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한 곳. 그곳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있거나 심지어 지인도 살고 있지 않아 찾아갈 일이 없던 곳이었다. 그곳은 집과 완전 반대에 자리했으며, 지하철을 타고도 마을버스로 갈아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자리했다. 서울 내 자리한 조선왕릉들을 차례대로 찾아다니다, 종묘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종묘는 크게 정전과 영녕전으로 나뉘는데, 기록상 폐위된 왕들은 종묘에 모셔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왕릉의 그 존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찾아낸 곳이 바로 연산군 묘였다.
사실, 2022년이 지나가기 전 연산군 묘를 찾았다. 은평구 집에서도 1시간 30분이 훌쩍 걸리는 거리라 큰 마음먹고 장소에 도착했지만, 그날은 월요일. 입장 관련 정보들을 확인하던 중에 이곳도 다른 조선왕릉들과 마찬가지로 월요일은 문을 닫는다는 것을 깜빡했다. 그로 인해 먼발치에서 묘 몇 기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023년 계묘년이 밝았고,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다시금 이곳으로 향했다.





1. 재실과 묘
연산군 묘 영역은 북한산 둘레길과도 이어져 있었으며, 헌인릉과 마찬가지로 재실이 밖에 자리해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이곳도 마찬가지로 내부를 돌아볼 수 없었으며, 조금 떨어져 내부의 모습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건축물이 위태로워 보였으며, 그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곳이 연산군 묘에 속한 재실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변을 유유히 지나갈 뿐이었다. 물론 분명한 목적을 갖고 이곳을 찾은 내게는 그곳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지만 말이다.
이곳을 찾았던 며칠 전과는 다르게 연산군 묘로 향하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았던 이곳에 답사를 온 듯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관리사무소로 보이던 곳 앞에는 조선왕실의 계보와 연산군 묘의 설명을 담은 책자들이 담겨 있었고, 옆에서도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을 오갔다. 서울과 근교를 바삐 오가며 조선왕릉들을 방문했기에, 내용의 전반과 세부내용들 까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익히고 정리해 온 것들이 헛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나름의 성취감을 만끽해 본다.
조선의 10번째 왕으로 12년 간 왕위를 지킨 연산군.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재위에 이르기까지 그 정통성이 아주 탄탄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왕과 중전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왕자로, 성리학적 이념을 갖춘 조선에서 정말 '더할 나위 없다'라는 표현이 어울렸던 인물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먼저 '폭군'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으나, 주변 상황들을 읽고 상념에 잠기다 보면 그 사람의 주변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알아서 갖게 해 준 인물로도 다가왔다.





연산군의 묘는 그의 반려자와 가장 깊숙한 곳 왼쪽에 자리했다. 차례대로 연산군, 거창군부인, 의정궁주, 연산군 사위와 딸이 각각 영면에 들어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이곳은 건너편에 자리한 아파트 단지가 보일 정도였고, 겨울의 분위기를 잔뜩 머금은 나뭇가지와 시간을 거스르던 소나무들이 주변을 꽉 채웠다. 물론 다른 조선왕릉들에서 봤던 웅장함은 느낄 수 없었지만, 가족들이 한곳에 모여있어 이유모를 온화함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상당히 운이 좋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사리 찾아올 수도 게다가 매력적인 무언가가 자리하지도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순간을 담으면서 들려오던 이야기가 상당히 유익했으며, 그 자극적인 기록들 사이로 그렇지 못한 삶의 흔적들을 마주하니 조선왕릉에서 느꼈던 그 느낌과는 또 다른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종묘 정전은 물론이거니와 영녕전에도 신위가 모셔지지 모한 연산군. 문득 남양주 사릉에 자리한 광해군의 묘도 어떨지 궁금해졌다.





2. 연산군
입에 담지도 못할 정도의 행동거지와 폭정으로 '폭군'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만, 재위 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왕세자시절 성종은 그를 지극정성으로 아꼈다고 전한다. 왕위에 올랐을 때도 단단한 정통성과 더불어 조선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기에, 한동안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갈 수 있었다. 예술분야에도 일가견이 있어서였을까? 연산군은 대간들과 경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경연을 폐지하기에 이른다.
그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 것은 '폐비윤씨' 사건에서 비롯된 갑자사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전에 무오사화에서 한 차례 피바람이 불었다면, 이번에는 그의 광기 어린 모습들을 검색들을 통해 충분히 접할 수 있었다. 이전에 사극으로 접한 것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으며, 차마 생각도 하지 못할 모습들은 '보편적 인권'이 정착된 현대 사회에서 경악스러운 순간들을 담은 기록의 연속이었다. 이후, 두 차례의 사화로 절대 왕권을 손에 거머쥔 연산군은 오직 쾌락을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영화 '간신'에서 표현된 것처럼, 방탕한 생활은 말할 것도 없으며 성균관을 사냥터로 만든다던가, 탑골공원에 있었던 원각사를 기생방으로 만들어버렸으며,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다채로운 업적을 남겼다. '흥청망청'이라는 표현도 바로 연산군 때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그렇게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연산군도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는 표현이 생각날 법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신하들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그는 폐위되었으며, 강화도로 귀양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연산군의 부인인 폐비 신씨(거창군 신씨)의 청이 받아들여지며 오늘날 이곳으로 이장되었는데 바로 옆에는 거창군 신 씨와 함께 영면에 들었다. 폭군으로 잘 알려진 지아비와 다르게 그녀는 성품이 자애로웠으며, 궁녀 및 후궁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할 정도의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연산군이 폐위되며 그녀도 중전의 신분을 상실한 채, 부인으로 강등됐으며 말년에 그녀와 연산군 사이에 낳았던 자식들도 그녀 보다 먼저 세상을 떠버리는 불운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 나 혼자 그 의자에 앉아 한참을 머물렀다. 인생을 길게 살았다고 볼 수는 없는 나이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것들은 찰나의 순간이며, 그 순간에는 즐거웠지만 지나고 보면 후회가 되는 것들도 더러 있었기에 살아갈수록 어렵다는 것을 요즘 참 강하게 느끼고 있다. 연산은 일국의 국왕이었으며, 지존의 자리에서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것들을 누려 본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최후를 간직한 곳 주변을 거닐며 귀양을 떠나며 옥새를 넘겼을 당시의 그 초연했다는 기록이 절로 떠올랐다.
모든 것을 다 누려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이상 주변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느껴서였을까? 임종 직전에 그가 남긴 말은 폐비 신 씨가 보고 싶다는 한 마디의 말이었다고 한다. 왕릉 주변에서 항상 정자각과 어로를 서성이다 그들이 남긴 서사에 집중했다면, 이번에 다가왔던 그 느낌은 결이 상당히 달랐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테지.라는 생각과 함께 연산군 묘에서의 순간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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