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사에 들어섰다. 영도 끝자락에 자리한 절로 들어가는 길목부터 스님의 카랑하고 맑은 염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염불 소리를 자양분으로 자란 형형색색의 수국이 줄지어 있다. 꽃밭을 조성한 도성 스님은 해마다 6월이면 수국 축제를 연다. 찾아온 손님들이 부처님의 자비를 한가득 담아 가기를 바란다는 큰 뜻을 담은 행사이다.
장맛비가 잠시 주춤거린다. 벼랑을 타고 놀던 안개가 일순간 달려와 온몸을 감싸 안으며 반긴다. 잠시나마 내가 수국이 된 기분이다. 내 몸을 스친 바람이 꽃밭 사이로 빠져간다. 거제도가 품고 있는 섬 칠천도 큰집에 해마다 피던 수국이 환생하듯 향기를 뿜는다. 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이 된다면 천상이나 천국이 따로 없다. 칠천도 수국과 영도 수국도 인연이 있어 어울리는가 보다.
내가 수국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일학년쯤이다. 큰아버지가 계시는 집 정원을 지나 작은 연못 돌다리를 건너면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다. 처음 본 수국은 작은 흰나비, 파란 나비, 자색 나비, 노랑나비들이 떼를 지어 뭉쳐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날이 갈수록 여러 가지 색으로 변하는 것이 신기했다. 큰아버지는 다른 꽃보다 수국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수국 향기를 강물 삼아 연어처럼 거가대교를 지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큰아버지는 어찌해서 그 시절에 귀한 수국을 구해서 꽃밭을 만드셨을까 궁금했다. 또래의 사촌과 자주 그 꽃을 보았다. 어떤 줄기는 유난히 큰 꽃송이를 머리에 이고도, 휘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시들지도 않고 변함없이 아침마다 꽃 빛을 뿜어냈다. 일곱 가지 색으로 변해간다는 것도 큰아버지가 일러주어 알게 되었다. 자줏빛 꽃술 때문인지 모르나 수국을 보러 자주 빨강 철 대문을 넘나들었다.
큰아버지의 정원 꾸미는 능력은 이웃 동네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등나무로 둥근 아치를 세우고 이른 봄 매화와 목련꽃을 시작으로 노란 꽃을 달고 낭창하게 휘어지는 황매화가 피면 백장미가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붉은 줄 장미를 심어 5월에는 붉은 꽃 터널을 만들었다. 봄이 깊어지면서 선인장도 귀한 꽃을 피운다. 늦여름 앉은뱅이 채송화꽃이 시들할 즈음, 닭 볏 모양의 맨드라미가 얼굴을 붉히고, 노란 해바라기 큰 얼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면 가을로 접어든다. 그 무렵에는 여러 종류의 국화꽃이 향기를 풍긴다. 큰 아버지 꽃밭에는 계절마다 내가 기억도 못 하는 향기와 모양도 가지각색인 꽃이 가득했다. 꽃집으로 명명되면서 이웃 동네 사람들이 일부러 꽃 구경을 하러 왔다. 꽃집 앞 아름드리 곰솔 나무 그늘에는 마을 어른들의 쉼터가 되었다.
큰아버지 손에는 농기구보다 꽃삽이 늘 들려 있었다. 봄비가 내리는 입춘이 지나면 동네 사람들은 모내기 준비를 위해 삽과 괭이를 들고 논물을 가두느라 바빴다. 큰아버지는 그때에도 꽃삽과 꽃모종을 들고 마을 곳곳을 다니며 수국과 코스모스와 만국화를 심었다. 농번기여서 마을 어른들이 핀잔을 주었건만 큰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큰엄마는 울화통을 폭발시켜 한바탕 싸움을 하곤 했지만, 가을이면 마을은 꽃동네가 되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은 옛 핀잔을 잊고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구경을 하기에 바빴다. 어쨌든 온 마을이 큰아버지의 화원이었다.
수국 꽃말이 변덕, 바람둥이라 한다. 변하는 외향에 가려 수국의 본성(本性)을 알지 못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아쉽기 그지없다. 자세히 바라보면 진심을 다해 색깔을 만들어 내고, 작은 꽃들이 다정하게 모여 큰 송이를 만든다. 수국의 은은한 사랑이 느껴진다. 큰아버지도 정원에 수많은 꽃을 피웠지만, 꽃의 깊은 의미는 느끼지 못하고 꽃의 화려한 외향만을 좋아했을까.
정작 큰아버지에게는 꽃인 딸과 조카인 나에게는 무심하셨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오롯이 남아버린 어린 조카들이 안쓰럽지 않았나 보다. 무엇보다 큰아버지 사랑이 필요했건만 관심 밖의 처지가 된 것이 나도 모르게 큰 아픔이었다. 큰아버지에게는 꽃보다 못한 존재였다. 꽃 가까이 가면, 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는 것이라며 크게 야단도 치셨다. 나는 큰아버지 마음에서 멀리 떨어진 조카라는 생각을 좀처럼 지울 수가 없었다.
지난가을 모처럼 오빠를 따라 거제에 있는 가족 묘소에 갔다. 주변에는 잡나무들이 엉켜 숲을 이루고 있을 뿐, 응달진 곳에, 자리해서 잔디가 엉성했다. 생전에 큰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던 꽃 한 포기, 관상용 나무 한 그루도 없었다. 큰집에는 조상 대대로 양지바른 땅이 많았건만 무슨 이유로 하루종일 햇살도 들지 않고 아카시아가 길을 막고 있는 척박한 이곳에 누워계실까 싶다.
큰집은 대대로 뿌리내리고 사는 종갓집이다. 거제도에서도 보기 힘든 우람했던 철 대문도, 니은 자 아래채는 사라지고 흔적조차 없다. 본채의 팔모기둥도 주인 떠난 집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귀한 벚나무로 만든 대청마루는 퇴색되었고 지붕까지 무너질 듯 사위어 가고 있다. 연못가에 싱싱하게 피워내던 창포꽃도 없다. 금붕어가 헤엄치던 작은 연못은 볼품없는 웅덩이가 되어 있다. 형형색색으로 아름답던 수국 꽃밭도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을 뿐이다.
태종대 바다의 바람이 다시 인다. 바다 안개가 꽃 사이로 헤매듯 지나간다. 꽃밭 극락세계에 있는 듯 마음이 편안해간다. 저 먼 곳에 계실 큰아버지는 지금 무슨 꽃을 가꾸고 계실까. 그곳도 부처님의 자비로 6월에는 수국 향기가 넘쳐날까.
수국이 피면 내년에도 나는 큰아버지 꽃밭에 대한 추억에 젖어 들겠지. 원망스러웠던 마음이 꽃 속으로 녹아든다. 다음 산소에 갈 때는 큰아버지가 애지중지 키우던 수국 한 송이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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