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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은 언니들을
- 『장르가 다른 핑크』가 그려내는 감각의 공동체
배옥주
1. 쉽게 어른이 되지 못하는 아이들
이예진의 『장르가 다른 핑크』는 무너진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자라나는 여자아이들의 섬세한 기록이다. 이 시집의 여자아이들은 쉽게 어른이 되지 못한다. 가난과 가족 해체, 노동과 폭력 속에서 언니들은 끊임없이 손상되고 정상적인 궤도에서 비껴난다. 「방학」의 언니들, 「존재의 성립」의 소녀 무리, 「오랜 미래」의 ‘현재’와 ‘미래 언니’는 모두 취약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은 상처 자체보다 그 이후에 형성되는 감각의 공동체를 더 오래 응시한다. 놀이와 괴담, 언니들과의 연대, 기묘한 환상의 언어는 서로를 붙드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이 시집에서 언니들, 친구들, 동생들로 이어지는 여성적 연결망은 서로에게 임시 거처가 되어준다. 학교도 가족도 더 이상 안전한 울타리가 아닌 자리에서 여자아이들은 자기들만의 규칙을 만들며 살아남는다. 이러한 성장은 캐서린 스톡턴(Kathryn Bond Stockton)의 ‘옆으로 자라는 성장’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를 향해 곧게 나아가기보다 현재를 버티기 위해 옆으로 퍼져나가는 성장이다. 화자들은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언니들의 삶을 더듬으며 세계를 구하지 못한 어설픈 핑크(「장르가 다른 핑크」)의 시간을 통과한다. 『장르가 다른 핑크』에서는 구원에 실패한 여자아이들이 서로의 결핍과 불안을 버텨낼 단단한 언어로 감각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2. 무너진 집에서 시작되는 성장
집은 보호의 공간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자라고 언어를 배우며 세계를 처음 만나는 곳이 집이다. 그러나 이예진의 시에서 ‘집’은 처음부터 그 역할을 잃은 공간으로 자리한다. 어른들은 먼저 무너지고 울타리는 쉽게 허물어진다. 「방학」과 「빙상」의 소녀들에게 집은 보금자리가 아니라 균열이 시작되는 장소다. 어른들은 떠나거나 폭력적이거나 침묵하고, 남겨진 아이들은 그 빈자리를 채워간다.
길에서 말을 건 사람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것을/ 바지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했다// 종종 옥상에 올라가/ 널어둔 고추들이/ 누워 있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죽어서도 집에 못 가는 언니들이 있었다 키우는 개가 집을 잘 못 지킨다고/ 아빠는 개를 뒷산으로 데려갔다// 그해 여름에 초경을 했지만/ 누구도 바지에 생긴 얼룩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열두 살이었는데/ 아빠를 따라갔던 개가/ 우리집 마당에서/ 내 신발을 물어뜯고 있는데// 엄마는 서울에 갔어요/ 언니들은 그늘도 없는 옥상에서/ 나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 여름이 집 위로 무너져내릴까봐/ 나는 나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집을 또 허물었다
- 「방학」 전문
「방학」의 소녀는 학교 밖에서도 계속되는 폭력의 위협과 붕괴되는 가족 사이에서 사춘기 몸의 변화를 혼자 감당한다. “지는 것을 싫어하는 열두 살”인 ‘나’는 초경을 했지만 “누구도 바지에 생긴 얼룩을 말해주지 않았”고, 아버지는 개를 뒷산으로 데리고 갔으며, 엄마는 서울로 갔다. 아이들에게 어른의 부재는 폭력이다. ‘나’가 종종 올라가는 옥상은 현실의 폭력을 잠시 비껴설 수 있는 장소이자 언니들과 함께 머물 수 있는 임시 피난처가 된다. “죽어서도 집에 못 가는 언니들”은 보호받지 못한 채 떠돌아야 했던 여성들이다. 언니들은 먼저 상처 입고 살아남은 존재들의 계보를 형성한다.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갔던 개가 마당으로 돌아와 ‘나’의 “신발을 물어뜯”는 장면은 폭력이 사라지지 않고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집은 안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다. ‘나’는 “여름이 집 위로 무너져 내릴까” 걱정되어 자신의 목소리로 지어진 집을 또 허문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세운 목소리의 집을 무너지기 전에 먼저 허물어버리는 것은 상처받기 전에 스스로 물러서는 자기 보호의 역설이다. 여름은 감당할 수 없는 기억의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엄마는 떠났고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언니들의 약속만 남은 자리에서 공포의 기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것은 지붕이라기보다 이 집에서 버티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옥상에서 소녀의 여름을 지켜주겠다는 언니들의 약속은 「빙상」의 자매에게로 이어진다.
언니, 여기서 죽은 꽃의 냄새가 나// 자매는 눈 내리는 창문 앞에 서 있다// 무거워진 지붕/ 하나둘씩 가라앉았다/ 나는 동생의 눈에서 사라진 해의 모습을 봤지// 우린 조금도 닮지 않았고// 붕대를 벗기면/ 썩은 치즈 냄새가 났다/ 칼이 무뎌서 들지 않아// 금간 컵에 우유를 따라주며// 오래전에 묻어둔 사냥개가 돌아왔어/ 차라리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자// 구경을 하러 천국에 갔어/ 그곳에서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봤어// 천사들이 나를 뜯어먹었어/ 사이좋게// 저녁에는 젖은 식빵을 먹었다
- 「빙상」 전문
「빙상」은 붕괴 직전의 얼음판에 서 있는 자매의 불안을 불온한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이 시의 공간은 처음부터 죽음과 부패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죽은 꽃의 냄새가 나”는 이곳은 눈 내리는 창문 앞이다. 그곳에서 자매는 언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지도 모를 음습한 상황에 내던져져 있다. “무거워진 지붕이 하나둘씩 가라앉”는 곳에서 언니는 “지는 해”가 들앉은 동생의 눈을 본다. “우리는 조금도 닮지 않았”음을 확인한 언니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쉽게 봉합되지 않는 동생과의 거리감을 느낀다. “우유를 따라주”는 금이 간 컵은 이미 균열된 관계를 암시하지만, 그럼에도 우유를 따른다는 행위 속에는 미약한 돌봄의 정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진짜 공포는 “오래전에 묻어둔 사냥개가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방학」의 개처럼, 이 시의 사냥개 또한 돌아오는 폭력의 이미지다. 그러니 “차라리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자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집에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를 확인할 수 있다. 돌아온 개가 신발을 뜯어먹듯, 천사들은 사이좋게 ‘나’를 “뜯어먹”는다. 구경하러 간 천국마저 천사들에게 뜯어먹히는 폭력의 장소임을 경험한 뒤에도 반드시 저녁은 온다. “젖은 식빵을 먹”으며 마치는 하루는 거대한 구원이나 극적인 회복 대신 축축하고 쓸쓸한 일상이다. 균열된 세계 속에서 서로의 곁으로 하루를 건너가는 것, 그것이 이 자매의 숙제다.
3. 우리끼리 만든 규칙으로 견디는 아이들
집이 무너진 자리에서 아이들은 밖으로 나간다. 학교와 운동장, 폐교의 창고와 물에 잠긴 교실. 이 공간들은 어른이 설계한 질서가 작동하지 않거나 이미 붕괴된 장소들이다. 「장마」에서 아이들은 물에 잠긴 학교 안에 갇힌 채 개구리에게 점프를 배우고, 「놀이터」의 아이들은 ‘얼음땡’ 놀이와 시소 속에서 기울어진 관계와 폭력을 익힌다. 「부력」의 화자는 물에 던져진 자리에서 겨우 떠오르는 법을 배우고, 「존재의 성립」의 아이들은 괴담과 수련 놀이로 사부와 제자의 공동체를 만든다. 아이들은 공포와 균열을 놀이와 괴담, 몸의 감각으로 통과한다. 앞으로 곧게 나아가지 않고 옆으로 퍼져나가는 불완전한 규칙 속에서 가까스로 서로의 곁에 머문다.
그 영화가 개봉한 뒤로/ 동네의 아이들은/ 줄넘기를 쌍절곤처럼 휘둘렀다/ 네 살 많은 언니를 찾아가/ 우리를 제자로 받아달라고 빌었다/ 바람의 기운이 낯설고/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야/ 사부의 말에 우리는 수련을 시작했다/ 체육관 창고에서 옷이 벗겨진 어른들이 나왔다면? 누군가는 매질하는 소리를 들었대 다 아니야 사실 귀신이 산대/ 중학교에 가서도/ 서로를 혼자 두지 않기로 했지만/ 뿔뿔이 흩어진 우리가/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조리 읽고/ 처음으로 번 돈으로 술을 사고/ 깨진 사랑을/ 테이프로 칭칭 감는 동안/ 사부는 시집을 갔다/ 모두 하산해라/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은/ 이제 내 장면은 내가 책임지라는 거겠지/ 창고에 살던 무언가는/ 학교가 폐교된 뒤로 봉인되어 있다/ 오래전/ 줄을 넘던 그 운동장에서/ 우리는 모래구름을 만들며 정의를 약속했다/ 정의는 다음 사람에게/ 창고를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거야/ 이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우리는 기를 모았다/ 세계의 작은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 「존재의 성립」 전문
이 시는 영화의 모방에서 출발한다. “동네의 아이들은 줄넘기를 쌍절곤처럼 휘”두른다. 화자와 친구들은 “네 살 많은 언니를 찾”아가 “우리를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한다. 여기서 언니는 먼저 삶을 통과해 본 존재이자 살아가는 기술을 전수하는 대상이다. 아이들은 학교나 어른이 아닌 언니들의 세계를 통해 살아가는 방식을 배운다. 여자아이들은 사부를 만들고 상상과 괴담을 만들어 운동장을 신화 공간처럼 사용한다.
폐교가 된 학교는 불안과 소문, 공포가 뒤섞인 장소다. 교육의 기능을 잃고 텅 빈 채 남아 있는 이 공간을 아이들은 수련과 괴담, 약속으로 다시 채운다. 어른들이 설계하고 떠난 자리를 아이들이 재점유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창고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괴담과 상상을 통해 균열을 알아차린다. 어른들이 준비해준 안전한 길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공포 주변을 맴돌며 몸으로 위험을 감지해간다. 괴담과 소문이 뒤섞인 창고의 공포를 함께 감당하며 아이들은 서로를 혼자 두지 않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사부가 시집을 가고 “모두 하산”하라는 말과 함께 공동체는 해산된다. 공동체는 흩어졌지만 “이제 내 장면은 내가 책임지라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래전 줄을 넘던 운동장에서 약속한 정의는 “다음 사람에게 창고를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자아이들은 스스로 만든 규칙과 괴담, 놀이의 공간 속에서 서로를 혼자 남겨두지 않는 법을 배워간다.
선생님이 물에 떠내려가서/ 이번 주부터는 개구리가 대신 가르치기로 했어요// 마을이 물에 잠기고 우리는 학교에 갇혔지 개구리는 점프를 잘해서 선생님이 될 수 있었구나 밖에서 번개가 내려치고 선더 라이트닝 바글바글 울다 보면 심장이 튀어오른다// 분필은 똑똑 노크하듯이/ 눈물은 뚝뚝/ 의성어가 없으면 운동장을 잃은 우리가 얼마나 슬픈지 표현하기 어려워서// 물에 잠긴 다리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튼 입술에 침을 바르며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 홀딱 젖은 옷을 입고도 폴짝폴짝 뛰어다니다 감기에 걸렸고// 복도를 따라 떠내려온 신발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계속 폴짝이면 미래에서 온 기억을 알아볼 수도 있겠지// 선생님 점프를 잘해도/ 착지를 못해서/ 개구리는 사람 손에도 화상을 입는다
- 「장마」 전문
이제 학교는 더 이상 규율의 공간이 아니다. 마을이 물에 잠기고 선생님은 떠내려간다. 권위와 제도가 붕괴된 자리에서 교단을 대신하는 것은 개구리다. “개구리는 점프를 잘해서 선생님이 될 수 있었구나”라는 말은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배워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식이나 규율보다 물속에서 튀어 오를 수 있는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이 환상은 재난을 이겨내는 아이들의 상상적 전략이다.
아이들은 감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공포와 슬픔을 ‘똑똑’, ‘뚝뚝’ 같은 의성어를 통해 몸의 리듬과 소리로 나타낸다. “의성어가 없으면 운동장을 잃은 우리가 얼마나 슬픈지 표현하기 어”렵다는 말은 아이들에게 언어가 감각에 가깝다는 것이다. “점프를 잘해도 착지를 못”하는 개구리 선생님은 가르치는 어른조차 이 세계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사람 손에도 ”화상을 입“는 개구리 선생님의 모습은 폭력 앞에서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완전한 어른도, 완전한 선생님도 없는 자리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착지 방식을 찾아간다.
아파트 아이들은 얼음땡을 좋아했다 나는 동생이 술래가 되는 것도 깍두기가 되는 것도 싫었다 동생은 얼음이 되기엔 물렀고 땡하면 죽었다 혜린이는 단숨에 미끄럼틀을 오를 수 있었고 지예는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는 걸 잘했다 내가 잘하는 것은 시소 위에서 균형 잡기, 동생이 오면 한쪽으로 기울어져야 했다
우리 모두가 아픈 까치를 쿡쿡 찌르던 3학년 오빠를 좋아했지 오빠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를 빤히 보며 오줌을 누던 경비아저씨는 한 번도 지워지지 않았다 놀이터 모래 바닥에는 잡히지 않는 손이 잔뜩 파묻혀 있었다 꽁꽁 얼어서 땡을 기다리는 손들, 다 두고 가기엔 눈에 밟혀도 우리는 매번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놀이터」 전문
물에 빠진 공을 주워오라고/ 소년들은 나를 물속으로 던졌다// 바지를 걷으면 개구리가 튀어나온다// 그들 사이에 끼고 싶어서 나는 둥글어졌다/ 튀어 오르고 튕겨 나가는// 언니 나 이제 개헤엄 안 하고도 물에 뜰 수 있어
- 「부력」 전문
「놀이터」의 얼음땡과 「부력」의 물속 던지기는 놀이가 폭력과 경계를 공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먼저 「놀이터」에서 유년의 놀이는 동심의 공간으로 남아 있지 않다. “동생은 얼음이 되기엔 물렀고 땡하면 죽”어 놀이 속에서도 반복되는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화자는 동생이 ‘술래’나 ‘깍두기’가 되는 것이 싫지만 불공평한 구조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한다. “아픈 까치를 쿡쿡 찌르”던 오빠나 “우리를 빤히 보며 오줌을 누던 경비아저씨”는 완성되지 못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여자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불쾌한 시선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암시한다.
아이들은 몸으로 살아남는 방식을 배운다. “혜린이는 단숨에 미끄럼틀을 오를 수 있었”고, 지예는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는 걸 잘 했”다. 화자가 잘하는 것은 시소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지만 “동생이 오”면 어김없이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기울이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다. “꽁꽁 얼어서 땡을 기다리는 손들”을 모래 바닥에 두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장면은 서로를 완전히 구하지 못하면서도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의식을 강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에게 성장은 기울어지고 얼어붙고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하며 타인의 곁을 간신히 붙드는 일이다.
「부력」에서 소년들은 “물에 빠진 공을 주워오라”고 ‘나’를 물속으로 던진다. 이 폭력적인 놀이 속에 던져진 ‘나’는 오히려 물에 뜨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고 싶”어서 스스로 몸의 형태를 공처럼 바꾸어 “둥글”어진다. 또래 집단으로 섞여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변형시킨 ‘나’는 “튀어 오르고 튕겨 나가”게 된다. ‘나’는 “이제 개헤엄 안 하고도 물에 뜰 수 있"다고 언니에게 자신 있게 말한다. 여기에는 분명한 변화의 조짐이 있다. 던져진 자리에서 뜨는 법을 익히는 것. 그것이 이 아이들의 성장 방식이다.
4. 서로의 체온으로 버티는 언니들의 세계
아이들은 자란다. 그러나 성장 이후에도 안정된 삶에 도착하지 못한다. 「오랜 미래」, 「그땐 프렌치블랙을 피웠다 같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프렌치블랙 난민들이라 불렀다」,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의 화자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기울어진 자리에 서 있다. 공장과 기숙사, 알바와 담배, 가족의 해체와 가난.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언니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다. 여성공동체는 상처 입은 몸들이 버텨내는 자리다. 그곳에서 함께 떨고 있는 언니들의 체온이 데워지고 있다.
현재와 나는 오 년째 같이 살고 있다/ 평생을 약속한/ 믿음 하나로// 현재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나는 통조림 공장에 간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뚜껑을 잠그다 돌아온다// 현재는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해준다/ 학생 중에 심상치 않은 아이가 있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쳐// 나는 열을 맞추어 서 있는 통조림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기계가 통조림을 뱉어내는 것보다/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 것이 많구나/ 현재의 이마를 짚고/ 미열이 좀 있는 것 같아// 뚜껑을 잘 잠그기 위해/ 특화된 나의 손으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다// 이제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술에 취한 미래/ 담벼락에 오줌을 누는 것을 본다// 공장에서는/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내야 버틸 수 있다// 미래는 우리집에/ 꽁초를 버리는 언니의 이름// 나는 미래의 벗은 몸을 생각하다가//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안으로/ 손을 넣을 뻔한 적이 있다
- 「오랜 미래」 전문
「오랜 미래」에서 노동과 가난, 가족 해체는 계속된다. 이 시에서 ‘현재’와 ‘미래’는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화자 곁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름이자 삶의 상태처럼 사용된다. “현재와 나는 오 년째 같이 살”면서 흔들리는 현실에 기대어 살아간다. 불안정한 세계에서 ‘현재’라는 이름의 사람과 살아가기를 택했다는 것은 미래를 유예하고 지금 눈앞의 것에 발붙이고 살겠다는 선택으로 보인다. ‘현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화자는 통조림 공장에서 일한다. 두 사람의 삶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연결된다. ‘현재’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심상치 않은 아이”를 이야기할 때 화자는 “열을 맞추어 서 있는 통조림”을 떠올린다. 성장은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기 위한 노동의 리듬으로 이어진다. 그 리듬은 화자의 몸에도 새겨져 있다. “뚜껑을 잘 잠그기 위해 특화된 나의 손”은 노동이 쓸모에 맞게 몸을 개조해버린 섬뜩함을 보여준다. 균일하게 찍혀 나오는 통조림처럼 화자 역시 공장의 리듬에 맞춰 규격화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화자는 “뚜껑을 잠그다 돌아”오는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같이 살고 있는 ‘현재’와 “우리집에 꽁초를 버리”는 ‘미래’언니를 생각한다. ‘미래’는 '꽁초를 버리는 언니의 이름이기 전에, 먼저 “술에 취”해 “담벼락에 오줌을 누”는 낯선 모습으로 등장한다. 미래의 실체는 한 박자 늦게 도착한다. ‘미래’라는 말이 관습적으로 품고 있는 희망의 어감과, 실제로 마주하는 취한 언니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희망을 기대하고 불러낸 이름이 고작 이런 모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 이 시가 던지는 냉소의 묘미다. “이제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는 말은 현재의 이야기가 끝났음을 알리지만, 동시에 삶의 다음 단계를 이야기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화자에게 미래는 현재보다 암울하다.
현재는 “미열이” 나고 화자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뿐이지만, 미래는 "술에 취"한 존재다. 절망에 찌든 '미래'언니는 성장 이후의 삶조차 불안정한 청년 세대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화자는 '미래'의 벗은 몸을 생각하다가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안으로 손이 들어갈 뻔한 위험한 순간을 만난다. 반복되는 노동의 리듬 속에서 잠시 노동 바깥에 있는 언니의 몸을 생각하는 그 짧은 틈이 오히려 화자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다. 노동의 리듬에서 벗어나려는 찰나조차 세계의 위협을 받는 현대인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미래’라는 언니는 위안이 아니라, 잠깐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냉혹한 세계를 증명하는 섬뜩한 존재다.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 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장을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사람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엄마는 결국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늙고 지친 눈빛을// 여기선 문을 잠그지 않아도 괜찮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전문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다. 엄마는 “애인을 따라”가고,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한다. 금값이 오르자 “언니는 손금을 팔러 갔”다. 금값이 오르는 것은 경제적 불안의 신호다. 세상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금을 찾지만, 금값이 오른 세계에서 언니가 팔 수 있는 것은 손금뿐이다. 부모의 부재 속에서 언니가 팔 수 없는 손금을 판다는 것은 끝내 자신의 운명마저 내맡겨야 하는 삶의 궁핍을 드러낸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손금을 팔아버린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운명선을 팔아버린 언니의 모습은 “따로따로 떨어지”는 눈처럼 해체된 가족공동체를 예고한다.
화자가 어릴 때 쓴 동화는 찢고 찢기는 이야기다. 언니의 숙제장과 엄마의 가계부와 아빠의 신문과 달력이 찢긴다. 찢어진 종이로 가득 차는 이야기는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는 가족의 분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가장인 아빠가 달력을 찢는 행위는 함께 살아가는 시간의 붕괴를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를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라며 화자가 언니의 것으로 되돌려놓는다는 점이다. 정작 동화를 시작한 것은 “내가 언니의 숙제장을 찢으면서”라고 명시된 '나'였는데도, 서술은 슬며시 ‘언니의 이야기’로 환치된다. 이 어긋남은 언니가 집을 나간 뒤 화자가 유년의 이야기를 언니의 것으로 다시 기억해내는 방식이다. 이렇게 상실은 기억마저 흐려놓는다. 누가 먼저 종이를 찢기 시작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금값이 올랐”고 언니는 “손금을 팔러 갔”다처럼 현재의 균열을 알리는 문장들은 짧게 끊어지는 반면, 동화를 떠올릴 길게 이어지는 산문으로 서술된다. 길게 흘러가는 과거에 비해 짧게 끊어지는 현재의 호흡을 통해 화자의 가족이 산산조각 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가족은 한 방향을 바라보지 못한 채 “따로따로 떨어지는 눈”처럼 흩어진다. 이 구절의 ‘눈’은 흩날리는 눈이면서 “따로 노는 늙고 지친 눈빛”의 눈이기도 하다.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떨어지는 싸락눈과, 서로 마주치지 못하는 지친 눈빛이 서로 겹쳐진다. 이 시는 금값과 손금처럼 동음이의어를 반복적으로 끌어와 해체를 형상화한다. 언어 자체가 갈라지고 겹쳐지는 방식으로 가족이 앓는 균열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족의 해체 속에서도 화자는 “집에 남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선 문을 잠그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심장한 심사를 끼워 넣는다. 지킬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찾아온 안도는 지켜야 할 것이 없어진 자의 낯선 해방감에 가깝다. 결국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는 역설은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이 이미 예비한 논리이기도 하다. 집을 잃는 것이 방향을 얻는 조건이 된다는 역설은 ‘설원’이란 표지물이 모두 지워진 공간이어서 ‘방향’이라는 개념 자체가 새롭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집’이 무너진 뒤에야 화자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감지하게 된다.
옛날에/ 현금이 많이 없을 때/ 새벽에 자도/ 수업을 빠지지 않던 때/ 담배를 피우는 게 예술가의 멋이라고 생각했을 때/ ATM에서는 수수료를 많이 떼갔지// 사 인실 룸메이트 언니들이 어려웠다 가끔은 방에 들어가지 않기도 했다 누구의 물건이 없어졌는데/ 아마 나 같다고/ 언니들이 쑥덕거렸어// 나는 그때 화목 아침에는 빵집에서/ 주말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보냈다// 내가 실패한 시를 쓰고/ 돈을 더 사랑하더라고// 많이 울고 난 다음날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커피를 무슨 맛으로 먹는지 알게 되었다/ 도서관에 자주 앉는 자리가 생기고/ 텀블러 속의 커피를/ 홀짝홀짝// 손님이 부탁한 케이크를 꺼내다 흠집냈다/ 괜찮다고 꼭 그거 달라고 웃으면서 말하던 그 분은// 컴플레인을 넣었다// 제빵사가 알바생을 과할 정도로 혼냅니다 보기 불편하네요/ 울먹이면서 계산하는데 마음이 안 좋습니다/ 그래도 나는 새벽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널 사랑해서 네 말을 들어주는 거야// 두 달 사귄 애인을 차단했을 땐// 그런 문장도 쓸 줄 알게 되었지// 그 시절의 나는/ 고집도 슬픔도 애정도 과했다/ 거기서만 올 수 있는 문장들이/ 이젠 너무 낯설게 보여// 기말이 끝나고 성적을 기다렸다/ 기숙사 짐을 정리해야 하는 어느 겨울/ 나는 발품을 팔았다// 새로운 방은 편히 드나들 수 있기를// 나의 스무 살/ 담뱃재를 잘못 털어도/ 꼬박꼬박 피우던
- 「그땐 프렌치블랙을 피웠다 같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프렌치블랙 난민들이라 불렀다」 전문
“프렌치블랙 난민들”은 같은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느슨하게 연결된 공동체처럼 부르는 이름이다. 경제적 궁핍과 청춘의 허세가 동시에 섞인 이 호명 방식은 이 시 전체의 온도를 압축한다. 담배는 가난한 학생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표식처럼 기능하지만, 화자는 그 시절을 낭만으로만 회상하지 않는다. 기숙사 시절 룸메이트 언니들은 어려웠고, 물건이 없어지면 화자를 의심했다. “사 인실 룸메이트 언니들이 어려웠”던 감정은 여성 공동체 안에서도 편안하게 섞이지 못하는 화자의 불안을 보여준다. 화자는 공동체 안에 속하고 싶지만 동시에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다는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언니들은 보호와 연대의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가까움과 불편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실적 공동체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낭만적 우정보다 함께 살아남기 위한 연대에 가깝다.
화자는 새벽에 일어나 빵집에 가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말을 보내며 버틴다. 이 시에서 새벽은 각각 다른 결을 가진다. "새벽에 자도 수업을 빠지지 않던 때"는 가난하고 잠이 부족해도 버티던 결핍의 시간이다. “많이 울고 난 다음날” 새벽 다섯 시는 무너진 뒤 다시 몸을 일으키는 시간이다. 그 새벽에 커피 맛을 알게 되고 도서관에 자주 앉는 자리가 생긴다. 그리고 케이크에 흠집을 내고 해고된 뒤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새벽이 온다. 해방처럼 보이지만 실은 버티게 해주던 루틴을 잃은 것이다. 새벽은 화자에게 가난과 노동, 버팀과 상실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케이크 사건은 충격적이다. 손님의 위로처럼 보였던 말이 결국 컴플레인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타인의 친절조차 믿을 수 없는 서비스노동의 현실을 보여준다. 화자의 취약한 감정 상태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소비되는 순간에도 화자는 끝내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널 사랑해서 네 말을 들어주는 거야”라는 문장을 배우게 된 화자는 청춘의 사랑조차 관계의 권력과 피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담뱃재를 잘못 털어도 꼬박꼬박 피”우는 몸은 서툴고 흔들리면서도 자신의 습관과 욕망을 놓지 않는다. 그것이 이 시집 속 언니들의 생존 방식이다.
5. 서로를 놓지 않는 감각
‘장르가 다른 핑크’는 정해진 방식으로 자라지 못한 소녀들의 색이다. 이 시집은 어설프고 위태로운 핑크색으로 견디는 여자아이들의 시간을 따라간다. 옥상과 운동장, 폐교의 창고와 기숙사 방 같은 위태로운 장소들은 이들이 잠시 몸을 누일 수 있는 자리다. 엄마가 플라스틱으로 만든 딸들이 잘못 태어난 탓으로 커다란 바구니가 되는(「지진 파티」) 훼손의 자리. 그곳에서 여자아이들은 물속에 던져져 뜨는 법을 배우고, 새벽 다섯 시의 노동을 견디며 온몸으로 다음날에 도착한다. 이 시집이 끝내 붙들고 있는 것은 무너진 세계에서도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다음 날로 건너가는 언니들이다. “집이 사라지”고 생긴 ‘방향’은 정체된 집을 벗어나 또 다른 언니들을 향해 옆으로 뻗어 나가는 연대의 이정표일 것이다. 그 끝에는 상실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이 많은 언니들’이 있다.
약력
배옥주
2008년 《서정시학》 시 등단
2022년 《애지》 평론 등단
시집 『오후의 지퍼들』, 『The 빨강』, 『리을리을』
연구서 『이형기 시 이미지와 표상 공간』
평론집 『언어의 가면』
<애지 비평문학상>, <김민부 문학상>, <두레 문학상> 수상
<요산창작지원금> 수혜,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부경대학교> 문학박사, <부경대학교 연구교수>, <애지>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