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시 주요명소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넉넉한 들녘에서 충과 예를 길어 올린 미륵정토
논산은 금강과 논산천이 빚은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 고을이다. 흔히 연무대의 육군훈련소를 제일 먼저 떠올리지만 일찍이 충청도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이름 높았다. 또한 계백이 목숨 바친 충절의 고을이요, 조선을 이끌어온 올곧은 선비정신이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고을이기도 하다.
지명에 산(山)이라는 글자가 있으나 여정은 들에서 시작해 들에서 끝나는 고을, 논산(論山). 이 고을로 접근하려면 1960~70년대엔 호남선 열차를 타는 게 가장 일반적이었다. 길손이 학창시절을 보낸 대전은 논산과 가깝다.
호남선 열차가 멈추는 서대전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길손은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이따금 서대전역에서 열차에 몸을 싣곤 했다. 차표를 구할 돈이 없으니 당연히 역무원 몰래 탔다. 몇 번이나 들켰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쨌든 원정(?)의 범위가
코흘리개 시절엔 고작해야 두어 정거장 거리인 두계역·개태사역까지였으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범위는 연산역에서 논산역, 그리고 강경역까지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 삼성각에서 내려다본 관촉사. 흔히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꼽힌다.
오늘은 승용차다. 호남고속도로 지선의 계룡 나들목으로 나와 한때 논산에 속했던 계룡시를 지나면 4차선 국도는 오른쪽으로 기찻길과 연산천을 끼고 가다 곧 개태사 앞에 닿는다. 이 길목은 그 옛날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의 김유신이 백제의 사비성(지금의 부여)을 칠 때 진격하던 길이고, 바로 계백이 5천 결사대로 신라군에 맞섰던 역사의 황산벌 전투 현장이다.
황산벌 전투 이야기는 계백의 묘소에서 하기로 하고, 우선 개태사(開泰寺)부터 둘러보자. 개태사는 천호산 기슭이라지만, 산속이 아니라 국도변의 평지에 터를 잡고 있는 절집이다. 큰 길에서 100m도 안 떨어져 있어 국도변에서 진입하자마자 나타나는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몇 발자국 걸으면 이내 경내에 도착한다. 중간에 향나무·소나무 수십 그루가 가지런하게 양쪽으로 서있지만, 너무 짧아 고찰의 경건함을 느낄 겨를도 없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작은 문을 지나 너른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태극기가 휘날리는 국기게양대, 그 뒤로 정법궁이라는 건물이 보인다. 중심 건물인 용화대보궁은 왼쪽에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시설엔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개태사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 까닭은 이 절집이 고려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 군대를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웅들이 자웅을 겨루던 후삼국시대 말기, 그 마지막 전투는 고려 왕건과 후백제 신검이 936년(태조 19) 벌인 일리천(지금의 경북 선산) 전투다. 신검은 이 전투에서 왕건에게 패주하였고, 결국 이곳 황산에서 항복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황산은 백제의 후예들에겐 참 뼈아픈 곳이 아닐 수 없다. 그보다 300년 전엔 이곳에서 계백장군이 피를 흘렸는데, 그 후예들의 땅에서 일어난 후백제가 마지막을 장식한 곳도 황산이었으니 말이다.
▲ 개태사지 석불입상은 936년 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을 무찌르고 개태사를 세울 때 조성한
것이라 한다. /
논산 노성면의 명재 윤증 고택. 명재의 인격처럼 단아한 기품이 넘치는 전통 가옥이다.
936년(태조 19) 왕건은 황산의 이름을 ‘하늘의 가호를 내려준 산’이란 뜻을 지닌 천호산(天護山)이라 바꾸고 개태사를 지었다. 국가의 환란이 있을 때마다 호국기도를 드리던 고려의 호국사찰로서 전성기엔 1,000명이 넘는 승려가 머물렀다고 하니 규모가 상당했을 것이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폐찰이 되었다고 전하는데도 대동여지도에 ‘천호산 개태사’로 표기되어 있을 정도면 얼마나 유명한 절집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자그마한 절집에서 당시의 위용을 느끼기란 불가능하다. 물론 증거는 남아있다. 철확(도민속자료 제1호)과 석조(도문화재자료 제275호)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철확은 지름이 무려 2m, 높이가 97cm, 둘레는 6.28m나 된다. 이 쇠솥은 개태사 부처님보다 훨씬 유명세를 떨쳤다.
개태사의 중심 법당은 용화대보궁(龍華大寶宮)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이는 미륵을 모신 용화전(龍華殿)의 높임말이다. 그런데 이곳엔 미륵불이 아니라 아미타석불입상이 모셔져 있다. 흔히 아미타불을 모셔놓은 법당을 극락전·미타전·무량수전 등으로 부르는데, 아미타불을 모셔놓고도 ‘용화’란 현판을 단 것을 보면 이 지역에서 미륵신앙이 얼마나 강하게 뿌리박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1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명재 윤증 초상. 명재는 재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전횡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 2 백제 때 쌓은 노성산성. 연산의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서로 마주했던 마지막 방어지에 해당하는 산성이다. / 3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돈암서원의 응도당. 서원 건물로는 규모가 제법 큰 편인데, 얼마나 많은 유생들이 사계의 문하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식 명칭이 개태사지 석불입상(보물 제219호)인 이 불상들은 936년 개태사를 세울 때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운데 본존불과 좌우의 보살은 흔히 보게 되는 불상과는 많이 다르다. 전문가들은 얼굴 전체에서 눈과 귀가 너무 크게 표현되었고, 원통형 체구도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져 다소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특히 체구에 비해 큼직한 손은 이색적이다.
정법궁은 ‘대한민국 최고의 호국종찰’임을 자임하는 개태사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 건물이다. 가운데엔 부처님, 그리고 왼쪽엔 관우, 오른쪽엔 단군을 모시고 있는데, 부처님 좌대엔 ‘남북통일 세계평화’라고 적혀있고, 단군 영정 앞엔 ‘국조단황상제(國祖檀皇上帝)’라는 글귀가 적힌 연등이 걸려있다. 또 관우 앞에 놓인 신칼 몇 자루도 눈길을 끈다. 아무리 호국사찰이라고는 하지만, 절집 안에 단군이나 관우의 초상이 있는 것은 영 어색하다. 스님께 굳이 여쭤보지 않았지만, 무속의 성지인 계룡산 신도안이 여기서 멀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개태사는 언제 찾아도 늘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아무 것도 없던 예전에 비해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느 고찰에서 느낄 수 있는 종교적인 평안함을 풍기려면 아직도 멀었다. 원래의 개태사터는 이곳에서 안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지역이다. 이곳도 논밭으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논두렁 밭두렁을 거닐다보면 당시 토기 조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백제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백제 군사 조형. 이곳엔 이 외에도 황산벌 전투 과정은 물론 백제의 군사 체계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 연산 충곡리에 있는 계백장군 묘.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하자 백성들이 시신을 수습해 이곳에 묻었다고 전해온다.
논산은 조선시대의 연산(連山), 노성(魯城), 은진(恩津), 석성(石城) 이렇게 4개 현이 합쳐져 이루어진 고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4현을 4군으로 바꾸었고, 1914년 4군을 합하여 새로 논산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놀뫼’의 ‘놀’을 논(論)으로, ‘뫼’를 산(山)으로 바꾸게 된 것인데, 논산시 지명유래 자료를 보면, 논산은 원래 노성군 광석면 논산리의 ‘놀뫼’, ‘놀미’라고 불리던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논산천은 금강과 이어져 강경과의 교통이 편했고, 당시 많은 배들이 강경을 거쳐 이곳 논산천의 놀뫼까지 들어와 이 마을 이름이 점차 이 지방의 지명을 대표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논산 지방에서 제법 큰 고을이었던 연산은 대추 주산지이면서 우리나라 대추의 대부분을 유통하는 집산지다. 매년 늦가을이면 대추축제를 펼치기도 하지만, 또 순대가 맛있어 대전 사람들은 일부로 연산까지 찾아오기도 한다. 이번에 들렀을 때는 설 대목을 앞두고 한창 대추를 출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연산은 조선 최고의 예학자로 추앙 받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고향이다. 한전리 서원말엔 사계가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던 돈암서원(遯岩書院·사적 제383호)이 있는데, 서원 왼쪽 편에 터를 잡은 응도당(凝道堂·보물 제1569호)은 서원 건물로는 규모가 제법 큰 편이다. 사계의 제자는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으니 얼마나 많은 유생들이 사계의 문하에 있었나 짐작할 수 있다.
잠시 집안을 들추자면, 사계 집안은 조선 최고의 명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학문이 깊어 나라의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는 문묘, 즉 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된 인물은 모두 18명인데, 한 가문에서 2명이 배향되기는 은진송씨 가문의 송시열·송준길과 광산김씨 가문의 김장생·김집이다. 특별한 것은 김장생·김집처럼 부자가 같이 문묘에 배향된 경우는 광산김씨뿐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광산김씨는 전주이씨, 연안이씨 가문과 함께 각각 7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는데, 이들이 모두 사계 후손들이다. 이렇게 광산김씨가 명문가로 이름을 드날릴 수 있었던 중심엔 한 여인의 정절이 있었으니 바로 고정리에 세워진 정려의 주인공인 양천허씨다.
김장생의 7대 할머니인 허씨는 태조(재위 1392-1398)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의 딸로 김간과 결혼했으나 17세의 나이로 혼자가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친정 부모가 재혼시키려 하자 허씨는 시댁이 있는 연산으로 아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이후 광산김씨 가문에서 김장생·김집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자가 배출된 것이다. 돈암서원에서 3km 정도 떨어진 연산 고정리는 광산김씨의 세거지인데, 이곳엔 양천허씨의 정려를 비롯해 김장생·김집 묘소, 사당 등이 흩어져 있다.
이제 계백 장군을 뵈올 차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연산은 백제가 최후의 항전을 벌인 황산벌 전투의 현장이다.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은 연산의 천호리·연산리·표정리·관동리·송정리 등을 포함한 넓은 범위다. 연산 남쪽의 충곡리엔 계백장군 유적지가 있는데, 예전부터 계백장군 묘라고 전해오던 분묘를 잘 복원해놓고, 10년쯤 전엔 백제군사박물관도 세워놓았다.
우선 삼국시대 말기의 국제 정세부터 간략히 살펴보자. 554년 백제 성왕이 옥천 관산성에서 처참하게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641년 즉위한 의자왕은 고구려와 손을 잡고, 이듬해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았다. 이어 윤충이 대야성(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김품석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643년엔 당항성을 공격해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 등 국위를 만회하는 데 힘썼다.
당시 신라는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가 죽었다. 이에 신라 조정은 절체절명의 위기감에 휩싸였고, 김춘추는 개인적으로 광적인 복수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신라만의 힘으로 백제를 이길 수 없음을 잘 알던 김춘추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나라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거듭 패하고 복수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신라가 제안한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자’는 계획은 귀가 번쩍 뜨이는 새로운 전략이었다.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직접 노렸다. 이를 군사용어로 참수공격(斬首攻擊·Decapitation Attack)이라 한다. 이와 더불어 성동격서 전술도 쓰기로 한다. 즉 고구려를 공격하는 척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660년(의자왕 20)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준비했던 대규모의 함선을 이용해 13만 대군을 출동시킨다. 신라도 무열왕과 김유신이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5월26일 출발, 고구려로 가는 것처럼 북진해 6월18일 남천주(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모였다. 신라군은 6월21일 덕적도에서 당나라 대군을 만난다. 그리고 두 나라는 7월10일 고구려가 아닌 백제 사비성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한다.
▲ 꽃창살 문양이 돋보이는 쌍계사 대웅전. 한겨울에도 모란과 연꽃 등의 꽃향기를 실컷 맡을 수 있는 극락세계다.
그러나 백제는 사비성을 직접 노리고 있는 나당연합군의 계획을 알아채지 못하고, 강력한 수도방위체제를 갖추지 않았다. 고구려 역시 신라와 당나라가 자신을 칠 것으로 여기고 동맹을 맺고 있던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도 지원군을 보내지 못했다.
나당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백제임을 뒤늦게 알게 된 의자왕은 서둘러 회의를 열었다. 여러 논의 끝에 백제는 신라군과 당나라 군사들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작전을 짰다. 그렇게 하려면 옥천쪽에서 넘어오는 신라군의 진출을 지연시켜야 했다.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막으면 그 사이에 지방군이 올라와 사비성을 지키게 된다. 그렇다면 불시에 공격을 당했다 해도 당시 백제의 군사력으로 보아 전혀 승산 없는 싸움도 아니었다. 좌평 의직이 3만~5만 가량의 군사로 당나라 군대를 막고, 계백은 5천의 군사로 신라를 막도록 했다.
그러나 좌평 의직은 기벌포를 통과하여 백마강(금강 하류)까지 올라온 소정방 13만 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계백은 이미 옥천 탄현(炭峴)을 넘은 신라군을 연산의 황산벌에서 막는다.
7월9일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이미 산직리산성, 모촌리산성, 황령산성 이렇게 3곳에 진영을 설치한 뒤 연산천 일대엔 목책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흔히 황산벌 전투가 계백의 5천 명과 김유신의 5만 명이 맞붙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당시 백제 진영은 달솔(2등관)인 계백만이 아니라 좌평(1등관)인 충상, 그리고 같은 달솔인 상영이 있었던 것으로서 달솔인 계백은 총지휘관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전문가들은 충상이 1만 명, 같은 달솔인 상영이 5천 명이니 총 2만 명 내외의 백제군이 신라에 맞서 싸웠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때 백제군은 세 갈래 길로 진격해 오는 신라군을 맞이해 네 번 싸워 모두 승리를 거둔다. 거듭 패하던 신라군이 승기를 잡게 된 데는 화랑인 반굴과 관창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자, 이에 분발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무찔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어린 관창을 죽인 것은 계백의 실수라는 의견이 많다
▲ 1 강경의 젓갈시장 골목. 지금은 150여 곳에 이르는 젓갈 가게들이 옛 명성을 잇고 있다.
2 옥녀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강경 읍내 풍경. 지금은 한적한 읍으로 전락했지만,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3 시간이 잠시 멈춘 듯 느껴지는 강경의 한 골목길. 마치 야외세트장처럼 느껴진다.
4 한때는 100척이 넘는 배들이 줄지어 있었으나 지금은 전시용 배 몇 척만 떠있는 강경
포구. 그러나 전문가들은 화랑들을 이용한 자살 공격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고, 사실은 우회공격을 위해 시선을 끌려는 의도였다고 밝히고 있다. 자살공격을 하는 사이 신라군 일부가 연산천 왼쪽의 구릉, 그러니까 지금의 금남정맥의 야산을 넘어갔고, 계백을 비롯한 지휘본부는 이것을 놓쳤다. 최대의 실수였다. 우회한 신라군은 백제군의 후미를 공격했고, 정면 가까이에 숨어있던 신라군도 동시에 공격을 감행했다.
괴멸 직전의 백제군은 황급히 황성 방면으로 후퇴했다. 신라는 항복을 종용했다. 결국 충상·상영 등 20여 명의 장수들은 항복하였지만, 계백은 끝까지 신라군과 싸우다가 마침내 전사하고 만다. 이로써 신라군을 막을 백제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의 장수 중에 신라와 내통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데, 당시 항복한 장수들이 그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만약 내통했다면 아마도 신라군의 우회작전을 눈감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충상은 황산벌에서 항복한 후 신라로부터 벼슬을 받아 활동했고, 백제 부흥운동이 격렬해지자 신라군의 길잡이로 전쟁에 참가하기도 한다.
흔히 백제의 멸망 원인을 의자왕의 향락으로 여기지만, 사실은 그것보다는 국제적인 밀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실수를 했고, 이로써 지방에 분산된 전력을 제대로 활용도 못한 채 처참히 무너진 것이다.
다만 내부적으로 보면 백제 정국에 큰 사건이 있었다. 그건 바로 백제 최고 관등인 좌평이 당시 6명이 정원이었는데, 의자왕은 자신의 아들 41명에게 모두 좌평이라는 벼슬을 내린 일이다. 이렇게 하니 다른 중신들은 권력과 멀어졌고, 이는 왕실과 귀족 둘로 갈라져 연대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어 결국 위기가 닥쳤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새겨둬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일제강점기에 강경의 부가 모이던 구 한일은행 강경 지점. 근대 문화재 제324호로 지정
되어 있다.
황산벌 깊은 밤. 어둑한 들판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별빛 부서지는 연산천도 굽어보고, 신라군의 우회 침투 코스로 짐작되는 벌곡천도 둘러보면서 최후의 전투 장면을 상상해본다. 갑자기 어두운 구릉 어디선가 신라군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백제군. 곧 전열을 정비하고 전투태세에 나서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5천 결사대는 하나둘 쓰러지고 결국 계백도 비장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 그때 계백은 패했으되 후세에 충의와 호국의 표상으로 길이 남았으니, 어쩌면 논산 연무대에 육군훈련소가 들어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패자에게도 배울 게 있나니.
아무리 일정이 빠듯해도 논산 노성면의 명재고택(明齋古宅·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은 꼭 들러야 한다. 제자들이 명재 윤증(明齋 尹拯·1629-1714)을 위해 지어줬다는 이 집은 화려하지 않지만 기품이 있다. 여름이라면 늙은 배롱나무 붉은 꽃이 반기겠지만, 지금은 연못도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수백 개의 항아리가 장관을 이룬 장독대 너머로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장하다. 그렇구나. 그 시절, 저 나무들은 그 치열했던 논쟁의 현장을 지켜보았겠구나.
흔히 ‘백의의 정승’이라 불리는 명재는 임금이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 등 수많은 벼슬을 내렸지만, 재야에 묻혀 단 한 번도 출사하지 않은 학자다. 그렇지만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거두 송시열(1607-1689)에 맞서 끊임없이 비판의 상소를 올리면서 노론의 전횡을 견제하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개인으로 보면 송시열과 윤증, 가문으로 보면 은진송씨와 파평윤씨, 당파로 보면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대결….
▲ 1 원항교라고도 불리는 채운면의 원목다리. 전라도와 충청도를 이어주던 다리이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 2 강경천 기슭에 있는 미내다리. 논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개태사 쇠솥, 관촉사 은진미륵과 함께 이 다리를 봤냐고 물어본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명물이었다. / 3 강경 옥녀봉 정상. 강경 답사엔 반드시 이곳에 올라 금강하구를 내려다봐야 한다. / 4 사계 김장생이 지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경 임리정.
잠시 조선의 정치 상황을 짚어보자. 조선 초기엔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였으나, 중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은 붕당정치 시기로 들어선다. 이황의 제자들은 주로 동인이나 남인이 되고, 이이의 제자들은 주로 서인이 되었다. 초기엔 동인이 정국 주도권을 잡았으나 인조반정을 거치며 서인이 세를 얻었다. 그러나 서인은 숙종 초기에 분열을 일으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며 이후 약 100년 동안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해 논쟁을 거듭하게 된다.
노론과 소론, 그 중심에 송시열과 윤증이 있었다. 송시열은 주자학 절대주의자로서 숭명반청을 정치철학으로 삼았고, 반면에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고 현실에 바탕을 둔 대청실리외교를 지지했다. 둘은 정치적으로 철저히 맞섰기 때문에 원수지간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사제지간이다. 또 송시열은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와 함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 사이로서 사돈 관계이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둘 다 당연히 서인이었다.
이렇듯 학통도 같고, 혼맥도 있고 해서 수십 년을 절친하게 지내던 윤선거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는데, 발단은 백호(白湖) 윤휴(1617-1680)의 경전해석이다. 윤휴가 중용에 대해 집주를 달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며 공격했다. 그렇지만, 윤선거는 윤휴의 경전해석을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요즘말로 하면 송시열은 강경파요, 윤선거는 온건파였다. 이후 송시열은 윤선거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돌아가자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이들 부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송시열은 대충 지어 보냈다고 한다. 이에 윤증은 몇 년 간 계속해 교정을 청했으나 송시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송시열 입장에선 자신이 미워하는 윤휴의 제문을 윤증이 받은 일, 그리고 생전에 윤선거가 ‘윤휴와 허목 등이 잘못했어도 너무 배척하지 말라’고 쓴 충고의 편지인 기유의서(己酉疑書)도 자신의 비위를 건드렸다.
송시열의 아집에 실망한 윤증은 결국 스승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후 그는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거두 송시열에 맞서 끊임없이 비판의 상소를 올렸다. 이는 결론적으로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노론의 전횡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를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한다. 송시열의 집이 회덕(지금의 대전 읍내동)이었고, 윤증이 니성(지금의 논산 노성면)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용어다. 이 갈등은 아직도 파평윤씨와 은진송씨 후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앙금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부자의 정과 사제의 정, 그리고 학문의 자유 사이에서 스승과 맞설 수밖에 없었던 윤증의 고뇌를 뒤로 하면, 길은 관촉사로 이어진다. 이곳은 충청도 미륵신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논산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답게 사람들의 발길도 어느 관광지보다 잦다.
은진미륵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대단하다. 우선 높이가 18m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이다. 고려시대 여느 지방의 불상들처럼 머리가 크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진 않았지만,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면서 제작 연대가 확실하다는 면에서 중요한 점을 인정받고 있다.
밑에서 올려보면 정말 거대하다. 저절로 경외감이 든다. 절을 하기 좋은 가장 좋은 포인트는 물론 미륵불의 발치이겠지만, 감상하기 가장 빼어난 곳은 왼쪽 돌계단을 밟고 올라간 지점에 있는 삼성각 앞이다. 이곳에서 보면 왼쪽으로 은진미륵·석등·석탑이 차례로 내려다보이는데, 그 너머로는 논산의 너른 들녘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래서 시각적으로 사람은 더욱 작게 보이고, 부처는 좀더 크게 보인다.
은진미륵을 뒤로 하면 이제 강경포구로 갈 차례. 그렇지만, 논산의 남동쪽 산간 지역을 빼놓을 수 없다. 논과 밭이 가득한 논산에서 그나마 산악지대로 꼽히는 지역이지만 볼거리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꽃무늬 창살의 아름다움이 저 부안 내소사나 영주 성혈사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 양촌 쌍계사에서 한겨울의 모란·연꽃 내음 실컷 맡고, 다리 한쪽만 묻힌 성삼문 묘소에선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절개에 묵념을 올리고, 비운의 후백제 견훤왕의 무덤에선 견훤이 되어 남쪽의 전주를 그리워하다 보면 노루꼬리처럼 짧은 겨울 해는 훌쩍 서산으로 기운다.
강경 가는 길. 어디를 둘러봐도 널따란 논밭이 펼쳐진 평야를 지나며 채운면에서 원북다리를 구경했다고 해도, 강경천을 건너기 전엔 반드시 강경 미내다리를 구경해야 한다. 논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께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너는 연산의 쇠솥, 은진의 미륵불, 그리고 강경의 미내다리를 보았느냐.” 논산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염라대왕께 칭찬이라도 들으면 이승에서 지은 죄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까 해서도 아니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마차꾼부터 장사꾼은 물론이요, 선비들도 강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다리 위에 가만히 앉아 이 다리를 건너갔던 역사적 인물들을 상상해보는 것도 제법 흥미롭다.
▲ 1 후백제를 세운 견훤왕의 묘. 후백제 도읍인 전주가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잠들어 있다. / 2 설 대목을 앞두고 대추 출하 준비에 한창인 연산의 한 대추가게. 연산은 우리나라 대추의 최대 집산지라 한다. / 3 호남선 강경역의 야경.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될 당시만 해도 강경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드날리던 큰 시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강경만큼 흥망성쇠의 명암이 확실한 고을도 많지 않다. 육로와 수로의 장삿길이 이어지는 강경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도 대구·평양과 함께 3대 시장으로 꼽혔던 큰 고을이었다. 조선 최고의 인문지리학자인 이중환(1690-1756)이 살던 18세기에도 제법 번창했던가 보다. 그는 저서 택리지 생리편에서 배를 이용한 교역의 장점을 풀어나가다가 강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은진의 강경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자리 잡아, 금강 남쪽 들 가운데에서 하나의 큰 도회를 이룬다. 바닷가 사람과 산골 사람들이 모두 여기서 물건을 사고판다. 언제나 봄과 여름 사이에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는데, 이때에는 비린내가 마을을 뒤덮고 큰 배와 작은 배가 두 갈래로 갈라진 항구에 담처럼 밤낮으로 늘어서 있다. 한 달에 여섯 번씩 열리는 큰 장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물화가 모여 쌓인다.’
이중환은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강경 팔괘정에서 택리지를 썼으니 매우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강경 포구엔 성어기인 3월부터 6월까지 넉 달 동안이면 하루 100척이 넘는 배들이 드나들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미 전기·수도 시설이 갖춰졌고, 극장까지도 있었다. 당연히 은행·경찰서·법원·병원 등도 앞다투어 들어섰다. 지금 광역시로 커진 대전은 물론 금강 주변의 부여·공주·군산, 좀 더 떨어진 익산·청주 등도 대부분 강경의 상권에 속했다 하니 그 권세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899년 금강하구의 군산항이 개항하자 근대식 큰 배들은 수심 낮은 금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군산항에 짐을 부렸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호남선 철길이 놓이면서 강경의 운명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택리지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데에는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면서 예찬한 배가 강으로 다니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호남선 철길이 지나면서 강경역이 생길 때만 해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강경장의 명성은 1930년대까지는 이어갔다. 1937년에 발표된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濁流)’ 도입부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참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은 깨어진다.’
그러나 금강 주변에서 가장 번성했던 고을이란 명성도 이걸로 끝이었다. 광복 후 군산항이 황폐화되고, 한국전쟁 때엔 공공기관이 모여 있던 강경이 집중폭격을 당하면서 읍내 중심지 대부분이 파괴됐다. 즐비했던 일본식 집들도 이때 대부분 부서졌다. 한때 전국 규모를 자랑하던 강경장은 결국 시골 읍내 작은 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상월면 주곡리에 있는 이삼 장군 고택. 조선 후기의 무신인 이삼 장군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 개태사보다 훨씬 유명한 개태사 쇠솥. 한때 1천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강경 지역에선 팔고 남은 막대한 양의 해산물을 처리하기 위해 일찍부터 염장 기술이 발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엔 10여 집만 겨우 명맥을 이어갔고, 1970년대에 들어서서 조금씩 살아나, 1990년대 중반 20곳이 채 안 되던 젓갈 가게는 젓갈축제를 열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금은 무려 150여 곳에 이른다. 사실 이 젓갈들은 대부분 군산항에서 가져온 것들이지만.
그러나 강경에서 둘러볼 곳이 어디 젓갈시장뿐이겠는가. 읍내의 장터를 거닐고, 옥녀봉에 올라 포구를 내려다보며 강경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인지 강경 사람들은 지인이 방문하면 옥녀봉으로는 반드시 안내한다. 이렇게 발품 팔아 돌아다니다 보면 낡은 건축물마다 세월의 더께가 잔뜩 내려앉아있는 강경은 마치 야외세트장처럼 느껴진다. 여기선 시간도 천천히 흐른다. 그럼에도 강경은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다. 한 바퀴 휙 둘러보면 끝나는 여느 시골 장터와 달리 골목길에서 여러 차례 길을 잃고 헤매야 겨우 그 가닥을 잡을 수 있다.
그리하여 전성기였던 1세기 전 문화재 답사는 좋은 테마가 된다. 강경의 근대 문화재로는 남일당한약방(10호), 북옥감리교회(42호), 중앙초등학교 강당(60호),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322호), 강경노동조합(323호), 한일은행 강경지점(324호) 등이 지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근대 문화재를 둘러보려면 헤맬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이정표도 없고, 안내판도 부실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강경읍 홈페이지에서 지도와 사진을 프린트해가면 큰 도움이 된다. 옥녀봉을 지나 천천히 둘러봐도 두어 시간이면 넉넉하게 읍내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장터의 허름한 막걸리집에서 발목이 잡힐지 모르니 시간을 좀더 넉넉하게 잡는 것도 괜찮으리라.
이렇게 막걸리집에 앉아 옆 탁자의 노인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강경을 ‘갱경이’라고 발음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투리이지만 이 말엔 자부심이 그득하다.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 전신인 강경상고를 ‘갱경상고’라고 발음하는데, 강경 지역에선 갱경상고 출신들이 관공서·금융 등의 분야를 꽉 잡고 있다. 그래서 토박이 노인들은 ‘갱경상고’가 대전이나 서울의 웬만한 명문보다 더 일류학교인 줄 알고 있다.
강경이 고향인 박용래 시인은 ‘갱경상고’를 졸업한 후 조선은행에 취업해 서울로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그의 시 ‘막버스’엔 강경의 허름한 뒷모습이 강변의 잔광처럼 아른거린다.
‘내리는 사람만 있고 / 오르는 이 하나 없는 보름 장날 막버스 / 차창 밖 꽂히는 기러기떼, / 기러기뗄 보아라 / 아 어느 강마을 / 잔광(殘光) 부신 그곳에 / 떨어지는가.’ ―박용래 시인의 ‘막버스’ 전문
이 시가 발표된 1979년 무렵, 그렇게 세월이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강경 분위기가 이 시엔 잘 드러나 있다. 그렇게 또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젓갈 가게가 늘어난 것으로 빼고, 우어회와 황복국 잘하는 황산옥이 허름한 옛집에서 으리으리한 건물로 바뀐 것 빼고, 황산대교가 걸린 것 빼고는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쇠락한 강마을, 빛바랜 풍경 속에서 추억의 막걸리로 마음을 적셨으니 노을 드리운 포구를 따라 거닐어볼까. 강경의 심장이었던 강경포구. 그 갈대숲 너머엔 배가 몇 척 기대어 있다. ‘맛깔젓 2호, 맛깔젓 3호, 맛깔젓 4호…. 이 배들은 생명 잃은 전시용이다. 이물을 건너온 바람이 노을에 젖은 갈댓잎에 스치는 이 소리. 그 옛날 포구에서 들리던 장꾼들의 웃음소리인가, 그 소리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한숨소리인가.
논산, 어떤 곳인가
충청남도 논산시(論山市)는 동쪽은 충청남도 금산군·계룡시·대전광역시, 서쪽은 부여군, 북쪽은 공주시, 남쪽은 전라북도 익산시·완주군과 접한다. 논산의 북동부는 금남정맥 분수령이 지나고, 남동부는 금남정맥의 한 줄기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내려 월성봉(650m)·바랑산(555m) 등의 봉우리가 솟은 산지다.
계룡산에서 발원한 노성천, 왕사봉에서 발원해 논산 시내를 지나는 논산천 주변에 넓은 논산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주변에 넓은 평야가 발달되어 관개가 용이하고 기름지므로 농경에 적합하다. 이 주변을 흔히 논산·강경평야라 부른다.
기후는 내륙에 위치해 있어 기온 교차가 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겨울철에도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논산 지역은 삼한시대엔 마한에 속했고, 백제시대엔 열야산현(烈也山縣)·진악산현(珍惡山縣)을 포함했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 그리고 가지내현(加知柰縣)을 포함했던 덕근군(德近郡)의 2개 군에 속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엔 황산(黃山)·이산(尼山)·덕은(德殷)·석산(石山)의 4군으로 바뀌었다.
고려 초에 황산은 연산(連山)으로, 덕은(德殷)은 덕은(德恩)으로, 석산은 석성(石城)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엔 예산·은진·노성이 시진현과 함께 공주에 속했다.
조선시대인 1397년(태조 6)에 덕은·시진을 합쳐 덕진(德津)으로 하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연산군(連山郡)을 연산현(連山縣)으로, 1419년(세종 1)엔 덕은군을 은진현으로 바꾸었다. 니산(尼山)은 영조 때 니성(尼城), 정조 때 노성현(魯城縣)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12년 4현을 4군으로 변경하였다. 1914년 연산·은진·노성·석성군 4군을 병합하여 논산군을 설치하였다.
현재 논산시는 강경읍·연무읍과 가야곡면·광석면·노성면·벌곡면·부적면·상월면·성동면·양촌면·연산면·은진면·채운면, 취암동·부창동의 2읍 11면 2동을 관할한다.
논산시는 비교적 높은 경지율과 함께 비옥한 충적토와 구릉지대로 이루어진 광활한 평야에서 미곡을 생산한다. 쌀은 연무면·성동면·광석면·부적면·채운면 등지가 주산지다. 이외에도 딸기·수박 등 시설채소가 활기를 띠고 있으며, 들깨·참깨·양송이 등 많은 특용작물이 재배된다. 특히 논산딸기는 맛과 향이 좋아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논산시는 축산업 여건이 좋아 낙농·양계·양돈 등이 지역에 따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양계업은 천연기념물인 오골계를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호남선 철도가 논산시의 중앙부를 지나고 있으며, 채운에서 연무읍까지 연무지선이 연결되어 있다. 고속도로는 호남고속도로 지선이 시의 남동부,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중앙부를 지난다. 또 국도는 1번·4번·23번 국도가 지나 전체적으로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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