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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조선왕조실록4 [세종문종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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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22세→태종은 세조가 24세가 될 때까지 군사 관련한 일 직접 챙길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전함- 신하들은 작은 사건 하나하나 어느 쪽에 먼저 알려야 할지 난감 태종은 주상에게 일을 먼저 보고하는 신하들을 처절하게 응징함(권력 재확인) |
이중 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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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인- 군사 관련일 세종에게 먼저 알려 유배→다시 불러다 압슬형, 강도 높은 조사,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한 고문 받음→ 함께 의견 나눈 박습, 심온(세종의 장인) 실토→강상인 거열형→ 중국에 다녀온 심온 체포 되어 압슬형, 고문→ 강상인의 말의 동조 했다는 자백→ 사약 강상인을 앞세워 심온을 제거하고자 했다.
태종은 세종에게 방해되거나 세종보다 더 세력이 우세한 모든 것을 제거, 정리하고자 했다.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명분(역적으로 몰아서)을 만들어 내서라도 제거한다. |
외척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계심을 보였던 태종~~ 왜 그랬을까?
계모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태조 꼬드겨 개국에 공이 큰 전 부인의 장성한 아들들 제치고 자신이 낳은 어린 아들을 세자 자리에 앉혔던 그녀와 같은 꼴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애초에 우환의 싹을 잘라 버리려 함 |
거열형-사지 찢기는 참혹한 형벌 압슬형-깨진 도자기 조각 위에 무릎 꿇고 앉히고 무릎 위에 무거운 돌덩어리 얹어놓는 형벌 |
세종은 집권 초기 자기 목소리를 죽이고 철저히 몸을 낮춰 모든 것을 상왕의 뜻에 따름→ 상왕 시절 태종이 직접 나서서 정보 누설과 교란행위 방지 위해 각 도에 있는 왜인들 억류조치→ 대마도 정벌에 대한 포고령→이종무를 3군 도체찰사로 삼음→ 포구 손쉽게 점령하고 포로로 잡혀와 있던 조선인, 중국인 대거 구출→이후 100년 가까이 조선과 중국의 해안가에는 모처럼 왜구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종무는 대마도에서 작전 잘못이 아닌 다른 시시한 일로 결국 유배) |
대마도 정벌: 1419년 5월 왜구가 충청도 비인현에 침입하여 정박 중인 병선을 불사른 다음, 상륙해서 읍성을 포위 공격하고 민가들을 약탈한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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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년(1420)7월 대비인 원경왕후 민씨가 세종의 눈물 겨운 간병에도 불구하고 사망→원경왕후가 좋아하는 절 세우기 태종에게 태상왕 존호 올림 태종은 아들을 위해 안정적인 왕위 계승과 위협 세력 제거→노는 것과 즐기는 것 더욱 매진하며 살기→동서남북 각 방면에 100여 칸 내외의 별장 짓고 며칠 씩 이궁, 저궁 옮겨 다니며 취미 마음껏 즐김 세종 4년 1442년 태종은 연화방 별장에서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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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임금 길들이기 세종은 이제 진짜 최고 결정권자 정치 10단 태종의 정치술과 카리스마에 눌려 기 한 번 펴보지 못했던 신하들은 새 임금 길들이기로 암묵적 합의 첫 번째 타겟- 양녕대군: 아버지 장례 끝나자마자 이천으로 옮겨졌는데 무리지어 사냥 다니고 마을 사람에게 술을 너무 많이 먹여 죽게 하고 남의 개를 훔치기도 함 결국 양녕은 경기 밖인 청주로 보내짐 |
여기까진 신하들이 세종을 휘두르는 것 같은 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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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서는 세종 세종은 장인 심온의 억울함을 알고 재조사 실시로 핵심 실세 제거하고 새로운 신하들로 대거 물갈이하고 중전의 한을 달래주고, 왕권 강화 구축하려 했으나 이것은 세종의 스타일이 아니다. 세종은 재조사를 명하지 않는 대신 그들에게서 충성심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세종은 피를 부르지 않고 조용하게 황소걸음으로 입지를 다져감 양녕 또한 세종 덕에 20년 만에 돌아와 궁궐 같은 집을 짓고 종실의 큰어른으로 대접 받게 됨 |
심온 제거 사건에 앞장섰던 인물들은 살얼음판 심온에 대한 사면은 문종 때 가서야 이루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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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철학 - 집현전과 황희 고려 때부터 있던 유명무실한 상태의 집현전을 일으킴, 인재 공급원 역할 태종때 양녕의 편들었다가 노여움을 사 지방에 쫓겨나 있던 황희(60세)를 복귀시키고 우의정 임명 -- 황희와 노대신들과 집현전 신진 학자 그룹을 양 날개 삼아 시대적 사명 200% 완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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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맹과 주자의 가르침 구현된 나라(유교만 절대화하지 않음, 불교도 내심 신봉) 풍수학이나 민간 신앙까지 가치 인정 2. 세종이 꿈꾼 유교 이상사회는 막연한 덕치국가가 아닌 제도와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법치국가에 가까움. 3. 분위기나 기분에 따른 즉흥적 결정 경계, 모든 일에 분명한 근거 갖기 원함 중요한 일 반드시 정승들과 의논 결정, 한번 검증된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함께 4. 현실에 필요한 학문-과학, 농업, 의학, 군사, 음악 등 모든 분야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관철 5. 전문가 중시한 인사제도, 신분 제약 없음 6. 학문을 좋아하고 토론 중시, 다독, 각 분야 탐독하고 전문가의 경지에 이름 7. 뚝심과 완벽주의, 중도포기 없음 |
하경복, 김종서 - 북방 지킴이 박연 - 궁중 음악 정비, 악기 정비, 아악보 편찬, (당시 중국주 나라의 제례악 아악, 당송 시절에 들어와 고려화 된 중국음악인 당악, 고려 전통 음악인 향악이 뒤섞인 상태) 인쇄술발전(낱글자를 대나무 조각에 고정), 당악, 향악 장영실(노비) - 과학 세종 - 훈민정음, 정간보 창안(악보법), 용비어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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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외교의 설움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팽창주의의 화신으로 북, 남으로 바다로 중국의 힘을 뻗치지 못해 안달, 정벌에 쓸 비용 마련 위해 국내적으로 총동원 명령 내리고 조선에도 전쟁 비용 부담 요구, 태종 죽자 북원 정벌 위해 말1만필 요구하기도 함 영락제는 내몽고 원정 중에 죽고 아버지의 팽창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아들이 뒤를 이었는데 1년 뒤에 또 죽고,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선종)가 즉위 선덕제는 조선 여인들 보내라는 요구, 정벌은 좋아하지 않아 말 요구는 사라짐 대신 사냥 마니아로 ‘매’를 잡아 보내라는 요구, 어린 내시들도 보내짐 그 내시들은 황제의 사신인 칙사가 되어 돌아옴(금의환향)- 이들은 황제의 하사품 몇 가지 가져와 바치고 나중엔 200개의 궤짝을 챙겨 돌아가기도 함 10여년 재위했던 선덕제가 죽고 정통제가 즉위하면서 비정상적 사대관계 많이 정리 |
조선의 매 ‘해청(해동청)’ - 전국의 감사, 수령, 절제사들의 가장 큰 업무가 해청 잡기! 나중에는 아예 수백 명이 ‘해청 체포조’로 보내지기도 함
정통제때도 적절한 규모의 인삼, 화문석, 종이 등의 조공품 보내면 비단, 석재, 약재 등의 답례품이 오는 전형적 사대관계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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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만발의 시대 세종의 집현전 사랑- 왕립도서관인 장서각 지어 연구 환경 만들고 풍부한 물품 공급, 집현전 학자들은 경연 강의 외교문서 작성 업무에서 학문 연구, 저술, 국정 자문 일까지 확대. 효과적인 공부 위해 사가 독서제 실시 과학기술 도약 - 독자역법개발(중국의 역서로 사용하니 오차 발생해서): 세종실록 별책부록에 실린 칠정산 내외편, 혼천의, 간의, 규포(천문 관측 기구) 시계제작-자격루(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측우기(강우량)-문종 아이디어 풍량계 설치, 무기분야 진보 |
농사직설(농업 기술서)- 정초 향약집성방(약재 소개서) 의방유취(동양 최대 의학 백과사전) 8도 지리지, 오례의, 동국정운 자치통감 훈의(자치통감을 기본으로한 해설서),실록, 삼강행실도, 인쇄술 발전(낱글자를 대나무 조각에 고정) 고려사(정도전이 시작한 고려사 편찬내용 수정 보완하여 세종 24년에 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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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개척의 시대 - 군사훈련, 무기 개량, 성벅 축조- 4군6진 북방(여진족)영토 개척 최쥰덕장군에 의해 1차 여진정벌 성공→두만강 쪽으로 눈을 돌려 최북방에 영북진 설치-책임자 이징옥 →유학자 출신 김종서를 동북면 책임자로 임명→사민정책→혹한과 가뭄, 백성 원망과 분노→세종과 김종서는 사민정책 계속 추진→흉년 당한 야인들을 구제하는 등회유책, 귀화 장려, 두만강 남쪽 실질적 조선 땅 |
사민정책: 함길도 남쪽에 살던 사람들을 국경의 새 고을로 강제 이주, 백성들 원망과 분노 |
종부법(태종) →종모법(세종) |
세종어제훈민정음-1443년 12월 30일 이날의 기록 전문 -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이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렀다.
훈민정음 공개 이후 보름동안 별다른 반응 없음 →이듬해 최만리 상소(사대에 어긋남, 오랑캐가 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두를 잘 쓰고 있는데 뭣 때문에 이런걸 만들었나?, 새롭고 기이한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 학문에 방해, 정치에 무익)→ 예상 못한 반발은 아니었으나 세종 분노→ 최만리 등 5인은 의금부에 가두었다 다 이튿날 석방, 이외 곤장이나 파직으로 처리 →신하 반대 더 이상 없음 → 본격적 훈민정음 보급, 용비언천가 등 책 출판, 훈민정음 해설서 보급 |
훈민정음 창체 이전의 <실록>엔 훈민정음과 관련된 단서나 기록이 전혀 없음 통설: 세종의 명을 받고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게 통설 3년 뒤 세종의 명에 의해 정인지와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해례본(해설서)> 편찬 이두: 설총이 만듦
최만리 상소는 당시 유학자들의 일반적 견해→ 세종은 ‘직접, 비밀리에’ 창제작업, 둘째딸 정의 공주가 도왔다는 기록도 있음 |
'뿌리 깊은 나무' |
세종 시대의 백성들(애민 군주) 1. 죄수: 재판을 오래끌어 가두지 마라, 적용 법규 모호할 땐 가벼운 조항 적용 옥을 청결케 하여 병에 걸리지 않게 하고 병에 걸리면 치료 2. 관비: 출산 시 산후 7일의 휴가→100일로 연장, 남편도 한달 휴가 백성의 고통 1. 사회의 급격한 보수화, 유교 이념 지배하는 생활(남존여비) 2. 수령고소금지법-수령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 재위기간 내내 논란 3. 곳곳에 유랑민 넘쳐났고 황해도 일대에선 도적떼가 끊이지 않음 4. 사민정책으로 고통 5. 화폐 유통 적극 추진했으나 백성들의 호응 얻지 못하자 저화 대신 동전을 주조하여 시중에 풀었으나 백성들 여전히 외면, 강경책으로 인한 고통은 백성의 몫 |
결국 태평성대는 사대부들에 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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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면 이면의 어두운 면도 볼 줄 아는 역사관 필요 |
황희 정승-24년 간 정승 이중 19년은 영의정 1. 사위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 서달이 시골길 가다가 인사 안하고 도망가는 아전을 잡아다 매타작 했는데 사망→억울한 아내 고발→황희는 오랜 벗 정승 맹사성에게 부탁해 피해자 가족 설득하게 하게 합의금 받고 사건 해결→ 엉뚱한 이에게 죄 떠넘기는 사건 기록 새로 작성→의금부 재조사로 사건 전모 밝혀짐→황희와 맹사성 파면→1주일 뒤 복귀 2. 제주 감목관으로 있을 때 말 천여 두가 죽은 데 책임이 큰 태석균을 편들어주다 구설에 오름 3. 개간 작업을 추진한 공을 내세워 개간한 땅 상당 부분 차지 4. 교하 수령에게 땅을 받는 대가로 그 아들에게 벼슬(낙하산)주어 비난 5.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벌로 없는 황희는 매관매직과 형옥을 팔아서 집 안팎에 수많은 노비 부림 6. 박포의 아내와 간통 7. 황희의 서자 황중생- 세자궁 일하면서 금띠, 금잔 훔쳤다가 발각 황희의 적자 황보신- 궁궐의 패물 훔쳐다 애첩에게 주곤 함, 발각되어 과전 반납 황희의 적자 황보신의 형 황치신- 동생이 반납 할 기름진 땅을 자신의 돌밭과 바꿔치기 함 |
우리가 알고 있는 황희의 이미지 온화, 청렴한 학자의 이미지.. 사실일까?
실록에는 황희에 대한 청렴이미지에 반하는 기록이 꽤 있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24년이나 정승자리에 있게 했을까? 세종은 황희를 수신제가에는 흠이 있지만 치국평천에는 필요한 인물이라 생각, 혁신적인 세종의 견제자이자 보완자 역할(멘토), 정치고문(실록엔 황희 의견을 따랐다는 구절이 수없이 나옴), 맹사성이 조심스럽고 신중한 타입이라면 황희는 거침없고 분명하며 결단력, 즉흥적 감정적이지 않음, 그의 의견에는 늘 원칙과 현실 사이의 적절한 지점이 있었고 일흔 넘기면서 여러 차례 사직서, 세종은 집에서 나랏일 처리하라는 배려, 평소 건강관리와 90세까지 장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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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의 인물 최윤덕- 대마도 정벌 공 세움, 자기관리 철저로 문신들로부터도 존중 무장 출신으로 우의정, 좌의정 역임 이징옥- 갑사로 들어와 근무하다 무과 응시, 최북단 경원에 부임하여 군소리 한 마디 없이 10년 넘게 자기 자리 지킴, 사신 윤봉이 해청과 스라소니 잡는다며 그의 관할 지역에서 설쳐댈 때 잡은 해청 풀어 줘서 이 일로 2년 가까이 파면 김종서- 오랫동안 대언(승지)으로 일함, 찰방(암행어사), 사헌부 직원으로 보여준 강직함과 일솜씨 인정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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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임금 문종 8세에 세자 책봉, 신중하고 차분하며 끈기 있는 아버지 성품 그대로 닮음, 착실한 세자 수업, 풍부한 경험, 말수가 적지만 논쟁이 일면 노성한 대학자도 당할 수 없는 입담, 문장은 일필휘지, 활쏘기 백발 백중, 천문을 잘 알아 일기 예보 정확(측우기 아이디어), 효성 지극, 음운학에 정통, 각종 기술도 신묘한 경지세자로 있은 지 무려 30년, 스물이 넘어서부터는 세종 곁에서 실무 배우고, 세종 도움 |
세종 자신이 제대로 된 준비 없이 급작스레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되어 아들은 철저히 준비시킴 문종 재위 기간 2년 3개월로 요절했다는 이미지가 강함(39세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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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서막 세자빈 휘빈 김씨- 용모 평범해 세자 마음 얻지 못하고 자나 깨나 남편 사랑 얻기 위해 미신적이고 망측한 것 행함→ 세자빈 폐출→세종은 외모를 중심으로 세자빈 뽑도록 지시→세자빈 선발대회→봉씨 선발- 직선적 다혈적 성격으로 궁합 맞지 않아 삐그덕~, 자식 없음→ 아이가 없자 권씨, 홍씨, 정씨를 세자의 후실로 들임→ 권씨 임신→권씨 임신 소식들은 봉씨(세자빈)는 거짓 임신 소동, 대낮 술타령, 자포자기식 행동, 궁녀와 동성연애→ 봉씨도 폐출→ 세자는 권씨와 세 번째 혼례→ 5년 뒤 아들 낳음(단종)→이튿날 산모(현덕왕후) 사망 |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한 김씨의 엽기적 방법 - 뱀이 교접할 때 흘린 피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간직하면 ... 등등
아내복 지질이도 없는 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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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세종 운동 부족 과다 업무로 인한 잦은 병치레,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대군과 종친들의 집 옮겨다니며 지내고 온천행과 눈병 치료 위해 초정리 약수 찾음 잦은 병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장기 집권에 따른 관성으로 인해 독단적 모습 소헌왕후 사이 아들 여덟은 모두 총명하고 재주 있음 형제들과 피흘려 싸워 왕위에 올랐던 태종은 자식들 화목에 신경 썼지만 형제들과 화목했던 세종은 그런 염려를 하지 않음 다섯째 광평대군 스무 살에 사망, 한 달 뒤 일곱 째 평원대군 열아홉 살에 사망 이듬해 소헌왕후 심씨 사망, 세자 등창 심각했다 회복 세종의 병세 급격히 악화되어 막내아들 영응대군 집에서 사망(54세) |
소갈증, 눈병,
일찍부터 대군들에게 능력에 맞는 일 맡김
세종 재위기간 31년 6개월 (1450.2.17.)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묘호는 세종 |
세종부인 6명-18남 4녀 - 아들이 너무 많음. 그 다음 대에 어떤 일이...
야심을 품은 수양대군
안평대군 - 몽유도원도 |
제5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 문종은 즉위식 내내 눈물 효성스런 문종은 부왕의 뜻을 존중하여 많은 예산 들여 대자암 증축, 화엄경 주조 문종의 성과- 군사부문: 직접 설계한 화차를 임영대군을 시켜 제작하고 변경지역에 배치, 진법서 저술(오진법) 문종은 시종일관 동생 수양대군을 옹호하고 배려 재위2년 3개월 종기 재발로 사망 |
세종 후반기 집현전 세력-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등 정치무대 등장
백성들은 문종의 죽음을 세종 때보다도 더 슬퍼했다는~~ 열두 살 단종 홀홀단신 왕위 오름 |
세종의 생일-
5월15일 스승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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