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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여행기>
동해바다에 몸을 맡기고-
경목기우회 주최로 4월26일부터 5월2일까지 속초항을 떠나 바닷길로 러시아,중국을 거쳐 우리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 오르는 긴 코스여행이 시작되었다. 한달전부터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손꼽아 온 4월26일. 마지막 일행은 32명으로 확정되었다. 26일 교대역에서 버스로 일행을 싣고 속초의 동명항으로 달렸다. 모두가 신비스러운 민족의 영산이라 상상으로 모습을 그리기는 하였지만, 과연 계절적으로 백두산 천지는 어떤 모습일까? 등산을 하는데 추위는 어느정도일까? 얼마전 눈이 왔다는데 아이젠이 필요한가? 12,000톤의 큰 화물선이라고는 하지만 배멀미 도 걱정이 되었다. 동명항에 도착하여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배에 승선하였다.
2층에 배정돤 방은 남자 14명이 같이 합숙하고 나머지 9명이 한방에 배정되었다. 여자는 모두 9명인데 교섭을 잘하여서 4인실(1등실) 세방을 얻어 편히 갈수 있었다. 저녁을 먹기전에 벌써 바둑 대국이 룸에서 시작되었다. 식사후에는 식당을 빌려 그곳에서 프랑카드를 걸어놓고 시합이 벌어졌다. 이 배의 승객들은 우리처럼 여행객은 거의 없고 대부분 상인들(보따리장사)과 러시아 사람들이었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제법 큰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붉게 물든 일몰의 장관도,별이 총총 걸린 밤하늘도 보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돌아올 때라도 기대를 해야지--
두만강 건너에 우리의 강산이
첫날은 긴장속에서 보내서인지 그럭저럭 시간이 잘 갔다. 아침 5시경 눈이 떠져 밖을 내다보니 다행히 날씨가 개어 있었다. 갑판에 올라 상쾌한 공기를 마시러 올라 갔더니 잠이 적은 친구들이 벌써 올라와 있었다. 바다위의 공기는 차고 바람이 세어 모자가 날라갈 판이었다. 지루하던 18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8시반경에 자루비노항에 도착하였다. 버스를 타고 한시간반 정도 가니 중국의 長領子세관이 나왔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훈춘시내로 향했다.오늘은 연길까지 가서 그곳에서 일박을 할 예정이다. 중국에 왔으니 중국 인사말부터 배워야지-- 초등학생들 처럼 가이드를 따라 복창을 해가며 몇가지 인사말을 배웠다.
니 하오마(안녕하세요?)/짜이젠(再見 안녕히 계세요)/싱쿨라(수고하셨습니다)/뚜이부치(미안합니다) 쯔파로마?(식사하셨습니까?) 등등
오후 2시반에 훈춘시내의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훈춘시내를 벗어나 두만강을 따라 얼마를 가니 유명한 "권하대교"가 소개되었다. 중국과 북한을 잇는 몇 안되는 다리이다. 두만강을 따라 권하마을로 가면서 우리모두는 "두만강 푸른물에 ---"큰 소리로 합창을 했다. 권하마을에는 안중근 의사 유적지가 있었다. 조금 더 가니 또 하나의 다리가 있었다. "사만자교"라고 하는데 가운데 다리가 끊어져 있었다. 다리위에 이북과 중국의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다리위로 걸으면서 이북과의 경계선을 넘어서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북땅을 밟는다는 감회를-- 이 다리는 끊어진 다리라 하여 '사만자단교'라고도 한다. 두만강을 따라 가면서 이쪽은 중국, 강 저쪽은 북한인데 이쪽은 그래도 산에 나무가 있는데 저쪽은 아예 민둥산이었다. 이유인즉 화목으로 나무를 베어서도 그러하지만, 탈북을 막기 위해 잘 보이도록 모두 나무를 베어 버렸단다. 가이드의 재치있는 말--왜 중국을 '차이나'라고 하느냐? 역시 북한과 차이나기 때문이란다.
긴 터널을 지나니 훈춘이 끝났다. 멀리 훈춘 밀강항이 보이는데 그곳에 밀강민속촌이 있단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라고 하는 먼곳에 제법 높은 산이 있었다. 왕재산이라고 하는데 '왕재산음악악단'이 유명하여 왕재산도 유명산이 되었단다. 그리고 옛날에는 부촌으로 이름난 온성군을 지나고 있었다. 북한의 가장 북단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인 "자수리마을"이 보였다. 몇가구 안되는 작은 부락이다. 연길시내에 있는 백산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은후 32명 전원이 희망하여 발맛사지를 택했다.이제 중국 어디엘 가도 발맛사지는 한국인에게는 대인기 옵션이다. 남자는 여자안마사에게서, 또 여자는 남자 안마사에게 서비스 받기를 원한다.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여행에서 가장 수고를 하는 것은 역시 발이다. 발 맛사지를 자주 하는 것도 피로를 푸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시차는 한시간인데 우리가 빠르다. 8시경에 호텔로 돌아왔다. 첫날 배위에서 잠을 편히 자지 못해서인지 이곳 백산호텔에서는 푹 잠이 들었다.
우리민족 선구자의 숨결이 있는 용정에 가다
아침 8시에 모닝콜을 했는데 5시에 벌써 잠이 깨었다. 아침산보를 나갔다. 곳곳에 건축현장이 보였다. 중국이 큰 잠에서 깨어난듯 전국 어디서이건 건설현장을 볼 수 있으니 과연 몇년이 지나면 어떻게 바뀔까- 실로 두렵기만 하다.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는 옛날과는 달리 모든 간판에 한글을 병기하도록 법제화 되어서 우리들에겐 매우 편리하였다. 연길에서 얼마 안되는 곳에 용정이 있었다. 대성중학을 방문하고 여러가지 브리핑을 받았다. 29세로 요절한 천재시인 윤동주의 시비를 보며 국어교과서에서 배운 싯귀를 다시금 감회스럽게 낭독해 보았다. 두만강도 그러했지만 혜란강은 더욱 초라하였다. 그러나 일송정과 함께 노래가사로 유명한 혜란강을 보는 감회는 색달랐다.일송정은 일본군사들이 없애고 손자벌인 작은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모두 그 소나무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누가 먼저인지 몰라도 "선구자"의 합창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의 애환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감동이 일었다. 일송정 가는길에 있는 모아산에는 사과도 아니고 배도 아닌 "사과배"나무가 온 산을 덮고 있었다. 모양은 사과인데 맛은 배맛이란다. 비암산까지 16km나 되는데 경관이 좋았다. 조금 가니 큰 호수가 나왔다. 명월호라고 하는데 길이가 7km니 되고 차로 10분이나 걸렸다. 드디어 현지시간으로 6시경에 백두산근처인 이도백하의 미인송호텔에 도착하였다. 이곳의 나무는 줄기가 흰 자작나무와 하늘높이 쭉 뻗은 미인송이 특산품이었다. 美人松은 과연 미인의 다리처럼 사람이 인위적으로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도 하늘로 향해 길게 뻗어 있어 근사하였다. 저녁을 하고나서 하도 배가 불러 식후 산보길을 나섰다. 김상희 권기동,김경,정상식,나 이렇게 한시간 가량 근처를 돌아 다녔는데 웃옷을 안 걸치고 나서서 추위를 느꼈지만 좀더 이국의 정취를 느끼려고 밤길을 기웃거렸다. 점포이름도 야릇한게 많았다. '밤고양이술집'이란 어떤 술집일까? 길가의 꼬치집에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배가 너무 부르지 않았으면 사먹어 보고 싶었다. 수퍼마켓(超市라고 함)에 가서 과자, 콜라등을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내방에서 몇몇 친구들을 불렀다. 객지에서 느낀 여러가지의 얘기를 나누면서--
내일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백두산천지를 오르는 날이다. 그런데 얼마전 눈이 내려 등산으로 오르지 못한다고 한다. 결국 찦차로 가기로 하고 대신 다른길로 달문까지는 등산을 하기로 하였다. 달문이라는 곳은 용문봉과 천문봉의 물이 터진 곳으로 2300m 지점에 있는데 가는 도중에 장백폭포기 있고 천지못에 바로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라도 등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다행이다.
백두산 천지신명께 소원을 빌며-
미인송호텔을 아침 8시에 출발하여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니 9시. 천지 간판이 있고 우리를 태우기 위한 찦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 지점이 1,950m라고 하니 한라산 높이와 같다.
6명씩 한팀을 만들어 찦차에 탔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계속 오르니 하늘에 해가 보이다가 금방 또 흐리기도 하고 과연 천지를 볼수 있을까 궁금하기만 하였다. 찦차로 30분 가량 오르니 더 이상 갈수 없는 지점이란다. 모두 내려 정상을 향해 걸어 올랐다. 그토록 소원을 하며 기도를 했건만 천지는 자욱한 안개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혹 시간이 가면 갑자기 날씨가 개일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에 기다려 보았지만 헛일이었다. 365일중 270일정도가 천지를 볼수 없는 비,눈, 안개낀 날이라니--그리고 한국 관광객이 년 6만명이나 되는데 과연 천지를 보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아쉽게 돌아간단다. 왜 천지라 하는가? 천지를 못보고 가는 사람이 천지라서 천지라 한단다. 4월말에 깨끗한 천지를 육안으로 보려는 것은 과욕일진데- 평균적으로 7~8월이 가장 맑은 날이 많다고 한다.
천지라는 표석은 등소평이 휘호를 남긴 것인데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고 갖가지 상념에 잠긴채 하산을 하였다. 바람은 세게 불었지만 그렇게 추운 날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다시 찦차를 타고 돌아와 일찍 점심을 먹고 12시경 등산백을 메고 달문쪽으로 등산을 시작하였다. 길이 미끄러워 아이젠을 하였다.
과연 등산로는 멋진 경관을 보여주었다. 눈 덮인 장엄한 바위산이 우리를 완전히 압도하였다. 지리산이 육산으로 큰 산이라면 설악산은 경관이 좋은 아기자기한 산인데 백두산은 우리를 압도하듯이 웅장하고 장엄하고-- 무슨 수식어로 표현해야할지--머리위로 덮어질 듯한 어마어마한 큰 산들이 주위에 늘어서 있었다. 백두산은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한다. 백두라는 이름 그대로 항상 눈이 덮여있어 마치 흰머리모양이라는 뜻이겠지만, 장백산도 흰눈이 길게 늘어서 있는 형상을 뜻한듯 하다. 16개의 유명한 봉우리가 있고 화산으로 생긴 천지는 그 크기가 세계 제일의 크기로 산천어가 살고 있고 6월부터 9월초까지 아름다운 야생화가 피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아이젱을 하였지만 길은 너무 미끄러워 발을 세게 밟으며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하였다. 긴 동굴을 지날때는 어두워 정말 위험하였다. 일행중 10m가량 미끄러져 타박상을 입은 사람도 있고 도중에 겁을 먹고 산행을 포기하고 하산한 일행도 많았다. 눈 녹은 물이 얼음으로 변하여 온통 등산계단이 얼음으로 덮여 위험천만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천지를 못 밟으면 어쩌나 싶어 열심히, 조심하면서 올랐다. 나는 카메라로 사진까지 남겨야 하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장백폭포는 가장 멋진 경관이었다. 주위가 얼음으로 둘러쳐진 가운데로 폭포가 흐르고 있었다. 그 규모도 대단하지만 멀리서도 보이는 경관이 일품이었다. 폭포 아래는 땅이 20m나 깊이 파져 큰 연못을 이루고 있다.장백폭포는 백두산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날씨기 화창하게 개이고 왼쪽의 뾰죽한 천문봉이 보였다. 천문봉은 용문봉과 함께 중국에서 볼수 있는 대표적인 봉우리이다.
나는 집사람이 포기하고 돌아갈까싶어 같이 동행하면서 이제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하면서 독려했다. 과연 얼마를 가니 평지가 나오고 달문에 도착하였다. 두터운 등산복에 줄을 서서 가는 모습은 마치 남국대륙 탐험대에 나선 모습 같아서 장엄하고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종착지에 도착하니 조금 아래쪽에 있는 얼음위가 천지란다. 그곳으로 한발짝 한발짝씩 들어가도 두터운 얼음위로 전혀 위험치가 않았다. 모두 천지위에서 서 있는 야릇한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해냈다는 성취와 만족의 흐뭇한 표정이 --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만세를 불렀다. 만세장면을 놓칠세라 사진으로 남기고-모두들 만세를 부르는 사진은 꼭 인터넷에 올리라고 강압을 하기도-
과연 가슴속에 품은 상념들은 어떤 것일까? 정말 이곳까지 고생하며 온 보람이 몇갑절로 다가왔다. 생각보다 훨씬 큰 감동을 느끼며 환희에 젖은채 하산이 싫어서인지 아무도 내려가자는 사람이 없었다. 내려오는 길은 훨씬 위험하였다. 그러나 워낙 조심한 탓에 아무 사고없이 모두 무사히 귀환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온천물에 계란을 삶아 팔고 있었다. 우리돈 천원에 3개씩. 노른자는 완전히 익고 흰자는 반이 익은 상태인데 맛이 좋았다. 하산하니 등산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 온천을 마치고 우리를 반겨주었다. 모두 온천탕으로 갔다. 섭씨 83도의 뜨거운 유황온천인데 피부질환을 비롯하여 효능이 좋단다. 시설도 좋았다. 그런데 너무 비쌌다. 중국돈으로 80위안, 우리돈으로는 14,000원이라니-- 서울의 특급호텔 사우나 값이다. 그러나 피로한 등산후의 온천, 그것도 백두산온천이니 감회가 다를 수 밖에 없다.
노천탕도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멀리 흰눈이 쌓인 백두산이 눈 앞에 펼쳐저 있다. 온천을 마치고 버스로 미인송호텔로 돌아왔다. 버스에서 가이드의 노래는 멋진 가락이었다. '돌아와요 백두산'과 '천지는 아무나 가나' 두곡을 가사를 바꾸어 바이브레이션까지 넣어서 멋들어지게 불렀다. 정말 하이라이트답게 오늘은 최상의 날이다. 무엇을 해 냈다는 성취감이랄까. 그토록 가고팠던 백두산천지를 밟아서일까--영원히 잊혀지지않을 기분좋은 날이었다. 석식후 김상희 방에서 박정희부부와 같이 양주와 과일을 먹으며 담소하였다.마치 저녁 마실나온 기분이었다.
북한땅이 바로 눈앞에
미인송호텔에서 2박을 하고 아침에 연길,도문을 거쳐 훈춘까지 긴 시간을 버스로 가야한다.가는 도중 역사전시관에 들러 브리핑을 받았다.우리 조선자치주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한눈에 볼수 있었다.그래도 중국에서 소수민족중에 가장 앞서가고 잘 살고 있는 우리민족이 자랑스러웠다. 연변대학과 연변방송은 다른 소수민족이 없는 큰 자랑거리였다. 도문은 지금부터 약 15년전에 와본 일이 있는데 강건너 산에 박혀있던 글씨를 모두 지운 것이 다르고 예나 지금이나 두만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두만강이라고하면 김정구씨의 노래가 연상되어 제법 큰 강으로 생각되지만 하상이 얕고 폭도 좁아 마음만 먹으면 북한에서 쉽게 넘어올 수 있다. 북한땅과 중국땅이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가장 경비가 심하단다. 상점의 간판은 도문강이라 적혀 있어 왜 두만강을 도문강이라 부르는가 했더니 이곳 연변사람들은 도문강이라고도 부른다. 사진을 돈내고 지정된 곳에서 찍으라고 하니 원 이런 곳도 있나 싶었다. 그런데 그곳 사진사가 괜찮으니 찍으라 한다. 마치 도둑질 하듯이 급히 사진 몇 캇트를 누르고 버스에 올랐다. 올때와 정반대로 강을 끼고 훈춘으로 달렸다.지루한 시간을 달래느라 가이드가 열심히 북한발 '우스개소리'와 북한말 공부,앞뒤가 같은 말짓기 등을 하면서 시간을 채웠다. 훈춘에는 저녁무렵에 도착하였다. 오늘 저녁은 또 이곳에서 유명한 구육(개고기)먹는 날이다. 나는 집안이 불교집안이라 잘 먹지 않는데 이곳의 구육이 유명하다해서 구경삼아 동참하였다. 일행중 9명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여 해물탕집으로 갔다. 春子狗肉館이라는 큰 음식점의 사장은 최영애라는 젊은 여자였는데, 왜 춘자구육점인가 물었더니 이 음식점을 차린 것은 어머님인 춘자씨였단다. 장사수완이 대단했다. 십여가지의 요리가 있고 한국의 메뉴와는 좀 달랐는데 전체평이 맛이 좋았다고. 그리고 값은 대단히 싸다는 평이다. 1인당 대략 6-7천원정도. 이제 중국의 마지막 밤이라서인지 그냥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신동혜회원이 스폰서한다고 남자 일부는 노래방으로 가고, 대부분 여자와 남자 일부는 발맛사지하러 갔다. 연길과 비교해 발맛사지 값은 반값이나 역시 서비스는 못했다.
귀국길에 본 아침일출 광경
오늘은 5월1일 5.1절 노동절날이다. 중국의 노동절은 대단하였다. 온 시내에 전 시민이 나온 것 같았다. 재래시장을 구경하려고 훈춘시내에 있는 시장에 들렀는데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대인파로 들끓었다. 노동절이라 세관의 출국수속도 인원부족으로 일찍 서둘러여 한단다. 그래서 점심을 9시반경에 냉면을 먹으러 갔다. 이곳 냉면은 북한식 평양냉면이라고 하여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맛을 보기 위해 모두 한그릇씩 받았다. 대부분 남기게 되어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중국의 현지 가이드 현군의 인삿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짐은 빠짐없이 잘 챙기되 단 한가지는 두고 가란다. 다름아닌 '따뜻한 情'은 남기고 가란다. 재치있는 친구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만남'을 합창하여 더욱 이별의 섭섭함을 나타내고-- 귀국길의 배는 울라디보스톡에서 오는 배인데 300명밖에 안되어 좀 넉넉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배에 승선을 하니 또 바둑대회가 시작되었다. 첫날 승선시의 대회는 백두대회이고 이번은 백두산정기를 받고 난 후의 대회이니 백두정기대회라 명명했단다. 파도가 훨씬 덜했다. 날씨도 구름은 끼었지만 온화하였다. 일몰의 사진을 남겼다.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붉게 띠를 두른 모습만도 장관이었다.
감기기운이 있어 약을 먹었더니 자꾸 잠이 왔다. 어쩔수 없이 바둑 두판을 연거푸 지고나니 마음이 편했다. 초저녁부터 자다 깨다 하면서 시간이 잘 갔다. 얼마를 잤는지 눈을 뜨니 아침 5시다. 얼른 옷을 입고 배위로 나왔다. 5시25분 쯤 되었는데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구름이 많아 일출은 볼수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아니 우연히도 빨간 해가 뾰죽히 솟아오르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얼른 카메라로 연속적으로 12캇트를 눌렀다.
일행중에 나혼자만이 일출의 흔적을 포착하여 남긴 셈이다. 신이 난 나는 여러사람에게 찍은 일출광경을 보여주었다. 아침 9시50분에 동명항에 배가 도착하였다. 하선후 속초에 있는 횟집에서 푸짐한 회를 안주로 여행의 마지막 회포를 술로 풀었다. 6박7일의 긴 여정도 모두 무사히 마쳤다. 비록 가고 오는 긴 뱃시간이 괴롭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면 더욱 추억이 남는 법이다. 그토록 가보고 싶던 백두산 천지를 비록 푸른 물은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천지위에서 물을 밟으며 물위에 서서 만세를 부르고 사진을 박고 모두들 감동의 한순간을 맛본 아름다운 추억의 여정이었다.
32명의 백두산 천지여행의 동반자들 모두는 긴 감동의 여정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글과 사진으로 조금이라도 즐거운 시간이 연장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졸문을 올립니다. 2004. 5. 3 밤 米 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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