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하우스 9회 (3~2화) 우리는 존과 마틸다의 비서 혹은 하녀
마틸다는 말레이시아인으로 원래 할머니 대까지는 인도에서 살다가 부모님이 말레이시아로 이주해 그곳에서 태어났다. 사진을 보니 그녀의 집은 공원같이 넓고 아름다운 데다 수영장까지 딸려 있어 궁전 같았다.
보여준 사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여준 행동도 그랬다. 국제전화는 요금 걱정 때문에 길게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말레이시아의 마틸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틈만 나면 전화를 걸어 “Hello, 마틸다 there?”라며 딸을 찾았다. 게다가 한번 전화를 걸면 몇 시간씩 통화를 하는 통에 아예 우리 집 무선 전화기는 언제나 마틸다 방에 놓여 있었다. 마틸다의 어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심심하게 사는지 요리할 때도 전화해서 마틸다와 수다를 떨고, 욕조에 들어가 목욕을 할 때도 마틸다와 수다를 떨고, 아무튼 틈만 나면 전화를 하셨다. 그런 걸 보면 잘 살긴 잘 사는 집인가 보다.
이런 가정 환경 때문인지 마틸다에게는 치유 불가능한 증상이 하나 있었다. ‘공주병’이라고 하기엔 좀 약하고 ‘여왕 병’이라고 하기엔 좀 과장된 그런 증상 말이다. 어느 날 밖에 나갔다 들어온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새봄, ‘이뻐’가 무슨 뜻이야?”
나야말로 무슨 소린가 해서 들어보니 밖에 나가면 한국 사람들이 자기에게 매번 “이뻐, 이뻐” 이런 소리를 한다는 거다.
“Pretty.”
내가 뜻을 해석해 주었지만, 마틸다의 반응은 ‘흥!’이었다. 오만한 표정과 함께. 그녀는 갑자기 방에 들어가 두꺼운 앨범을 가져오더니 사진관에서 찍은 수십 장의 프로필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 예전에 필리핀에서 모델 생활했었는데, 한국에서도 모델을 할 수 있을까?”
흠, 모델이라…. 키가 160센티미터라면 모델을 하기 힘들지 않을까 궁금했지만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고민하며 대답해 주었다.
외국인이 많이 출연하는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에는 출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Do you know <서프라이즈>, the TV program? Some foreign actors program on.”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콧대를 높이며 나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 프로필 사진을 그 사람들한테 좀 보여주겠어?”
뭐시라? 프로필 사진을 보여주라니…. 내가 네 매니저냐, 너희 비서냐? 하는 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쳤지만, 꾹 눌러 참았다. 워낙에 그녀는 그런 식으로 말할 때가 많았다. 어디로 안내해달라는 둥, 음식을 좀 주문해달라는 둥…. 나한테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아그네스도 마틸다에게 오는 전화를 메모하다 지쳐 “나는 마틸다의 개인 비서”라며 어깨를 으쓱한 적이 있다.
그녀가 밖에서 인기가 많은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그녀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온갖 사람들에게 우리 집 전화번호를 남발하고 다닐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틸다를 찾는 전화는 끊이지 않았고, 우리 집 룸메이트들은 마틸다에게 온 전화 메모를 적어두느라 지친 곤 한다.
게다가 그녀는 절대 청소를 하지 않는다. 한번은 존과 마틸다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아그네스와 내가 바닥 청소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TV를 시청하며 우리가 청소하기 좋도록 두 발을 우아하게 들어주기까지 했다. 우리가 요란하게 청소기를 틀고 거실 청소를 하자 TV 보기가 어려워졌는지 그 둘은 다정하게 어깨와 허리를 감고 방으로 들어가 낮잠을 자는 거였다.
사실 마틸다의 애인 존은 한술 더 떴다. 도대체 그는 컵을 사용하고 씻는 법이 없었다. 소파 테이블이나 컴퓨터 옆에 항상 그대로 놓여 있는 컵을 보고 나는 존에게 한마디 했다.
“존, Please, clean your cups. Please!”
그러자 그 도도한 양반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하는 말.
“이봐, 새봄. 난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구, 알잖아? 난 아티스트야!”
황당해진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존에게 울부짖었다.
“I’m not your maid! And this is not a hotel!”
놀란 마틸다가 방에서 나와 상황을 파악하더니 존의 컵을 대신 씻어주었다.
나는 내친김에 부르르 떨면서 소리 질렀다.
“청소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거야!”
두 사람은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 뒤로도 그들이 청소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대신 걸레로 소파를 닦고 있는 나를 보고는 마틸다가 까르르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새봄, 너 신데렐라 같아.”
이봐! 마틸다! 내가 신데렐라면, 넌 못되고 못생긴 이복언니라고!
글로벌 하우스 9회 (3~3화). 너희들 도대체 한국에 왜 왔니?
한번은 내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존과 마틸다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고, 아그네스가 인터넷 채팅을 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신기해하며 말했다.
“야!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도대체 분간이 안 간다. 넌 매일 외국에 사는 것 같겠구나.”
물론 나는 한국에 살고 있지만 집에서만큼은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어 한국적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먹히지 않는다.
뉴스는 항상 CNN이 고정적으로 틀어져 있고, 우리나라 대통령보다는 미국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더 논쟁거리다. 경상도, 강원도, 제주도, 전라도 사람이 어떠니 하는 소리는 전혀 없고 ‘뉴질랜드 남자 친구의 발음이 촌스러워 헤어졌다.’, ‘이태리 애들은 엄청 패셔너블한데 너무 느끼하다.’, ‘프랑스 남자들은 로맨틱하지만, 대머리에다 진짜 못생겼다.’, ‘유태인은 정말 짠돌이고, 독일 애들은 무뚝뚝해서 매력 없다.’, ‘프랑스와 이태리는 길거리를 지나가다 어떤 음식을 골라 먹어도 맛있다.’ 등등 일상적인 이야기 자체가 그야말로 글로벌하다. 우리 집에선 노는 것도 글로벌하다. 룸메이트들끼리 모이거나 외국인 친구가 왔을 때 가장 즐겨하는 게임이 바로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 맞히기다. 식탁 위에 있는 파란 지구본을 돌려가면서 말이다.
비디오를 보더라도 한국인 친구와 외화를 보는 것과 외국인 친구들과 보는 것은 또 다르다. 외국인 친구들과는 ‘쟤는 호주 출신, 쟤는 캐나다 출신’, ‘쟤는 과거에 누구누구랑 살았고, 지금은 누구랑 살고 있다’ 등등 세계적인 배우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스캔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본다.
한번은 룸메이트들과 <쇼 생크 탈출>을 볼 때였다. 주인공이 감옥에서 만난 흑인 남자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그 흑인 남자가 “다들 레드라고 부르지”라고 한다. 주인공이 이유를 묻자, 그 흑인 남자가 말한다. “글쎄, 내가 아이리시라서 그런가 보지.” 그때 우리집 애들이 다 웃었다. 난 하나도 안 웃기는데. 내가 “왜 웃는데? 뭔데?”라고 묻자, “응, 아일랜드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빨갛거든.” 했다. 이렇게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그들이 웃을 때마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서 그동안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됐다.
외국인 친구랑 사귀고 룸메이트들과 지내면서 우리 문화, 우리나라 사람들, 음식, 환경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은연중 다른 나라와 비교하게 된다는 점이다. 아침에 룸메이트들이 빵과 과일 조각을 먹을 때 밥과 김치를 꺼내면 그전에는 크게 느끼지 못했던 김치 냄새가 그렇게 강하게 느껴질 수 없다. 다른 나라에 가면 물론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지만 우리나라, 내 집에서까지 그런 것을 느끼며 살게 되다니, 때로는 그들에 비해 세련되지 못한 생활의 단면을 느끼기도 하고, 그들에 비해 더 인간적이고 따뜻한 우리의 모습을 새삼 발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권하지 않고 혼자 먹는 법이 거의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혼자 먹는다. 우리는 아무리 없어도 나눠 먹고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먹으면 오히려 불편한데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함께 나누는 따뜻한 정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가 짱이다. 그들도 마음속으로는 서로 나눠 먹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들 문화가 개인적이고 독립적인데 바란다고 될 일인가.
이렇듯 함께 살기 시작하자 나는 하루하루 그들의 문화를 배워가고 차츰 알아가게 되었다. 똑같은 한국에서의 생활이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나에게 늘 새로운 시간이었다.
하여튼 나는 우리 집이 한국에 위치해 있지만 대화 내용이 한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기에 그들과 얘기할 땐 그들의 나라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심지어는 그 나라를 직접 방문해 본 느낌까지 받는다. 그들의 문화와 정보를 전해 들어서 그런지 이야기를 통해 더 친숙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그네스와 함께 살 때는 호주가 제일 가 보고 싶은 나라였고, 너무 멋져 보였다. 쿠웨이트 출신인 폴이 쿠웨이트 이야기를 해줄 때도 그랬고, 마틸다가 말레이시아 이야기할 때는 정말 말레이시아가 아름답게 느껴져서 나중에 꼭 가보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말레이시아에 와서 결혼까지 했으니).
그런데 외국인들도 한국에 오게 된 동기를 들어보면 비슷했다. 휴는 “미국에 있을 때 아버지 친구 가운데 한국 사람이 있었는데 함께 식사를 하면서 한국 이야기를 들었어요.”라고 했다. 스콧도 “뉴질랜드에 살 때 우리 동네에 한국인들이 많았거든”이라고 했다. 존 역시 “호주에 사는 한국인들이 내 노래를 많이 좋아하더라고.” 말했고, 존의 여자 친구인 마틸다도 “말레이시아에서 개인 교사로 한국인들을 많이 가르쳤었거든”이라고 했다.
그들도 자기 나라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어 강사들은 친구가 한국에서 영어 강사를 하는데 수입도 좋고, 대우도 좋다는 자랑을 들었다거나 현지 영어 강사 채용 광고를 보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나라에 대해서 알고 나면 그들 나라에 가서도 더 많은 것을 보게 되는 것 같다. 하여간 당시 세계 여행을 준비 중이던 나에게 친구들의 나라는 여행지 1순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