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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32: 7-14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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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가을 새벽부흥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많은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은혜를 받고 삽니다. 사랑과 기도입니다. 사랑을 통해 행복의 은혜를 받습니다. 기도를 통해 거룩의 은혜를 받습니다. 사람에게도 두 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사랑과 기도입니다. 그런데 사랑과 기도는 하나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은 기도요 가장 좋은 기도는 사랑입니다.
무더운 여름, 어느 가정에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을 위해 부지런히 음식을 만든 엄마가 유치원에 다니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예쁜 딸 오늘 손님을 위해 기도해 주겠니?” 딸이 말했습니다. “나 어떻게 기도하는지 몰라”. 엄마가 말했습니다. “괜찮아. 엄마가 하는 대로 하면 돼”. 딸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어쩌자고 이 무더운 날씨에 눈치도 없이 손님이 와서 음식을 만들게 합니까? 오 마이 갓,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해 주옵소서”. 기도는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또한 진심이 담겨야 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중에 대표기도를 길게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장로님이 얼마나 기도를 길게 하시는지 한번 시작하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다 훓습니다. 어떤 때 인물시리즈로 나가면 에덴동산의 아담에서부터 밧모섬의 사도 요한까지 나갑니다. 한번은 기도하고 눈을 떳더니 교인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뒤돌아보니 목사님만 혼자 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교인들이 다 어디 있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갔어요?” “언제요?“ ”아브라함때 나갔어요”.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진심으로 기도해야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기도가 있습니다. 남을 위한 기도입니다.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지만 남을 위해 기도하면 복이 따라옵니다. 우선 그 사람이 변화됩니다. 그가 변하면 내가 행복해집니다. 내가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합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기심을 극복하는 기도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면 결국 그 복이 나에게로 옵니다.
기독교 신문에 여수성광교회 박성자 집사님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14년 전 3월 여수에서 시아버지 생신 때문에 서울에 오다가 서대전역에서 잠시 쉬는 사이, 국수판매대에서 국수를 사먹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자기가 타고 왔던 열차가 서서히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5개월 짜리 아기를 안고 달리는 열차를 타다가 발을 헛디디어 열차 바퀴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열차 바퀴에 깔려 죽겠구나” 했는 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는 온데 간데 없고 자기만 바퀴에 옷을 걸려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 살려 주세요”하고 소리쳤는 데 한참있다가 기차가 멈췄답니다. 사람들이 소리쳐서 운전수가 멈춘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얼굴에 약간의 상처만 나고 아기는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했는 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친정 어머니가 그 순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서울에 사는 친정 어머니는 아침부터 웬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 서울 근교에 있는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날따라 기도 안하면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기도하고 저녁에 돌아왔는 데 딸이 열차사고를 만나서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달려갔는 데 다행히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기적의 배후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왜 그날 어머니는 기도의 감동을 받았을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어느날 기도의 감동을 받으면 그날은 누군가가 사는 날입니다. 우리가 여기 살아 있는 것도 누군가가 그때 그때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의 위력을 믿습니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나이 80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백명 천명도 아니고 200만이 넘는 백성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를 전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제가 지난 여름 이스라엘 가서 이 광야를 찝차를 타고 가 보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흔들리는 찝차를 타고 광야를 달렸는 데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해하려고 모험을 시작했지만 정말 힘들었습니다. 사방이 뜨거운 사막인 데 어디 내려 달라고도 못했습니다. 그냥 참고 가는 것이 나았습니다. 차를 타고 가도 힘든 데 맨 발로 걸어 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다 정말 힘든 일이 생겨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는 데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 예배한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도 약간 있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한번만 올라간 것이 아니고 8번이나 올라갔고 마지막에는 40일이나 거기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에 지친 백성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만든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는 데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백성들이 금송아지 섬기는 소리다. 부패한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의 목소리에는 이미 슬픔과 탄식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말씀합니다. 출32: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은 이미 진노하셨습니다.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신 하나님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웬만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나님의 산, 시내산 앞에서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나마 아론을 비롯한 지도자들도 다 거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정말 화나고 슬픈 날이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꼼짝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야 했습니다. 분노의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때 다급하게 기도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출32:11-12,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아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아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아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죄까지 사랑하는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사랑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드러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다 품는 사랑입니다. 온유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엄한 사랑입니다. 죄를 미워하는 사랑입니다. 진리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서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한없는 미움을 베푸십니다. 죄인을 사랑하는 사랑을 은혜라고 하고 죄를 미워하시는 사랑을 진노라고 합니다. 은혜만 사랑이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는 진노도 사랑입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합니다. 두 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롬1장의 사랑과 롬3장의 사랑입니다. 1장에서는 먼저 죄에 대한 진노를 말합니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로마서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십니다. 불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불의는 사람앞에서 잘못된 행동입니다. 불경건이 먼저고 불의가 다음입니다. 불경건이 뿌리고 불의는 그 열매입니다. 세상은 밖으로 나타난 불의를 죄라고 말합니다. 살인, 간음, 절도, 사기, 다 불의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뿌리가 불경건입니다. 하나님께 잘못 되었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진노합니다.
그 진노를 막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당해야 할 진노를 스스로 당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속죄”, “화목제물”이라고 말합니다.
롬3: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나려 하심이니”.
화목제물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롬3: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래서 여러분, 이 공식을 아시겠습니까? “인간이 죄를 지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자신이 대신 죽어 우리 진노를 막은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 그래서 롬1장의 하나님의 진노가 롬3장의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은혜사이에 예수님이 계셨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중보의 사역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중보자로 살았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도 예수님처럼 중보자가 살겠다”. 중보기도란 영어로 ”intercess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inter, ”중간에 들어가“, cession,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중간에 내가 서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원형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작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생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 하셨습니다.
눅22:32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은 중보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하셨습니다.
눅23:34,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오른편 강도를 위해 중보기도했습니다.
눅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승천하신 후 하늘 보좌에 앉아 하시는 일도 중보기도입니다.
히7:25입니다.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롬8:34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중보기도가 위대한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가 아름다운 것은 예수님과 똑같은 기도를 우리가 하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가 능력있는 것은 예수님처럼 응답받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지금 둘 사이에 섰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입니다. 죄에 대하여 심판하실 하나님과 그 무서운 진노앞에 선 백성들 가운데 모세가 섰습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러면 어떻게 중보기도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 12절, 13절에서 모세는 두 가지로 기도합니다. 먼저 12절을 보십시오.
출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아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모세가 하나님께 그 백성을 위해 빌었던 첫 번째는 이 백성에게 화를 내리지 말아야 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이방인들이 “봐라, 너희 하나님은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니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긍휼이 많은 분 아닙니까? 모세는 지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죄인입니다. 하나님앞에 염치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바랄 것은 다만 긍휼과 자비입니다.
유명한 나폴레온 황제의 병사중에 탈영한 병사가 생겼습니다. 그나마 두 번이나 탈영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온은 그를 살려 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알고 달려와 울면서 애원합니다. “황제여, 내 아들을 살려 주옵소서”. 나폴레온이 말했습니다. “두번이나 탈영한 병사를 살려주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요. 살려줄 수 없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황제여, 저는 왕에게 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비를 구합니다”. 나폴레온이 또 말했습니다. “의는 그만두고 자격도 없소. 어떻게 두 번이나 탈영한 병사를 살려주란 말이요?”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내 아들은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기 때문에 긍휼을 구하지 않습니까? 한번만 불쌍히 여겨 주소서”. 어머니의 간절한 탄원으로 아들이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중보기도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긍휼입니다. 제가 이번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독일의 비텐베르크를 갔습니다. 거기 루터가 95개조항을 써붙인 교회가 있고 그 옆에 박물관이 있었습니다. 그 박물관에 루터의 많은 유품들과 말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루터가 했던 마지막 말을 읽고 가슴이 서늘했습니다. 루터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We are beggar, it is true"(우리는 거지다. 그것은 사실이다). 루터는 왜 죽어가면서 자신을 거지라고 말했을까? 그는 평생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루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는 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루터처럼 하나님앞에서 거지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의 연약한 몸과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직도 어린 내 아들과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늙고 병든 우리 부모님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직도 하나님 모르는 내 친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25년간 드렸던 기도가 이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는 드디어 응답되었고 어거스틴은 25년 후에 돌아와 2천년 기독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간질에 걸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아버지의 기도가 이것이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흉악한 귀신들인 딸을 데려온 어머니가 했던 기도도 같았습니다. “주여,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나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드렸던 또 하나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13절입니다. 출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르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첫째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이미 약속했지 않습니까?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고 약속하고, 가나안 온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는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부족하오니 저를 보고 응답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응답하옵소서.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일점일획도 변개함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여 아침마다 새롭지 않습니까? 약속대로 응답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기도할 때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앞에 거지입니다. 우리 보고 응답하시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보다 우리의 열심보다 우리의 정성보다 앞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기도했습니다. 야곱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창32: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아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사실 야곱이 하나님앞에 내놓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평생 속이고 거짓말하고 욕심부리던 야곱 아닙니까? 그래서 야곱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보면 기도할 자격도 없는 놈입니다. 그래도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대로 이루어주옵소서”.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시119: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뜻을 돌이키겠다
그렇게 모세가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4절을 크게 읽겠습니다. 출32:14, “여호아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다같이 “뜻을 돌이키사”. 어떤 뜻을 돌이키셨다는 것입니까? 10절로 돌아갑니다. “내가 진노하여 진멸하리라”. 그 뜻을 돌이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하나님은 기도에 약한 분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뜻을 돌이킨 기록이 성경에 10번 이상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떻습니까? 한 나라를 책임짓는 대통령이 어렵게 어떤 정책을 만들었는 데 한 남자가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고 그 정책을 바꾸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대통령의 권위는 어떻게 되고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꾸십니다. 자신이 가지신 계획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권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기도를 듣고 니느웨를 멸망시키겠다는 뜻을 바꾸셨습니다.
요엘시대 백성들이 기도하고 회개하자 민족을 멸망시키겠다는 뜻을 바꾸셨습니다. 진노하고 심판하려는 생각을 기도 때문에 바꾸셨다면 우리를 축복하고 잘되게 하겠다는 생각은 기도 때문에 얼마나 잘 이루시겠습니까? 나쁜 뜻은 돌이키시고 좋은 뜻은 빠르게 이루게 하는 힘, 그 응답의 비밀이 중보기도의 비밀입니다.
저는 중보기도의 혜택을 참 많이 본 사람입니다. 자라면서 청소년기에 방황했습니다. 교회를 못 나올 뿐 아니라 하나님을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 저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그 뒤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제가 돌아올 뿐 아니라 하나님께 목회자로 쓰임받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제가 하나님께 돌아오자 곧 바로 신학교로 갔습니다. 저는 한번도 신학을 하려고 계획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제 계획대로 되지 않고 어머니 기도대로 되었습니다. 약한 어머니가 강팍한 아들을 기도로 이긴 것입니다. 혹시 자녀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돌아옵니다. 어디 가겠습니까?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부모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께 돌아올 뿐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사업축복도 그렇습니다. 어려운 시대 열심히 사업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크리스쳔은 열심히 사업할 뿐 아니라 기도하면서 사업해야 합니다. 어떤 기독교 잡지에 불황을 이기고 사업에 승리한 분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남편이 사업이 어려울 때 부인이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 기도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옵소서”. 그리고 매주 최선의 감사예물을 드렸습니다. 어떤 때는 아들 등록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헌금을 계속했습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부르짖었습니다. 3년만에 천억짜리 사업을 따 냈습니다. 지금은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기도 때문입니다. 교회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부흥되어야 합니다. 많은 이유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영적 지체인 성도 여러분을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국의 한 교회가 갑자기 부흥했습니다. 몇 백명 교회가 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알아보았습니다. 비밀이 있었습니다. 15년전 로라라는 집사 부부가 교회 나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도시에 술집이 많아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도시를 살려주옵소서. 이 도시를 악에서 건져주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 교회를 강하게 하옵소서. 우리 목사님을 도와 주옵소서”. 로라부부의 기도가 15년 계속되자 어느날 교회가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영혼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2-3년전 우리 교회 어느 분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판교입주를 맞아 판교의 영혼을 주옵소서“. 매일 기도하다가 한번은 전도를 나가 한 분이 어렵게 전도했습니다. 이 분은 처음 믿는 초신자였는 데 이 분을 위해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분의 믿음이 커지면서 에 남편과 시동생이 함께 교회를 나왔습니다. 이웃에 사는 옆 집 사람도 전도했습니다. 기도 시작하기 전에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자 생긴 기적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학생이 아버지 구원을 위해 어느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우리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소식이 없었습니다. 가끔은 실망하고 지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번 가을새벽부흥회에 그 아버지가 교회 나왔습니다. 그나마 자신의 생일날 나왔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중보기도는 능력입니다. 누구나 어떤 사람을 위해 진실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듣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듣고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신 하나님, 어머니의 기도를 듣고 귀신들린 딸을 고치신 예수님, 오늘도 그 은혜와 능력은 우리에게 임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서 여러분이 살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기도가 그를 살립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출32: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32:11-12,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아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아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아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나려 하심이니”.
롬3:24,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눅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3:34,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히7:25,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롬8:34,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출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아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마틴 루터, ”We are beggar, it is true"(우리는 거지다. 그것은 사실이다).
출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르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창32: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아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시119: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내가 뜻을 돌이키겠다
출32:14, “여호아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