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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한 성민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십년 동안 친히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며 사십일 동안 금식하게 하셨습니다. 사탄이 시험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열하루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을 무려 사십년 동안이나 방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강력한 능력으로 무장한 사탄의 시험을 넉넉하게 이기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수없이 반복되는 시험 앞에서 번번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실패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달랐습니다.
공생애 내내 시험을 완벽하게 이기셨습니다. 사탄이 당신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곧 인생과 똑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으셨기에 시험을 받았지만 죄는 없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마침내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완성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으며 사십일을 금식하고, 사탄의 시험을 완벽하게 이기셨다는 소문은 즉시 갈릴리 지방은 물론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찾아 나왔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소의 습관대로 회당을 찾아 들어가셨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회당 예배는 개인 기도를 드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신앙고백인 쉐마שְׁמַ֖ע를 암송했습니다. 열여덟 개의 간구로 구성되어 있는 18기도문을 낭송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서인 성경 낭독과 기도와 설교로 이어졌습니다. 설교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진행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보통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읽었습니다. 가끔은 아람어를 섞어 읽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낭독할 사람은 사전에 미리 결정해 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읽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자발적으로 일어선 것인지, 미리 비공식적으로 요청을 받은 상태에서 일어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언제나 성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으로 끝났습니다. 당신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11:14a) 참된 하나님 곧 세상을 구원할 진정한 메시아로 오셨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특히 율법에 대해서는 어떤 거부감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자귀字句에 얽매이지도 않으셨습니다. 율법 하나하나에 함축되어 있는 진정한 정신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곧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자, 예배를 돕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말씀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특정한 내용의 말씀을 찾아내셨습니다. “드렸다ἐπεδόθη”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정한 책을 요구하셨고, 봉사자가 바로 그 책을 가져다드렸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또 “찾았다εὗρεν”는 여기저기 뒤적이면서 찾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원하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찾아내셨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도적으로 찾아내신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가 나를 택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복된 소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나를 보내셔서,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는 사면을, 눈먼 이들에게는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고, 눌리고 지친 이들을 자유케 하여 ‘지금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해!’라고 선포하게 하셨다.”(눅4:18-19)였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사로잡으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사모하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허물과 죄의 포로가 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사면赦免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눈먼 사람들에게는 다시 보게 되었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억눌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스스로 갖추고 있는 능력만으로는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절대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던 사람들을 온갖 종류의 매임들로부터 완벽하게 건져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해!”를 직역하면 “주의 은혜의 해”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하신 희년Year of Jubilee을 가리킵니다. 희년禧年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바로 다음 해였습니다. 곧 오십년 째 되는 해였습니다. 희년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리면 모든 빚이 완전히 탕감되었습니다. 종들에게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땅은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절대 절망의 나락에 깊이 빠져 있던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일어나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이렇게 희년은 누구나 다 평등한 삶을 누리는 공동체의 꿈을 역사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사회적인 장치였습니다. 사실 희년 법은 안식일법과 안식년 법에서 발전했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육일 동안은 일하고, 하루는 반드시 쉬어야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지나친 노동력 착취를 금지하기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선지자가 활동했던 800년 전은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조금만 돌아보면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안식년 규정은 육년 동안은 땅을 경작하고 일 년 동안은 땅을 쉬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땅을 일 년 동안 쉬게 한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자연발생적으로 얻게 된 소출을 통해서 사회적인 약자들 곧 스스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고,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당장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실제로, 안식년이 선포되면 모든 종류의 밭의 경작은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저절로 난 열매 곧 하나님께서 값없이 부으시는 은혜 안에서 허락해 주신 열매들 가운데 어떤 것도 거둬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약자였었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 언제든지 차지할 수 있는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특히,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거류민일 따름이다. 너희가 소유한 땅에서는 어디서나 땅을 되사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레25:23-24)라는 증거에 따르면,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생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구나 다 하나님의 땅에 머물러 살다 때가 되면 떠날 수밖에 없는 거류민居留民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려울 때는 언제든지 땅을 팔고, 좋아졌을 때는 언제든지 다시 살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희년은 땅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다.
또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어떤 위협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미4:4)라는 증거에 따르면, 성민 이스라엘에게는 꿈꾸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이 소유한 땅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노동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가족들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상입니다. 원할 때는 언제든지 이웃들을 청하여 함께 즐길 수 있는 세상입니다.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입니다. 곧 힘으로 만들어낸 평화Pax가 아닙니다.
친선과 협력을 바탕으로 화평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평화Shalom를 누리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그들에게 있어서 땅은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근간根幹이었습니다. 세상에 등장한 이후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유리방황했던 성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원했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회당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선지자가 기록한 말씀을 찾아 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이미 탁월한 가르침을 베풀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어떤 해석을 들려주실지 기다렸습니다.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눅4:21)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에서 살아내고 있는 당신의 삶이야말로 희년의 완벽한 구현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실제로, 성령께 사로잡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종류의 병을 완전히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주셨습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절대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당신께 찾아 나온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두 다 완벽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찾아가셔서 당신이 세상에 나타난 목적을 보여주기도 하셨습니다. 실제로, 거라사 지역의 광인狂人 한 사람을 고쳐주시기 위해서는 폭풍우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 그것도 한밤중에 건너가셨습니다. 자연 법칙까지도 다스리시는 당신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를 완벽하게 고쳐주신 다음에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곧장 갈릴리 바다를 다시 건너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원래 자리로 돌아오셨습니다.
희년은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혔을 때 비로소 삶에 구체적으로 현재화懸在化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년禧年된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만 살아낼 수 있습니다. 희년 안에 담겨 있는 정신 역시 성령을 통해서만 삶에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절대 절망으로 몰아붙이는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희년 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완벽한 평등과 평화를 누리는 희년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습니까? 이를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2:6-8)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삶에 희년을 구현하기 위해서 성령께 완전히 의지하셨습니다. 당신을 철저히 비우셨습니다. 낮추고, 낮추고 또 낮추셨습니다. 당신의 전부를 조금도 아끼지 않고 모두 다 내놓으셨습니다.
희년이 필요한 영혼들을 허물과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하기 위하여 물질보다,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보다 먼저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주고 있다는 의식조차도 없이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레바논 계 미국의 시인인 그Kahlil Gibran는 “...싫은 생각이 (전혀) 없고,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는 맘도 없고,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덕으로 여기는 생각도 없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줌은 건너편 골짜기의 상록수가 공중을 향해서 그 향기를 뿜는 것과도 같다...청함을 받고 주는 것이 좋으나, 청함 받기 전에 알아차리고 줌은 더 좋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희년을 완벽하게 구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는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 전부를 주면서도 싫은 생각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당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서 주는 마음도 없으셨습니다. 덕으로 여기는 생각조차 없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때, 미리 알아서 채워주셨습니다. 당신을 주고 또 주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을 닮아놓은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열렬한 지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살이 공동체”의 대표로 유명한 그朴基浩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생각과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라.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라. 배고픈 이에게는 밥그릇을 밀어주라. 헐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벗어주라. 사는 데 꼭 필요한 것 이상의 물건이 있거든 그것으로 남을 구제하기 위해서 나눠주라.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이 가는 길을 평탄케 해주시기를 늘 간구하라.”라고 기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땅과 물질과 능력은 오롯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합니다.
일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몫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희년의 구현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선지자는 평등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해서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혼자 살려고 하였다!”(사5:8),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아...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백성들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였다.”(사10:1-2)라고 고발했습니다.
사회의 기득권을 완벽하게 독차지하고 있었던 당시 왕, 선지자, 제사장, 방백 등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들은 땅을 사고파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힘없고 가난하며 기댈 곳조차 없는 이들의 가산을 삼키기 위해서 특권적인 지위를 이용해 불의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25:40, 45)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최후 심판 때, 당신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믿음의 유무라기보다는 어떻게 살아왔느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지극히 가난한 사람을 돌봐주었다면 상을 받아야 마땅한 의인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벌을 받아야 마땅한 악인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지혜는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14:31)라고 외쳤습니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 받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천하보다 귀합니다. 기댈 기반이 전혀 없는 가난한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그를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모욕하는 죄가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억압하지 말아야합니다.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George MacDonald는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은 부副이지만,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맨발의 전도자로 알려진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나는 나무에게 물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 주겠니
그러나
나무는 꽃을 피웠다.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노래했습니다. 대지주였던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고 난후, 고아들을 돌보는데 필요한 땅 삼천 평만 남기고 모두 월남한 피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남겨둔 삼천 평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등기登記를 하지 않았습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일뿐이라는 희년의 토지법을 철저히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땅만 나눠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점퍼라도 생기면 추위에 떠는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내일 아침 먹을 쌀만 남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먹을 쌀이 필요한 사람에게 퍼주었습니다. 마지막 쌀이었는데 아이들은 어떻게 하려느냐고 물으면, 성경이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서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이 다 먹여주신다.”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염원한 민족통일은 성민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과 맞닿아 있습니다. 땅을 하나님의 것으로 믿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은 희년의 토지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옷과 쌀을 걱정하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은 희년의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희년禧年의 사람이었습니다.
희년禧年 된 사람이었습니다. 희년의 정신을 온전히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학자들은 한국 교회가 정체기를 지나서 완만한 쇠퇴기로 들어섰다고 진단합니다.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고는 있지만 반등할 기미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입니다. 오히려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꼰데 짓이나 하며, 지극히 배타적인 동시에 이기적이기까지 한 집단 정도로 매도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교회의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득 채워졌던 교회는 가파른 속도로 비어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희년 정신을 실천하는 희년 된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고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서 나눠줌이라.”(행4:33-35)라는 증거에 따르면, 사도들은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붙잡히실 때 혼비백산 도망쳤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탁월한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은혜를 경험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소유를 팔아서 만든 물질을 사도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서로 유무상통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습니다. 희년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영향력을 잃어버린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기꺼이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희년 정신을 그대로 실천하는 희년禧年된 사람입니다.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힐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당신 자신을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한 희생 제물로 아낌없이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주신 물질과 능력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희년 정신으로 완벽하게 무장하고 실천하는 복된 삶, 자신의 소유가 무엇이 되었든 기꺼이 나눠줄 수 있는 복된 삶, 거룩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꽃을 피우는 복된 삶, 무엇보다 신음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