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 참사랑은 주고 잊어버리는 것
참다운 부모는 어떤 사람이냐 할 때 자식을 위해서 태어났고, 자식을 위해서 살고, 자식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돼야 참된 부모의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요, 참된 자식 앞에 이상적인 부모로서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식 앞에 평화의 중심이 되는 것이요, 행복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참된 효도는 어디에 기준을 세울 것이냐? 그 반대의 입장입니다. 부모를 위해서 태어났고, 부모를 위해서 살고, 부모를 위해서 목숨을 다하는 사람이 참된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부모 앞에 이상적인 자녀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녀요, 행복과 평화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기준에서 보게 될 때,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의 공식을 제시한다면 위해서 존재하는 데서만이 참된 사랑, 참된 행복, 참된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75-318~319,1975.1.16)
참사랑의 성질은 뭐냐? 사랑하고 잊어버리고 또 사랑하려고 하는 곳, 생명을 투입하고도 잊어버리고 또 투입하는 곳에 참사랑이 거합니다. 가치 있는 것을 한꺼번에 전부 주고도 잊어버리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왜 잊어버려야 되느냐? 더 주려고 하니까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주고 잊어버리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전부 노트에다 치부해서 받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젖줄, 생명을 나눠 주면서도 좋아합니다. 타락한 어머니의 심정도 그러한데 타락하지 않은 본연적인 어머니의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것을 투입하고도 잊어버리는 사람 가운데 참사랑이 영원히 존재합니다. (207-56~57,1990.10.28)
참사랑은 천년을 주고도 잊어버리는 사랑입니다. 천년을 주고도 또 천년을 주겠다고 하면서도 잊어버리려는 사랑, 그런 사랑이 인간세상에 도대체 있느냐? 그 표시체로 나타나 있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아버지라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생기기는 그저 험상궂은 도둑놈같이 생겼는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미를 봐도 일자무식이고, 손을 보면 두꺼비손 같고, 발을 보게 되면 개발같이 해서 다니면서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더하다는 것입니다. 자식 사랑, 한 가지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162-267~268, 1987.4.17)
참사랑만이 심신의 이상적인 관계를 영원히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이 심신통일의 기지 위에 임하면 우주의 참사랑과 공명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참사랑 아닌 것이 없게 되고, 자동적으로 무한자유와 희열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격은 자연스럽게 상대세계와 정으로 동화되고,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체휼하며 창조목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294-64,1998.6.11)
참사랑은 경험을 통해서 얻고, 체휼을 통해서 알게 돼 있습니다. 참사랑은 말이나 글 혹은 일반교육을 통해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을 통해서만 완전히 체득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도 성장하면서 단계적으로 생활을 통해서 참된 자녀의 심정, 참된 형제의 심정, 참된 부부의 심정, 참된 부모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완성하게 돼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전체적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창조목적을 완성한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277-197,1996.4.16)
부모의 참사랑, 형제의 참사랑, 부부의 참사랑, 자녀의 참사랑 등 4대 사랑을 완성하고 4대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최소단위가 가정입니다. 참가정은 인간의 참사랑과 참행복의 터전이요, 참생명과 참혈통이 싹트는 곳입니다.
따라서 참가정은 인간이 창조본연의 참사랑과 참인격을 길러내는 수련소요, 참사랑의 학교입니다. 그와 같은 참사랑의 참가정은 인류의 소원인 동시에 창조목적의 근본입니다.
그 참가정에서 배출되는 참사랑의 참인격에 의해서만 참된 사회, 국가, 세계의 완성이 있으며 모든 환경권의 창조이상이 구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294-65~66,1998.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