇잖아도 좀 만나려고 했더니.... 기천은 마루로 나오며 한 십 년 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어서, 들어오게. 어서.~~
(10)
참 이렇게 술에 고기에 주셔서 잘 먹었습니다. 특청 하나 할 게 있어서 왔는데, 들어주시겠에요? 그제야 동혁은 취한 체하면서 본론을 끄집어냈다. ~~~~무슨 특청? 왜 아쉰 일이 있나? 하고 귀를 갖다가 댄다. ~~~왜 돈이 소용이 되나? ~~~돈이 소용이 되는 게 아니라 빚을 갚으러 왔에요. 응? 빚을 갚으러 오다께? 자네가 언제 내 돈을 썼던가? 전 댁에 돈을 다 갚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위임을 맡아가지고 왔는데요. 다른 사람들이라니 누구누구 말인가? 이번에 주인어른께서 새로 회장이 되신 우리 농우회의 회원들이 진 빚인데요. 저희들은 와 뵙고 말씀 드리기가 어렵다고 제게다 맡겨서 심부름을 온 셈입니다. ~~~수고스러우시지만 뭐 적어두신 게 있을 테니 좀 꺼내보셨으면 좋겠는데요. 그 말을 듣자 기천은 딴전을 부리듯 여보게 우리 그런 얘긴 뒀다 하세. 술이 취해서 지금 웅숭망숭한데. 하고 고리대금업자는 살금살금 꽁무니를 뺀다.~~~~
우리 회장이 되신 데 대해서 불평을 품는 젊은 사람들이 있는 줄은 짐작하시겠지요? 그중에 몇몇은 혈기가 대단해서 제 손으로는 꺽을 수가 없는데 이번에 좀 후하게 신경을 써주셔야 과격한 행동까정 할려고 벼르는 청년들을, 어떻게 주물러볼 수가 있겠에요. ~~~~아-니 자네가 날 위협을 하는 셈인가? ~~~~뒷일은 제게다만 맡겨주시면 그 대신 제 말씀은 들어주셔야 합니다.
(11)
아니 그럼 오 푼 변리로 논 걸 변리까지 다 받으실 줄 아셨던가요? ~~~난 할 수 없네. ~~~그럼 나 역시 할 수 없쇠다. 우격으로 될 일이 아니니까요. 하고 기천의 앞에 내놓았던 지전 뭉치를 도로 집어 꼭꼭 싸서 하리춤에다 차며 하지만, 이 돈은 졸연히 받지 못할 줄 아세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나는 책임을 wmf 수도 없구요. 하고 목침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섰다. ~~~~
여보게 날 좀 보세. ~~~~그럼 차용증서 모아둔 걸 이리 주시지요 하고 돈과 차용증서를 바꾸어 들었다 수십 장이나 되는 인찰지를 구걱 쥐고,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동혁은, 재떨이 위의 성냥을 집더니 확 그어댔다.
[반역의 불길]
(1)
그 뒤로 회원들은 물론 동리의 인심은 동혁에게로 쏠렸다. ~~~~ 회원들의 돈은 빚을 깨끗이 청산하고도 육십여 원이나 남아서 그것을 밑천으로 새로이 소비조합을 만들 예산을 세웠다. ~~~~
조기회는 여전히 하나 회관은 커다란 자물쇠를 채운 채 쓰지를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쓰지를 않는게 아니라, 그동안 기천이가 여러 번 열라고 명령을 하였어도, 동화와 갑산이가 쇳대를 감추고는 서로 밀고 내놓지 않아서, 쓰지를 못하고 있다.
(2)
영신에게서는 하루걸러쯤 편지가 왔다.
(3)
어느덧 해가 바뀌어 음력으로 정월이 되었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눈 딱 감고 건너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자. ~~~청석골을 떠날 결심을 하였다.
(4)
그동안 기천이는 장근 두 달께나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다. 병을 앓은 것이 아니라 타동에 나가서 양반 자세를 하다가 임자를 톡톡히 만나서 졸경을 쳤는데, 골통이 깨어지고 가슴에 담이 들어서 꼼짝 못하고 누워서 음력과세를 하였다.
(6)
강기천 씨 육십 칠 점 손톱여물을 썰고 앉았던 기천의 얼굴에는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안심의 미소가 지나갔다. 박동혁씨 삼십팔 점! 이 나머지는 몇 점씩 되지 않으니까 읽지 않겠소. 하고 구장은 목소리를 높여 투표한 사람들을 둘러보며 ~~~~강기천 씨가 절대 다수로 우리 한곡리 진흥회의 회장이 되셨소이다. 라고 선언을 하였다.
(8)
오늘 회장이 되신 강기천 씨는 우리 농우회원들이 진 여러 해 묵은 빛을 변리는 한 푼도 받지 않으시고 깨끗이 탕감해주셨습니다.
(10)
영신은 조선을 떠나기 전날까지 동혁을 기다렸다. ~~~~이거 무슨 일이 단단히 생겼나보다. 하고 짐은 먼저 철도편으로 부치고 빈 몸으로 한곡리를 향해 떠났다. 동혁을 만나보지 않고는 떠날 수가 없었고, 또는 두 사람의 장래에 관한 일도 충분히 상의해서 이번에는 아주 아귀를 짓고 떠나려 함이었다. ~~~~ 아니, 다-들 어디 갔습니까. 영신은 부지중 노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그 앤 읍내로 잡혀갔다우! 잡혀갔다뇨?
[내 고향 그리워]
(1)
영신은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않는 것을, 하는 수 없이 조선을 등지고 떠났다.
(2)
가자, 죽더라도 내 고향에 가 묻히자!
(5)
자동차 정류장에는 청석골의 주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중을 나왔다.
(7)
하루아침은, 천만뜻밖에 동혁의 편지가 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에는 학부형회에 참례를 하고 늦도록 학원의 유지 방침을 의논하다가 별안간 심장의 고동이 뚝 그치는 것 같아서 원재에게 업혀 내려왔다. 내려와서는 턱 쓰러지며 고만 정신을 잃었다.
[천사의 임종]
(1)
이튿날 저녁때에야 공의의 진찰을 받게 되었을 때, 영신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영신의 선성을 들은 공의는, 원재 어머니만 남겨놓고 방 안에 그득히 찬 사람을 다 내보낸 뒤에, 거진 한 시간 동안이나 정성껏 신체의 각 부분을 진찰해 본다. 그는 환자에게 손을 떼고 한참이나 눈을 딱 감고 앉아서, 머리를 외로 꼬고 바로 꼬고 하다가, 청진기를 집어넣고는 잠자코 일어서 밖으로 나간다. 어떱니까? 대단하죠? ~~~~대단 섭섭한 말씀이지만.... 하고 주저하다가 내 진찰이 틀리지 않는다면, 며칠을 못 넘기겠는걸요. 하고 고개를 떨어트린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각기가 심장까지 침범한 것만 해도 위중한데 원체 수술을 완전히 하지 못한 맹장염이 재발이 됐습니다. 염증이 대단하니 어디다가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2)
병세는 시시각각으로 더해가는 한편이건만, 영신은 어머니에게도 편지를 못하게 하였다.
(4)
원재, 내가 가더래두.... 우리 학원은 계속해요! 응, 청년들끼리...~~~~학원 집이 뵈는 데다.... 무 묻어.... 억!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젖히고는 뒤로 덜컥 넘어졌다.
(5)
청석골은 온통 슬픈 구름에 싸였다.
(6)
전보를 받은 동혁은 응? 이게! 하고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그날 저녁 동혁은 거의 실신이 된 사람처럼 병들어 누운 어머니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청석골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최후의 한 사람]
(1)
동혁은 관 모서리에 얼굴을 부비며 연거푸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2)
그저께 강기천이가 죽었네. 뭐? 누가 죽어? 동혁은 거짓말을 듣는 것 같았다.
(6)
아무리 지루하던 겨울도, 한 번 지나만 가면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닥쳐온 ~~~인제 완전히 봄이로구나!
[Review]
청석골에서 야학을 시작한 영신은 과로한 탓으로 몸까지 쇠약해지자 한곡리로 내려간 동혁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동안 서로 간에 편지는 주고받지만 직접 만나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학생 농촌계몽 활동 보고 자리에서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고 서로의 마음을 알아볼 사이도 없이 헤어진 것이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다. 영신이 오기로 한 날짜에 동혁은 그녀를 맞으러 바닷가로 내려갔다.
“이른 아침 동혁은 찢어진 지우산을 숙여 쓰고 큰덕미로 갔다. 쇠대갈산 등성이 위에 올라 머리를 드니 구름과 안개에 싸인 바다가 눈앞에 환하게 터진다. 무엇에 짓눌렸던 가슴이 두 쪽에 쩍 뻐개지는 것 같은 통쾌감과 함께 동혁은 앞으로 안기는 시원한 바람을 폐량껏 들이마셨다가 후- 하고 토해내고는 휘파람을 불며 불며 나루께로 내려갔다. 큰덕미라는 곳은 하루 한 번 똑딱이(석유발동선)가 와 닿는 조그만 포구로 주막 몇 집과 미루나무만 엉성하게 선 나루터다.”(본문)
심훈이 이 소설을 썼다는 충남 당진의 ‘필경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잔잔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엔 농가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곳 멀리 아래로 는 아스라이 바다가 보이고 그 앞 해안을 따라 부곡공단이 가로막혀 있었다.
“이윽고 파-란 페인트칠을 한 똑딱이가 선체를 들까불며 들어온다. 갑판 위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가 보인다.”(본문)
이 소설을 쓸 때(1933년) 심훈은 33세의 나이로, 이미 사회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3.1운동의 옥고를 치르고 상해에 건너가 독립운동가 ‘신채호’ 등과 교우하기도 하였으며, 후에는 동아일보 기자, 해직 그리고 영화 제작자였다.
소설의 주인공인 채영신은 실존 인물로, 본명이 최용신이며 당시에 “수원군 반월 면 천곡리”(현재는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농촌 계몽 활동을 벌이는 소식이 알려져 있었다. 마침, 동아일보에서 모집하는 공모 소설에 응모하기 위해 심훈은 어머니가 거주하던 당진 부곡리(한곡리)로 내려가서 50여 일 만에 이 소설을 탈고했다고 한다.
소설의 무대는 영신이 활동하는 청석골(샘골 마을)과 동혁이 활동하는 한곡리 두 곳으로, 영신의 인물 설정이 실존인네 비해서 동혁의 인물 설정은 분명하지 않다. 당시 그곳에서 계몽 활동을 하던 심훈의 장조카 “심재영”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심훈은 직접 그곳 마을에서 농촌의 실정을 눈으로 보며 소설을 썼기 때문에 소설에서 동혁의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곡리에서 다시 해후(邂逅)한 동혁과 영신은 두 사람의 사랑보다는 선구자적 사명에 치중하기로 하고 삼 년이 지나서 어느 정도 사업이 안정 괘도에 이르면 서로 결혼을 약속하고 헤어진다. 그 후 영신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에 전념하며 교회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치고, 아이들 숫자가 늘어나자, 회관을 신축하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건강을 해치고 결국은 병세가 악화하여 간다. 부자 환난청의 무지와 비협조에도 용기 있게 맞서고, 돕는 손길에는 사랑으로 보답하며 천신만고 끝에 세워진 회관의 기공식장에서 영신은 한 차례 쓰러졌다.
한편, 동혁도 열두 명의 동네 청년들과 힘을 합쳐서 마을 회관을 건립하였으나, 겪게 되는 재정의 어려움과 고리대금업으로 농민들을 착취하는 강기천의 훼방으로 겪게 되는 동지들의 뼈아픈 배신을 겪게 된다. 심훈은 소설에서 훼방하는 강기천의 꾀임으로 어쩔 수 없이 동지들을 배반하고 떠나는 건배의 마음(당시 젊은 지식인들의 마음)을 이렇게 담았다.
“여보게 동혁이! 난 술 먹었네 술 먹었어. 자네 덕분에 끊었던 술을, 삼 년째나 끊었던 술을 먹었네. 그저께 저녁부터 죽기 작정하고 막 들이켰네. 참 정말 죽겠네, 죽겠어. 이 사람 동혁이, 팔아먹은 양심이 아직도 조금은 남았네그려! 하고 앙가슴을 헤치고 주먹으로 쾅쾅 치더니 동혁의 어깨에 가 턱 실리며 여보게, 내 이 낫짝에 침을 밷어주게! 어서 똥물이래두 끼얹어주게! 난 동지를 배반한 놈일세. 우리 손으로 진, 피땀을 흘려서 진 회관을, 아아 그 집을 그 단체를 이놈의 손으로 깨트린 셈일세! 하고 진흙 바닥에 가 펄썩 앉더니, 흑흑 느끼면서, 내가 형편이 자네만 해도 두 가지 맘은 안 먹었겠네. 내 딴엔 참기도 무척 참았지만, 원수의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어떡하나? 앞 못 보는 늙은 어머니하구 하나 둘도 아닌 어린 새끼들하구 이 입술에도 풀칠을 해야 살지 않겠나? 하고 사뭇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우리 내왼 남몰래 굶기를 밥 먹듯 했네, 못 먹고도 배부를 체하기란 참 정말 힘든 노릇이네. 하지만 어른은 참기나 하지, 조 어린 것들이야 무슨 죄가 있나? 우리 같은 놈한테 태난 죄밖에 이승에 무슨 큰 죄를 졌단 말인가? 그것들이 뻔히 굶네 그려. 고 작은 창자를 채지 못해서 노랑방통이가 돼가지구 울다 울다 지쳐 늘어진 걸 보면 눈에서, 이 아비놈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네그려! 하고 떨리는 입술로 짭짤한 눈물을 빨면서 문지방에다가 머리를 들부비더니 눈물 콧물로 뒤발을 한 얼굴을 번쩍 쳐들며 여보게 동혁이, 자넨 인생 최대의 비극이 뭔 줄 아나? 끼니를 굶고 늘어진 어린 새끼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걸세! 그것들을 죽여 버리지도 못하는 어미 에비의 속을 자네가 알겠나? 하고 부르짖으며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는다.”(본문)
동혁은 그날 동지들을 배반하고 떠나는 건배를 오 리 밖까지 나가서 전송하였다. 또한 자신의 사랑보다도 사명을 앞세워야 한다는 영신의 마음도 이렇게 표현했다.
“머리를 들면, 황금가루 같은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머리를 숙이면, 그 달빛을 실은 물결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부서지며, 눈과 영혼을 함께 황홀케 한다. 다시금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면, 풀솜 같은 구름 속으로, 숨바꼭질하는 달 속에는 쓸쓸한 방구석에 홀로 누워 외딸을 그리는 어머니의 눈물에 젖은 얼굴이 비치는 것 같고, 기다란 한숨과 함께, 머리를 떨어뜨리면, 닦아 논 거울 같은 마당 위에, 꿈에도 잊히지 못하는 고향 산천이 아련히 떠오른다. (중략) 영신의 떨리는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한마디는 하나님, 제가 그이를 사랑해도 좋습니까? 하는 독백이었다.”(본문)
두 사람은 결국 서로 사랑의 약속을 이루지 못하고, 영신은 죽고 동혁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농촌계몽이라는 말은 이제 농촌 일손 돕기로 바뀌었다. 한때 교과서에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올라왔던 소설<상록수>는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세상은 바뀌었다. 한진 포구를 가려고 지도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그곳에 <필경사>가 있는 것을 알아내고 부랴부랴 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빌려다 다시 읽었다.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한 소설이 내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스토리도 그러하거니와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심훈의 탁월한 문구들이 마음에 감동이 되었다. 내게는 우연한 횡재였다.■
<본문>
“현재의 정세로 보아서 어느 시기까지는 계몽운동과 사상운동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아니 됩니다. 계몽운동은 어디까지든지 계몽운동에 그칠 따름이지, 부질없이 다른데다가 혼동해가지고 공연한 데까지 폐해를 끼칠 까닭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우리 시골로 내려갑시다! 이번 기회에-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서, 우리의 고향을 지키러 내려갑시다! 한 가정을 붙든다느니 보다도, 다 쓰러져가는 우리의 고향을 붙들기 위한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 용기를 냅시다! 그네들을 위해서 일을 하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선구자로서의 기쁨과 자랑만은 남겠지요. ”
“박첨지는 마누라를 흘낏 돌려다보고 중얼중얼 군소리하듯 한다. 너구리굴 보구 피물 돈버텀 내쓴다구, 동혁이 월급 탈 때만 바라구서 조합돈꺼정 써놨으니 참 정말 입맛이 소태 같구려. 영감의 말을 한숨으로 화답하던 마누라는 그래두 동혁이가 어떡허든지 우리 양주 배야 곯게 하겠수? 명색이라두 학교 졸업이나 했으면 모를까, 지금 와서 전들 무슨 뾰죽헌 수가 있나베. 양식이라구 인젠 묵은 보리 여남은 말이 달랑달랑허는데...”
“한 사람은 고향인 한곡리로, 한 사람은 기독교청년회 농촌사업부의 특파원 격으로, 경기 땅이나, 모든 문화시설과는 완전히 격리된 청석골이란 두메 구석으로 내려가서 일터를 잡은 뒤에는,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
“영신은 매우 유쾌한 그날그날을 보냈다. 날마다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은행나무 밑으로 올라가서 조기회에 참례를 하였다. ”
“(강)기천은 다리를 도사리고 앉아서, 고무신의 때가 고약처럼 묻은 버선바닥을 쓰다듬던 손으로, 술잔을 들고 쭈욱 들이키고는, 족제비 털 같은 노랑수염을 매비작거려서 꼬아 올리더니 좀 하기 어려운 말일세만.... 하고 반쯤 외면을 한 동혁의 눈치를 곁눈으로 흝어본다.”
“한편으로 글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거진 날마다 늘었다, 양철 지붕에 송판으로 지은 조그만 예배당은 수리를 못해서 벽이 떨어지고 비만 오면 천장이 새는데 선머슴 아이들이 뛰고 구르고 하여서 마루청까지 서너 군데나 빠졌다. 그것을 볼 때마다 늙은 장로는 흥, 경비는 날 곳이 없는데 너희들이 예배당을 아주 헐어내는구나. 강습이구뭐구 인전 넌덜머리가 난다. ”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은, 등잔불로 날아드는 나비처럼 청석골로만 모여들 수밖에 없는 형세다. 요새 들어온 아이들까지 합하면, 거의 백삼십여 명이나 된다.”
“달밤을 이용해서 영신은 모래를 날랐다. 거치를 만들어가지고 청년들과 마주잡이를 해서 시냇가의 모래와 자갈을 밤늦도록 나르기를 여러 날이나 하였다.”
“청석골서 한 십리쯤 되는 흑석리라는 동리에 그 근처서 제일가는 부명을 듣는 그 한난청 집에서는 주인 영감의 환갑잔치가 열렸다. 한난청은 한곡리의 강도사 집보다 몇 곱절이나 큰 부자로 근처 동리를 호령하는 지주다.”
“건배 씨는 기천이 지시로 군청의 서기가 돼서 아주 이사를 간대요. 한 달에 월급이 삼십 원이라나요.”
“건배가 떠나는 날 동혁은 오 리 밖까지 나가서 전송을 하였다. 몇 해 전 교원 노릇을 할 때에 입던 것인지, 무릎이 나가게 된 쓰메야리 양복을 입고 흐느적흐느적 풀이 죽어서 걸어가는 뒷모양을 동혁은 눈물 없이는 바라다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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