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 애착과 허무주의
“ 어릴 적 늘 저는 혼나고 자랐어요. 저라는 애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애인데 나와서 가족들을 힘들게 한데요. 그런데 저는 엄마가 힘들어 하는게 너무 마음 아파요. 아버지한테 맞으면서도 저희 때문에 맞으며 참고 사셨잖아요. 그런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마음이 갈라진다.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와 엄마를 걱정하고 있다니 참으로 애잔한 아이다. 이 사례에서 자녀는 단지 부모에게 사랑받고 의미있는 소중한 대상이고 싶다. 이는 인간의 본성으로 세상에 나와 초기 경험이 이후 삶에 미치는 영향을 심리학자 메리메인은 애착유형으로 분류하고 엄마와 초기 애착관계에 대해 연구했다. 불안정 애착인 아이들은 이러한 욕구가 만족이 되지 않으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고 부모와 관계 악화가 학대로도 이어질수 있다.
여기서 학대는 의도성과 고의성을 가진다.
부모가 상황을 핑계로 의도적으로 자녀를 돌보지 않고 방치 해두는 것이다. 예로 엄마가 늘 반복해서 핸드폰 하느라 아이가 불러도 듣지 않고 반응을 보이지 않는 행동이나, 아이를 혼낼 때 이유를 ‘너가 잘못했으니 맞는 거야’ 라는 이유로 아이를 훈계한다. 훈육은 아이가 이유를 알고 그러한 잘못된 행동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반면 훈계는 가르쳐서 원하는 방향으로 가길 원한다. 강제성을 띄며 아이의 입장이나 의견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냥 하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니 그냥 하면 된다는 식이다. 한편 학대의 최고는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돌봄 의무를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임된 양육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감정교류가 없어지고 누가 아프다고 해도 공감하기 힘들다. 살아가는 삶에 대해 가치, 희망에 대한 완전히 거부하고 허무주의적 관점에 빠지기 쉽다.
위의 사례는 부모간의 폭력이 아이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고 자기 때문에 엄마가 아빠한테 맞고 살았다는 마음이 들게 엄마의 삶은 한탄스러웠다. “너희들만 아니면 엄마는 너희 아빠랑 안 산다.” 는 말은 아이에게 너가 나를 남편에게 맞게 살게 한 짐적인 존재로 해석한다. 느끼게 되는 존재의 가벼움, 불필요한 존재 , 남에게 짐이 되는 존재라고 느낀다면 살고 싶은 의지는 바닥 일 수 밖에 없다. 프레드리히 니체는 악을 경험한 사람은 악을 퍼뜨림으로써 악을 존속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악을 경험함으로 오히려 선을 학습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악의 끝에서 선이 구제한다는 희망인데 불안함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불안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주변에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뿌리가 약한 경우가 많다.
언제라고 쑥 뽑으면 뽑힐 것 같은 여린 뿌리를 가지고 있다. 약한 뿌리는 시간과 물과 햇살이 필요하다. 주변에 자기 스스로에게 불행의 활을 스스로 쏘고 있는지 살펴보자. 워낙 잘난 척하는 자기애적 성격이 강한 삶들이 많은 요즘 그들 역시 척일 뿐임으로 상처 받지도 말고 상처 주지도 않는 그런 담담한 시간들을 살아보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