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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김정은과 북한의 개혁·개방 - 北의 제2 개혁 모델 베트남
익명 추천 0 조회 56 13.03.24 00: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정은과 북한의 개혁·개방 - 北의 제2 개혁 모델 베트남

- 도이머이 도입 2년 만에 식량 자급자족

- 공산통일 후 농업집단화 실패, 인플레, 국제적 고립 속에서 1986년 도이머이 정책 도입

- 경공업 위주로 노선 전환, 외자도입·수출증대 노력

- 2000년 이후 연평균 7.2% 성장

 

 

 

 

                                   

▲ 활기에 넘치는 하노이 거리. 2000년대 이후 베트남은 연평균 7% 이상의 성장률을 자랑하고 있다.

  

“도이머이 정책이 없었더라면 베트남이 과연 냉혹한 국제질서하에서 제대로 생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간파하고 결단을 내린 당시 국가 지도부의 행동에 찬사를 보냅니다.”

 

  

부총리급 고위직을 지낸 베트남 지인(知人)의 설명이다. 베트남이 이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더라면 개발도상국 대표주자로 고도성장을 구가하기는커녕 존립 자체도 힘에 부칠 정도로 대내외적인 난관에 직면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논지였다.

 

  

필자가 6년이 넘는 베트남 현지 특파원 기간 알게 된 현지인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이 정책이 베트남을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에서 탈출하게 한 토대를 마련한 데다 농업·상업 등에서 실제적인 개인 영농과 경영을 허용, 개인과 국가가 모두 득을 보았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구원투수였다는 평가다.

 

  

물론 개혁과 개방을 불러온 이 정책으로 양극화(兩極化)와 관료집단의 극심한 부정부패 등 후유증도 만만찮지만, 국민 전체의 소득과 생활여건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시각이다. 국민생활이 예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개선됐으니 집권 공산당에 대한 불만도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공산당과 국가 지도층의 지지기반이 굳건해지는 정치적 성과도 있었다.

 

 

≫ 농업집단화 정책의 참담한 실패

도이머이(Doi Moi)는 우리말로 ‘쇄신’ 정도로 번역된다. ‘바꾼다’는 뜻의 ‘도이(Doi)’와 ‘새로운’이라는 의미의 ‘머이(Moi)’를 합친 말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이 정책은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고육책(苦肉策)이었다.

 

베트남은 공산통일 직후인 1976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사회주의경제 체제의 이식을 서둘렀다. 농업 부문에서는 토지개혁과 집단화가, 상업 부문에서는 자본주의 상업의 폐지가 각각 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특히 농업 부문에서 두드러졌다. 통일정권은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추진했던 토지개혁과 집단화를 남부 지역에서도 강압적으로 실시했다.

 

이런 시도는 처음부터 실패를 예고하고 있었다. 중·북부의 농업은 협소한 토지에서 소작농 (小作農)과 영세농(零細農)이 주류를 이룬 반면, 메콩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곡창 지대인 남부는 독립농(獨立農) 위주였다.

 

베트남사 전공인 인하대 사학과의 최병욱 교수는 저서 《최병욱 교수와 함께 읽는 베트남 근현대사》(2008년)에서 흥미로운 남부 농민의 특징을 지적한다.

 

“메콩강 지역은 산개촌(散開村)이 일반적이다. 북부처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농민들은 일정분의 토지를 갖고 뚝뚝 떨어져 살고 있으며, 촌락공동체의 결집성에 의해 묶이기보다는 개인적이고 자유롭다”고 설명한다.

 

  

소출이 적든 많든 자영농민으로 일하다 통일로 하루아침에 집단농장의 일꾼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남부 지역 농민의 생산의욕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무리였다. 집단농장에 출근은 하지만 일하고는 담을 쌓은 마당에서 생산량이 급감한 것은 당연했다. 집단화는 계획대로 순항하지 못했다. 메콩강 유역의 경우 1980년 계획 연도까지 농가 기준으로는 9.2%, 경지면적 기준으로는 5.8%밖에 집단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다 가톨릭, 까오다이교, 화화교 등 공산당에 적대적인 종교집단의 반발도 한몫을 했다.

 

쌀 생산과 수출 대국이었던 베트남은 오히려 수입국으로 전락하고, 배급제에 의존하는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 1979년 新경제정책도 실패  

상공업 부문의 실패도 이어졌다. 통일정권은 매판(買辦)자본가 근절과 사영(私營) 상공업자본의 개조 추진을 핵심으로 하는 결의문 254호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사영 상공업과 서비스 산업의 등록제, 화교를 중심으로 하는 대자본가의 자산 압수, 통화 개혁, 사금융 금지 등 일련의 혁명적 조치가 취해졌다.

 

 

                                                                                 공산통일 후 남베트남인들은 급격한 사회주의화

                                                                                    정책을 피해 바다로 탈출, 보트피플이 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공권력까지 동원한 일련의 조치에도 오히려 암시장(暗市場)이 성행하는 등 지하경제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생활여건이 어려워지자 남부인들을 중심으로 한 상당수 국민이 보트피플 대열에 합류해 해외로 탈출했다.

 

  

정치적 여건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중국의 지원하에 노골적인 반(反)베트남 정책을 취한 크메르루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감행한 캄보디아 침공(1978년)과 이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중국-베트남 전쟁(1979년)에 따른 과도한 전비(戰費) 부담도 경제난을 더욱 부채질했다. 결국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공황(恐慌)이라고 할 정도로 참담한 실패로 귀결됐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일로를 걷자 남부 출신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가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9년 9월에 개최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6기 회의에서 경제활동 활성화를 골자로 하는 일련의 자유화 정책인 신(新)경제정책을 발표했다. 신경제정책의 핵심은 우선 농업 부문에서 행정규제 완화와 물질적 동기 부여였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은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기보다는 위기를 일시적으로 모면하려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사업기반과 하부구조의 미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진영의 경제제재, 외환부족 등으로 인해 신경제정책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 공산당 원로 레주언, 시장경제로의 개혁 지지 

신경제정책의 실패는 곧 집권세력 내의 첨예한 정치공방(攻防)으로 이어졌다. 남부 출신이 중심이 된 개혁파는 파국의 해결책으로 더욱 강력한 개혁정책을 요구했다. 반면 북부 인사 중심의 공산당 보수파들은 “자유분방한 자본주의 색채가 실패의 근원”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통제경제 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베트남 개혁파들의 후견자

                                                                            였던 혁명원로 레주언.▶

  

두 진영 간의 갈등은 1982년 3월 열린 공산당의 제5차 전당대회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이 대회에서 양측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에는 뜻을 같이했지만, 경제회복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代案) 마련에는 실패했다. 특히 이 대회에서 개혁을 주창했던 응우옌반린이 정치국원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1984년부터 개혁파가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듬해 6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8기 회의에서 가격, 임금 및 통화개혁의 즉각적인 실시를 의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개혁조치는 신경제정책과는 성격이 크게 달랐다. 신경제정책이 주로 농업과 농촌에 집중된 것과는 달리 개혁정책은 공업과 도시에 중점을 두었다. 생산할당제와 배급제에서 벗어나 이윤동기와 시장기능에 의한 생산, 분배, 유통 체제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경제관리 방식이 통제 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바뀐 것이다.

 

  

개혁파에 힘을 실어 준 것은 1세대 지도자인 레주언 당서기장이었다. 그는 호찌민 전 주석, 응우옌잡 장군, 팜반동 전 총리, 쯔엉찐 전 당서기장 등과 함께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항전(抗戰)을 이끈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대불(對佛) 독립전쟁 시기인 1945년부터 1951년까지 남부에서 항전을 지도했다. 이런 배경을 지닌 그는 원래 공산주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신경제정책 실패 이후에는 그 오류를 시인하면서 개혁파 옹호자로 변신했다.

 

 

≫ 공산당 보수파의 집단퇴장

레주언이 1986년 7월 사망하면서 개혁파 진영에는 일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런 분위기를 대변하듯 같은 해 12월로 예정된 제6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서기장 후보로 보수파인 쯔엉찐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쯔엉찐이라는 이름은 중국공산당이 감행했던 ‘장정(長征)’에서 따온 것이다. 그럴 정도로 철저한 마오쩌둥(毛澤東)주의자였던 그는 예상대로 당 서기장에 취임했지만, 불과 5개월 만에 같은 혁명동지인 레둑토, 팜반동과 함께 지도부에서 물러났다. 이들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통일 이후 야기된 어려움, 특히 경제난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지고 축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 80대 원로의 동시 퇴진과 함께 응우옌반린이 최고 실권자인 서기장에 선임됐다.

 

  

6차 전당대회는 도이머이 정책을 탄생시킨 중요한 전기였다. 이 대회는 베트남 공산당 역사에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공산당 지도부의 실수와 능력부족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정책실패에 대한 당 지도부의 책임을 확실하게 물었기 때문이다.

 

  

응우옌반린 서기장 체제 출범과 함께 개혁파는 다시 한번 탄력을 받았다. 응우옌반린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인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실천책으로 도이머이 정책을 천명했다. 도이머이 정책이 지향하는 목표는 크게 다섯 가지였다.

 

 

≫ 응우옌반린의 개혁 

첫째, 생산의 우선순위였다. 곡물과 소비재 생산의 증대 등 소비와 자본 축적에 필수불가결한 생산량의 확보에 우선순위를 뒀다.

 

둘째, 사회주의경제 체제의 전형적인 특징인 중공업 부문에 대한 투자를 줄이는 대신 경공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투자 우선순위를 재조정했다.

                                                                                     도이머이정책을 도입한

                                                                                       응우옌반린 서기장.▶

 

셋째, 정부 고시(告示)가격과 계약 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영세기업과 가구(家口)기업의 자율화, 경제적 유인제도의 도입, 생산보조금제도의 개혁, 생산력의 수준과 특징에 걸맞은 새로운 생산관계 정립을 추진했다.

 

다섯째,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 및 비(非)공산권 국가들과의 새로운 경제협력 관계 구축 등을 모색했다(구성렬, 《베트남의 경제》, 동남아학총서 10, 한국외대 출판부).

 

도이머이 정책 가운데 눈여겨볼 것이 다름 아닌 다섯 번째 대외(對外)개방 부분이다. 당 지도부가 대외개방 쪽으로 선회한 것은 내적(內的) 요인뿐 아니라 불리하게 급변하기 시작한 국제정세와 무관치 않다.

 

통일 직후 화교 축출과 곧 이은 캄보디아 침공 등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된 상황에서 베트남의 유일한 버팀목은 소련이었다. 하지만 그 소련마저 1986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통해 개방과 개혁을 주창하고 나서면서 베트남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더구나 그때는 이미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사회주의권 국가들로부터의 지원이 사실상 중단되거나 급감하는 상태에서 베트남은 스스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본과 기술이 없는 데다 국내경제마저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 국제적 고립에 직면한 마당에 돌파구란 결국 서방진영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외자유치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파는 실용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 ‘토지법’ 통해 토지상속권 등 인정

제한적으로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한 도이머이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은 점진적인 방식을 취했다. 또 ‘아래에서 위로의 변화’와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변화’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추진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경제개혁의 기본원칙도 눈에 띈다.

 

우선 장기적으로 다양한 경제 부문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민간 부문에서 차별철폐를 통해 건전한 경쟁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의미였다.

 

둘째, 상품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시장관계를 중시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셋째, 경제정책 목표를 농업발전, 소비재생산, 수출증대 및 대외관계 개선으로 설정하는 한편, 자원분배를 세 가지 목표에 집중하기 위해 해외 파트너와 개방적 관계를 시도하는 등 경제구조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

 

넷째, 사회경제적 환경의 안정화를 통해 인플레이션, 재정적자(赤字), 지나친 통화발행을 억제하고, 인민의 생활수준을 개선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베트남은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새로운 가격과 임금 정책이라는 점을 인식해 이 부분에 대한 개혁작업에도 나섰다. 1987년에는 ‘외국인투자법’을 공포했고, 1993년에는 토지상속권과 담보권, 사용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토지법’을 개정했다. 이어 파산법, 외국인투자법, 기업법 등을 차례로 발효시키는 등 법적 토대를 착실하게 구축했다.

 

 

≫ 식량 자유롭게 사고팔도록 해  

도이머이 정책의 가장 큰 성과는 농업 부문에서 나타났다. 도이머이 정책 시행 2년 뒤인 1989년부터 베트남은 생산목표량을 초과해 식량 자급자족(自給自足)을 달성했다. 여기에다 140만t의 쌀 수출을 통해 315만 달러의 외화까지 획득했다. 이는 당시 전체 수출액의 20%를 차지할 만큼 큰 규모였다.

 

 

                                                                    하노이의 노점상. 베트남의 개혁·개방은 소규모 협동농장

                                                                        해체와 농산물 자유처분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쌀과 함께 주요 수출품인 커피의 경작방식도 국영(國營)농장 체제에서 벗어나 민영화(民營化) 쪽으로 빠르게 탈바꿈했다. 이에 따라 커피 경작면적도 1988년 하반기에는 9만ha로 예전보다 배나 늘어났다. 천연고무와 차(茶) 등 다른 산업작물의 재배도 크게 늘어났다.

 

  

농업 부문에서 짧은 기간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높아진 농민의 생산의욕과 농업 부문에 대한 정부의 과감한 집중투자 때문이었다. 새로운 계약제도 도입, 식량매매의 자유화, 식량수매의 합의제, 시장기능에 의한 단일가격화, 집단농장 해체에 따른 농지의 개인 대여, 농업세 경감 등 일련의 개혁조치들이 그러한 성과를 가져왔다.

 

  

공업 부문에서의 성과도 상당했다. 우선 1987년까지 감소세였던 공업생산이 이듬해부터 회복세로 돌아섰다. 이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는 연(年)평균 4.1%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연평균 7.6%의 고도성장을 실현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국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공업 부문이었다. 경공업 생산비중이 1980년의 62%에서 1989년에는 73%로 상승하고, 이에 힘입어 이 기간 70%의 고용증가율을 나타냈다.

 

 

≫ 5년 만에 외자유치 21배 증가

금융 부문의 성과도 주목할 만했다. 무엇보다 살인적인 인플레가 진정 기미를 보이면서 안정화 단계에 진입했다. 연간 세 자리 수대이던 인플레는 1986년에는 월(月) 19.4%, 1987년 월 12.7%, 1988년 월 12.4%로 각각 낮아졌다. 이어 1989년에는 월 2.8%로 급감하면서 국민생활도 크게 개선됐다.

 

또 동(Dong)화 평가절하로 암시장을 중심으로 한 외환거래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92년 말부터는 공식 환율과 암시장 환율 차이는 무시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실제 금리(金利) 적용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실제 금리 적용으로 사채(私債)시장 상당 부분이 은행으로 흡수됐다. 중앙은행(SBV)이 수행하던 상업은행 기능을 새로 설립된 특수은행에 넘겨줌으로써 SBV는 국가중앙은행으로 통화관리에 주력할 수 있었다.

 

  

무역 대상국도 소련 등 공산권에서 일본·싱가포르 등 서방국가로 바뀌었다. 도이머이 정책 시행 초기 베트남의 대일(對日)수출은 전체의 30%, 수입은 40%를 각각 차지할 정도였다. 또 싱가포르도 수교(1991년) 직후 베트남 수출의 36%를 차지할 만큼 빠르게 비중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대외수출이 본격화한 1992년 베트남의 수출은 전년보다 17.5%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대외개방 상황에서 베트남의 풍부한 노동력과 자원이 부각되면서 외국인투자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 특히 외국인투자법이 제정되면서 베트남은 태국, 인도네시아 등 다른 동남아권 국가들보다 유리한 투자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1988년부터 외자(外資)가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아직 베트남의 내수(內需)시장은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외국기업들은 베트남을 수출우회시장으로 판단하고 투자했다. 외국기업들의 베트남에 대한 투자는 1988년 3억6000만 달러에서 5년 뒤인 1993년에는 77억4000만 달러로 21배나 급증했다.

 

 

≫ 2000년 미국과 무역협정 체결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투자 진출이 이어졌다. 외자기업들은 섬유, 봉제, 신발, 가구 등 노동집약형 경공업을 중심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다가, 점차 관광과 호텔 등 서비스업종과 가전(家電)·건설·기계 등으로 다양해졌다.

 

  

도이머이 정책에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한 것은 1998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가입과 2000년 미국과의 무역협정 체결이다. 이는 개도국으로서 걸음마를 시작한 베트남이 국제사회에 편입을 시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2001년 12월부터 발효된 미국과의 무역협정으로 평균 40%였던 베트남산 제품의 대미(對美) 수입관세율이 4%로 대폭 인하되면서 베트남의 대미 수출이 급증하게 됐다. 또 2006년 11월 세계무역기구(WTO)에 15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베트남 경제는 도이머이 정책 아래서 순풍에 돛을 단 형국이다. 물론 1997~ 1999년 아시아 전역을 강타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시기를 제외하고 베트남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높은 성장을 구가해 왔다. 2000년과 2001년 각 6.8%, 2002년 7.09%, 2003년 7.2%, 2004년 7.79%, 2005년 8.4%, 2006년 8.17%, 2007년 8.46%, 2008년 6.31%, 2009년 5.32%, 2010년 6.78%, 2011년 7.5% 등으로 상승 랠리를 이어 왔다.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수출도 올해에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먹구름이 우려되지만 지난해보다 13%가량 늘어난 1095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 베트남 정부의 전망이다.

 

 

≫ 공산당의 집권력 강화

도이머이 정책은 물론 많은 부작용도 낳았다. 부정부패의 만연과 구조화가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특히 인·허가권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휘두르는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는 베트남 정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다다른 느낌이다. 이런 공직자들에 편승해 부동산 투기 등으로 막대한 부(富)를 축적한 일부 기업인들의 행태는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전체 인구의 70% 이상인 농어촌 주민들과 빠른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된 도시 빈민층의 삶은 개선은커녕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자본주의적 성격이 다분한 도이머이 정책으로 집권 공산당의 지배력은 오히려 강화됐다. 국민의 삶이 정책도입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된 상황에서 공산당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지고, 공산당은 국민적 합의를 통해 자연스럽게 정당성을 확보하게 됐다.

 

  

도이머이 정책은 단순히 경제적 개방개혁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정치·사회·문화적으로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언론의 비판기능 강화, 국회의 권한 확대, 부정부패 사범에 대한 척결의지 확고, 사법개혁 등 다양한 부문에서 새로운 바람(新風)을 몰고 왔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지난 7월 25일 《중앙일보》와의 대담에서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김정일 체제와의 차별화 전략의 하나로 베트남식 개방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면서 “정치적으로는 경직된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도 외자유치와 개방을 한 도이머이 정책이 북한 실정에 맞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필자도 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김정은이 도이머이의 성공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베트남을 방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필자가 베트남에 주재하던 2003년에도 김정일의 베트남 방문설이 나돌았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정일보다 젊고 개방적인 김정은의 베트남 방문 가능성은 훨씬 현실감 있게 다가선다. 베트남도 북한이 원하면 도이머이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줄 용의가 있을 것이라는 게 현지 소식통의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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